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저리 인터넷 자료를 찾아보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철학적인 글들은 한국말이 더 어려워요.. 이해도 안되고... 그래서 위키피디아를 찾았더니 hylomorphism 이라고 해서 아주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네요...
질료형상론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실체(substance)는 질료(matter)와 형상(form)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관점으로, 이 구성이란 것이 물리학의 원자가 모여 분자가 되고, 분자의 결합이 물체를 이루는 것처럼 질료와 형상이 1+1로 결합되는 방식이 아닌, 이 두 가지가 실체를 구성하는 두 가지 양상(aspect)처럼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을 말합니다.
물리학에서는 물체가 쪼개어 지면 분자로, 분자가 쪼개어지면 원자로 나뉘어지지만, 질료형상론의 관점에서는 실체에 있어서 이 둘을 갈라낼 수 없는, 질료 없는 형상, 형상 없는 질료를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그런 개념으로 보는데요... 이건 실험을 통해서 밝혀낼 수 있는 실증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지성으로 추론해낼 수 있는 사실로 봅니다.
굳이 물리학 영역에서 질료형상론적 관점과 비슷한 것을 대라고 한다면, 원자 영역의 “전자”의 존재를 밝히는 것과 유사한데, 이것도 전자라는 '실체' 가 실험적으로 증명이 되었다기 보다는 기능적으로 증명이 되었기 때문인 것이라는 점에서 입니다...
질료와 형상의 "실제성" 에 있어서 두가지 관점이 있는데...
플라토니즘의 이데아론에서는 "실체"가 현실 속에서 나타내는 "형상"은 진정한 형상(이데아)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이야기 하면서 "형상" 자체를 본질적인 것(형상?)과 비본질적인 것(질료?) 두 가지로 나누어 버리는 관점이 있고...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와 형상은 둘 다 실재하는 등가의 것으로, 실체가 보여주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둘 중 하나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즉 질료와 형상은 자신의 존재를 실체 자체의 존재성에 의존한다는 이야기가 되겠네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을 기독교의 "도그마"에 적용했고, 현재까지도 가톨릭은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지만, 개신교는 그 전통을 거의 완전히 버렸고, 그래서 그것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고 합니다...
가장 구체적인 예를 바로 성만찬 순간에 빵과 포도주(질료)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형상)로 질적 변화(transubstantiation)가 일어난다는 "화체설"인데, 가톨릭은 아직도 이것을 인정을 하고 있고, 개신교는 인정을 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볼수 있다고 하네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모든 실체는 질료라는 “수동적인 원리”와 형상이라는 “능동적인 원리”로 구성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어떤 것의 "형상"은 그 것으로 하여금 어떤 것일 수 있도록 속성을 부여하는데 반해, 전혀 형상화되지 않은 질료 - 원초적 질료 - 는 실제적으로 손에 잡히는 무언가가 아닌 순전한 가능성 그 자체라고 봅니다. 따라서 질료란 것은 실제로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관념일 뿐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형상"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를 아리스토텔레스는 4원소라고 불리우는 흙, 불, 바람, 물로 보았는데, 이것은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로 인식되었습니다. 가장 기본적 “형상”인 4원소는 조금 더 복잡한 상위의 형상에 의해서 여러 가지 물체들로 구성되어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살과 뼈라는 형상은 그 4원소들을 이용해서 실체로서의 살과 뼈를 만들고, 또한 여러 가지 장기라는 형상은 살과 뼈를 이용하여 많은 실체적 장기를 구성하며, 인간 이라는 형상은 여러 가지 장기들을 이용하여 실체적 인간을 만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형상도 먹고 먹히는 사슬 관계를 형성하고 있네요.)
