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공동선> 2009년 5&6월 호에 실린 것입니다. 혼자 읽기에 너무 아쉬워서 제가 윤문길 편집장님께 부탁을 드렸더니 공동선 홈피에 올리심과 더불어 퍼가기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당부대로 출처를 밝혀드립니다.
http://www.comngood.co.kr/article_view.htm?selected_no=692&PHPSESSID=e5c5eb83bc68b17299d45e06b365dfda
다비안을 위하여 좋은 글 읽기를 허락해 주신 윤문길 편집장님께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신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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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과학에게 자리를 내주는가?

신재식 : <호남신학대학교> 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장대익 : <동덕여자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과학을 가르치고 있다.

장대익: 최근 교황 베네딕트 16세가 아프리카 순방 중 “에이즈 방지를 위해서는 콘돔을 보
급하는 게 별 효과가 없다. 성에 대한 도덕적인 회복이 더 중요하다”며 콘돔 보급에 굉장
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었습니다. 그 때문에 난리가 났었죠? 에이즈 환자의 70%를 아프
리카가 차지하고 있고, 카메룬은 70%가 에이즈 때문에 죽어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무책임
한 발언을 했다며 영국의 잡지 <레딕>에서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유럽의 어느 국가에서
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반대하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과학적인 사실들에 대해서 종교적
인 교리 때문에 사실을 무시하거나 무지한 상태를 보이는 건 종교가 유통기한이 지난 게
아니냐? 이런 의미에서 과학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종교를 다시 한 번 바라보는 일이 매우
필요하다고 봅니다. 가톨릭에서는 1992년까지 지구가 태양을 불법적으로 돌았습니다.

1992년에 교황청이 갈릴레이를 완전히 사면했습니다. 종교가 ‘우리는 인간의 삶에 가치
와 의미를 준다. 좋은 일을 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과학은 언터처블Untouchable이 아
니라 개입해야 한다는 거죠. 아프리카에서는 교황 대신에 콘돔을 달라는 거죠. 지금 이 순
간에 과학과 종교와의 정말 진지한 대화가 필요하고 서로의 도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
니다. 신학자 입장에서 얘기를 해주시죠.

신재식: 종교가 과학에 대해서 딴죽을 걸기 시작하는 배경을 살펴봐야합니다. 베네딕트
16세의 발언은 굉장히 민감한 이야기입니다. 최근 과학계가 “종교를 과학적 관점에서 한
번 해명을 해보자”는 이야기들을 하고 특별히 진화론적 관점에서 또는 자연주의적 관점에
서 종교를 해명하려는 시도들이 계속 있어왔지요. 대표적인 사람이 <만들어진 신>의 리
처드 도킨스이고 다니엘 데닛, 에드워드 윌슨, 스콧 에틀란 등 상당수 진화론을 수용하고
있는 자연주의 과학자들이 종교를 순수하게 자연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종
교계에서는 감정적으로 뒤틀릴 수는 있을 거예요. 종교인들이 ‘과학이 과연 종교를 적절
하게 해명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는 것이 하나의 축이고요. 다른 하나는
과학에서 나왔던 특정한 성취들이 종교를 향해서 끊임없이 질문을 제기하는 경우입니다.

몇 년 전에 고등학교 선생님이 이런 전화를 하더군요. “복제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
까?” 간단히 대답을 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지요. ‘복제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없을까?’ 에 대해서 대답을 하려면 도대체 인간이 무엇이고 복제가 무엇인가 그리
고 구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얘기를 해야 되는 것이거든요. 구원이 무엇인가 하는 것
은 신학 속에서, 기독교 속에서 2000년 간 만들어져온 정답 비슷한 게 있어요. 인간이 무
엇인가에 대해서는 생물학 쪽에서 얘기하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받아들이는 내용도
있고요. ‘복제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들고 나오면 기독교 전통 내에
서의 답이 전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존에 있었던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구원이 무엇
인가에 대한 논의를 기반으로 해서 복제라는 것이 어떠한 특성을 갖는 것인가. 그리고 그
게 새로운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어떤 위치를 갖는가. 이런 얘기를 다 해야 합니
다. 종교 입장에서는 자연과학의 발전으로 인해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질문들이
제기되는 거예요. 자연스레 과학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요. 역사적으로
보면 종교와 과학이라는 것이 중세 이후 가톨릭교회가 서구에서 지식을 거의 독점하다시
피 해왔기 때문에 자연과학에 대한 것도 신앙에 대한 탐구와 분리되지 않는 상황이었거든
요. 과학 혁명 이후에 전문 과학자들이 등장하고 과학의 분야가 확립되면서부터 과학이
종교로부터 독립선언을 하고난 300년 후에는 과거에 종교가 주연, 과학이나 자연철학이
조연이었던 상황에서 완전히 바뀌었거든요. 과학이 독립변수가 되고 종교가 종속변수가
되어버리는 상황에 처한 거죠. 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 과학의 논의들, 과학기술의 적용
에서 일어났던 몇 가지 부작용들 그리고 과학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했던 자연철학이
나 과학철학들과 과학에 대해서 좀 더 많은 지식을 얻게 되면서 과학이 전부가 아니라는
자신감 비슷한 것도 생겼지 싶어요. 몰라서 당했었는데 이제는 대답해 줘야할 수많은 질
문들이 다시 제기되니까 어쩔 수 없이 대답해주면서 종교 입장에서는 일종의 리턴매치에
들어간 거죠. 그런데 종교는 신학과 과학을 같이 공부한 일부의 신학자 과학자 그룹을 비
롯해서 과학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신학자들이 주로 리턴매치를 들어가는 상황이고 과학
자들은 특별히 진화론자 가운데서 자연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 ‘종교를 코너까지
쫙 밀어붙이자, 아예 링 밖으로 몰아내자는 입장’인 것 같습니다.

