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

전도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성경을 한 눈으로 본다면
평신도를 향하여 전도하라고 강력하게 촉구하는 말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실례를 든다면 편지서가 될 것이다.
바울의 편지 속에서 전도하라는 내용이 있을까.
전도에 대하여 가장 근접한 내용은 엡 6:15이 될 것이나
그러나 현장 투입에 적극성을 엿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내용도 있지만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명령한 내용이다.

사도 바울은 항상 전도에 대한 비상(非常)이었지만
성도들에게는 전도 하라고 닦달거리지 아니하였다.
베드로도 그리하였는데
다만“소망의 이유에 대하여 묻는 자들을 위하여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고만 했을 뿐이다.
사도 요한도 입도 한번 벙긋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이 성도들에게 간곡하게 요구한 것은 평안 소망 감사 사랑 은혜 이단(異端)과 같은 것으로서
교회를 지키기에 급급한 기분만 들 뿐이다.
그러니까 집중적인 관심사는 질(質)적인 문제였다.
그렇게 기쁜 신앙생활만 해 주더라도 감사감사하였다.
머리 숫자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마 자신들의 몫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전도에까지는 감히 부담을 주려고 한 흔적은 거의 없다.
물론 제자가 제자를 낳는다는 말에서
전도자는 양육해야 된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교회에서 단3장과 행 1:8과 같은 내용을 가지고 어지간이 전도하라고 뽁아 대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가 하는 의문(疑問)을 함 가져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초대교회에서는 왜 부흥했을까?
물론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생활을 청산하고 변화된데 대한 세상 사람들의 눈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누구에 의하여 또 어떻게 변화 되었는지에 대한 근본이 교회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럼 현대교회에 대한 정곡(正鵠)을 찌르는 일이 있다.
이미 다 아시다시피
현대 교회에는 뭐 어떻게 라는 것도 찾기 어렵고 누구라고 하는 사람도 드물다.
물론 프로그램도 많고 목회자도 많지만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 시키는 그 무엇은 너무나 희박한 현실이다.

전도는 인위적(人爲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하여 되는 것이다.
율법에 얽매어서 부담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능가한 변화가 소문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다니는 교회로 데리고 오면 뭐하나?
잔치 집에 데리고 오더라도 굶겨야할 것을 빤히 알고 있는 한
전도에 대한 사명은 또 휴가 시켜야할 것이다.
그러나 맛있는 음식이 잔뜩 차려져 있다면
진짜로 강권해서라도 데리고 오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