여기서 재밌는 것이 하나 있는데, “형상” 이란 것이 형태상의 유사성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란 겁니다. 엄밀히 말해서 병아리가 닭이 되어갈 때, 각각의 병아리는 “닭” 이라는 형상적 원리에 의해서 닭의 모양을 갖추어 가지만, 그렇게 해서 생긴 닭들이 다 똑같은 닭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질료적으로는 하나같이 다 다른 닭이 된다고 보기 때문에, 여기에서 “형상” 이란 것은 앞에서 말한 “닭”을 만드는 “작동원리”의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각각의 종들이 가지는 “작동원리”로서의 “형상”을 “혼(soul)" 으로 보았고, 다시 말해서 혼이라는 것은 같은 종 내의 개별체들이 가지는 개별적 특성이 아닌, 각각의 개별체들이 종으로서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형상”으로 정의했습니다.
“변화” 를 설명함에 있어서도 질료형상론은 기계론을 대체할만한 부분이 있는데, 기계론적으로는 병아리가 닭이 될 때, 병아리를 구성하는 “질료”가 기계적 법칙에 의해서 재배열되면서 닭으로 변화를 일으키게 되고, 결국 “닭”이란 것은 질료의 기계적 재배열의 결과물에 대한 라벨일 뿐인 것이 되며, 그렇게 되면 결국 “닭”이란 것은 개별체 각각의 닭이 아니면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반면에 질료형상론적으로는 “닭” 이라고 하는 것은 개별체로서의 닭이 아닌, 객관적 실체로서의 닭으로서, 병아리가 개별체의 닭으로 자랄 때 향하게 되는 목표로서의 “형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야기 하면서 변화를 설명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질료형상론은 이 세계를 어떠한 목적에 의해 이끌려가는 것으로 해석하고, 모든 것은 그 것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가 있다고 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형상론이야말로 변화를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여겼습니다. 병아리가 닭으로 변할 때, 병아리와 닭은 필시 무언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병아리와 닭이 공통점이 전혀 없다면, 그리고 병아리의 형체가 서서히 사라지고 닭의 형체가 나타날 때 어떠한 원리가 지탱해주지 않는다면, 그 병아리는 애초에 닭이 될 수 없었을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하면 병아리는 그냥 사라질 뿐이고, 닭은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을 거라는 겁니다. 병아리가 닭으로 커가는 과정에는 아마도 변하지 않는 원리가 깔려있을 거라고 본 거죠. 병아리와 닭은 그 원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이야깁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것을 “질료” 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동시에, 병아리와 닭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은 무언가도 필시 있을텐데, 그 무언가, 즉 말하자면 변화를 이끌어내는 원리, 그 원리를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 이라고 보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 체계에서는 변화란 것이 “질료”가 어떤 “형상”을 잃고 다른 형상을 가지는 것으로 정의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개념이 재밌는데 “추동되지 않는 추동자”(Unmoved mover) 개념이라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대부분의 존재들에 있어서 “형상”과 “질료”는 똑같이 서로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고 합니다. 가령 “인간”이라는 형상은 그 것 자체로서만 존재할 수 없고, 개별체로서의 인간으로만 존재가 가능해집니다. 그렇지만 이런 일반적인 경우와는 예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현상계를 일으키는 동인으로서의 궁극적인 원천이 있다고 보았는데, 그 원천은 순전히 “형상”으로만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존재는 “질료”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데, 이것은 닭, 인간의 경우처럼 개별적인 “형상”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것은 “이상적인 형상” (ideal Form)으로서 다른 모든 존재들이 지향하는 목표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온 우주를 추동하는 “추동되지 않는 추동자” 라고 이름붙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들은 이 궁극적이고 원천적인 존재의 완전성을 따라가게 되면서 완전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중세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신학자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 계열의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추동되지 않는 추동자” 개념을 “하나님” 이라는 종교적 개념에 적용해서 쓰게 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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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장난이 아니군요... 플라톤의 이데아론과도 비슷한 거 같은데... 또 다르고...
브루너의 질료적 형상과 형상적 형상 이야기에서 질료형상론까지 뻗어 왔네요... 제가 뭣도 모르고 “에이코노스”와 “모르포스” 라고 깝죽거렸는뎅... 전혀 헛다리 짚었어요... 깨갱...
