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에 대한 질문과 세계화의 의미

남북의 통일에 대하여 사람등에게 묻는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그리고 그 당위성에 대해서 질문한다면 아마도 몇 가지의 답변들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남북이 통일되어 인구가 늘어나야 내수 등의 진작으로 한국경제가 탄탄해 질 수 있다는 말도 들을 수 있을 것이고 대립의 해소를 통한 국방비의 감소 등으로 경제가 윤택해 질 것이라는 대답 또한 한 자리를 차지할 만한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개인적으로는 가장 공감이 가는 내용인데 그것은 남북한이 통일되어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고 평화가 정착되어 생명의 안전함이 보장될 수 있을 것이라는 답변입니다.
여기서 가지는 의문은 지구가 세계화하고 있는데 민족의 통합이 과연 어떠한 의미를 가지느냐 하는 것이고 경제적으로도 과연 만족할 만한 것일까라는 것과 평화라는 것이  남북간의 정전협정과 평화선언 및 상호간의 활발한 교류를 통하여서도 확보가 가능한 조건들이 아닌가 생각되어진 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계화에 반대하는 입장들도 적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그러한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또한 아닙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초기의 러다이트(luddite)운동에서 보듯이 기계를 파괴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이해되는 것이고 그러한 행동이 기계를 없애는 의미가 아니라 초기 자본주의의 가혹한 근로에 저항하는 의미를 부여 받았듯이  세계화에 반대하는 것 또한 세계화가 무력화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세계화 자체를 반대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즉자적 기계파괴운동에 다름 아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세상의 발전은 기본적으로 생산력의 발전을 전제로 하고 있고 이것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흐름입니다.
기계화나 세계화나 이것 속의 근본적 흐름은 생산력의 극대화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누군가에 의하여 의도하고 기획된 것이 아닌 마치 우주가 진화하는 과정과 흡사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문제는 발전된 기계가 얼마만큼의 생산력을 올리는데 대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인간을 여유롭고 자유롭게 하는가의 과제일 것입니다.
세계화 또한 그것이 가지는 물류의 원활성 자본의 집중과 분산 이를 통한 생산력의 고도화는 여전히 극복되지 못한 일개국주의의 착취를 동반하고 그로부터 가진 국가로부터 그렇지 못한 국가에 대한 수탈을 여전히 잔재로 남겨 부의 흐름을 형성하고 가난의 고착을 의도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생산력을 향상시켜나가는 그리하여 절대적 재화의 양을 확장시키는 진보적 측면의 단초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극복되지 못한 역사의 찌꺼기

한국사람들이 통일을 너무도 당연시하는 현실은 해방이후 극복되지 못한 민족주의에 대한 향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특히 민족주의에 대하여 부정적이어야 할 진보적세력의 한 측면들에 의하여 강하게 추동되고 있음은 이러한 경향에 대한 혐의를 더욱 짙게 만듭니다.
극복되지 못한 역사는 항상 찌꺼기를 남깁니다.
단순하게 이야기 하면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의 잔류물을 남기는데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모두 다 부정적 측면으로 전화되어 버리는 것 같습니다.
우선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예로 들고자 합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죽음은 아버지의 큰 목소리로 아침일찍 나에게 찾아왔습니다.
"박정희가 죽었단다."
사람의 죽음 앞에서 조금은 이상할 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조금 들뜬 목소리였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이 바라던 민주주의 세상에 대한 설레임이 한 인간의 죽음보다 더욱 강하게 찾아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몰론 이러한 저격사건 조차 유신말기의 국민들의 저항에 의한 지배세력 내부의 갈등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민중들의 평가가 충분히 이루어 지기도 전에 죽음으로 인한 종결은 찌꺼기를 남겼습니다.  여전히 새마을의 유령은 지자체 국기봉 위에서 미친듯이 머리를 휘날리며 춤추고 있으며  독재자의 추악함 또한 국가발전이란 업적의 휘장에 뒤덮이어 있습니다.