장대익: 종교가 계속 코너에 몰린 것은 사실이고 이제 상황이 조금 바뀐 것 아니냐고 지적
을 하셨는데, 종교가 과학에게 무슨 얘기를 시작하는 순간 과학계에서는 확인 사살 비슷
한 걸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이겼다가 졌다가 다시 한 번 이겼다 하는 게
아니라. 지금은 리턴매치가 아니라 이제 한 번 쳐봤는데 카운터펀치가 들어간 거죠. 최근
에 일어나고 있는 이른바 도킨스 등을 중심으로 한 무신론 운동이 무시할 수 없는 지성운
동이라고 봅니다. 일반적으로 무신론자들은 잘 모이지 않거든요? 워낙 자신들이 잘났다
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모여서 운동 같은 것을 하지 않습니다. 도킨스의 책에도
나오죠? ‘원래 무신론자들은 고양이와 같아서 단독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최근 몇 년 사이
에 기라성 같은 대가들이 다른 이유가 아닌 종교 때문에 모였어요. 흐름이 심상치 않습니
다. 무신론 전통은 고대나 근대로 가도 다 있었죠. 과거의 무신론은 철학에 기반을 뒀고
요, 개별적인 작업을 한 거죠. 최근에 무신론의 입장에 선 과학자들이 뭉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리턴매치가 아니라 종교가 코너에 몰려서 그로기 상태에 있었는데 드디어 한 번
에 완전히 보낼 수 있는 그런 시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신재식: 과학적 사고나 경험주의적 관념에 근거해서 무신론을 전개한다는 것이 그리고 무
신론 운동이 체계를 갖추어서 단체로 하는 행동이 지성사회에서 굉장히 독특한 사건이며
특별하다는 것은 맞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이 사람들을 그렇게 묶었느냐? 최근 무
신론 운동의 대척점에는 근본주의적 사고에 기반을 둔 창조과학과 지적 설계운동이 있습
니다. 1970~80년대에 한국정치사에서의 양 김의 관계와 종교와 과학의 관계가 비슷하다
고 봅니다. 창조과학이나 지적설계에 관련된 기독교의 창조론자들이나 근본주의들이 무
신론을 살려주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둘 다 기반은 기독교라는 서구문명 속에서 태어
난 이란성 쌍생아 정도로 생각을 하는데요.

장대익: 양 김의 관계, 아사다 마오와 김연아의 관계는 하나가 죽으면 하나가 뜨는 것 아
닙니까? 실력이 비슷해야지 이렇게 얘기할 수가 있는 건데. 무신론 운동이 왜 생기는 됐는
지 역사적으로 추적하다보면 창조론 운동이 활발해지니까 ‘더 이상 이렇게는 안 되겠다.’
이렇게 해서 ‘더 이상 이렇게 가다가는 인류 전체적인 손해다. 지식이 퇴보한다.’ 이런 생
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뭉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라이벌 관계이냐. 다시 말해서
창조론자들이 어떤 굉장히 많은 데이터들을 가지고 있고 무언가 할 얘기들이 굉장히 많으
냐. 그건 아니라는 거죠. 창조론 때문에 무신론이 나온 건 맞지만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경쟁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신재식: 종교와 과학은 라이벌이기 전에 서로의 생존을 담보해주는 공생 관계라고 생각
을 해요. 만약에 종교가 완전히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무신론 운동도 의미가 없어지는 거
예요. 도킨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보수 기독교나 지적 설계론자들에 대한 반대 대응으
로써 나타나고 있고요. 서양사회나 한국사회에서 종교와 무신론, 또 특정종교와 무신론
의 관계로 봤을 때 이게 50 : 50의 담론구조냐? 그건 아니거든요. 무신론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서 공감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퍼센티지로 따진다
면 훨씬 적다고 생각되고 영향력 면에서도 동등하다고 보진 않습니다.