알고보니 질료는 헬라어로 나무, 재료라는 뜻의 “휠레스”, 그리고 앞의 형상은 자연, 형태라는 의미의 “모르페스”, 뒤의 형상은 단순히 모양, 이미지라는 의미의 “에이코노스” (라틴어 어원의 ‘아이콘’이랑 같은 뜻이랍니다.)로 되어 있군요...
위의 질료형상론의 관점에서 브루너의 이야기를 다시 들어보면...
브루너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것을 결국은 논리를 넘어선 역설로서 이야기한 것 같기는 한데...
이마고 데이, 즉 인간에게 있어서의 “하나님의 형상(이미지)” 이라고 할 때,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질료적 이미지는 이미 파괴되고 없다는 것은 지당한 이야기로 보입니다. “나” 라는 인간의 현실성에서만 보아도 하나님과 나는 이질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적 이미지는 남아있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병아리가 최종적으로 닭이 되고, 애벌레가 최종적으로 나비가 되는 질료형상론의 일반론을 우리 인간의 최종 종착지가 하나님의 본체인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과정에 그대로 적용하면, 이미 인간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이에는 질료적인 공통점이 없다는 것을 브루너 자신도 이미 인정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형상적 이미지” 는 전혀 그 의미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추동되지 않는 추동자”... 질료를 필요로하지 않는 “순수 형상” 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질료는 없이 형상적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양식이 가능하긴 합니다... 말은 된다는 말입니다...
다만 결과적으로는 브루너의 논증 방식은 그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논리적으로는 결국 그러한 신적 존재 양식이 인간에게도 가능하다는 식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종합해보면 브루너의 말은 질료형상론의 일반적인 존재 양식의 입장에서 말하면 넌센스가 되고, 신적 존재 양식으로는 이야기는 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말하는 인간의 존재 양식이 신의 그것이 되어버리는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휴...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말장난 같은 것은 어쩔 수가 없군요... 바르트와 브루너의 싸움도 결국은 대가리 싸움이었나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하네요...
여기에서 저는 이런 문제를 제기해보고 싶네요... 일단 질료형상론에서는 벗어나서요...
인간이라는 단일 실체는 보통 영, 혼, 육의 세가지 양상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으로 이야기 됩니다. 그런데 혼과 육이라는 양상은 말하자면 확실히 인간의 양상으로 볼 수 있는데, 영이라는 양상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르트적 입장에서 보면 “영”이라는 특질이 인간의 가능적 영역에서 배제되어져야만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속성을 가진 영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해주지 않고는 불가능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근데 보통 영을 인간에게 속한 것으로 대부분 이야기 한단 말이에요...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바르트도 인간의 영(혼)을 이야기 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브루너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이 되거든요... 논리적으로는 논박을 당할 수는 있지만 브루너의 말은 논리를 깨면서 무언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되죠...
그러면서도 바르트의 말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라는 입장에서 또 말하고자 하는 멧세지가 강하구요...
손가락 보다는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봐야하는 것이 신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한 번 만용은 부려보았는데 제대로 썼는지 모르겠어요... 다비아 제현님들의 신랄한 비판과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의도였다면 다른 표현으로 풀어나가지 왜 굳이 에밀 브루너는 별로 적절치도 않은 질료니 형상이니 하는 표현을 썼는지가 좀 이해가 안됩니다...
단지 질료형상론이 인상깊었던 것은 이데아론 같은 일반적인 이원론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는 것이었어요... 말하자면 질료와 형상은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에 비해 차등적인 것이 아닌, 서로 뗄레야 뗄 수 없이 밀접한 실체의 양면성을 말해준다는 느낌이라는 것이에요... 그런 면에서 일원론적인 느낌도 갖게 하구요...
