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위기와 원인에 대한 과제

       

심 상 용 박사

서울신학대학교, 중앙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

월드크리스챤 성경학 연구소 소장,

한국기독교보수교단협의회 보수원형찾기위원회 회장



  대다수의 사람들은 신학을 성경에 어떤 사람이 만들었겠거니

그리고 성경에서 나왔겠거니 하지만...

 

신학은 성경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성경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성경의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닙니다.

 

신학이라는 개념 자체를 만든 장본인은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이라는 철학자가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서구 기독교가 심각한 침몰 내지 죽었다는 현상은

이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사실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기독교 역시 심각한 침체 현상에 빠져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는 교회 안 밖으로 기독교 위기에 대한 문제가 삼각하게 거론되고 있습니다.

모두가 위기라는 것을 공감하고 있으며 위기에 대한 문제가 화두입니다.


  세계 기독교계는 물론 한국기독교계도 이 같은 기독교 위기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지난 20여 년간 수많은 논의를 거듭해 왔습니다.

 

그 때마다 기독교 위기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다루고 있나

토론 현장에 참석해 보면 문제의 본질과 너무 동떨어진 주제를 가지고

위기의 문제를 다루지 않나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기독교 위기에 대한 문제는 단지 한국기독교계 만의 과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서구 기독교에서 지난 500년간 서구 교회의 화두였습니다.

 

지금 서구 기독교회가 치명적인 위기 속에 빠져 있는데 무려 천 수 백년의 그렇게

왕성했던 서구 기독교가 무너지는데 왜 이 같은 논의가 이루어지지 아니 하였겠습니까?

 

한국의 기독교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큰 규모와 대대적인 노력이

초교파적으로 진행되었지만 결국 이에 대한 과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이 같은 절대 위기 상황에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기독교가 세계 기독교가 안고 있는 이 문제에 대한 세계 기독교에 화두를

던져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느 한 두 개인이나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교회가 안고 있는 과제이기에 한국교회에 이에 대한 과제를

기도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설 때가 되었습니다.


  기독교 위기와 신학의 문제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칠 때 불문율로 여기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신학의 전 과정을 거쳐서 꺼내지 않습니다.

 

신학을 가르치며 신학(Theology)과 신학체계(Theology frame) 내지

개념구조라는 Structure를 만들고 형성한 장본인이 과연 누구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신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면서도 늘 이것이 의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여기에 대해서는 일체 한마디도 없었고 누가 만들었겠거니 하고

지나갑니다.


  그래서 신학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아니 신학을 졸업할 때까지

도대체 가장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신학이라는 것을

도대체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신학을 성경에 어떤 사람이 만들었겠거니

그리고 성경에서 나왔겠거니 하지만 신학은 성경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성경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성경의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닙니다.


  신학(Theology)이라는 개념 자체를 만든 장본인은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Platon)이라는 철학자가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신학의 개념구조를 만든 장본인도 역시 플라톤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배우는 신학대학에서 플라톤이 만든 신학을 배우고

그 이름조차도 ‘신학대학’이라고 하니 당연히 플라톤이 성경을 말하는 신학을

만들었다고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학대학에서 플라톤이 만든 신학을 만들었다고 말하는가요?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아이러니 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플라톤이 오늘날 신학대학에서 가르치는 신학과 신학이라는

개념 체계를 만든 장본인인데 플라톤은 일체 말하지 아니하고

그런 사실조차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까?

 

사실 신학대학에서 가르치는 신학의 모든 패러다임은

플라톤이 설정하고 창안한 개념체계를 받아 들여 거기에 성경에 있는 내용들로

포장시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플라톤과 그가 체계화 시킨 울피리스 방식과 사고 유형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지요.


  대개 신학대학에서 기독교 신학 하면 바울이 만든 것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일컫기를 ‘바울신학’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바울이 축성했다는 바울 신학을 어거스틴이 이어받아

어거스틴이 정통신학을 세운 성자라고 온통 지칭을 합니다.

