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3
죽을 고비를 넘겼다면, 구원이다.
폭력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면, 해방이다.
일자리를 얻었다면, 이 땅을 살아갈 방법과 의미를 찾은 거다.
무의미로부터, 무능력으로부터, 죽임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
나아가 새로운 생명세계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것,
그것이 구원 아닌가?
예수의 삶, 그가 전한 소식이, 우리를 해방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임을 고백하는 자들,
그런 우리는 예수쟁이다.
이러한 고백에
‘타종교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궤변이 설 자리가 어디 있는가?
하나님이, 예수님이, 성령님이,
예수쟁이들의 허락 없이는 구원하실 수 없다는 말인가?
제발 인간으로서의 분수와 예의를 알자.
제발 신의 대변인 노릇 좀 하지 말자.
신 앞에서,,
동료 인간들 앞에서,,
‘타종교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무책임한 궤변은
예수쟁이 늘오늘을 ㅈㄴㄱ 쪽팔리게 한다.
p.s. 타종교를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 지는,
예수쟁이 늘오늘에게 묻지 마라. 타종교인에게 물어라.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8-10 22:07)
2007.08.16 16:08:29
제가 오프모임을 꼭(?) 가는 이유중의 하나는 온라인에서 핏대올리며 논쟁을 벌이거나 감정쌈까지 했음에도 오프에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첨에는 거의 막말을 하다시피 한 적도 있었고, 지금은 상당히 자제하지만, 정말 막말이 아니라 욕이라도 해 주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온라인에서는 인격과는 상관없이 그렇게 해야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감정쌈이 아님에도 마치 그렇게 비쳐지기도 합니다.
이스턴님이 늘오늘님의 인격이 훤히 들여다 보신다니 도사쯤 되시거나 거의 신의 자리에 가셨나보군요?
(사실 이 글을 쓸까 말까를 엄청 갈등하다가 쓰게 될 만큼 저도 이런 류의 글을 싫어합니다만)
만약에 늘오늘님을 한 번이라도 만나서 얘기해 보신 분은 절대로 이스턴님같은 발언을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인터넷에서는 그럴만 한 경우도 있다는 점을 이해하도록 해 주세요.
물론 저도 이렇게 글쓰기 제한을 받을 정도의 과격한 언어사용은 잘한다고 칭찬할만한 일은 결코 아니며, 가급적 말리고 싶은 사람이니 이스턴님과 큰 입장의 차이는 없겠지만, 제가 타인의 인격을 언급할 정도는 아니기에 이스턴님에게 이러한 말을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저 역시 첨에는 거의 막말을 하다시피 한 적도 있었고, 지금은 상당히 자제하지만, 정말 막말이 아니라 욕이라도 해 주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온라인에서는 인격과는 상관없이 그렇게 해야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감정쌈이 아님에도 마치 그렇게 비쳐지기도 합니다.
이스턴님이 늘오늘님의 인격이 훤히 들여다 보신다니 도사쯤 되시거나 거의 신의 자리에 가셨나보군요?
(사실 이 글을 쓸까 말까를 엄청 갈등하다가 쓰게 될 만큼 저도 이런 류의 글을 싫어합니다만)
만약에 늘오늘님을 한 번이라도 만나서 얘기해 보신 분은 절대로 이스턴님같은 발언을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인터넷에서는 그럴만 한 경우도 있다는 점을 이해하도록 해 주세요.
물론 저도 이렇게 글쓰기 제한을 받을 정도의 과격한 언어사용은 잘한다고 칭찬할만한 일은 결코 아니며, 가급적 말리고 싶은 사람이니 이스턴님과 큰 입장의 차이는 없겠지만, 제가 타인의 인격을 언급할 정도는 아니기에 이스턴님에게 이러한 말을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2007.08.16 17:49:44
올라이브님 인지 올리브 님인지는 잘 몰라도 그런식의 편들기를 할려면 윗 댓글을 쭉 읽어보시면 처음처럼님이 제가 금방 늘오늘 님에게 보였던 태도를 대장님에게 하고 계신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 분은 대장님을 향해 하나님 같이 행동한다는 말과 함께 신약성경의 유대인들과 같다고 하셨더군요
그러면 그 논리 그대로를 따르면 처음처럼 님도 당신의 이런 충고를 받아야겠지요
그런데 왜 그 때는 침묵하시다가 저에게만 이런 식의 글을 남깁니까?
