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6
우선 “유익한” 글을 귀한 시간을 내어 다비아에 올린 breeze님의 “믿음”에 찬사를 보냅니다(아랫글). 쉽지 않은 일이더군요. 우선 Noll박사의 글을 날로 안 먹으려면 Noll박사의 번역글의 다비아에서의 위치를 명시해주세요.
“다비아이니 만큼” 진도를 엄청나가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진화나 진화론을 이해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창세기 1장 이해하는 사람들 없습니다.
그런데 자꾸 이해한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그나마 하나님 “아버지”는 이해 못한다고 하는 데에 어떻게 아버지의 “창조”는 이해한다고 자꾸들 오해하는지…
최근에 Richard Dawkins라는 Zoologist가 쓴 “The God Delusion”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Dawkins할아버지는 The Selfish Gene(1976)이라는 smash hit을 쓴 분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권위있는 atheist입니다(최근 타임지 표시 장식). 그 “이기적유전자”라는 책이 popular science(대중과학?)로 쓰여진 책 중 가장 잘 써진 저서라고 하는 비평가들도 있습니다. 이에 저도 개인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한 할아버지가 인류를 하나님”으로부터” “선교”해서 구출하려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쓴 책이 “The God Delusion”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잘 쓰여지지 못한 책입니다. 결론적으로 진화론, 창조론의 토의가 가치있게 이루어지려면 그 할아버지 능력내지는 의지보다도 뛰어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종교에 “문자주의”가 있다면 과학(교)에는 “Positivism”(breeze님께 설명부탁(계속 과학에 관한 글을 올리시면 저도 다른 진도를 다비아에서 나갈 수 있음(물론 예전에 말한대로 시중에 이미 나와있는 과학책들 읽기); 예를 들어 positivism은 현대 대학교에 학과별 형태내지는 구조를 준 여러분들이 지금 섬기는 “종교”입니다)”이 있습니다.
그 외의 의견들 샘플링:
과학과 종교는 서로 간섭하기에는 너무 다르다는 의견(Stephen Jay Gould(근래에 타계한 하바드대 교수이자 학계의 거두)와 다른 학자들이 완성기키고자 제시한 의견): 과도한 단순화 문제: the problem of over-simplification
진화론을 공부할수록 기독교적 믿음이 강해진다는 의견(논리적인(?) 자세한 뒷받침이 주제가 지향하고자 하는 바에 택도 없이 부족함: i.e., “Evolution and Christian Faith,” Joan Roughgarden: Evolutionary Biologist at Stanford University.
다시 경고합니다:
어떠한 논쟁에서 (혼자서 하더라도) 헤메고 있을 때에 무슨 틀린 가정을 하고 들어갔는가를 잘 따져보세요. 이 수준이 되면 그 때가서 진도를 다시 나가자.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3-17 19:31)
“다비아이니 만큼” 진도를 엄청나가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진화나 진화론을 이해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창세기 1장 이해하는 사람들 없습니다.
그런데 자꾸 이해한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그나마 하나님 “아버지”는 이해 못한다고 하는 데에 어떻게 아버지의 “창조”는 이해한다고 자꾸들 오해하는지…
최근에 Richard Dawkins라는 Zoologist가 쓴 “The God Delusion”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Dawkins할아버지는 The Selfish Gene(1976)이라는 smash hit을 쓴 분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권위있는 atheist입니다(최근 타임지 표시 장식). 그 “이기적유전자”라는 책이 popular science(대중과학?)로 쓰여진 책 중 가장 잘 써진 저서라고 하는 비평가들도 있습니다. 이에 저도 개인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한 할아버지가 인류를 하나님”으로부터” “선교”해서 구출하려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쓴 책이 “The God Delusion”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잘 쓰여지지 못한 책입니다. 결론적으로 진화론, 창조론의 토의가 가치있게 이루어지려면 그 할아버지 능력내지는 의지보다도 뛰어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종교에 “문자주의”가 있다면 과학(교)에는 “Positivism”(breeze님께 설명부탁(계속 과학에 관한 글을 올리시면 저도 다른 진도를 다비아에서 나갈 수 있음(물론 예전에 말한대로 시중에 이미 나와있는 과학책들 읽기); 예를 들어 positivism은 현대 대학교에 학과별 형태내지는 구조를 준 여러분들이 지금 섬기는 “종교”입니다)”이 있습니다.