 

거의 모든 신학은 신구교를 막론하고 이 전제하에서 신학이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바울 신학과 어거스틴 그리고 카톨릭과 개신교는 이 정통 위에 있다며

자신들의 계파적 라인을 내세워 자신들이야말로 정통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기독교가 말하는 신학 논리는 원형인 플라톤이 만들어 놓은 체계와

동일하면 이를 기독교가 주장하는 바울신학이라는 체계와 동일한 체계입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말하는 논리대로라면 플라톤의 말한 신학과 신학 체계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바울의 신학 체계와 역시 동일합니다.

 

이는 바울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바울 이후의 어떤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지금의 기독교 논리대로 말한다면 당연히 바울이 가지고 있는 바울신학 체계는

플라톤이 말한 플라톤이 만든 신학과 신학 체계를 그대로 원용하여 사용한 것이므로

신학에서는 반드시 플라톤과 바울, 바울과 어거스틴, 그리고 플라톤과 카톨릭,

플라톤과 루터 그리고 칼빈과의 관계에 대하여 말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모두 플라톤이 만든 신학과 신학체계를 그대로 수용하여 신학과 신학체계를

사용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계에서는 플라톤이 신학을 만들었다는 것도,

그리고 플라톤(Platon)이 만든 것을 바울 신학이 형성되었다는 것도,

그것을 어거스틴이 만들었다는 계승시켰다는 것도

일체 말하지 않습니다.

 

이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신학과 신학체계 자체를 만든 장본인을 일체 말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이용한 사람들 다시 말해 바울이나 어거스틴을 기독교 신학과 신학체계를

만든 원조자라도 되는 것처럼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소위 신학과 신학체계를 만들었다면 세계관 및 신앙관 신학관 교리관의 뼈대의 근간을

모두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논리에 의하면 바울이나 어거스틴이 그 플라톤의 신학과 신학체계 뼈대위에

성경을 포장해서 기독교 신학을 완성시켰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신학과 신학체계를 말하려면 당연히 그 신학과 신학체계를 만들고

그 구성의 근간을 마련한 장본인인 플라톤을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기독교는 왜 신학과 신학구조를 만든 플라톤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는가요?


  그렇다면 플라톤(Platon)이 성경을 위하여 이 같은 신학과 신학체계를 만들었는가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단연코 플라톤은 성경을 위하여 신학(Theology)과 신학체계(Theology frame)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플라톤은 고대 그리스의 민족 종교인 오르피우스 종교와 그들의 선조들이 전승해준

종교를 집대성하기 위하여 그들의 신과 종교 체계를 만들기 위하여

신학과 신학체계를 마련한 것입니다.


  플라톤 사상은 철학사상으로 포장되어 그리스 로마 사상에 크게 영향력을 제공하게 됩니다.

 

 저명한 철학자 버트란트 럿셀(Bertrant Russell)에 의하면 플라톤이야말로

고대 중세 현대를 거치면서 가장 큰 영향력을 준 인물이 플라톤이라고 소개합니다.


  플라톤이 이렇게 고대 중세 현대에 이르며 큰 영향력을 주었다는 이면에서

그가 만든 신학과 신학체계가 카톨릭만이 아니라 개신교 그리고 이슬람까지

그 영향력을 결정적으로 미치고 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반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플라톤(Platon)이 만든 신학과 신학체계는 자체부터가 성경을 위하여

만든 것도 아니고 성경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그는 성경에 대하여 알았거나 접했다는 어떤 증거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가 이 신학과 신학체계를 만들고자 한 의도는 유일하며 명백합니다.

자신의 역사와 종교를 말하는 고대 그리스 종교와 철학사상체를 집대성하기 위하여

만든 신학이며 신학체계입니다.


  대개 역사적으로 플라톤 하면 플라톤 철학사상으로 대변합니다.

그러나 플라톤 철학사상은 철저히 종교사상을 포함하여 말합니다.

