이리 저리 인터넷 자료를 찾아보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철학적인 글들은 한국말이 더 어려워요.. 이해도 안되고... 그래서 위키피디아를 찾았더니 hylomorphism 이라고 해서 아주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네요...

질료형상론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실체(substance)는 질료(matter)와 형상(form)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관점으로, 이 구성이란 것이 물리학의 원자가 모여 분자가 되고, 분자의 결합이 물체를 이루는 것처럼 질료와 형상이 1+1로 결합되는 방식이 아닌, 이 두 가지가 실체를 구성하는 두 가지 양상(aspect)처럼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을 말합니다.

물리학에서는 물체가 쪼개어 지면 분자로, 분자가 쪼개어지면 원자로 나뉘어지지만,  질료형상론의 관점에서는 실체에 있어서 이 둘을 갈라낼 수 없는, 질료 없는 형상, 형상 없는 질료를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그런 개념으로 보는데요... 이건 실험을 통해서 밝혀낼 수 있는 실증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지성으로 추론해낼 수 있는 사실로 봅니다.

굳이 물리학 영역에서 질료형상론적 관점과 비슷한 것을 대라고 한다면, 원자 영역의 “전자”의 존재를 밝히는 것과 유사한데, 이것도 전자라는 '실체' 가 실험적으로 증명이 되었다기 보다는 기능적으로 증명이 되었기 때문인 것이라는 점에서 입니다... 

질료와 형상의 "실제성" 에 있어서 두가지 관점이 있는데...

플라토니즘의 이데아론에서는 "실체"가 현실 속에서 나타내는 "형상"은 진정한 형상(이데아)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이야기 하면서 "형상" 자체를 본질적인 것(형상?)과 비본질적인 것(질료?) 두 가지로 나누어 버리는 관점이 있고...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와 형상은 둘 다 실재하는 등가의 것으로, 실체가 보여주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둘 중 하나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즉 질료와 형상은 자신의 존재를 실체 자체의 존재성에 의존한다는 이야기가 되겠네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을 기독교의 "도그마"에 적용했고, 현재까지도 가톨릭은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지만, 개신교는 그 전통을 거의 완전히 버렸고, 그래서 그것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고 합니다...

가장 구체적인 예를 바로 성만찬 순간에 빵과 포도주(질료)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형상)로 질적 변화(transubstantiation)가 일어난다는 "화체설"인데, 가톨릭은 아직도 이것을 인정을 하고 있고, 개신교는 인정을 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볼수 있다고 하네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모든 실체는 질료라는 “수동적인 원리”와 형상이라는 “능동적인 원리”로 구성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어떤 것의 "형상"은 그 것으로 하여금 어떤 것일 수 있도록 속성을 부여하는데 반해, 전혀 형상화되지 않은 질료 - 원초적 질료 - 는 실제적으로 손에 잡히는 무언가가 아닌 순전한 가능성 그 자체라고 봅니다. 따라서 질료란 것은 실제로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관념일 뿐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형상"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를 아리스토텔레스는 4원소라고 불리우는 흙, 불, 바람, 물로 보았는데, 이것은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로 인식되었습니다. 가장 기본적 “형상”인 4원소는 조금 더 복잡한 상위의 형상에 의해서 여러 가지 물체들로 구성되어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살과 뼈라는 형상은 그 4원소들을 이용해서 실체로서의 살과 뼈를 만들고, 또한 여러 가지 장기라는 형상은 살과 뼈를 이용하여 많은 실체적 장기를 구성하며, 인간 이라는 형상은 여러 가지 장기들을 이용하여 실체적 인간을 만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형상도 먹고 먹히는 사슬 관계를 형성하고 있네요.)


여기서 재밌는 것이 하나 있는데, “형상” 이란 것이 형태상의 유사성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란 겁니다. 엄밀히 말해서 병아리가 닭이 되어갈 때, 각각의 병아리는 “닭” 이라는 형상적 원리에 의해서 닭의 모양을 갖추어 가지만, 그렇게 해서 생긴 닭들이 다 똑같은 닭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질료적으로는 하나같이 다 다른 닭이 된다고 보기 때문에, 여기에서 “형상” 이란 것은 앞에서 말한 “닭”을 만드는 “작동원리”의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각각의 종들이 가지는 “작동원리”로서의 “형상”을 “혼(soul)" 으로 보았고, 다시 말해서 혼이라는 것은 같은 종 내의 개별체들이 가지는 개별적 특성이 아닌, 각각의 개별체들이 종으로서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형상”으로 정의했습니다.