한 편임을 보이시는 겁니까? 먼저 발생된 사건에 대해서 동일한 충고부터 하시죠.
그것이 순리가 아닐까요?
제가 볼 때 당신의 판정은 너무나도 편파적입니다.
그 분은 대장님을 향해 하나님 같이 행동한다는 말과 함께 신약성경의 유대인들과 같다고 하셨더군요
그러면 그 논리 그대로를 따르면 처음처럼 님도 당신의 이런 충고를 받아야겠지요
그런데 왜 그 때는 침묵하시다가 저에게만 이런 식의 글을 남깁니까?
한 편임을 보이시는 겁니까? 먼저 발생된 사건에 대해서 동일한 충고부터 하시죠.
그것이 순리가 아닐까요?
제가 볼 때 당신의 판정은 너무나도 편파적입니다.
2007.08.17 14:29:26
편파적으로 보여서 죄송합니다. 이스턴님!
위의 댓글논쟁이 계속 될 때는 제가 글을 쓰고 싶은 맘을 정말 많이 참고 있을 때입니다.
저의 무절제한 손가락운동에 대해 스스로 제한을 가하면서 쓰고 싶은 것을 억누르고 있었지요.
제가 늘오늘님을 편든 것은 아니라고 언급했지만, 충분히 편파적으로 보일 수 있음을 인정하겠습니다.
왜냐면, 늘오늘님은 그간 직접 대면을 하고 이야기를 하며 어느 정도 상호이해를 가진 반면 대장님은 아직 그런 기회가 없었으니 당연 언급할 내용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대장님에게 다른 언급을 하지도 않았을겁니다.
옹호하지 않은 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고, 제가 늘오늘님에 대해 옹호를 했다면 그 사람에 대한 옹호였지 그의 글쓰기 자체를 옹호한 것이 아닙니다.
저 역시 자제하지 못하고 글을 통해 감정을 쏟아낸 적이 여러번 있었기에 결코 자유로운 입장은 아닙니다.
정용섭목사님과 운영진에 대해 서운한 마음에 제 글들을 다 삭제시키고 분을 삭였던 적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오해의 내용이 이해로 바뀌고 나니 오히려 저의 부족한 부분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겠더라구요.
제가 님에게 오버했다고 하더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단 하나였습니다.
판단할 수 있는 것만 판단하자.
늘오늘님(꼭 늘오늘님만이 아니라 누구든지)의 글쓰기가 예의에 어긋났거나, 논리적이지 못하거나, 내용이 부실
하거나 그 부분을 얘기하면 되는데, 그의 인격이 어떻니 하는 것은 역시 오버한 것이란 말이었습니다.
사실 윗 댓글 중에 끼어들고 싶은 부분은 굉장히 많지만, 중간으로 들어갈 수는 없으니 최근의 님의 글을 보고 제 생각을 말한 것에 불과하오니 너무 괘념치 마시고, 용서해 주시면 안될까요?
위의 댓글논쟁이 계속 될 때는 제가 글을 쓰고 싶은 맘을 정말 많이 참고 있을 때입니다.
저의 무절제한 손가락운동에 대해 스스로 제한을 가하면서 쓰고 싶은 것을 억누르고 있었지요.
제가 늘오늘님을 편든 것은 아니라고 언급했지만, 충분히 편파적으로 보일 수 있음을 인정하겠습니다.