장대익: 구체적으로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해 얘기해 보죠. 한국의 개신교는 진화라는 것
의 ‘진’자만 꺼내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입니다. 가톨릭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진화는
가설 이상’이라고 해서 마치 진화론을 수용하는 듯 했지만 소개가 안 된 교황의 뒷말에 무
게를 실어보면 더 재밌어요. 뒤에는 ‘영혼은 그렇게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가톨릭
은 굉장히 애매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 같아요. 반쪽짜리 진화론을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신체는 진화하지만, 인간의 영혼만큼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건데
진화론을 통째로 받아들이면 그런 얘기가 논리적으로 옳지 않죠. 근대 이후로 연구자들
은 영혼이라는 것을 뇌의 작용에 불과하다고 얘기를 하거든요? “영혼은 있을 수도 있는
데 그건 뇌의 작용이다.” 물질적으로 환원해서 설명을 합니다. 영혼이라는 걸로 신과 소통
을 한다면 뇌 속 어딘가에 분명히 베이스가 있어야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보면 가톨릭
이 진정한 의미에서 진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거죠. 개신교는 전혀 받아들이는 입장이 아
닌 것 같고. 불교에서는 진화를 수용한다고 말하지만 윤회설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진
화와 충돌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스님한테 여쭤봤더니 스님은 윤회설을 믿지
않고 진화를 믿는다고 하시더라고요. 불교, 가톨릭, 개신교 등의 종교는 진화에 관해서는
불편한 점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신재식: 한국 사회가 종교다원사회잖아요? 갤럽조사를 보면 불자들 가운데서 윤회를 부정
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아요. 개신교인들 가운데도 윤회를 믿는 사람들이 10%가 넘어
요. 여러 종교의 신념체계가 뒤죽박죽 섞여있어요. 자기 종교의 신념체계에 충실한 게 아
니라 자기 나름대로 재구성하는 것일 거구요. 영혼이 창발적 현상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영
혼이라는 것을 실체적으로 아니면 현상적으로 설명할 거냐에 따라 다르며 기독교 신학 전
통에 다 있어요. 영혼이 분명한 실체를 가지고 있고 인간의 신체와 구분되는 기능과 영역
을 가지고 있다는 흐름이 주류였어요. 또 다른 흐름은 장 선생께서 얘기하셨듯이 영혼이
라는 것이 인간의 어떤 명령을 수행하는 지식적인 의미에서, 기술적인 의미에서 사용되
고 있죠. 후자로 설명하자면 인간의 영혼을 얘기하는 데에는 좀 어려움이 덜할 거라고 생
각을 하고요. 순수하게 두뇌의 시냅스 차원에서 시냅스의 네트워킹 과정 속에서 영혼을
설명하는 것이죠. 그걸 완벽히 설명할 수 했냐는 문제는 좀 다른 거라고 하고요. 상위 레
벨의 수준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하위 레벨의 수준에서 설명할 수는 있지만 완벽히 설명
할 수 있다는 것에서는 저는 동의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영혼을 과학으로 완벽히 설명
할 수 없다고 봅니다.

장대익: 한국 사회에서는 창조진화논쟁을 할 만큼, 진화론조차도 제대로 소개가 되고 있
지 못합니다. EBS에서 설문조사를 했는데 한국 사람들은 40% 정도가 진화를 믿지 않아
요. 진화론을 안 믿는 첫째 이유가 진화론이 과학적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그 다음이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안 믿는다는 거예요. 진화론이 과학적 사실이 아니기 때
문에 안 믿는다는 통계를 보고 놀라며 굉장히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창조진화논쟁을 할
만큼, 진화론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게 아주 큰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과학과 종교에
대한 논쟁보다 더 중요한 건 과학 교육에 대한 문제라고 봅니다.

신재식: 저도 그 프로를 보았는데 그 다음 설문에서 나온 게 “학교에서 창조론과 진화론
을 함께 가르쳐야한다는 주장이 60%”나 나왔어요. 이걸 과학자의 입장에서 보거나 기독
교 외의 종교의 입장에서 보자면 기가 막힌 일이거든요. 창조론 담론을 주로 계승하고 있
는 게 개신교의 일부지만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에서 동의하고 있는 상황인데, 한국 사회
에서 25%가 넘지 않거든요? 진화론이 소개가 잘 안 되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개인적으
로 동의합니다. 한국에서 자연과학 일반에 관한, 아주 기초적인 것에 대한 소개가 사실상
제대로 되지 않고 있고요. 신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신학이 제대로 소개가 되지 않는 것도
고민이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사실상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보수주의적인 성향이라
고 하는 것은, 특별히 창조과학류의 근본주의적 성향이 한국 교회 안에서 막강한 영향력
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 신학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흐름과 오랜 전통들이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선포되고 있는 대부분의 신학들이 언제 만들어
졌냐 하면 과학혁명 이전에 만들어진 신학이죠. 한국 교회의 현장 속에서 근대 신학이나
현대 신학이 제대로 선포되지 않은 거예요. 서구에서는 역사적 흐름에 따라 순서대로 경
험하면서 만들어낸 건데 한국에는 한꺼번에 들어오면서 순서에 관계없이 문제의식은 다
탈락되고 답안 형식만, 답안지만 들어온 케이스고 그 답안지조차도 순서대로 들어온 게
아니라 섞여서 들어온 케이스고요. 종교와 과학이 링 위에 올라붙었는데 양쪽에 올라선
선수들이 뛸 만큼 아직 충분히 준비가 안 되어있는 상황이고 선수 자격들도 없는 사람들
이 나서서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상황이고, 자기가 이 링 위에 왜 올라왔는지도 제대로 파
악이 안 된 상태라는 거죠.