당시에는 종교와 철학을 구분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입장에서 본다면,

신학과 신학개념체계들은 절대로 용인할 수 없는 이교도들의 산물입니다.

 

성경을 위하여 사용할 수도 없고 사용해서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플라톤의 신학과 신학방식에 의해 소개되거나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이 플라톤이 만들어 놓은 신학과 신학체계에 그대로 원용해서 성경을 덧입혀 놓고

그것을 성경을 위한 학문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현주소입니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중세에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그러합니다.


  기독교 신학의 큰 문제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플라톤의 신학과 신학방법론에 성경을 덮어 놓고 그것이 성경을 위한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여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엄격히 말해 플라톤 사상을 이해하고 성경을 이용하는 것이지

성경을 이해하고자 하는 방법론이 아닙니다.

 

가령 부산을 가기 위한 도로를 만들기 위하여 아르콘을 준비했는데

그것을 인천 가는 길에 깔았다고 합시다.

그 아르콘이 깔려져 있는 것을 보고 그 길을 가는 것을 곧 부산가는 길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아무리 아르콘을 깔아 놓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가는 길은

어디까지나 인천이지 부산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원리 같은 원리입니다.

지금 기독교가 신학과 신학체계 위에 성경을 깔아 놓고 그것이 성경이라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플라톤이 만들어 놓은 것 신학과 신학체계 위에 성경에 있는 내용들을 포장해 놓고

그것이 성경을 위한 것이라고 그것이 성경이라고 이해하라는 것은

플라톤을 이해하는 것이지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현재의 기독교는 플라톤의 사상적 체계와 플라톤의 길을 이해하기 위해서

성경을 이용하는 것이지 성경 그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신학 안에서는 수많은 모순과 허구체계와 반성경적 체계와 주장들이

난무하지만 기독교는 이를 은폐시켜 놓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을 짓밟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성경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플라톤(Platon)이 자신의 신과 신학체계를 만들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수단들에게

성경을 덧입혀 그것을 성경이라고 하는 것에는 명백하고도 분명한 모순이 존재합니다.

 

이 허구와 모순이 일반인들은 알 수 없지만 기독교에 대하여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서구의 천재적인 학자들과 지식인들은 비록 전부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 여지를 간파하고 치명적인 공격을 가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서구 기독교의 죽음을 초래케 한 치명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플라톤의 신학과 신학구조 위에 성경을 덧 입혀 놓고 그것이 성경이라고 하는

기독교를 은폐시켜 놓고 있는 이 같은 모순의 구조들과 그 산물이 기독교를

죽음의 여지로 몰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기독교를 치명적인 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심각한 요인은 없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기독교는 이를 알리도 없고 그것만이 성경이라고 믿고 있는

기독교는 속수무책으로 위기에 노출되어 있지만 기독교는 여전히 플라톤의 신학과

 신학논리위에 세워 놓은 것만이 성경을 이해하는 정통논리라고 굳게 믿고 확신하고 있기에

기독교는 이 사실을 의심하거나 여기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이것이 아니면 기독교와 성경을 지켜내지 못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여기에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소위 정통신학이니 전통신학이니 하는 말들은 하나같이

플라톤의 신학과 신학체계 논리위에 성경을 덧입혀 놓고 그것이

성경이라고 외치고 있기에 언제나 공격당할 여지에 노출되어져 있습니다.

 

플라톤의 신학과 신앙 논리에 기독교가 말려 들어가 있으면서도 그것만이

기독교의 전부라고 맹신하고 있는 까닭에 기독교는 치명적인 함정에

빠져들어가면서도 자신들은 성경으로 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과 신학체계를 소개하는 신학대학에서 대개 자신들이 배우는

신학과 신학체계가 바울신학이라고

그리고 이것을 어거스틴이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은 바울의 신학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라는 인물과 사상 앞에 ‘신학’이라는 말을 붙여 놓고 바로 바울 신학이라고 했으면

바울이 이 신학을 만들었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 사실을 전혀

해명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바울이 신학이라는 것을 만들었다는 증거가 어디에 나옵니까?