왜냐면, 늘오늘님은 그간 직접 대면을 하고 이야기를 하며 어느 정도 상호이해를 가진 반면 대장님은 아직 그런 기회가 없었으니 당연 언급할 내용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대장님에게 다른 언급을 하지도 않았을겁니다.
옹호하지 않은 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고, 제가 늘오늘님에 대해 옹호를 했다면 그 사람에 대한 옹호였지 그의 글쓰기 자체를 옹호한 것이 아닙니다.
저 역시 자제하지 못하고 글을 통해 감정을 쏟아낸 적이 여러번 있었기에 결코 자유로운 입장은 아닙니다.
정용섭목사님과 운영진에 대해 서운한 마음에 제 글들을 다 삭제시키고 분을 삭였던 적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오해의 내용이 이해로 바뀌고 나니 오히려 저의 부족한 부분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겠더라구요.
제가 님에게 오버했다고 하더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단 하나였습니다.
판단할 수 있는 것만 판단하자.
늘오늘님(꼭 늘오늘님만이 아니라 누구든지)의 글쓰기가 예의에 어긋났거나, 논리적이지 못하거나, 내용이 부실
하거나 그 부분을 얘기하면 되는데, 그의 인격이 어떻니 하는 것은 역시 오버한 것이란 말이었습니다.
사실 윗 댓글 중에 끼어들고 싶은 부분은 굉장히 많지만, 중간으로 들어갈 수는 없으니 최근의 님의 글을 보고 제 생각을 말한 것에 불과하오니 너무 괘념치 마시고, 용서해 주시면 안될까요?
2007.08.23 12:57:18
댓글들 읽느라.. 정말 재밌었습니다. 쌈구경이 제일 재밌는것 같아요(타락한 죄성)..ㅋ
아무튼 늘오늘 님이 제기하신 문제는 '구원'에 관한 문제이구요. 여기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다르니까, 생각이 다른 것을 공격하다 보니 자세와 태도와 감정까지 문제가 되었구요. 극우적 신앙과의 피할 수 없는 마찰을 일으킨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 그러한 전통적 기독교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무리들의 반박의 수위가 고조됨에 따라 이렇게 토론이 흐지부지 마무리 되어서 좀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아주 좋은 토론 주제였고, 결론이 마무리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다른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 조화를 이룰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나는 거기에 대해 왜 이런생각을 하느냐? 이 정도의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데에서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실존의 몸부림을 이해하고 그분들의 아픔을 중보하고 그들의 주장이 틀렸다면, 성령께서 말씀으로 깨닫게 해주시기를 기도하는게 바람직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주장을 몰라서 반박하는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그것들이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주장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왜 못 받아들이는지 이해하고 서로 격려함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늘오늘 님이 제기하신 문제는 '구원'에 관한 문제이구요. 여기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다르니까, 생각이 다른 것을 공격하다 보니 자세와 태도와 감정까지 문제가 되었구요. 극우적 신앙과의 피할 수 없는 마찰을 일으킨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 그러한 전통적 기독교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무리들의 반박의 수위가 고조됨에 따라 이렇게 토론이 흐지부지 마무리 되어서 좀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아주 좋은 토론 주제였고, 결론이 마무리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다른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 조화를 이룰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나는 거기에 대해 왜 이런생각을 하느냐? 이 정도의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데에서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실존의 몸부림을 이해하고 그분들의 아픔을 중보하고 그들의 주장이 틀렸다면, 성령께서 말씀으로 깨닫게 해주시기를 기도하는게 바람직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주장을 몰라서 반박하는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그것들이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주장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왜 못 받아들이는지 이해하고 서로 격려함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2007.08.23 13:52:31
전에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 비슷한 부류의 토론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저도 신앙노선으로 따지자면 극우 골수 꼴통 보수 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위에서도 여러 인격적인 분들이 언급하신 대로 이것을 어떤 자세로 풀어내느냐, 표현하느냐? 이것이 숙제일 것 같습니다. 단순히 '예수천당! 불신지옥!' 이것이 진리다. 이거 왜 안믿냐? 안믿으면 이단이다.. 그러니 따지지 말고 꼭 믿어라! 물론 이렇게 표현하는것이 편하고 아주 강력한 주장이 될 수는 있지만, 이런것은 노방전도할때 심판용의 선포이지요. 토론할때는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 깊이 숙고해 보고 차근차근 논박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감정이 고조되고,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신앙과 마찰을 일으킨다고 느끼실 땐, 아주 극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좀 멀리 내다보면 꼭 그게 그것이 아니었단 사실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구원의 문제이구요. 구원이 단순하게 죽어서 가는 천국의 문제이냐? 삶의 질의 문제인가? 이런 부분에 의문을 제기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인데, 기독교인들만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고,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지 않은가? 그런 하나님은 너무 편협한 하나님이 아니신가? 이렇게 늘오늘 님께서 질문을 제기하신 걸로 사료됩니다.