장대익: 제가 예전에 진화를 공부하는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복음과 신앙>이라는 잡지
에 ‘진화론과 기독교를 조화시켜볼까’하는 입장에서 연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돌 맞을
각오하고 썼는데 격려를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창조과학회의 멤버들이나 지적설계론자
들은 침묵했어요. 한 1년간 침묵을 하다가 반론을 제기하기에 바로 답변을 하고 그 다음
논쟁에서는 빠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몇 년 후에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위험한 발언일
지는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는 신 선생님이 거의 무신론자로 보이기도 하거든요. 다 인정
하시는 것처럼 보이면서 유신론자로 남아계시고. 진화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어
떻게 유신론자의 작업을 하시는 지. 종교와 진화는 물과 기름이라고 보는데 왜냐하면 유
신론적 관점은 ‘정신이 먼저 있고, 정신에서 물질이 나왔다’는 건데 그러니까 위에부터의
창조를 얘기할 수밖에 없어요. 유신론의 핵심입니다. 진화론은 뭐냐면 ‘어떻게 덜 복잡한
것에서 자연적인 원인에 의해서 더 복잡한 것이 나왔는가?’ 라는 걸 묻는 것이거든요? 제
박사 과정 지도교수셨던 다니엘 데닛은 “창조론, 유신론을 스카이훅Skyhook이라 하고,
무신론, 진화론을 크레인Crane이라”고 비유를 하는데요. 진화론이 함의하고 있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양립불가능하다.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그런 신이라고 하는 것이 존
재한다면 그건 인간보다 더 대단한 존재잖아요, 신은 인간을 만들 수도 있는 존재이니까.
하지만 진화론적인 입장에서 보면 신은 인간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덜 복잡
한 것에서 더 복잡한 것이 나오는 자연적 메커니즘을 알게 된 것이 150년 전이고, 그 이후
로 엄청난 혁명이 일어났는데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도대체 유신론이 가능할까하
고 묻고 싶습니다. 신 선생님께서 신학자들이 300년 동안 과학에 대항해왔는데 그 대항에
대한 우리의 수입은 그야말로 도떼기시장에서 싸우는 거였다고 얘기하셨는데 과학에 대
한 대응을 인문학 계열에서 종교를 포함한 신학자들이 했다고 하는데 뒷북 친 것에 불과
한 거 아닌가요. 도대체 무슨 새로운 제안을 한 건지요. 200년의 역사를 보면 새로운 건
다 과학이 제기한 거고 그것을 시간차를 두고 헉헉대며 소화한 게 인문학인데 그 다음의
상황에서 인문학이 무슨 대단한 것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얘기를 하는데 그 실체가 과연 무
엇인가요.

신재식: 유신론자가 진화론을 제대로 수용하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무신론으로 갈 수 밖
에 없는 것 아니냐고 하셨는데 유신론을 어떻게 규정하는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
니다. 스카이훅과 크레인으로 비유를 하는 것이 재미있고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특정한 사물을 설명할 때 유신론적 접근 방식은 이미 전제를 두고 연역적 사고를 통
해 사물을 설명한다는 얘기로 받아들이고 크레인과 같은 경우는 밑에서 경험을 통해서 자
연주의적 설명을 한다는 것으로 두 가지를 방법론적인 차이의 문제로 설명하는데 과연 그
게 유신론을 적절하게 이해하는가의 문제에 있어서 생각이 좀 다릅니다. 유신론이라고 하
는 것이 ‘단순하게 정신이 물질보다 앞선다’ 이런 의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신론은 사
물을 이해하거나 현상의 의미를 찾거나 무엇을 하든 신이라는 전제를 두고 설명하며 해석
하는 전체의 세계관의 틀을 말하는 것인데요. 그렇다면 신은 도대체 어떤 존재냐가 문제
라고 봅니다. 대부분의 신에 대한 이해가 흔히 창조를 얘기할 때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인
격신이면서 그 존재가 사람의 모습을 한 신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신학에서 그게
가장 강력한 이미지죠. 그런데 신학자입장에서 보면 신을 인격신의 모습으로 또는 사람
을 형상화하는 모습으로 설명하는 것은 사람이 신학을 하기 때문에 사람이 고백하기 때문
에 문제지, 신이라고 하는 존재자체를 인격신이나 특정한 사물의 모습으로 규정할 수 없
습니다. 오히려 현대신학에서는 신 그 자체를 인격성을 넘어서는 것으로 설명하려는 전통
이 강합니다. 신을 인격신의 모습이나 특정한 사물로 규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가톨
릭 신학 전통에 있어도 부정신학에서도 나올 수 있었던 것이죠. 저는 신 자체를 에너지
로, 존재의 근거 정도로 이해한다면 진화론과 얼마든지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합
니다. 다만 신이 인간의 모습에서 구체적인 특정시점에서 구체적인 사물을 창조해 냈다
고 생각하면 문제지만 그런 신의 얘기가 기독교 유신론이 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
니다.

장대익: 신 선생님의 그런 신관은 주류 가톨릭이나 기독교의 신관하고는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저도 그런 정도의 신이라면 예컨대 인격적인 신이 아니고 예컨대 우주의 법칙
과 같은 혹은 궁극적 실재 정도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동의할 수 있습니다.

