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주의, 동성애자를 심판하다


1. 기독교의 끊임없는 동성애 박해


동성애자들에 대한 교회의 기록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잔인함 그 자체다. 이것은 용서를 구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보상해야 할 문제다.  -릭터 노튼Rictor Norton -


흑사병이 유럽 전체를 죽음의 공포에 몰아넣었을 때, 베네치아에서는 동성애자들이 공개 처형당합니다. 성직자들이 흑사병의 원인으로 동성애를 지목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흑사병은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천벌이었고 성직자들은 빈곤한 상상력으로 동성애 때문에 멸망한 것으로 보이는 소돔과 고모라를 떠올렸습니다. 이후, 동성애자들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었고 1461년에 베네치아의 모든 의사와 이발사들은 동성애 행위로 항문이 손상된 사례를 발견하는 즉시 사흘 안에 신고하도록 명령받았습니다.1)

동성애자에 대한 기독교의 탄압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1100년대 중엽, 프랑스의 신학자이며 종교재판의 재판관이었던 페트루스 칸토르Petrus Cantor가 신부들 사이의 동성애 애정 행각을 단죄하는 운동을 벌였고 로마서 1장 26~27절이 오로지 동성애만 가리킨다고 주장했습니다. 1179년에는 교황 알렉산드르 3세가 로마의 라테란 대성당에서 소집한 세계 교회 협의회인 에큐메니컬 공의회에서는 동성애 처벌을 요구했습니다.2) 13세기 스콜라 철학자들은 세속 권력과 종교재판소가 함께 주도하던 이단과 성적 일탈 행위에 맞선 투쟁이라는 광범위한 운동 속에서 동성애에 대한 단죄를 정당화시켰습니다. 그리고 14세기에 이르러 화형을 동성애에 대한 공식 형벌로 규정합니다.3) 이후 동성애자들은 종교 재판 을 통해 노골적으로 처형당합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동성애자를 종교 재판을 열어 화형 시키지는 않지만, 그들을 대하는 냉랭한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동성애자는 거의 없으며 실제로 있어도 욕먹을 것과 왕따당할 것이 두려워 밝힐 수 없습니다. 피텐저는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공공연하게 고백하는 사람들조차도 동성애자들을 “더러운 존재”, “역겨운 성도착자”, “망할 죄인들”등의 표현을 쓰면서 욕하는 편지를 여러 번 받았다고 했습니다.4) 피에르 버튼의 말대로 “오늘날 동성애자는 과거의 문둔병자와도 같습니다.”

심지어 동성애자는 선교 대상자로서의 자격도 박탈당했습니다. 오늘날에는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선교활동이 이루어져 장애인, 노숙자, 독거노인 등 소외계층에 대한 선교 활동이 활발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동성애자에 대한 선교 활동은 거의 없습니다. 선교는커녕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꺼려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마치 복음의 사각지대처럼 그들은 시야 밖에 존재하며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자격조차 박탈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동성애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나누려는 몇 안되는 시도들은 동성애자와 함께 심판받았습니다. 남녀 동성애자들에게 사역하기 위해 세워진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커뮤니티 교회는 25년 동안 8번이나 방화를 당하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중 1973년 뉴올리언스에서 일어난 방화는 무려 스물아홉 명이나 사망한 학살 사건이었습니다.5)




2. 동성애가 죄인가?

기독교가 오랫동안 동성애자를 잔인하게 핍박해 온 근거는 성경 구절입니다. 성경에서 동성애를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몇 개의 구절을 찾을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 : 소돔 성 각 마을에서,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모든 남자가 몰려와서, 그 집을 둘러쌌다. 그들은 롯에게 소리쳤다. “오늘 밤에 당신의 집에 온 그 남자들이 어디에 있소? 우리가 그 남자들과 상관 좀 해야 하겠소.” (창세기 19:1~5)

너는 여자와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안 된다. 그것은 망측한 짓이다. (레위기 18:22)

남자가 같은 남자와 동침하여, 여자에게 하듯 그 남자에게 하면, 그 두 사람은 망측한 짓을 한 것이므로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레위기 20:13)


 신약성경 : 여성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나,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이나, …… ,남의 것을 약탈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9~10)

간음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 그 밖에도 무엇이든지 건전한 교훈에 배치되는 일 때문임을 우리는 압니다. (디모데전서 1:10)