제가 현재의 신학적 역사 이해 없이 이 둘의 논쟁을 1935년으로 돌아가 들었다면 부르너 편에 손을 들어줄 것 같은데요. 물론 지금은 둘 다 아니지만요. 이건 그냥 개인적인 사견입니다. 그럼!
실체의 양면성인 질료와 형상이 일 대 일로 합쳐진 것이 아니란 점에서... 또한 질료와 형상은 그 어느 것이 다른 것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적이란 점에서... 또한 그 두 가지가 실체를 떠나서는 의미가 없고 인식되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브루너가 인간에게 하나님의 질료적 형상이 파괴되었다는 의미는 실존적으로 인간은 하나님과 소외되어 있는 현재적이고 정적인 리얼리티를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하나님의 형상적 형상은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실존적 소외를 극복하고 구원으로 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미래적이고 동적인 리얼리티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목사님의 말씀, 즉 브루너가 단순히 질료형상론을 카테고리적으로만 사용했다는 것 이상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는데요...
바르트는 조금 오바헀다는 느낌도 들구요... 그렇지만 그 오바 조차도 의미가 있는 것이겠지만요...
단순히 형상과 질료를 말하는 브룬너의 입장을 거들려구요.
형상적 형상과 질료적 형상을 인간의 어떤 부분이야 하는 건
이미 많은 이야기들이 나와 있으니 그걸 보면 되구요.
브룬너가 왜 그렇게 형상과 질료를 구분했느냐 하는 질문이지요.
하나님의 형상이 손에 잡힐 정도로 그렇게 구분되는 것도 아니구요.
그것은 관점의 차이를 말하는 거지요.
하나님의 배타적이고 존재론적인 창조 능력을 전제한다면
인간이 아무리 타락했어도 손상되지 않는 형상이 남아 있다는 말이 되는 거죠.
그렇잖아요.
하나님의 창조능력이 손상될 수는 없지요?
그렇다면 그의 창조능력으로 지음 받은 인간도 역시 손상될 수 없는 거지요.
그러나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
살아 있으면서도 존재론적으로 죄의 경향을 보인다는 사실을 보면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거지요.
바르트는 후자에 방점을 두고 인간을 보았다면
브룬너는 전장에 방점을 두었다고도 볼 수 있어요.
이런 논란은 오늘도 역시 계속된다고 볼 수 있죠.
인간이 누구인지 아직 결정이 나지 않았으니요.
하나님의 창조능력에 대한 해명도 역시 계속되니까요.
오늘의 신학적 관점에서 창조가 태초의 창조로 끝나지 않고
창조의 유지와 종말의 완성에 이른다는 차원에서 본다면
역시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 문제는 계속된다고 봐야지요.
나는 개인적으로 바르트도 옳고,
브룬너도 옳다고 봅니다.
팁- E. Brunner를 발음할 때
'브룬너'라고 하는 게 가장 정확해요.
요 위의 안희철 목사님을 비롯하야
한국 신학자들은 흔히 '부르너'라고 발음하더군요. 음흠.
검색에 용이하기도 하고 일관성 측면에서요.^^;
그래도 이참에 배움을 더 얻고자 도서관에 있는 아무 상냥해보이는 독일인을 붙잡고
Brunner 어떻게 발음하나 물어보았습니다.
이미 독일어 하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독일어의 r/R발음은 거의 "ㅎ"나 "ㅋ" 중간 어디쯤 됩니다.
그리고 두개의 자음 n 은 말씀하신 대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실험(! ㅋ) 결과 "운너"와 "우너" 중간 어디쯤이었지 정확히 한 쪽으로 기울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굳이 발음대로 한국말로 적어보자면 "브ㅎㅎ웅너" 정도가 아닐까 싶네요.