신재식: 신을 우주의 궁극적 실재나 우주를 지배하는 특정한 원리라고 정의 내리는 것 자
체가 기독교신학 안에 있어 왔거든요. 오히려 인격신의 모습으로 설명하거나 구체적인 사
물로 설명하는 것은 일종의 방편이라고 설명합니다. 사실 종교언어가 늘 은유적인 용법으
로 사용되었다는 것,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자기들의 종교적 경험에 가장 부합하기 때문
에 인격신의 모습으로 한 신에 대한 설명들이 일반화된 것 같지만 실제 기독교신학 전통
에서는 오히려 훨씬 폭넓게 있다는 것입니다. 신학이나 종교는 뒷북치는 것이 아니라 원
래 그런 것이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원래 신학이라는 것이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 경험
된 사건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고 나갈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지요. 결국 신앙이나 신학
이 작동하는 체계는 벌어진 사건의 해석이 기본적이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화현상 속에
서 인간의 경험 속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 특정한 의미로 해석하고 형상화된 세계관
을 가르쳐서 그것을 지칭해서 그것을 종교라고 부르고 신앙이라고 부른 것이지, 딱 둘로
갈라서 여기서부터는 과학의 영역, 자연철학의 영역이고 여기서부터 종교의 영역이라는
아니라는 거죠. 지금까지의 철학은 모든 것을 해석해 왔는데 이제는 해석하는 것이 아니
라 방향을 정하고 밀고 나가야 한다는 그런 경우에 있어서는 최근의 신학자들 가운데서
나 해방신학에서 그런 말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제가 보는 신앙의 본질적인 모습 속에서
는 종교담론 자체는 원래 뒷북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과학은 글쎄요, 설명을 다 해주는
것 알아요. 그런데 내가 살고 싶은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 약하고 과학이 내가 살고 있는
세계는 설명하는데 내가 살아가고 싶은 세계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그
게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갈증입니다.

장대익: 가치의 문제와 종교의 유용성 문제로 넘어오네요. 중세 때는 모든 것을 종교가 가
지고 있었다면 과학이 거기서 분가를 하고 어떻게 보면 종교 입장에서는 배신이죠. 그 이
후과학이 주연배우가 되어 흘러왔고 거기에 대해서 신학이 리턴매치로 대응하는 것이라
고 말씀을 하셨는데, 한 가지 사실은 정말 중요한 이슈가 과학이 사실의 영역을 다 가져
왔어요. 종교인들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해야 할 사실,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연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자연현상에 대한 이해와 설명은 과학이 쥐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지요. 그것은 이미 다 내 준거예요. 그런데 여전
히 지금 종교가 부여잡고 여전히 이것은 우리 거다, 이것은 뺏어갈 수 없다고 하는 부분
은 가치와 의미의 영역입니다. 신 선생님 말씀처럼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지만 어떤 세상
을 살아가야하는지를 얘기해주지 못한다.” 당초 과학계에서는 그것을 뭐라고 얘기 했냐
면 “그래, 그것은 가치의 영역이니까 우리는 손 댈 수는 없다.” 그런데 20세기 초반에 들어
와서 논리 실증주의 같은 철학이 들어오면서 “그런 세계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무의미한 세계다.” 이렇게 얘기를 해왔고 20세기 중 ? 후반에는 “오히려
그런 것이 더 중요하다, 포스트모더니즘 영향 때문에 그런 것이 중요하다, 과학이 다할 수
는 없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무신론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정신은 그 언명에
대해서 기본적인 도전을 하고 있어요. “그동안 우리가 사실의 영역을 가져왔다, 너희들을
인정하듯이, 하지만 너희들은 가치와 의미를 꼭꼭 부여잡고 있는데 사실 그거 독점하지
마라, 너희들이 지금까지 독점해 왔지만 독점해서도 안 되고 독점할 근거도 없다”는 얘기
를 해요. 왜냐하면 일단 가치라는 것이 사실과 완벽히 분리되거나 절연된 것이 아니라, 사
실적인 측면이 있고 거기에 가치적인 측면이 쌓이는 것인데 이미 기독교적 세계관 종교적
인 세계관은 이미 사실로써 가치를 잃었다, 이미 사실로써 유통기한 지났다, 따라서 영향
을 받을 수 없다, 그러면 좋다, 당신 거다, 당신들이 그렇게 해왔는데 당신들이 그동안 이
세계에서 행했던 다양한 일들을 봐라, 그게 바람직한 세계냐, 그게 우리가 따라가야 할 가
치냐에 대해서 종교가 정말 할 얘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 전쟁이
십자군전쟁이었고 지금도 종교분쟁이 일어나고 종교가 평화를 얘기해주지 않거든요. 평
화를 실천하지 않거든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의 영역이 뭐냐는 거죠. 도
킨스 등의 자연주의자들이 이 점을 지적하고 있는 거죠. “가치도 독점하지 말고 오픈해 놓
고 같이 경쟁하자, 그러면 과학이라는 것도 뭔가 삶의 의미를 주지 않을까.” 솔직히 말씀
드려 제가 그 캠프에 있지만 아직 과학이 가치를 줄 것이냐, 가치를 대체할 것이냐, 아니
면 새로운 가치를 제시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아직 만족스러운 답을 하고 있지는 못하다
고 생각합니다. 도킨스, 데닛, 굴드 등 수많은 과학자들이 가치의 영역에서 종교가 독점하
는 것에 반대를 했지만 여전히 아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신재식: 기존의 과학이 사실의 영역을 통제하고 종교가 의미나 가치 영역을 통제해왔지
만 장 선생님은 이 둘을 분리하는 게 가능한가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런데 사실의 영역과
가치의 영역이 붙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의 영역 자체가 가치에 의해서 왜곡될 수도
있고 판단 중지가 될 수도 있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고 가치 의존성이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존의 가치에 대해서 종교가 독점해 왔는데 최근의 무신론 운동은
가치마저도 얘기하자는 것인데 그런 흐름으로 설명하는 것은 논리적으론 맞지만 그 흐름
이 옳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종교가 여러 가지 폐해를 만들어왔다며 드는 예가 9?11사태
이고 중세에서 이단재판이나 마녀재판 또는 십자군전쟁 그리고 종교근본주의에 의한 논
의들입니다. 그런데 종교라고 하는 것은 표피에 불과하며 종교로 인한 단일한, 독립된 현
상들이 아니고 실제 그 사건에서 들어가서 보면 정치, 사회, 경제적 다른 동인들, 다른 이
해관계들이 함께 얽혀서 들어간 것이지요. 9.11사태도 십자군전쟁도 단순히 종교적 신념
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 않아요. 당시의 사회, 정치, 경제적 역학구도가 반영된, 일
방적으로 종교의 폐해라고 결론 내리기는 좀 섣부르지 않느냐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과학
이 과연 사실의 영역에 기반을 두어 가치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과학적인 사실에 근
거한 판단이 바로 가치의 영역으로 연결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역시 그 순간에는
선택이라는 논리적인 갭이 있는 거고 그 때의 선택의 기준은 이미 과학자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선의에 의해서 결정될 가능성이 다분히 많지, 순수하게 과학적 관찰의 결과라는
것과 논리적 결과가 바로 직접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요. 순수하게 과학적인 논의에 동의
하는 사람도 종교문제에 관해서는 다른 입장을 취하는 과학자들이 여러 분 있습니다.