 전두환의 경우는 조금은 다른 것 같습니다.
물론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때로 그때가 좋았다는 이야기도 하지만 그래도 일반적으론 충분히 독재자로 평가되고 이것이 역사발전의 걸림돌이 되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6월 항쟁이란 민주적 저항에 의하여 축출된 것 때문이라고 보아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가지 다른 의미들을 부여하지만 그리고 부여할 수 있지만 부인하기 어렵게 열강들의 다툼속에서 해방을 맞이한 것은 스스로의 충분한 힘으로 극복하지 못한 역사의 과제를 남겨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친일세력을 등에 업은 이승만 정부의 모습은 바로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박정희라는 인물을 낳아고 경제제일주의의 이명박 정부의 탄생으로 여전히 건재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참으로 질긴 반역의 역사입니다.
이는 아마도 극복되지 못한 민족주의적 과제에 해소하지 못한 민주주의적 숙제가 더해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이것이 역사의 부정적 모습이라면 긍정적 측면에서는 통일운동과 민족주의적 흐름들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아집니다.
민족국가 시설 극복하지 못한 민족적 과제가 낳아놓은 분단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어쩌면 당연한 자발적 흐름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이 항상 정당성을 쟁취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동전의 양면과 야누스의 두 얼굴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당연히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이 민족국가시대가 끝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과연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논리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만약 여전히 그러하다면  세계의 모든 분할되어 있는 민족들이 통일되어야 한다는 논리도 당연시 되어야 할 것이고 역으로 같은 민족이 아니면 통일의 울타리에서 배척되어야 한다는 역의 논리도 성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역사속에서 우려하는 것은 민족통합논리가 바로 이(異)민족에 대한 배척의 사고와 동면의 양면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시오니즘과 팔레스타인 억압, 게르만주의와 유대인 학살, 황민사상과 약소국가 침탈, 중화사상과 소소민족의 억압 등 민족주의와 쇼비니즘은 야누스의 두얼굴 일 뿐입니다. 
그것이 강대국에 대한 약속국의 저항에서는 역사적으로 당위성을 가졌지만 다른 면으로 진화했을 때는 쉽게 다른 얼굴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러한 것을 매우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근 지상에서 회자가가 되고 있는 애국적 민주주의 또한 이러한 민족주의에 대한 아쉬움이 남긴 기형아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학문의 가장 기본된 자세는 의심이라고 합니다.
특히 철학적 사유는 이것에 철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통일도 민족주의도 애국적 민주주의도 모두 의심해볼 여지가 있다고 여겨지고 또한 그것의 변절의 혐의를 예의주시하여야 할 것입니다.
변절은 사물이 변해서 그런것도 있지만 그것은 가만히 있어도 세월이 변해서 그런것도 있습니다.
세월의 변화와 발전이 가만히 있는 나를 지나쳐 가버린 것입니다.
기독교 내 사회참여에 관심있는 분들 중 통일운동을 중시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성결교회의 역사중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역사가 민족주의적 선행으로 자랑거리가 되곤 합니다.
물론 당시에 그것이 종교적 원리주의에 기인해서 그런 것인지 아지면 나름 민족주의적 의식에 기초해서 그런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만 어찌되었건 다른 교단들에게 얼굴을 점더 높이 들수 있는 것중 하나기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민족주의적 전통이든 아니면 그것으로 포장되었던지 간에 그러한 입장은 여전히 동일한 내용으로 의미있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글 속에서의 통일과 민족주의 그리고 교회의 과제

정목사님의  신학적 입장에서도 민족적이거나 통일에 대한 글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통일운동이나 민족주의적 입장의 견지가 의미를 상실해 가고 있다고 생각할 뿐 아직까지는 반동적이지는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발전을 이제 막 그 지점에 있는 우리들을 지나쳐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고민해야 할 때 인것 같습니다.