“변화” 를 설명함에 있어서도 질료형상론은 기계론을 대체할만한 부분이 있는데, 기계론적으로는 병아리가 닭이 될 때, 병아리를 구성하는 “질료”가 기계적 법칙에 의해서 재배열되면서 닭으로 변화를 일으키게 되고, 결국 “닭”이란 것은 질료의 기계적 재배열의 결과물에 대한 라벨일 뿐인 것이 되며, 그렇게 되면 결국 “닭”이란 것은 개별체 각각의 닭이 아니면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반면에 질료형상론적으로는 “닭” 이라고 하는 것은 개별체로서의 닭이 아닌, 객관적 실체로서의 닭으로서, 병아리가 개별체의 닭으로 자랄 때 향하게 되는 목표로서의 “형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야기 하면서 변화를 설명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질료형상론은 이 세계를 어떠한 목적에 의해 이끌려가는 것으로 해석하고, 모든 것은 그 것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가 있다고 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형상론이야말로 변화를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여겼습니다. 병아리가 닭으로 변할 때, 병아리와 닭은 필시 무언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병아리와 닭이 공통점이 전혀 없다면, 그리고 병아리의 형체가 서서히 사라지고 닭의 형체가 나타날 때 어떠한 원리가 지탱해주지 않는다면, 그 병아리는 애초에 닭이 될 수 없었을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하면 병아리는 그냥 사라질 뿐이고, 닭은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을 거라는 겁니다. 병아리가 닭으로 커가는 과정에는 아마도 변하지 않는 원리가 깔려있을 거라고 본 거죠. 병아리와 닭은 그 원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이야깁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것을 “질료” 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동시에, 병아리와 닭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은 무언가도 필시 있을텐데, 그 무언가, 즉 말하자면 변화를 이끌어내는 원리, 그 원리를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 이라고 보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 체계에서는 변화란 것이 “질료”가 어떤 “형상”을 잃고 다른 형상을 가지는 것으로 정의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개념이 재밌는데 “추동되지 않는 추동자”(Unmoved mover) 개념이라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대부분의 존재들에 있어서 “형상”과 “질료”는 똑같이 서로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고 합니다. 가령 “인간”이라는 형상은 그 것 자체로서만 존재할 수 없고, 개별체로서의 인간으로만 존재가 가능해집니다. 그렇지만 이런 일반적인 경우와는 예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현상계를 일으키는 동인으로서의 궁극적인 원천이 있다고 보았는데, 그 원천은 순전히 “형상”으로만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존재는 “질료”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데, 이것은 닭, 인간의 경우처럼 개별적인 “형상”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것은 “이상적인 형상” (ideal Form)으로서 다른 모든 존재들이 지향하는 목표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온 우주를 추동하는 “추동되지 않는 추동자” 라고 이름붙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들은 이 궁극적이고 원천적인 존재의 완전성을 따라가게 되면서 완전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중세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신학자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 계열의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추동되지 않는 추동자” 개념을 “하나님” 이라는 종교적 개념에 적용해서 쓰게 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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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장난이 아니군요... 플라톤의 이데아론과도 비슷한 거 같은데... 또 다르고...


브루너의 질료적 형상과 형상적 형상 이야기에서 질료형상론까지 뻗어 왔네요... 제가 뭣도 모르고 “에이코노스”와 “모르포스” 라고 깝죽거렸는뎅... 전혀 헛다리 짚었어요... 깨갱...

  

알고보니 질료는 헬라어로 나무, 재료라는 뜻의 “휠레스”, 그리고 앞의 형상은 자연, 형태라는 의미의 “모르페스”, 뒤의 형상은 단순히 모양, 이미지라는 의미의 “에이코노스” (라틴어 어원의 ‘아이콘’이랑 같은 뜻이랍니다.)로 되어 있군요...


위의 질료형상론의 관점에서 브루너의 이야기를 다시 들어보면...


브루너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것을 결국은 논리를 넘어선 역설로서 이야기한 것 같기는 한데...


이마고 데이, 즉 인간에게 있어서의 “하나님의 형상(이미지)” 이라고 할 때,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질료적 이미지는 이미 파괴되고 없다는 것은 지당한 이야기로 보입니다. “나” 라는 인간의 현실성에서만 보아도 하나님과 나는 이질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적 이미지는 남아있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병아리가 최종적으로 닭이 되고, 애벌레가 최종적으로 나비가 되는 질료형상론의 일반론을 우리 인간의 최종 종착지가 하나님의 본체인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과정에 그대로 적용하면, 이미 인간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이에는 질료적인 공통점이 없다는 것을 브루너 자신도 이미 인정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형상적 이미지” 는 전혀 그 의미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추동되지 않는 추동자”... 질료를 필요로하지 않는 “순수 형상” 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질료는 없이 형상적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양식이 가능하긴 합니다... 말은 된다는 말입니다...


다만 결과적으로는 브루너의 논증 방식은 그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논리적으로는 결국 그러한 신적 존재 양식이 인간에게도 가능하다는 식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종합해보면 브루너의 말은 질료형상론의 일반적인 존재 양식의 입장에서 말하면 넌센스가 되고, 신적 존재 양식으로는 이야기는 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말하는 인간의 존재 양식이 신의 그것이 되어버리는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휴...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말장난 같은 것은 어쩔 수가 없군요... 바르트와 브루너의 싸움도 결국은 대가리 싸움이었나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하네요...


여기에서 저는 이런 문제를 제기해보고 싶네요... 일단 질료형상론에서는 벗어나서요... 


인간이라는 단일 실체는 보통 영, 혼, 육의 세가지 양상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으로 이야기 됩니다. 그런데 혼과 육이라는 양상은 말하자면 확실히 인간의 양상으로 볼 수 있는데, 영이라는 양상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르트적 입장에서 보면 “영”이라는 특질이 인간의 가능적 영역에서 배제되어져야만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속성을 가진 영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해주지 않고는 불가능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근데 보통 영을 인간에게 속한 것으로 대부분 이야기 한단 말이에요...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바르트도 인간의 영(혼)을 이야기 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브루너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이 되거든요... 논리적으로는 논박을 당할 수는 있지만 브루너의 말은 논리를 깨면서 무언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되죠...


그러면서도 바르트의 말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라는 입장에서 또 말하고자 하는 멧세지가 강하구요...


손가락 보다는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봐야하는 것이 신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한 번 만용은 부려보았는데 제대로 썼는지 모르겠어요... 다비아 제현님들의 신랄한 비판과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