저는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저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구요. 저는 다비아에서 약간 골통취급하는 축자영감설도 믿습니다. 그리고 대장님이나 코람데오님께서 그렇게 강력하게 주장하시는 예수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음도 믿구요. 오직 예수님만 믿어야 구원받는다 이것을 저도 믿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하나님은 신자들만의 하나님이신가? 위에서 좋은 언급들이 많았는데 그냥 싸움한다고 skip된 표현들이 많은 것 같은데요. 교리처럼 따지고 들자면 또 반발이 있겠지요? ㅎㅎ 암튼 하나님은 악인에게도 은혜를 베푸시고 선인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믿는 자든 불신자든 동일하게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죄인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고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겠죠..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을 머리로 믿고 배운대로 신앙고백하고 이땅에서 대충 육신의 욕망을 위해 치열하게 살다가 죽으면 ... 그래도 예수 믿는 다는 지적 동의와 고백이 있었으므로.. 나중에 죽으면 천국가겠지..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라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 아니었나 싶네요..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위에서 아주 심도 깊은 표현과 의견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그리고 미래. 구약과 신약의 성취. 팔링게네시아, 파루시아 등..이미와 아직의 긴장과 조화등. 엄청나게 깊은 신학적 주제가 아주 가볍게 던져지다 말았네요.
지금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늘오늘님의 고민과 갈등. 그리고 실존의 몸부림. 절대타협할 수 없는 진리의 배타성!! 하지만 진리이신 예수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해결될 것입니다. 진리가 늘오늘님을 자유케 할 것이며, 이후로 늘오늘님은 자유로운 영혼으로~ 자유롭게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귀결되는 문제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 천국의 내재성과 현실성, 장소 공간성, 하나님 나라의 특징, 하나님 나라의 주권, 하나님 나라의 백성등.. 결국 문제는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는 이 성경의 진리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 문제로 향하게 될 수 밖에 없는 필연성!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하신 그분의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특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인간.. 물론 그분의 형상이 타락한 인간속에 존재하느냐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고 라도 하나님은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에 긍휼,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기계로 만드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신격을 닮은 인격체로 만드셨기 때문에 자율성과 독립성, 창조성, 사회성을 가지고 교제하면서 살아가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성경속에서의 신자와 불신자, 하나님의 백성과 아직 하나님의 백성가운데로 돌아오지 못한 자들... 또한 그들에 대한 심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과연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심판인가?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과 반대되는 것은 아닌가? 이런 문제가 대두되겠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순종이 아님을 통해서 이미 이방인 사랑과 구원의 모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잘보든 대충보든 혈통적 순종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계보만 봐도 그러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따르는 이방인, 잡족들도 다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들의 역할을 감당했고, 신약에서도 이방인의 뜰에서 예수님께서 분노하시며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심도 물론 그들이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든 이유도 있겠지만, 유대인의 혈통적 우월성, 선민의식 이런 것들로 인해 이방인의 뜰이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인데 그곳을 그렇게 무시하고 자기들이 장사하는 곳으로 차지해서 만민이 하나님앞에 나오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예수께서 분노하셨다..라고 보기도 합니다. 저는 이 둘다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민을 사랑하시고 모든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의 종교가 어떠하든 민족이 어떠하든 하나님의 통치가운데로 돌아오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하나님은 왜 잔인한가? 