그 외의 의견들 샘플링:
과학과 종교는 서로 간섭하기에는 너무 다르다는 의견(Stephen Jay Gould(근래에 타계한 하바드대 교수이자 학계의 거두)와 다른 학자들이 완성기키고자 제시한 의견): 과도한 단순화 문제: the problem of over-simplification
진화론을 공부할수록 기독교적 믿음이 강해진다는 의견(논리적인(?) 자세한 뒷받침이 주제가 지향하고자 하는 바에 택도 없이 부족함: i.e., “Evolution and Christian Faith,” Joan Roughgarden: Evolutionary Biologist at Stanford University.
다시 경고합니다:
어떠한 논쟁에서 (혼자서 하더라도) 헤메고 있을 때에 무슨 틀린 가정을 하고 들어갔는가를 잘 따져보세요. 이 수준이 되면 그 때가서 진도를 다시 나가자.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3-17 19:31)
2007.03.12 22:32:45
"The Selfish Gene"을 영어로 읽기를 권하지만(The God Delusion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한글 번역본이 적어도 두버젼이 있는 것으로 예년에 한국에 갔을 때에 알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담으로 예전에 미국에 있는 한국인사에게 이 책을 추천하니 좋다고 자신의 교포의사와 스터디그룹까지 만들어서 공부까지 한다고 하더니 나중에 그 한국인사가 저에게 전한 말, "그 의사가 기독교인였는데 그 책읽고 기독교 그만 두었다나..."
다비아에는 그 정도의 회원층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눈팅만 하는 회원들이 더 많은 현실 속에서는 우려는 될 수도 있겠습니다.
한글 번역본이 적어도 두버젼이 있는 것으로 예년에 한국에 갔을 때에 알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담으로 예전에 미국에 있는 한국인사에게 이 책을 추천하니 좋다고 자신의 교포의사와 스터디그룹까지 만들어서 공부까지 한다고 하더니 나중에 그 한국인사가 저에게 전한 말, "그 의사가 기독교인였는데 그 책읽고 기독교 그만 두었다나..."
다비아에는 그 정도의 회원층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눈팅만 하는 회원들이 더 많은 현실 속에서는 우려는 될 수도 있겠습니다.
2007.03.12 23:13:46
즉, 다아윈의 진화론이 기독교"사"에 이바지한 엄청난 업적(반어법도 과장법도 아닌 직설법내지는 과소법):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한다는 착각에서 구원해줌.
이렇게 기독교 발전에 "정말" 도움되었던 이가 성 누구누구, 철학가 누구누구 합해도, 역사에 있었나?
참고로 한 6, 7년 전 쯤에 미국 과학지, Scientific America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적 업적내지는 발견, 특별호가 있었는 데에 그 표지: "미안합니다, 아인슈타인(Sorry, Einstein)." 1위는 아인슈타인을 제치고 다아윈의 진화론이였다는 것이다.
아직 진화론의 가치는 택도 없이 과소평가되었고 오해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한다는 착각에서 구원해줌.
이렇게 기독교 발전에 "정말" 도움되었던 이가 성 누구누구, 철학가 누구누구 합해도, 역사에 있었나?
참고로 한 6, 7년 전 쯤에 미국 과학지, Scientific America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적 업적내지는 발견, 특별호가 있었는 데에 그 표지: "미안합니다, 아인슈타인(Sorry, Einstein)." 1위는 아인슈타인을 제치고 다아윈의 진화론이였다는 것이다.
아직 진화론의 가치는 택도 없이 과소평가되었고 오해되고 있습니다.
2007.03.13 00:03:28

뉴욕 님,
위의 글에서 거의 마지막 단락에
<다시 경고합니다.> 운운하셨는데,
누구에게 경고하신 건가요?
다비안 일반에게요?
혹은 한글 사용이 아직 익숙하지 않으신건가?
저도 따라가기 힘든 글을 자꾸 쓰시면 어찌하란 말씀인지요.
너희들은 잘 몰라, 더 공부해야 돼, 그런 투로 말씀하시는 것 같이 보이네요.
창세기 1장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지요?
아버지가 무엇인지, 창조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지요.
궁극적인 걸 아는 사람은 물로 없습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연필 조차가 그 궁극성을 내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성서의 세계를 안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 범주 안에서 늘 진리론적 투쟁을 해야하는 거 아닌가요?
진화론을 절대화 하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알려진 생명의 원리(?)로서 진화가
그것에 가장 가까이 갔기 때문에 우리는 그걸 배우는 겁니다.
그리고 논쟁하는 거지요.