장대익: 신 선생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삶의 의미와 가치 등은 역사적으로 종교가 그것을
상당 부분 담당해왔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제 종교가 사실의 영역에서 많은 부분을 펑크
냈기 때문에 더 이상 종교라고 하는 큰 우산 안에 가치라고 하는 부분들을 계속 담아놓지
말자, 삶의 의미는 종교가 있든 없든 모든 사람이 관심 있는 주제며 생각해야 되고 고민해
야하는 것이죠. 그동안 종교가 일종의 노동 분업을 해 줬어요. 과학은 사실을 제시하고 종
교는 어떤 가치를 제시하는 그런 식의 분업과 특화가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수백 년, 수
천 년 동안 종교가 그런 가치와 사실을 다루어왔기 때문에 전문가입니다. 과학이 따라하
지 못해요. 저도 과학적 사실로부터 아주 직접적인 삶의 의미가 나올까라고 생각하지 않
습니다. 단지 저는 종교가 가치와 의미에 독점을 풀라고 하는 것은 과학이 할 수 있다는
얘기죠. 그 정도입니다. 모든 종교가 정말 우리가 따라가야 될 가치나 이런 것들에 대해
서 솔선수범 했느냐 하는 비판에 대해서 실제로 보면 복잡한 스토리가 있는 것이다, 종교
라는 것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정치 경제 별별 문제들이 있고 9?11사태도 마찬가지라는 말
씀에 저는 기본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저는 왜 종교가 대표로 혼이 나느냐? 그것은 이
유가 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그것은 종교가 갖고 있는 정신구조Mentality, 종교인이 갖고
있는 정신구조, 종교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지배구조, 그 종교구조가 갖고 있는 어떤 재생
산 되는 메커니즘과 그렇지 않은 메커니즘과 분명히 다르다, 예컨대 가톨릭이나 개신교
나 다 내세를 믿습니다. 이슬람도 내세가 있습니다. 내세가 있는 종교에요. 내세가 정말
과학적으로 가능한 얘기냐 그것을 떠나서 내세를 생각하는 정신구조는 이 세계에서 이 현
실 세계에서 불만족을 내세까지 연결시킬 그런 가능성을 가진 정신구조입니다. 도킨스가
9?11사태가 있은 다음에 쓴 글에서 얘기했던 것은 뭐냐면 종교 때문에 9?11사태가 일어났
다고 했잖아요. 그 얘기의 핵심은 뭐냐면 종교적인 내세를 주장하는 종교적인 정신구조
를 갖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테러를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을 상당히 높이는 것이거든
요. 바로 그것을 결과 했다가 아니라 종교라는 것이 굉장한 매개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런 테러를 쉽게 할 만한 종교적 정신구조라고 이야기할 수 있죠. 그런 종교적 정신구조가
문제 있다는 것을 과학이 얘기해줄 수 있다는 것이죠.