어륀지는 오렌지든 어차피 한국사람 발음 못알아듣는 것은 똑같고
이거든 저거든 외국 명칭 정서법이 하나로라도 정리되길 바라며,
앞으로는 정목사님 의견대로 "브룬너"에 맞춰보도록 하지요. 하하^^
"브룬너"의 방점에 대한 설명은 정목사님께서 이미 잘 설명하신 바와 같지만
사실 이는 바르트와의 상대적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브룬너의 입장은
"둘 다"에 방점을 가지고 있다고 사료됩니다.
둘 다에 강조점이 있기 때문에(제가 읽어보기에는 둘 다에 같은 무게중심이 있습니다)
부득불 "카테고리얼"로 형상imago를 본 것이구요.
그 이유 말고는 없는 것 같습니다. 최소한 "Natur und Gnade"에는요.
정목사님 설명이 그런 것이기는 했는데
혹 읽으시는 분들 가운데 오해가 있을까봐 애꿋은 첨언을 합니다.
그리고 오늘 첫날처럼님을 통해 개진되어 온 이 오래된, 길고 긴 바르트와 브룬너간 논쟁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의 핵심들인
계시론, 죄론, 구원론, 인간론, 혹은 더 나아가 창조론이나 종말론까지 미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일수록 이에 접근하고자 하는 이들은 반드시
2차자료(그것에 "관한")가 아니라 1차자료(그것"의")를 탐독함이 필수일 겁니다.
사실 2차자료를 들고 대화를 시작하면 밑도끝도 없어질 때가 많습니다.
너무 쉽게 자기 생각이 붙어버리구요.
그런 부풀려진 생각들이 혼선만 빚어내곤 합니다.
공부하시는 분들께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화두를 꺼내주신 첫날처럼님께 감사드리며.^^
사이의 충돌을 저는 모순으로 인식합니다.
왜람된 이야기지만 인간의 가능성을 배제시키는 이유 중 하나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건 죽음의 문제와도 직결되지만)
인간은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인식할 수도 창조할 수도 없습니다. 가령 인간은 원도 사각형도 삼각형 조차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합니다. 인간이 그린 것은 그 도형의 이데아와 닮은 그림일 뿐이지 결코 그것이 이데아의 실체로
제시될 수 없습니다. 또한 새삼스러운 이야긴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의 언어, 문화, 정치 , 경제 어느 것 하나 모순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이야깁니다.
우리의 삶이란 게 다 그런 것 같기도 하면서....
그래서 저는 인간에게는 질료적 형상과 형상적 형상 어느 것 하나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간단명료하게 몇가지로 질문드립니다.
1. 인간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종말의 때에 영원하신 성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그런 영원의 시간이 올 때, 인간은 모든 "한계"를 극복하게 될까요? 그 한계를 극복했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요? 제대로 인식하게 된다는 뜻인가요? 하나님"처럼" 창조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인가요?
2. 과연 이데아의 실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나요? 수리적으로 완전한 삼각형을 그려낸다고 한계를 뛰어넘고 모순마저 뛰어넘는 완전에 이른 것인가요? 우리가 뭐하러 이데아의 실체를 떠올리며 그걸 복제하고 재현하느라 힘을 빼야 할까요?
3.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도 남지 않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될 수 있나요? 그리고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완전히 파괴된 것은 회복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가 필요하게 되겠지요?
"하나님의 형상"론의 무게중심이 잘못되었다고 생각이 드는군요. 오늘날의 신학에서 창조이야기가 주는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브룬너나 바르트나 그런 점에서 불필요한 논쟁을 했다고 생각하고요. 창조이야기는 인간(이스라엘)의 자기인식의 결과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의 전달이 전혀 아니라, 인간의 현주소를, 특히 포로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연역적 명제가 아닌 귀납적 유추입니다. 이것이 오늘에 이르러 여전히 유효한 점은 어디에 있을까요? 적어도 이것 하나는 말해두고 싶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했던 게 아니라 존재적으로 닮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리하게 역사적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하여 이를 하나님의 형상 파괴론에 적용하여 설득력을 잃은 지 오래된 근대적 원죄론을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뒤집어씌우지는 말아야 할겁니다.