인간의 입장에서 너무 잔인하고 끔찍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이부분에 걸려서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르다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 부분때문에 신앙을 저버린 사람도 있음을 생각해 볼때 결코 쉬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구약에서도 그분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보여주셨고, 지금도 동일하게 그분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문제로 넘어가보았을때, 왜 인간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안 믿었을까요? 하나님을 마음속에 두기를 싫어하고, 누군가의 통제를 받는 것을 싫어하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자신이 원하는것, 내가 하고 싶은것, 신조차도 내가 섬기고 싶은 신을 섬겨야지. 인간과 교제하고 인간과 대화하는 인격적인 신은 왠지 나약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강력한 파워로 인간을 지배하고 억누르고 탄압하고 자연 만물을 통치하는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신의 모습은 인간이 섬길만하고... 아무튼.. 온 천지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지식이 없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하나님을 알리시길 원하셨고, 이스라엘 정복전쟁 가운데서도 모든 사람들이 다 멸족당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구원계시에 필요한, 또한 하나님을 계시하기에 필요한 부분만 함축적으로 기록되었기에 그 외의 경우는 기록이 안된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가령 라합도 라합을 통해 라합의 가정이 구원받았는데 라합의 이름만 기록되었지 가족 5명이 구원받았는지 일가 친족 100명이 구원 받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추측은 해볼 수 있을 것이고 유대인들의 다른 기록을 참고할 수는 있을 겁니다. 중요한 사실은 정복전쟁가운데서도 그 전쟁 자체가 하나님을 계시하는 수단이었고, 그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통치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태어나고 죽는것은 사람의 힘으로 조절 못합니다.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전쟁에서 죽을지, 늙어죽을지, 굶어죽을지, 병들어 죽을지, 사고를 당해 죽을지, 살인을 당할지, 자살하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누구나 죽는다... 이것은 성경시대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죽습니다. 이런 저런일들로 죽습니다. 사람이 죽는다고 하나님은 잔인하시다...누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이 아닙니까? 죽는 것은 사람이 택한 것이고 어쩔 수 없이 처한 운명이라면 이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구원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태어난 지방의 전통종교 힌두교, 불교, 이슬람을 찾습니다. 내가 믿는 신이 구원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죽을 운명에서 구원해 주실 분은 예수님 한분이라고 하나님이신 자신께서 그렇게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한것이다. 믿는 자는 이렇게 고백할 수 도 있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구원의 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여정가운데 있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믿기로 택한 것 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도 인간들이 하나님의 교제속으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통치안으로 돌아오기를 기뻐하셨고 그래서 니느웨의 회개를 통해,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옴을 통해 이스라엘,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만물, 모든 우주, 모든 만민의 하나님이심을 알리신 것입니다.
지금도 늘오늘님의 주장대로, 하나님은 신자든 불신자든 은혜를 베푸시고 통치하시고 다스리십니다.
다만 우리의 눈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택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삶의 질이 변하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며, 구원의 여정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고 죽을때... 물론 그분이 다 아신다할지라도 그분의 마음은 얼마다 더 아프실 것이며, 얼마나 더 애가 타겠습니까? 말을 듣지 않을때 매로 다스리는 부모의 심정이 자녀는 부모가 섭섭하고 날 사랑하시지 않는가? 잔인한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부모의 심정은 자녀가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라고 사랑으로 견딜수 없는 마음, 자녀의 고통보다 더 쓰라린 마음을 가지고 때리는 것입니다. 이미 그것은 십자가의 형벌을 통해 대신 매맞으시고 대신 죽임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강력하게 확인 되었다고 믿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잔인하다 할 수 있습니까?