신: 종교적 정신구조를 진화심리학적 입장에서 얘기를 하자면 그게 인간의 본질적인 것
아닙니까? 내세의 역할들이 분명히 유효성이 있기 때문에 그런 기능을 담당해 온 게 종교
였죠. 순서를 바꿔서 얘기를 하게 되면 특정 기능들을 바꾼다는 것이죠. 가치를 독점하는
것은 굳이 종교만은 아니죠. 어떤 이데올로기든지 가치 독점이 있을 수 있거든요. 때에 따
라서는 특정 이데올로기가 나올 수 있는데 종교가 이념 이상 강할 수는 있어요. 왜냐하면
종교는 가장 궁극적인 것을 그게 특정한 궁극적인 존재감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장
궁극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절대화시키는 경향들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종교가 궁극적인 가치나 의미의 영역을 독점하고 있다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 여러 종교가 있는 상황이고 각각의 종교들은 자신들이 자기 종교
에 대해서 충실하죠. 인지적 차원에서 특정 종교가 독점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가
능한가, 거기에서 좀 유보적으로 생각이 들고 사실과 가치의 영역 자체를 분리하는 것 자
체도 걸리거든요. 예를 들면 인간이 특정한 문화 속에서 사회활동을 할 때 인간의 삶 속에
서 단순하게 과학적이나 인지적 앎이나 종교적 의미만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잖아
요. 예술적인 활동, 정치적인 활동, 경제적인 활동 등 각각의 기준들이 복합적으로 살아가
는데 현대사회에서 종교나 과학이나 예술이나 경제나 이런 것도 복합적인 살아가는 영역
중에서 특별한 영역들을 담당하는 것들이고 그것의 경계선은 느슨하고 맞물려 있는 것이
고 정확하게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의 모습은 과거부터 있었는데 중세 때 기독
교가 모든 것을 다 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그 모든 시스템을 기독교적인 색채로 싹 바
른 거죠. 발라서 통제를 한거죠.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는 각자 자율성, 독자성을 훨씬 더
많이 요구하는 거고 오히려 과학적이고 경험적인 것들이 훨씬 더 종교나 예술이나 경제까
지도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상황들이고 통일될 수 있다는 문제는 아닐 겁니다. 그리
고 인지적 차원에서 종교와 과학 갈등문제는 종교가 사실의 영역까지 발언하기 시작하면
서 문제가 되죠. 예를 들면 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이 자연현상은 이렇다고 말한 순간
문제가 됐죠. 그리고 과학적인 관점에서 사실은 이렇게 해야 된다고 주장할 때 의미와 판
단까지 넘어갈 때 거기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여전히 자기 관성들을 가지고 있는
데 관성에 의해서 그러니까 의미를 추구하는 관성과 사실을 추구하는 관성이 쭉 나가다
가 어느 접점에서 그 관성을 틀어서 다른 쪽으로 나가면 충돌이 일어나는 거예요.

장대익: 마지막으로 종교의 미래에 대해서 얘기를 했으면 합니다.
종교는 여전히 가치와 의미의 부분들을 독점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그것에 대해
전문성이 있는 것이지요. 사실의 영역은 과학에 깨졌고, 어쨌든 가치와 의미는 부여잡고
있는 건데 과연 종교가 앞으로도 그런 일을 할 수 있느냐? 사실에 관해서는 유통기한이 지
난 것은 분명해요. 그런데 종교가 가치의 영역에서도 유통기한이 지났느냐? 우리가 어떻
게 살아야 되는지에 대해서 종교는 얘기해 줄 수 없다, 적어도 종교는 얘기해줄 만큼 도덕
적이지는 않다, 도덕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이죠. 아니면 더 이상 식상한 거라든지 아니면
시대에 뒤떨어진 가치라든지 이런 얘기를 할 수 있겠죠. 가치도 새로운 종교 없이 어떻게
보면 무신론적인 관점에서 혹은 어떤 비종교적인 그런 가치들을 제시할 수 있으니까요.
저는 가치영역에서도 종교가 마치 회사를 차려서 열심히 그것을 독점해 왔는데 사실은 가
치의 시장에서 보면 종교만 있었던 것도 아니란 말이죠. 이데올로기도 있을 수 있었을 것
이고 그 다음 다른 무신론 그런 것도 있었을 것이고 하지만 가치와 의미의 영역은 종교가
제일 잘했으며 그동안 끌고 왔어요, 인정해요. 그런데 앞으로 그럴 가요?

신재식: 시장 점유율이 낮아서 결국 도산하지 않겠느냐가 장 선생님 생각인가요?