물론 목사님의 말씀처럼 분단상항은 멸망의 질서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질서의 극복이 반드시 통일이어야 한다는 답이 정답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대전제는 평화의 정착이라고 보아집니다.
통일이 반드시 행복한 세상을 가져다 준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통일은 평화의 정착이라는 대전제의 한 가지 방법일 수 있을 것입니다.
통일의 문제는 민족통합의 문제가 아니라 전쟁의  종결과 평화의 도래라는 좀 더 발전된 문제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남과 북을 국가간으로 본다면 반드시 국가간에 통합이 필요한 이유는 없습니다.
민족간의 문제로 본다면 민족통합은 이제 지나쳐간 가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통일은 오히려 새로운 매우 어려운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의 국가내 두 등급의 국민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안정된 경제체제를 파괴시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북으로 부터 유입되는 값싼 노동력은 남쪽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킬 것이며 남쪽의 흥청거림은 북측에 통합된 국가의 일원으로서의 괴리감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이것은 갈등과 대립의 출발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서로간의 교류와 지속적인 평화정착의 노력과 교섭을 통하여 상호의 발전을 도모해야 할 것이며 그 이후 생산력의 발전이란 측면에서 서로가 통합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EU가 국가 간에 행하고 있는 통합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생산력 발전에 저해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행하는 통일은 앞서 말한 민족주의의 향수를 달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상당한 시간이 걸려서야 진행될 아시아지역의 경제블럭과 통합의 과정과 별반 다를바 없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가져야 할 선교적 책임은 환경, 인권, 반전, 반핵 등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에 평화의 정착이라는 가치가 추가될 수 있다고 보아집니다.
이후 다른 글에서 다루고 싶습니다만 한국교회의 위기는 아마도 이러한 진취적 가치들을 지향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조선시대 부터 전래된 기독교가 봉건체제의 붕괴와 민족국가 형성의 미숙함에 일조하였지만 발전한 자본주의적 문화의 전래로 인하여 발전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당시 기독교는 신앙의 행태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문화적으로는 충분히 발전적이고 진취적이었습니다.
7~80년대를 거처면서도 KNCC의 활동을 통하여 그나마 기독교의 대표적 모습은 진보적인 모양새를 갖추었으며 그러한 그늘아래 사회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젊은 청년들이 모여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사회의 발전은 지금의 내가 변하여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지향하는 이후의 어린 세대들이 지금의 나까지 커올라와 발전하는 것이다.'라고 했던 생각이 납니다.
지금의 기독교가 한기총 등으로 대표되는 보수적 모습들은  새로운 가치를 지향하는 젊은 세대의 영입을 차단하고 있으며 떠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교회 구성원의 고령화는 한국사회가 노령사회로 접어든 것으로 부터 기인한 측면도 있지만 이로인하여 가속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남아있는 청년들이야 있겠지만 더 이상 이후 세대의 발전된 사회를 이끌어나갈 가치를 가진 젊은이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향후 2~30년 후 사회의 트랜드를 이끌어나갈 젊은이들이 과연 교회내에 존재하고 있고 그들이 영입되고 있는가 하고 물음을 던진다면  그렇다고 답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한국교회는 놓여 있습니다.
이런의미에서 매우 근본적으로 보수적이라고 생각되지만 포용의 폭이 상당히 넓은 카톨릭의 환경운동 등 진보적 운동에 대한 관심은 한국카톨릭을 성장시키는 동력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음은 개신교들에게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다시금 한국교회의 위기는 보수화로 부터 오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통일이나 민족 등의 화두는 더 이상 이를 발전하고 있는 사회를 이끌고 갈만한  가치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요원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가치,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한국교회의 발전에 기저를 차지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우리들의 특수한 가치 즉 정전과 평화가 자리잡기를 바랍니다.
통일과 진보의 문제에서 다비아 회원님들의 고민의 단초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