성경의 성취 이후의 만인구원설... 이것은 그때 가봐야 알 수 있는 사실이고,
우리는 구원의 여정가운데 이미 구원받아 신자의 삶이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거나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긴장을 늦추지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서도 몸부림 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논의는 뒤에 추가로 더합시다. 두서없이 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튼 구원의 문제이구요. 구원이 단순하게 죽어서 가는 천국의 문제이냐? 삶의 질의 문제인가? 이런 부분에 의문을 제기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인데, 기독교인들만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고,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지 않은가? 그런 하나님은 너무 편협한 하나님이 아니신가? 이렇게 늘오늘 님께서 질문을 제기하신 걸로 사료됩니다.
저는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저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구요. 저는 다비아에서 약간 골통취급하는 축자영감설도 믿습니다. 그리고 대장님이나 코람데오님께서 그렇게 강력하게 주장하시는 예수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음도 믿구요. 오직 예수님만 믿어야 구원받는다 이것을 저도 믿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하나님은 신자들만의 하나님이신가? 위에서 좋은 언급들이 많았는데 그냥 싸움한다고 skip된 표현들이 많은 것 같은데요. 교리처럼 따지고 들자면 또 반발이 있겠지요? ㅎㅎ 암튼 하나님은 악인에게도 은혜를 베푸시고 선인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믿는 자든 불신자든 동일하게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죄인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고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겠죠..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을 머리로 믿고 배운대로 신앙고백하고 이땅에서 대충 육신의 욕망을 위해 치열하게 살다가 죽으면 ... 그래도 예수 믿는 다는 지적 동의와 고백이 있었으므로.. 나중에 죽으면 천국가겠지..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라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 아니었나 싶네요..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위에서 아주 심도 깊은 표현과 의견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그리고 미래. 구약과 신약의 성취. 팔링게네시아, 파루시아 등..이미와 아직의 긴장과 조화등. 엄청나게 깊은 신학적 주제가 아주 가볍게 던져지다 말았네요.
지금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늘오늘님의 고민과 갈등. 그리고 실존의 몸부림. 절대타협할 수 없는 진리의 배타성!! 하지만 진리이신 예수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해결될 것입니다. 진리가 늘오늘님을 자유케 할 것이며, 이후로 늘오늘님은 자유로운 영혼으로~ 자유롭게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귀결되는 문제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 천국의 내재성과 현실성, 장소 공간성, 하나님 나라의 특징, 하나님 나라의 주권, 하나님 나라의 백성등.. 결국 문제는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는 이 성경의 진리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 문제로 향하게 될 수 밖에 없는 필연성!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하신 그분의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특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인간.. 물론 그분의 형상이 타락한 인간속에 존재하느냐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고 라도 하나님은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에 긍휼,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기계로 만드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신격을 닮은 인격체로 만드셨기 때문에 자율성과 독립성, 창조성, 사회성을 가지고 교제하면서 살아가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성경속에서의 신자와 불신자, 하나님의 백성과 아직 하나님의 백성가운데로 돌아오지 못한 자들... 또한 그들에 대한 심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과연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심판인가?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과 반대되는 것은 아닌가? 이런 문제가 대두되겠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순종이 아님을 통해서 이미 이방인 사랑과 구원의 모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잘보든 대충보든 혈통적 순종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계보만 봐도 그러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따르는 이방인, 잡족들도 다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들의 역할을 감당했고, 신약에서도 이방인의 뜰에서 예수님께서 분노하시며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심도 물론 그들이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든 이유도 있겠지만, 유대인의 혈통적 우월성, 선민의식 이런 것들로 인해 이방인의 뜰이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인데 그곳을 그렇게 무시하고 자기들이 장사하는 곳으로 차지해서 만민이 하나님앞에 나오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예수께서 분노하셨다..라고 보기도 합니다. 