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 오프라인에서 처음 인사를 드린 하랑입니다.
그동안 정말 다비안 님들을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기쁩니다.
앞으로도 자주 찾아갈게요~!

이 글은 예전에 써놓았던 글들로 문자주의 해석에 대한 비판 시리즈입니다.
분량 때문에 시리즈처럼 이어서 올리겠습니다. 괜찮겠죠?^^
다비아정도면 다 알고 계시는 내용이겠지만요.

------------------------------------------------------------------------------------------------------------------------------------
 

Prologue - 대심문관 이야기


대심문관 이야기

어느 날, 예수가 어떤 마을에 갑자기 나타납니다. 로마시대 3년 동안 사람들 사이를 편력할 때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다시 한 번 민중 속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눈 먼 자를 치료해주고 병든 자를 고쳐주며 죽은 자를 되살립니다. 사람들은 단번에 그리스도를 알아보고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놀라운 주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그러나 감격의 순간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키가 크고 허리가 꼿꼿하며 여윈 얼굴에 번뜩이는 눈을 가진 아흔 살의 노인인 대심문관이 그리스도를 어둡고 좁다란 감옥에 가둬버렸기 때문입니다. 철문을 열고 들어온 대심문관은 그리스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는 정말 그리스도냐? 네가 그리스도란 말이냐? … 네가 진짜 그리스도건 가짜건 그건 아무래도 좋아. 어쨌든 나는 내일 너를 재판에 회부하여 극악무도한 이단자로서 화형에 처할 테다. 그러면 오늘 너의 발에 입을 맞춘 민중이, 내일은 내가 손가락을 놀리기만 해도 네가 불타고 있는 모닥불 속에 앞을 다투어 장작을 던져 넣을 거다. …그들은 경탄의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며 공포에 떨면서도 그처럼 날뛰던 수억의 양떼를 진압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과 뛰어난 지혜를 가진 우리를 자랑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우리가 좋은 낯으로 손짓을 하기만 하면 그들은 기쁨과 웃음에 싸여 어린애다운 행복한 노래를 부르며 희희낙락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그들의 죄까지도 용서해 주겠다. 어떤 죄든지 우리의 허락만 받으면 모두 속죄될 것이라고 우리는 그들에게 말해 주련다. 우리는 비밀을 간직한 채, 그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천국의 영원한 보상을 미끼로 하여 그들을 유혹할 것이다. …이제 내가 말한 것은 실현되고, 우리의 왕국은 건설될 것이다. 다시 되풀이하지만 내일이면 너도 그 온순한 양떼를 보게 되리라. 내가 손을 조금 흔들기만 해도 그들은 앞을 다투어 달려와 너를 불태울 장작더미에 시뻘건 숯덩이를 던져 넣을 테니 말이다. 그건 다시 말해서 네가 우리의 일을 방해하러 왔기 때문이야. 사실 누구보다도 먼저 화형에 처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너란 말이다. 나는 내일 너를 화형에 처하겠다. 내가 할 말은 다 했다.”

이 이야기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제5장 2절에서 둘째 이반이 셋째 알로샤에게 들려주는 <대심문관>이라는 극시입니다. 15세기의 한 작은 마을에 나타난 그리스도는 자신의 권위와 지위를 잃어버릴 것을 우려하는 대심문관에 의해 화형 당합니다. 대심문관에 의해 예수가 처형된 후, 대부분의 순진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허락만 받으면 모두 속죄된다는 것 따위의 대심문관의 가르침을 믿으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대심문관의 가르침은 예수의 가르침과 전혀 상관이 없음에도 사람들에게 진리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오리가 아님에도 오리인 척하는 <미운오리새끼>임에 틀림없습니다.


현대판 미운오리새끼

15세기가 한참 지난 오늘 날, 대심문관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지만 <대심문관>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운오리새끼가 마치 태초부터 내려온 종교적 진리인 것처럼 위장한 채 더욱 은밀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예수를 끊임없이 화형 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문자주의라는 보이지 않는 이름으로 대심문관과 맞먹는 권위를 가지고 목사의 설교, 교회의 성경공부 교재, 각종 기독교 서적, 그리고 일상적인 행동과 언어생활 속에서 세밀하면서도 강력한 위력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현대판 미운오리새끼가 사랑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부르짖은 예수의 소중한 가르침들을 헤집어 놓으면서 한국 기독교는 사람들의 신뢰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교회를 ‘신뢰 한다’는 응답자는 18퍼센트에 불과한 반면, ‘불신 한다’는 응답자는 무려 50퍼센트에 육박했습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종교가 없는 사람 중에는 단 3퍼센트만이 개신교회를 신뢰한다고 밝혀, 비 기독교인가운데 개신교에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 졌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아프가니스탄에서 기독교인 23명이 피랍되었을 때, 피랍 인들의 건강을 염려하거나 귀환을 기원하기보다는 그들을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었던 것도 한국 기독교에 대한 대중들의 불신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자주의라는 오늘날 미운오리새끼의 정체가 무엇이며,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정신을 훼손시키고 있는지 알아내어 미운오리새끼가 만들어 놓은 종교적 도그마를 깨부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를 지탱해온 생명력이었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예수의 중요한 가르침들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되어 머지않아 한국 기독교가 척박한 세상에 희미하지만 강력하게 내뿜고 있는 그리스도의 빛을 모두 잃어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속>-

다음 글은 축자무오류설을 바탕으로하는 문자주의 성서 해석의 실례와 오류에 대한 글입니다.
가능하면 2일에 한 개 꼴로 글을 올리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