뉴욕 님은 심술굳게도
논의를 원점으로만 돌리네요.
우리 눈 앞에 놓여 있는 것이 비록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해도
그것을 말해야 하지 않을는지요.
그것에 완전히 포섭당해도 된다는 게 아니라
그 부분에서 전체를 볼 수 있도록,
또한 어쩔수 없이 궁극은 볼 수 없으니까
부분에 충실해야 하겠지요.
<엘로 카드>는 그만 보이시는 게....
주의 은총이.
위의 글에서 거의 마지막 단락에
<다시 경고합니다.> 운운하셨는데,
누구에게 경고하신 건가요?
다비안 일반에게요?
혹은 한글 사용이 아직 익숙하지 않으신건가?
저도 따라가기 힘든 글을 자꾸 쓰시면 어찌하란 말씀인지요.
너희들은 잘 몰라, 더 공부해야 돼, 그런 투로 말씀하시는 것 같이 보이네요.
창세기 1장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지요?
아버지가 무엇인지, 창조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지요.
궁극적인 걸 아는 사람은 물로 없습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연필 조차가 그 궁극성을 내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성서의 세계를 안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 범주 안에서 늘 진리론적 투쟁을 해야하는 거 아닌가요?
진화론을 절대화 하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알려진 생명의 원리(?)로서 진화가
그것에 가장 가까이 갔기 때문에 우리는 그걸 배우는 겁니다.
그리고 논쟁하는 거지요.
뉴욕 님은 심술굳게도
논의를 원점으로만 돌리네요.
우리 눈 앞에 놓여 있는 것이 비록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해도
그것을 말해야 하지 않을는지요.
그것에 완전히 포섭당해도 된다는 게 아니라
그 부분에서 전체를 볼 수 있도록,
또한 어쩔수 없이 궁극은 볼 수 없으니까
부분에 충실해야 하겠지요.
<엘로 카드>는 그만 보이시는 게....
주의 은총이.
2007.03.13 00:18:40
꼭 설명까지 해야합니까?
다른 분이 아닌 정목사님이 그러시니 난감하네요.
물론 그 반대로 돌릴 수도 있지만..
쟁토방으로 옮겨간 글, "기독교의 적"에서는...
정목사님이 그냥 다비아에서 개인이시면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경고가 그렇게 들리는 것은 독자 몫, 이 경우에는 정목사님의 몫이니 제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익숙치는 않겠지만...
점심약속이 있어서 나가봐야 하는데...
"저도 따라가기 힘든 글을 자꾸 쓰시면 어찌하란 말씀인지요."
이 말은 다시 곰씹어보세요.
다른 분이 아닌 정목사님이 그러시니 난감하네요.
물론 그 반대로 돌릴 수도 있지만..
쟁토방으로 옮겨간 글, "기독교의 적"에서는...
정목사님이 그냥 다비아에서 개인이시면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경고가 그렇게 들리는 것은 독자 몫, 이 경우에는 정목사님의 몫이니 제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익숙치는 않겠지만...
점심약속이 있어서 나가봐야 하는데...
"저도 따라가기 힘든 글을 자꾸 쓰시면 어찌하란 말씀인지요."
이 말은 다시 곰씹어보세요.
2007.03.13 06:31:36
오늘도 유혹이 옵니다.
“능력을 보여 줘봐,” 갑옷을 입은 아이가 말했습니다, “아니면 뭘 믿고 그 따위 옷을 입고 다니니.”
입은 갑옷을 봐서는 어른인지 속을 뻔 했습니다(물론 처음에는 깜박 속아 주었습니다. 어른으로).
하지만 그 갑옷의 장식이나 레벨을 보니 분명 그 동네에서는 주류 중의 주류의 권위가 있는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갑옷을 입은 단지 아이였을 뿐이였습니다.
그 아이만 깨면 그 동네는 물론 이웃 동네도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지만 그냥 그렇게 있었습니다. 아이를 깰 수는 없는 노릇은 둘째치고 그 동네까지 가서 머물라고 한 이유도 날라갈 노릇이었습니다. 그 동네에서는 딴 동네나 이 동네에서 못한 일을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실상 그 동네에 사는 아이들은 그것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날 오후 집으로 돌아와서 뉴스를 들으려고 시집을 찾았습니다. 새로나온 시집이였습니다, “A Worldly Country.” 그것도 지금 현존하는 뉴스 앵커중 가장 뛰어나다는 John Ashbery였습니다; 참 반가웠습니다. 책 커버에 있는 뉴스는 오래된 뉴스를 다른 노래로 또 트는 것이지만 그래도 그 뉴스를 같이 나눌 수 있는 이가 있다는 동질감으로 좋았습니다. 나이가 들어 오래된 뉴스 다시 노래하나? 그러면 그나마 오래 된 뉴스이니 그 동네에 가서 들려주면 익숙하게 뉴스가 들릴까?