장대익: 결국에는 사실의 영역이 붕괴된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고 종교가 얘기를 하면 정
말 허황된 사실에 기반을 두어서 얘기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신재식: 말씀의 이면에는 사실 종교가 한국에 해악이 더 많고 긍정적인 기능보다 부정적
인 기능이 많다는 이야기인데 저울에다 놓고 한번 재보면 긍정적인 부분이 더 많다고 생
각합니다.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해온 역할이나 내용 면에서 보면 해악이 많다고 생각하
는 것에는 기본적인 동의를 하지는 않습니다. 사회시스템들을 지금까지 기본적으로 유지
시켜 놓고, 기존에 해왔던 교육기능이나 사회봉사 기능들이나 기타 기능을 생각했을 때
도 그렇습니다. 지금 한국교회 안에서도 한국교회가 문제가 많다고 얘기를 하는데 문제
가 많은 것은 기존의 종교가 가야할 길을 안가서 문제가 많은 것이었는데 기존의 종교가
당연히 해야 된다고 하는 것들은 지금도 지속적으로 하고 있거든요. 굉장히 크거든요. 그
런데 그건 문제가 안 돼요. 왜냐하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매
번 일등 하는 애는 칭찬을 안 하잖아요. 그런데 삽십등 하는 애가 성적이 뛰면 얘는 떠들
어서 올려주어야 하잖아요. 지금 그런 상황이거든요. 9?11사태가 100% 종교 잘못이라고
얘기를 할지라도 역사 속에서 9?11사태로 생긴 피해보다도 종교가 기능한 훨씬 더 긍정적
인 부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종교가 과연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이냐? 종교라고 말
하는 현상을 역사 속에서 가지고 있는 까닭은 의미나 가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
하기 때문에 만들어 낸 거라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역사 속에서 종교들의 특정 모습이
존재해 왔습니다. 조직화된 종교는 분명히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칠 것입니다. 길게 보았
을 때 개신교도, 로마 가톨릭도 없다가 생겼으니까 우리의 미래는 단언할 수 없는 것입니
다. 그렇지만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 종교현상이라고 하는 것이나 종교적인 메커니즘이라
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지속적으로 이어질 거라고 생각 합니다. 또한 종교가 사실의 영역
에 있어서 이미 아닌 것으로 판정되었다고 하는데 종교가 사실의 영역들을 설명한 것들
은 신학사를 통해서 보면 종교적 교리가 사실의 영역을 규정한 것이 아니고 당시 세계관,
당시의 과학적 수준과 결과들을 종교가 자신들의 신학화하는 작업에서 받아들인 거예요.
그리고 일단 신학적 교리가 만들어지면 일종의 압력이 되어 지식 탐구에게까지 영향을 주
는 과정입니다. 피드백 관계입니다. 과학과 종교의 대화에서 과학을 안 받아들이는 종교
는 결국 소멸할 것입니다. 당대의 지식과 당대의 문화와 소통하지 않는 종교는 결국은 죽
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자들은 당대의 세계관과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소통하는 작업
을 했습니다. 그래서 특정한 역사종교들도 끊임없이 변신을 시도할거고요. 인간의 본질
됨 때문에 종교적 요구 때문에 종교는 없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장대익: 제 입장은 종교가 새로운 의미 덩어리로, 의미체계에 대한 어떤 하나의 조직으로
나뉠 것이며 종교라는 것이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가톨릭, 개신교 이
런 것이 아니라 거기서 했던 것들의 조금 더 다른 방식으로 말입니다.
신재식: 종교사적 관점에서 보면 새로 바뀌는 어떤 현상을 다시 종교라 이름 붙일 거예
요.

장대익: 그게 종교가 가치를 독점한다는 증거죠? 왜 그것을 종교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신재식: 서양종교사에서 보면 종교Religion라는 용어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계속 바뀌
어 와요. 한동안은 수도원의 생활의 삶이 종교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었고 그게 종교인
거예요. 나중에 가면 기독교를 종교라고 얘기를 해요. 장칼뱅의 기독교 강해도 원래 제목
이 기독교 종교 강해에요. 지금같이 종교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서구 기독교가 다른 종
교를 만난 다음에 나타난 거예요. 그러니까 종교라는 이름 자체가 언어의 영역에서 고고
학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 끊임없이 변경되는 것이에요. 영성이라는 개념자체도 마찬가
지예요. 이게 실체가 있어서가 아니고 특정한 어떤 현상을 가리켜서 붙여진 이름이고 종
교는 영원할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종교가 과학에게 기대하는 것의 하나는 과학
의 대중화라는 것이죠. 장 선생님께서도 본인의 과제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요, 대중에
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전문가들의 담론이 아니라 대중담론 작업들을 해주었으면 좋겠어
요. 특별히 진화론 같은 경우에 사실 정보의 민주화가 되지 않아서 진화론이 쉽사리 다른
사람에게 접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단편적으로 왜곡된 정보들만 흘러 다니
고 있어서 창조진화론 논쟁이나 한국의 종교와 과학의 문제가 왜곡된 틀로 나타난 것이
지 다 오픈 되고 정보의 민주화가 된다면 훨씬 더 좋은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
다. 부정적인 결과는 왜곡된 정보, 누군가에 의해서 통제된 정보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대익 : 저는 완전히 반대되는 입장에서 종교인들이 과학책을 읽기를 부탁합니다.

신재식 : 그것은 일단 동의합니다.

장대익 : 신 목사님은 제가 만나본 신학자, 목사 중에서 가장 과학책을 많이 읽는 분이시
거든요. 이런 분만 있으면 문제없어요. 그런데 안 읽고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자꾸 엉뚱
한 소리를 해대니까 그게 아주 큰 문제죠.

신재식 : 특정한 신념 때문에 아예 담을 치고 접근 자체를 안 하는 경우도 있죠.

장대익 : ‘과학책을 읽는 종교는 희망이 있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새로운 종으로 진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