그리고 바울은 신학을 한 적이 없으며 바울 서신 자체에 나타난

그의 주장들은 신학대학에서 주장하는 사상적 맥락과는 전혀 무관한 것들뿐입니다.


바울은 신학이나 신학체계를 말한 적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바울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가요? 이것은 명백한 바울에 대한 기만입니다.

 

바울은 신학을 한 적이 없었고 신학을 만든 장본인도 아닙니다.

오늘날까지 신학대학이나 신학교에서 바울 신학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바울이 만든 것도 체계화 한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바울이 신학을 만들고 바울이 신학체계를 형성한 것처럼

포장하고 조작해서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모두 근거가 없는 조작된 사실을

가지고 바울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후에 플라톤 신학과 신학체계를 도입해서

기독교 신학과 한 교부나 학자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들의 조작물들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바울의 이름을 가져다

붙여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결코 바울은 오늘날 신학을 창안한 사람도 아니고 신학체계를 형성하거나

구성한 인물도 결코 아니며 바울은 현재의 신학 아무 상관도 관련도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은 바울의 사상과 궁극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말하는 신학 역시 성경과 관련이 없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기독교가 주장하는 신학체계를 분석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허구체계인가를

알 수 있는데 이는 플라톤의 울피리스 종교 방식에 성경을 덧입혀 놓은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오늘날 사상계에서는 바울에 대하여 바울이 신학을 잘못 만들어 놓았다고

종종 비난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입니다.

 

만약 현재의 기독교 신학을 바울이 만들었거나 조성하였다면

이 비난이 정당하다고 할 수 있으나 바울은 현재의 기독교 신학이나

교리신학을 조성한 바가 전혀 없습니다.

 

현재의 기독교 신학을 바울이 만든 적도 없고 이것을 조성한 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에 대한 이같은 비난은 당장 중단되어야 하며

신학대학에서 가르치는  신학이나 교리가 바울신학이라는 가르침이나 주장은

당장 중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어거스틴이 바울 신학을 계승했다고 하는데 이 또한 근거없는 허위 사실입니다.

결코 어거스틴은 바울 신학을 계승하지 않았습니다.

 

어거스틴은 바울사상을 계승한 계승자도 아니고 어거스틴의 사상은

바울 사상과도 일치하지도 않습니다.

 

구교나 개신교나 어거스틴이 바울의 사상을 계승하였다고 가르치고 있으나

이것은 엄청난 조작을 전제로 하는 주장입니다.

 

어느 것 하나 바울과 아무 상관없는 허무맹랑한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독교가 플라톤의 신학과 신학개념 체계를 끌어다가 거기에 성경을 덧입혀 놓고

그것을 바울신학이라고 외치는 것은 성경에 대한 기만이며

역사에 대한 조작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플라톤의 신학과 신학 방식에 의해서 소개되거나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기독교는 소위 정통교리 전통신학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바울신학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모두가 근거 없는 허구적인 주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플라톤의 신학과 신학 방식에 의거해서 성경을 가르치는

현재의 기독교 신학과 신학 체계는 그 역사적 전모나 조작의 전모가 어디에 있는지

규명되어야 하며 바로 잡아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제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이제 플라톤이 이교도들의 신 즉

고대 그리스의 이교도들의 오르피우스 종교를 체계화시키기 위하여 만든 방식으로 구성된

신학(Theology)이나 신학구조(Theology frame)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경에 의해서 성경을 이해하는 새로운 개념체계 연구해 내거나

이끌어 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기독교와 교회는 이를 위해 모든 총력을 기울여야 하며

수많은 위기극복의 과제 가운데

이것보다 더 시급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당면한 위기극복의 최대의 과제이며 숙제인 것입니다.


 2010-05-12 복음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