"Thrill of Romance
…..
Everyone’s solitude (and resulting promiscuity)
Perfumed the byways of villages we had thought civilized.
I saw you waiting for a street car and pressed forward.
Alas, you were only a child in armor….
모든 이의 고독(그리고 초래되는 무분별한 성짓거리)의 향내가
문명화되었다고 생각했던 동네들의 옆길들을 채웁니다.
당신이 전차를 기다리는 것을 보았고 지나쳤습니다.
어쩌나, 당신은 갑옷을 입은 단지 아이인 것을…
John Ashbery"
그런데 그 동네도 이 동네도 더 이상은 거의 대부분 동네사람들이 뉴스를 찾으려고 시를 읽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I pressed forward.
지나쳤습니다.
“능력을 보여 줘봐,” 갑옷을 입은 아이가 말했습니다, “아니면 뭘 믿고 그 따위 옷을 입고 다니니.”
입은 갑옷을 봐서는 어른인지 속을 뻔 했습니다(물론 처음에는 깜박 속아 주었습니다. 어른으로).
하지만 그 갑옷의 장식이나 레벨을 보니 분명 그 동네에서는 주류 중의 주류의 권위가 있는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갑옷을 입은 단지 아이였을 뿐이였습니다.
그 아이만 깨면 그 동네는 물론 이웃 동네도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지만 그냥 그렇게 있었습니다. 아이를 깰 수는 없는 노릇은 둘째치고 그 동네까지 가서 머물라고 한 이유도 날라갈 노릇이었습니다. 그 동네에서는 딴 동네나 이 동네에서 못한 일을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실상 그 동네에 사는 아이들은 그것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날 오후 집으로 돌아와서 뉴스를 들으려고 시집을 찾았습니다. 새로나온 시집이였습니다, “A Worldly Country.” 그것도 지금 현존하는 뉴스 앵커중 가장 뛰어나다는 John Ashbery였습니다; 참 반가웠습니다. 책 커버에 있는 뉴스는 오래된 뉴스를 다른 노래로 또 트는 것이지만 그래도 그 뉴스를 같이 나눌 수 있는 이가 있다는 동질감으로 좋았습니다. 나이가 들어 오래된 뉴스 다시 노래하나? 그러면 그나마 오래 된 뉴스이니 그 동네에 가서 들려주면 익숙하게 뉴스가 들릴까?
"Thrill of Romance
…..
Everyone’s solitude (and resulting promiscuity)
Perfumed the byways of villages we had thought civilized.
I saw you waiting for a street car and pressed forward.
Alas, you were only a child in armor….
모든 이의 고독(그리고 초래되는 무분별한 성짓거리)의 향내가
문명화되었다고 생각했던 동네들의 옆길들을 채웁니다.
당신이 전차를 기다리는 것을 보았고 지나쳤습니다.
어쩌나, 당신은 갑옷을 입은 단지 아이인 것을…
John Ashbery"
그런데 그 동네도 이 동네도 더 이상은 거의 대부분 동네사람들이 뉴스를 찾으려고 시를 읽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I pressed forward.
지나쳤습니다.
2007.03.13 09:04:31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더군요. 뉴욕님의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같은 지식이, 알아먹을 수있는 한국말로 나와야 저희에게도 보배가 되지 않겠습니까? 설마 혼자말로 독백하시는 것은 아니지요?^^*
2007.03.13 09:23:34
영어, 한글 문제가 아닙니다.
언어 문제, 말씀 문제 입니다.
인스턴트 말씀은 문제입니다.
금방 이해되는 것 시원은 하지요.
그것은 연속극 보면 됩니다.
친절, 봉사등등
사회모임에 웬만큼 교양있으면 해결됩니다.
그런데 봉사만큼 건방진 개념이 또 있을까요.
여기 시간으로 오후늦게 새로운 시집을 만난 것도 그렇고
아침에 "구슬이 서말.." 찾으려고 네이버 들어가고
이제 밤에 다비아에서 대하고..
언어 문제, 말씀 문제 입니다.