저는 이 둘다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민을 사랑하시고 모든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의 종교가 어떠하든 민족이 어떠하든 하나님의 통치가운데로 돌아오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하나님은 왜 잔인한가? 인간의 입장에서 너무 잔인하고 끔찍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이부분에 걸려서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르다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 부분때문에 신앙을 저버린 사람도 있음을 생각해 볼때 결코 쉬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구약에서도 그분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보여주셨고, 지금도 동일하게 그분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문제로 넘어가보았을때, 왜 인간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안 믿었을까요? 하나님을 마음속에 두기를 싫어하고, 누군가의 통제를 받는 것을 싫어하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자신이 원하는것, 내가 하고 싶은것, 신조차도 내가 섬기고 싶은 신을 섬겨야지. 인간과 교제하고 인간과 대화하는 인격적인 신은 왠지 나약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강력한 파워로 인간을 지배하고 억누르고 탄압하고 자연 만물을 통치하는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신의 모습은 인간이 섬길만하고... 아무튼.. 온 천지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지식이 없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하나님을 알리시길 원하셨고, 이스라엘 정복전쟁 가운데서도 모든 사람들이 다 멸족당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구원계시에 필요한, 또한 하나님을 계시하기에 필요한 부분만 함축적으로 기록되었기에 그 외의 경우는 기록이 안된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가령 라합도 라합을 통해 라합의 가정이 구원받았는데 라합의 이름만 기록되었지 가족 5명이 구원받았는지 일가 친족 100명이 구원 받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추측은 해볼 수 있을 것이고 유대인들의 다른 기록을 참고할 수는 있을 겁니다. 중요한 사실은 정복전쟁가운데서도 그 전쟁 자체가 하나님을 계시하는 수단이었고, 그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통치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태어나고 죽는것은 사람의 힘으로 조절 못합니다.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전쟁에서 죽을지, 늙어죽을지, 굶어죽을지, 병들어 죽을지, 사고를 당해 죽을지, 살인을 당할지, 자살하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누구나 죽는다... 이것은 성경시대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죽습니다. 이런 저런일들로 죽습니다. 사람이 죽는다고 하나님은 잔인하시다...누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이 아닙니까? 죽는 것은 사람이 택한 것이고 어쩔 수 없이 처한 운명이라면 이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구원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태어난 지방의 전통종교 힌두교, 불교, 이슬람을 찾습니다. 내가 믿는 신이 구원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죽을 운명에서 구원해 주실 분은 예수님 한분이라고 하나님이신 자신께서 그렇게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한것이다. 믿는 자는 이렇게 고백할 수 도 있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구원의 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여정가운데 있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믿기로 택한 것 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도 인간들이 하나님의 교제속으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통치안으로 돌아오기를 기뻐하셨고 그래서 니느웨의 회개를 통해,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옴을 통해 이스라엘,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만물, 모든 우주, 모든 만민의 하나님이심을 알리신 것입니다.
지금도 늘오늘님의 주장대로, 하나님은 신자든 불신자든 은혜를 베푸시고 통치하시고 다스리십니다.
다만 우리의 눈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택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삶의 질이 변하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며, 구원의 여정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고 죽을때... 물론 그분이 다 아신다할지라도 그분의 마음은 얼마다 더 아프실 것이며, 얼마나 더 애가 타겠습니까? 말을 듣지 않을때 매로 다스리는 부모의 심정이 자녀는 부모가 섭섭하고 날 사랑하시지 않는가? 잔인한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부모의 심정은 자녀가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라고 사랑으로 견딜수 없는 마음, 자녀의 고통보다 더 쓰라린 마음을 가지고 때리는 것입니다. 이미 그것은 십자가의 형벌을 통해 대신 매맞으시고 대신 죽임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강력하게 확인 되었다고 믿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잔인하다 할 수 있습니까?
성경의 성취 이후의 만인구원설... 이것은 그때 가봐야 알 수 있는 사실이고,
우리는 구원의 여정가운데 이미 구원받아 신자의 삶이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거나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긴장을 늦추지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서도 몸부림 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논의는 뒤에 추가로 더합시다. 두서없이 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