조금 역설적인 이야기를 하고 마치려 합니다. 인간은 죄를 짓거나 혹은 죄를 지을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지요? 그것은 곧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죄의 가능성이란, 자유의지를 지녔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유의지가 없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한 공동체에 참여시키실 수 있을까요? 따라서 죄란 종말론적으로 부정적인 무엇이 아니라 종말적 완성을 위한 핵심적 과제입니다. 판넨베르크의 표현대로라면, 인간의 영원한 하나님과의 "자기구별"을 통해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과 하나인 그 아버지-아들 관계가 종말적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서 실현될 가능성 혹은 전제가 바로 자유의지(혹은 죄)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론의 관심은 저 옛날이 아니라, 따라서 미래로부터 오시는 하나님의 현실성인 것은 아닐까요.
그 실존적 한계성(율법,육체..등등)으로 인해 변질된 인간의 영(하나님의 형상)을 복구하려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닌가요?
한편으론 예수님이 아니였다면 우리 인간은 노아의 방주처럼 소돔과 고모라처럼
확~ 쓸어버리지 않으셨을까란 상상도 해보게됩니다
우리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든 안남아있든 예수님이 오신 후로는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인간이 하나님과 영적인 소통을 할수 있는것(인격적 소통)이라 이해했는데요
일종의 메신적처럼요...
2차대전을 겪은 이후 독일 신학은 홀로코스트 때문인지...
브루너와 바르트의 의견차이 같은 소모적인 논쟁이 오랫동안 지속된 것처럼 보여집니다
루터교 이후 독일의 개신교와 신학의 역사에서 배울 부분이 많이 있지만
전쟁의 상흔이 인간의 영혼을 어떤 방향으로 몰고 가는지 통찰하게도 하네요
주체(Subjekt)로서의 인간이 주체적으로 하나님을 인식 가능성(일반계시든 특별계시든)이 있다는 것(Wortfähigkeit)과,
비록 죄인(Sünder)으로서의 인간이지만 결국 하나의 주체로서
인간이 그 주체된 인간에게, 신이 그 주체된 인간에게 말할 수 있음으로서
인간은 책임있는 존재(Verantworlichkeit)라는 사실을 이마고 데이의 형상적formal 측면에서 가지고 있습니다.
부르너는 imago Dei의 형상적formal 측면은 어느 정도만 훼손된 것으로 보고
질료적material 측면은 완전히 상실되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의 "형상"과 "질료"라는 표현을 원래의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것과
동일시하는 건 불가하다고 봅니다. 이미 중세에서 이를 수용할 때도 달랐거니와
부르너에게 있어서도 단지 의미적인 측면에서 카테고리화(kategorial) 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신이 형상과 질료로 구성되어 있다는 얘기가 아니란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그가 왜 형상적 측면에서 완전한 상실을 말하지 않았는가가 아닌가 싶네요.
사실 바르트나 부르너는 모두 인간의 기원적 신형상(ursprüngliches Gottesbild)가 파괴되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죄론"과 "계시론"이었지요.
특히 계시론과 관련하여 과연 인간이 신을(혹은 그의 말씀을) "주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반대 입장이었다고 봅니다.
아시다시피 부르너는 프로테스탄트 교의학의 연장선에서
일반계시와 특수계시의 인간 스스로의 인식 가능성을 긍정합니다.
부르너에게는, 인간이 죄인이든 아니든 간에
모든 다른 피조물들과는 다른 인간만의 특성(Humanum)이 있다고 보고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죄인인 인간이 여타의 피조물과 질적으로 다른 지점이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besondere Stellung).
Emil Brunner, Natur und Gnade, Paul Siebeck, 1935, p.9-11을 참조했고요,
혹시 번역이 되어있나 모르겠습니다. 얇은 책이니 한번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더 자세히 쓰고 싶지만 시간이 안되서... 그럼 열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