인스턴트 말씀은 문제입니다.
금방 이해되는 것 시원은 하지요.
그것은 연속극 보면 됩니다.
친절, 봉사등등
사회모임에 웬만큼 교양있으면 해결됩니다.
그런데 봉사만큼 건방진 개념이 또 있을까요.
여기 시간으로 오후늦게 새로운 시집을 만난 것도 그렇고
아침에 "구슬이 서말.." 찾으려고 네이버 들어가고
이제 밤에 다비아에서 대하고..
2007.03.13 09:34:31
돌구름님
“…지식이, 알아먹을 수있는 한국말로 나와야 저희에게도 보배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 말씀을 말로 표현할 정도면 무언가가 님에게 이미 도착했습니다.
다만 익숙치 않아서 그렇지요.
“친절한” 익숙한 지식, 먹여 주는 지식상품….
그것은 이미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지식이, 알아먹을 수있는 한국말로 나와야 저희에게도 보배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 말씀을 말로 표현할 정도면 무언가가 님에게 이미 도착했습니다.
다만 익숙치 않아서 그렇지요.
“친절한” 익숙한 지식, 먹여 주는 지식상품….
그것은 이미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2007.03.13 11:39:06
실로 배움을 원하는 자들이면,
실로 예수님을 따라가기를 원하는 자들이라면…
정녕코 배우고 싶다면:
1.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기 바라는 허영버리기.
2. 능력발휘하는 것 참기.
무식하고 급한 이놈은 돌려 애기하는 법을 아직도 익히지 못하였고-but 연습 중임-
어느 현자?가 쓴 글을 옮긴 것임.
***혹시 언짢으시더라도 내 정보 보기 없기-공평해야 되니까
실로 예수님을 따라가기를 원하는 자들이라면…
정녕코 배우고 싶다면:
1.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기 바라는 허영버리기.
2. 능력발휘하는 것 참기.
무식하고 급한 이놈은 돌려 애기하는 법을 아직도 익히지 못하였고-but 연습 중임-
어느 현자?가 쓴 글을 옮긴 것임.
***혹시 언짢으시더라도 내 정보 보기 없기-공평해야 되니까
2007.03.13 16:57:12
저 말고도 여러 분이 계셨군요^^.
저희 교회에 어린이들이 5명 출석하고 있는 데
우리 말 보다는 영어가 훨씬 편한 꿈동이들이지요.
매 주일 예배 때 순서의 일환으로 제가 <어린이 설교>를 한 5분 진행합니다.
그런데 가끔 그 어린이들이 눈만 껌뻑거리고 있는 경우가 있어요.
제겐 일상 용어인데도 그들에게는......
그 때 영어 단어나 문장을 곁들여 주면 그 아이들의 이내 얼굴이 환해지지요.
그제서야 '이젠 통하는 구나' 싶어요.
제 마음도 편하고요.
말이 잘 안 통하면 서로가 답답해 지는 것 같습니다.
그게 아무리 의미심장한 말일지라도요.
저희 교회에 어린이들이 5명 출석하고 있는 데
우리 말 보다는 영어가 훨씬 편한 꿈동이들이지요.
매 주일 예배 때 순서의 일환으로 제가 <어린이 설교>를 한 5분 진행합니다.
그런데 가끔 그 어린이들이 눈만 껌뻑거리고 있는 경우가 있어요.
제겐 일상 용어인데도 그들에게는......
그 때 영어 단어나 문장을 곁들여 주면 그 아이들의 이내 얼굴이 환해지지요.
그제서야 '이젠 통하는 구나' 싶어요.
제 마음도 편하고요.
말이 잘 안 통하면 서로가 답답해 지는 것 같습니다.
그게 아무리 의미심장한 말일지라도요.
2007.03.13 20:29:30
예전에 한국소식을 접할려면 학교 도서관에 어느 한 곳 큰 폴더에 비치한 그것도 적어도 몇주, 며칠 늦은 한국 신문을 가끔씩 들려서 신문냄새, 먼지 뒤집어쓰면서 읽어야 했습니다(그러한 때에서 다비아까지… 짧다면 확실히 짧은 세월인데 말입니다). 그러던 시절에 기억에 남는 바이올린니스트 정경화씨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바이올린 실력이 늘지 않고 정말 답답한 시절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그 때가 바이올린이 가장 늘고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의 절대 대부분의 학생들이, 교인들이 정경화가 바이올린을 잘 연주하고 싶은 만큼 주님이나 학문을 배우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의 절대 대부분의 학생들이, 교인들이 정경화가 바이올린을 잘 연주하고 싶은 만큼 주님이나 학문을 배우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2007.03.13 21:15:06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더군요.”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누가 꿰어야 할까요?
