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섭 목사님의 설교비평에 대한 박영선 목사님의 반론글을 두고 이어지는 토론이 끈이 되어
다비아에 오게된 저는 이 공간에서 드러나는 견해에 호기심이 일어났습니다.
기독교인이 어떤 사유의 과정을 거쳐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것일까 궁금해졌다고나 할까.
성서읽기에서 인문학적인 전통을 소중히 여길 것이라는 홈페이지 대문에 걸린 말도
처음에는 수수께끼처럼 느껴졌습니다.
인문학적인 전통을 소중히 여기면서 성경을 보면 어떻게 보인다는 것일까?...

그래서 태생적인 지적 호기심으로 다비아에 실려있는 글들을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읽었습니다.
대학시절에 예수를 믿게 된 저는 장로교, 감리교에서 신앙생활을 했지만
신학적으로 비교적 자유로운 생각을 했다고 스스로 정리합니다.
대학시절에는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텍스트로 성경공부하다가 칼빈주의가 성경을 해석하기에는
그릇이 너무 협소하다는 과격한 주장을 펴 친구와 의가 틀어지기까지 했으니까요.

암튼 다비아에 실린 글들을 읽고 느낀 것은,
글들에서 나타나는 견해들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고
그것이 또 다양한 방식으로 조율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밖의 시선으로 볼 때 생각이 치밀하지 않으면 나타나기 쉬운 오류나 잘못된 흐름도
있다는 느낌도 듭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잘못 파악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오류를 파악하기 가장 좋은 방법이 '진지한' 토론이니까.)


느낀 점을 두 가지만 우선 거론하면,

1) 첫 번째로 인문학적인 성경 읽기에 대한 소견입니다.

홈페이지 첫머리에 있는 '성서읽기에서 인문학적인 전통을 소중히 여길 것'이라는 말인데,
인문학은 문학,역사학,철학을 일컫고 그 바탕에 언어학이 깔려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인문학적인 전통으로 성경을 본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해
봤습니다.

성서 본문은 역사적인 기록이며, 따라서 집필될 당시의 역사적 특이성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바를 해석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이해됩니다.
여기에 텍스트 개념이 등장하여 언어학적인 텍스트들을 주의깊게 분석하여 해석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를 갈라놓는 갈림길치고는 이정표가 그리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런 의도 자체를 두고 보수주의에서도 딴지를 걸 만 이유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정 목사님 말씀처럼 서로 '기본적 사유 틀이 소통되지 않으면 대화는 더디거나 제 자리에 머물거나,
막히거나 옆으로 새'게 됩니다.
그렇다면 기본적 사유의 틀이 달라지는 것은 아마도 이 지점이 아니라
한참 더 지난 어느 지점에서야 나타날 것 같습니다.

모세 출애굽 당시의 성경 기록은 이집트 19왕조에 속한 파라오 람세스 2세
또는 메르나프타하(Merneptah) 시대의 역사적 기록입니다.
우리 시대가 아닌 그 시대의 눈으로 그 사건을 바라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각으로 바라본다고 해서
홍해가 갈라졌다는 기록을 축자적으로 해석하면 넌센스라는 결론을 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 보수주의와 진보주의가 갈라지는 갈림길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성경 텍스트를 면밀히 해석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때 그 자리에 없었던 우리로서는 알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보주의는 만일 출애굽 당시 그런 초자연적인 기적이 가능했다면
지금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느냐,는 이성적인 판단을 선택한 것입니다.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텍스트 상의 기표와 기의의 문제를 연구함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역사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가?
그보다도 더 심오한 질문으로 '진리가 무엇이냐'란 빌라도의 질문을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이후로 많은 철학자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습니다.
칸트가 던진 충격 이후, 현상학을 거쳐 비트겐슈타인을 지나면서 결국 언어 문제에 인류가
매달려 온 것도 따지고 보면 진리를 알아내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언어 문제에 매달리면서 인류의 사유는 '더 이상 진리 따위는 상관이 없다'는
이상한 신념을 수면 위로 내밀었다가 들이밀었다가 했습니다.
이런 신념도 철학적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선택일 뿐입니다.
세계에 관한 모든 해석이 궁극적으로는 언어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세계를 기술한
것의 배후에 이른다거나 또는 그것을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언어철학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결과가 바로 '홍해가 실제로 갈라졌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상관이 없다'는
견해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사유의 틀'은 선택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진화론에 관한 것입니다.

다비아 게시판의 창조과학회와 관련한 글과 이어진 댓글을 읽으면서
저는 일상적인 사고로는 그 말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어학을 이야기하니 언어적 유희의 단계일까도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적 관점에서 창세기를 믿으며 동시에 창조론자들은 정신나간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이야기하니 말입니다.

그러다가 2001년11월6일 조선일보의 판넨베르크 교수와의 대담 기사를 읽고는 어느 정도
의문이 풀렸습니다. (혹 필요하신 분은 제 홈에서 다운받으십시요. http://kdaeil.com/pdf/pannenberg.pdf )
판넨베르크 교수는 창조설과 진화설이 '창발적 진화(emergent evolution)'라는 개념을 통해
화해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판넨베르크 교수가 그렇게 말할 때는 단서가 붙습니다.
즉 "자연도태 원리에 근거한 기계적 과정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고 생명생산이 어떤 새로운 것을
지속적으로 생산한다는 출현과정으로 표현된다면” 진화론을 신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고도 미묘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할 때 진화론은 다음 3단계 정도를 말합니다.

○ 무기물에서 유기물로 합성... 이것은 밀러의 실험이라고 무기물에 전기에너지를 주었을 때 유기물이
합성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자연법칙이 아니라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 개입된 실험장치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 유기물이 생명체로 진화한다.
○ 단세포 생명체에서 인간까지 진화한다.

그런데 판넨베르크는 이런 기계론적인 진화론은 '저등생물체로부터 고등생물체에로의 진화',
'새로운 개체를 발생케 하는 후성설적 진화'를 근본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 뿐더러
성서의 '창발적 진화(emergent evolution)'와 화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판넨베르크는 '창발적 진화(emergent evolution)'의 최고봉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로고스의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진화의 단계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갑자기 발생(emergent)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진화론을 말할 때 그 진화론은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그 진화론이 아닙니다.
판넨베르크의 조선일보 대담에 의하면 과학자들이 '전혀 새로운 것이 갑작스럽게 출현하는
'창발적 진화론을 이야기 한답니다.
이제 진화론이 과학이라면 그 '전혀 새로운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남겠지요.
여기 게시판의 진화론과 창조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종교적 관점에서 창세기를 믿으며
동시에 창조론자들은 정신나간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제가 잘못 들은 것일까요? 다시 가서 읽어 봐도 그렇습니다.

개인적인 느낌은 판넨베르크의 '창발적 진화(emergent evolution)'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외에 어떤 예를 찾을 수 있는지 의아합니다.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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