전통적으로,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 사람들은 동성애를 심각한 죄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동성애를 정죄하고 심판하기 시작합니다. 레위기에 따르면 동성애자는 죽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동성애를 죄악으로 규정하는 전통적인 관점은 오늘 날에도 유효합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는 《동성애 논쟁》에서 “성경에서 동성애를 금지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동성애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이성애 일부일처제)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질서가 문화가 아니라 창조와 함께 설립되었기 때문에 그 유효성은 영구적이며 또한 보편적이다. 하나님의 창조 규범으로부터의 ‘자유’란 있을 수 없으며, 진정한 자유는 오직 그 규범을 받아들일 때에만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 관점을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데릭 셔윈 베일리Derrick Sherwin Bailly, 존 보스웰John Boswell 등의 많은 성경 연구자들은 성경이 동성애를 금지하지 않는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합니다. 다니엘 헬미니악Daniel Helminiak은 《성서가 말하는 동성애 What the Bible Really Sas About Homosexuality》에서 “성경이 동성애를 단죄할 어떤 진정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기에 단순히 성경을 인용함으로써 동성애에 반대하는 일을 그만둬야 한다. 성경은 동성애를 반대하는 입장을 전혀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성경을 그 당시의 역사적, 문화적 관점에서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성경이 동성애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게이나 레즈비언 섹스 자체가 선한지 악한지, 동성 간의 성행위 자체가 옳은지 그른지를 분명하게 알아보고 싶다면 성경이 아닌 다른 곳에서 답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결코 그 질문에 답하지 않으며, 오히려 동성애에 대해서는 일부러 개의치 않으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전통적인 동성애 관점을 비판하면서 성경이 소돔을 꾸짖는 이유는 동성애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을 냉대했기 때문이고, 레위기 구절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강력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지 동성애를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주장하려는 의도는 애초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레위기의 주장은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섹스 자체가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유대인의 정체성을 강력하게 유지하려는 것이 그 의도였다.”

두 관점이 서로 다른 이유는 역시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관점이 성경 문자를 그대로 일반화시켰다면, 다니엘 헬미니악은 성경을 본문이 씌어진 당시의 역사, 문화적 맥락에서 해석했습니다. 두 관점 모두 각각 장단점이 있습니다. 전자는 알기 쉬운 도덕적 지침을 마련해주지만 성경의 전체적 의미를 흐리게 할 위험이 있고, 후자는 상대적으로 성경의 원래 의미를 파악하기 좋지만 연구 과정이 복잡하고 난해합니다. 따라서 어느 하나의 관점이 틀렸다고 결론을 내리기에는 성급합니다.

그렇지만 문자주의에 따라 동성애가 죄라도 하더라도 사람에게는 동성애자를 심판하고 정죄할 권리가 없습니다. 전통적인 교리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더 더러운지 우열을 가리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동성애자를 보면서 “내가 쟤보다는 낫지”, “저 사람보다는 내가 의인이야.”, “어떻게 저런 죄를 지을 수 있지”라는 생각을 합니다. 동성애가 하이레벨의 큰 죄로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동성애자가 이성애자보다 죄가 더 많다고 할 수 없습니다.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를 다음과 같이 비유할 수 있습니다. 철수와 영희가 찰흙을 빚었는데 철수는 둥그런 모양의 찰흙을 빚었고 영희는 한 부분이 유독 뾰족한 모양의 찰흙을 빚었습니다. 언뜻 보기에 영희의 뾰족한 부분은 더욱 두드러져 보입니다. 그러나 영희가 만든 것과 철수가 만든 것은 모두 같은 찰흙 덩어리입니다. 영희와 철수가 만든 것이 모두 찰흙 덩어리인 것처럼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모두 같은 죄인입니다. 단지 동성애자는 영희가 만든 뾰족한 부분처럼 죄가 더욱 두드러져 보일 뿐입니다.

‘내가’ 동성애자보다 ‘죄를 덜 지어서’ 의인이라는 것도 착각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행위로 의로운 사람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로마서 5:1),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로마서 4:9)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로마서 3:10~12)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자 앞에서만큼은 자신이 죄인임을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심판받아야 할 죄인이 따로 정해져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동성애자의 존재는 위로가 됩니다. 장 보들리야르의 표현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동성애자는 우리 모두가 죄인임을 감추기 위해 거기에 따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