물론 자본주의”교”에서는 “고객”을 위해서 제가 꿰지요. 애프터서비스로 풀어지면 제가 또 꿰줍니다. 돈주고 사기만 하면 됩니다.
학교의, 교회의 학생과 교인은 “고객”이 아닙니다.
줄기차게 작금의 교회의 현실, 학교의 현실은 썩을대로 썩었다고 하면서,
왜 "자신"은 예수님이 아닌 “그것을” 표준으로 하십니까?
예수님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부모님이 친절합니까? 친절한 분들도 있지요. 그런데 한명은 악역을 해야합니다. 한명은 빨간불이어야합니다. 요즈음에 "한국에도" 콩가루집안 많다는 풍문은 듣고 있습니다.
요즈음 학교, 학원, 교회 “고객”서비스해서 꿰서 바치는 것 저도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더군요.”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누가 꿰어야 할까요?
물론 자본주의”교”에서는 “고객”을 위해서 제가 꿰지요. 애프터서비스로 풀어지면 제가 또 꿰줍니다. 돈주고 사기만 하면 됩니다.
학교의, 교회의 학생과 교인은 “고객”이 아닙니다.
줄기차게 작금의 교회의 현실, 학교의 현실은 썩을대로 썩었다고 하면서,
왜 "자신"은 예수님이 아닌 “그것을” 표준으로 하십니까?
예수님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부모님이 친절합니까? 친절한 분들도 있지요. 그런데 한명은 악역을 해야합니다. 한명은 빨간불이어야합니다. 요즈음에 "한국에도" 콩가루집안 많다는 풍문은 듣고 있습니다.
요즈음 학교, 학원, 교회 “고객”서비스해서 꿰서 바치는 것 저도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더군요.”
2007.03.13 21:34:16
뉴욕님..다른 뜻은 아니랍니다. 단지 뉴욕님의 마지막 두 개의 대글과 같은 글을 원하는거죠..
글의 의미가 난해하다는 것이 아니라, 뉴욕님의 글쓰기가 해독이 잘 안된다는 것입니다^^(제가 난독증은 아닌 것 같고요^*)
글의 의미가 난해하다는 것이 아니라, 뉴욕님의 글쓰기가 해독이 잘 안된다는 것입니다^^(제가 난독증은 아닌 것 같고요^*)
2007.03.13 22:34:48
“단지 뉴욕님의 마지막 두 개의 대글과 같은 글을 원하는거죠.”
그러한 글들만을 쓸 수도 있지요: 레벨을 붙여서 정리 정돈할 수 있는 글 편리하지요. 편리한 것이 필요할 때 있습니다. “그래서” 정리 정돈을 할 때인 것 같아서 위의 두 대글을 쓴 모양입니다. 물론 제가 아침에 철자법 확인할려고 “구슬이 서말”하고 네이버 검색했는데에 댓글에 올라와 있는 것이 재미있기도 했었고요. 이는 이미 한 이야기이고. 어쨌든 그렇다면 진도 조금 더 나가지요.
“줄기차게 작금의 교회의 현실, 학교의 현실은 썩을대로 썩었다고 하면서,
왜 "자신"은 예수님이 아닌 “그것을” 표준으로 하십니까?”
거의 다라고 할 만큼 많은 이들이 그러한데 왜 그럴까요?
다 그런 “경향”은 확실히 있다고 보면은 됩니다.
아니 다 그렇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연스럽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러한“ 가치들(위에서는 표준이라고함)을 자신들 안에서 “내부화”하지 않고서는 “그 자리”에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You might say it comes naturally because they would never have gotten to that point unless they had internalized those values.”
이게 무서운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바람을 피면 내가 바람을 피는구나하고 아는 데, 이는 모르는 사이에 잠시 생각을 막은 사이에 이미 안에 들어와 버립니다. 그나마 깨달아도 이미 “그 자리”에까지 가있기에… 즉, 이는 제도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학교니 대형교회 입시학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부사이, 부모와 자식사이, 친구사이에도 여지없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의 시처럼
“모든 이의 고독(Everyone’s solitude)”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 비용(cost)은 천문학적 숫자로고 해도 과소평가입니다.
그리고 “초래하는 난잡한 성짓거리(and resulting promiscuity)”는 십계명에서도 그런 것처럼 단순한 성적 바람을 피는 것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다비아에 글 올리면 편지쓰는 것처럼 마치 무슨 그 날 일을 했다는 착각이 올 수도 있거든요.
그러한 글들만을 쓸 수도 있지요: 레벨을 붙여서 정리 정돈할 수 있는 글 편리하지요. 편리한 것이 필요할 때 있습니다. “그래서” 정리 정돈을 할 때인 것 같아서 위의 두 대글을 쓴 모양입니다. 물론 제가 아침에 철자법 확인할려고 “구슬이 서말”하고 네이버 검색했는데에 댓글에 올라와 있는 것이 재미있기도 했었고요. 이는 이미 한 이야기이고. 어쨌든 그렇다면 진도 조금 더 나가지요.
“줄기차게 작금의 교회의 현실, 학교의 현실은 썩을대로 썩었다고 하면서,
왜 "자신"은 예수님이 아닌 “그것을” 표준으로 하십니까?”
거의 다라고 할 만큼 많은 이들이 그러한데 왜 그럴까요?
다 그런 “경향”은 확실히 있다고 보면은 됩니다.
아니 다 그렇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연스럽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러한“ 가치들(위에서는 표준이라고함)을 자신들 안에서 “내부화”하지 않고서는 “그 자리”에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You might say it comes naturally because they would never have gotten to that point unless they had internalized those values.”
이게 무서운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바람을 피면 내가 바람을 피는구나하고 아는 데, 이는 모르는 사이에 잠시 생각을 막은 사이에 이미 안에 들어와 버립니다. 그나마 깨달아도 이미 “그 자리”에까지 가있기에… 즉, 이는 제도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학교니 대형교회 입시학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부사이, 부모와 자식사이, 친구사이에도 여지없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의 시처럼
“모든 이의 고독(Everyone’s solitude)”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 비용(cost)은 천문학적 숫자로고 해도 과소평가입니다.
그리고 “초래하는 난잡한 성짓거리(and resulting promiscuity)”는 십계명에서도 그런 것처럼 단순한 성적 바람을 피는 것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다비아에 글 올리면 편지쓰는 것처럼 마치 무슨 그 날 일을 했다는 착각이 올 수도 있거든요.
2007.03.14 11:58:12
저~기 위에 정 목사님!
간만에 까칠한 댓글을 놓으셨네요.
제가 뵈옵기로 뉴욕님께서는...
기본적으로 다비아에 애정을 갖고 계시거든요.
따라서 하시고 싶은 말씀도 많고,
선배로서 한 수 지도 하시고 싶다는 열정..
그래서 좀 차이나는 표현과 문장력으로
자꾸 그러시는 것 같네요.*^^*
하지만, 뉴욕 선생님!
제가 요 며칠 지켜 보니까
아직은 너무 빠르게 진도 나가시지 않는 편이
이 공간의 평화와 즐거움에 도움 될 것 같은데요.^^
간만에 까칠한 댓글을 놓으셨네요.
제가 뵈옵기로 뉴욕님께서는...
기본적으로 다비아에 애정을 갖고 계시거든요.
따라서 하시고 싶은 말씀도 많고,
선배로서 한 수 지도 하시고 싶다는 열정..
그래서 좀 차이나는 표현과 문장력으로
자꾸 그러시는 것 같네요.*^^*
하지만, 뉴욕 선생님!
제가 요 며칠 지켜 보니까
아직은 너무 빠르게 진도 나가시지 않는 편이
이 공간의 평화와 즐거움에 도움 될 것 같은데요.^^
2007.03.14 21:27:55
“그냥 한번 던져 본 거에요.
뉴욕 님이 어찌 하시나 보려구요.
좀 삐지셨나?”
애들 장난합니까?
정목사님은 목사님이 싫건 좋건 다비아에서는 어떤 위치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저도 따라가기 힘든 글을 자꾸 쓰시면 어찌하란 말씀인지요."
이 말은 다시 곰씹어보세요.
거기에 목사님이 위에서 하신 질문들의 답들이 있다는 소리였습니다.
뉴욕 님이 어찌 하시나 보려구요.
좀 삐지셨나?”
애들 장난합니까?
정목사님은 목사님이 싫건 좋건 다비아에서는 어떤 위치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저도 따라가기 힘든 글을 자꾸 쓰시면 어찌하란 말씀인지요."
이 말은 다시 곰씹어보세요.
거기에 목사님이 위에서 하신 질문들의 답들이 있다는 소리였습니다.
2007.03.14 21:43:46
위에 뉴욕님이 댓글 중에
“줄기차게 작금의 교회의 현실, 학교의 현실은 썩을대로 썩었다고 하면서,
왜 "자신"은 예수님이 아닌 “그것을” 표준으로 하십니까?”
이 말씀이 요즘 제가 나름으로 묵상하는 내용과 많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물론 저를 포함해서 신앙의 원리가 신앙적이 아니고
전혀 세상적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면에서 모든 신앙인들에게 다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복을 설명함에도 십자가를 기준한 신령한 것을 말하지 않고
세상의 기준으로 복을 설명해서 전혀 엉뚱한 성공자들을 만들고
오히려 주님을 매우 초라하게 만드는 모습을 봅니다.
이런 모습들이 세상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보인다는거죠.
주님께서 신앙의 대전제로 회개하라고 하셨는데
그 회개가 결국은 세상과 반대적 원리를 의미한다고 보는데
그러다면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신앙형태 모두가 다
일단은 잘못되었다고 봐야할 것 같은데....
즉, 그 반대적 개념이 우리에게는 없다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세상에 살면서 그 반대적 개념과 원리로 살아야 한다는 것.
이것 자체가 우리는 이미 세상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전무한 것 아닌가요?
하긴 그러기에 하늘나라란 개념이 등장하는것일진데
하여간 그 표준 정하기가 관건인것 같습니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매일 속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줄기차게 작금의 교회의 현실, 학교의 현실은 썩을대로 썩었다고 하면서,
왜 "자신"은 예수님이 아닌 “그것을” 표준으로 하십니까?”
이 말씀이 요즘 제가 나름으로 묵상하는 내용과 많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물론 저를 포함해서 신앙의 원리가 신앙적이 아니고
전혀 세상적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면에서 모든 신앙인들에게 다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복을 설명함에도 십자가를 기준한 신령한 것을 말하지 않고
세상의 기준으로 복을 설명해서 전혀 엉뚱한 성공자들을 만들고
오히려 주님을 매우 초라하게 만드는 모습을 봅니다.
이런 모습들이 세상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보인다는거죠.
주님께서 신앙의 대전제로 회개하라고 하셨는데
그 회개가 결국은 세상과 반대적 원리를 의미한다고 보는데
그러다면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신앙형태 모두가 다
일단은 잘못되었다고 봐야할 것 같은데....
즉, 그 반대적 개념이 우리에게는 없다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세상에 살면서 그 반대적 개념과 원리로 살아야 한다는 것.
이것 자체가 우리는 이미 세상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전무한 것 아닌가요?
하긴 그러기에 하늘나라란 개념이 등장하는것일진데
하여간 그 표준 정하기가 관건인것 같습니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매일 속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과학으로 얻어지는 지식의 총체 이외에 참된 지식은 없다고 하는 입장.
실증주의라는 이름은 자연과학의 방법을 철학에 적용하려고 하였던 생시몽에서 비롯되었고 A.콩트가 실증철학으로서 확립하였다. 그 연원(淵源)은 영국의 경험론과 프랑스의 계몽주의 유물론(唯物論)에 있지만, 그 배경에는 자연과학의 급속한 발달과 공업 사회의 성립이 있다. 실증철학은 프랑스 혁명기의 대표적인 철학이 되었다. 또 E.마하, R.아베나리우스 등의 과학철학도 인식론에서 실증주의의 대표적인 것으로 꼽히지만, 19세기의 실증주의에서는 논리학이나 수학의 역할에 대해 충분한 고려를 하지 못하였다.
1920년대부터 빈 학단(學團) 사람들을 중심으로 제창되기 시작한 새로운 실증주의는 이 점의 결함을 보충하고, 논리학이나 수학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는 한편, 이들 학문이 경험과학과 다르고, 세계에서의 정보를 주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여기에서 이 새로운 실증주의를 논리실증주의라고 한다.
현재는 논리실증주의도 또 얼마간 비판을 받아 분석철학(分析哲學)이라 불리는 것으로 변신(變身)하고 있지만, 이것은 이미 실증주의라고는 불려지지 않는다. 일상 생활에서는 형이상학이나 종교를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고, 오로지 검증이 가능한 증거에 의지하여 여러 가지 문제를 풀려고 하는 사람을 실증주의적인 사람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