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 (Nevius Mission Plan)

조회 수 8872 추천 수 12 2007.04.30 01:50:55
관련링크 :  
(정용섭 목사님의 '명'을 받들어, 잠시 써 봤습니다.
한국 개신교회사 전공이 아닌지라,
서너가지 문헌을 짜깁기해서 베낀 수준에 불과합니다)

===============================================
19세기 말,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을 위해,
존 네비우스(John L. Nevius, 1854-1893)의 제안에 따라 채택한 선교 정책이다.

구한말, 새 선교지 한국에는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를 위시하여,
캐나다, 호주, 영국 등 각국 각 교파의 선교사들이 몰려들었고,
한국의 개신교회 또한 격동의 한국 정세 가운데서 간헐적인 수난을 당했으므로,
뚜렷한 선교 방법을 설정하고,
교파간 경쟁도 피하며,
한국 교회의 수난에 대응할 선교사들의 입장을 밝히는 정책 설정이 시급했다.
더욱이, 이 정책을 수립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1890년까지 H.N.앨런, H.G.언더우드 등 10여 명의 선교사를 한국에 파견)
거의가 신학교를 갓 졸업한 20-30대의 청년들이었기에,
해외 선교의 경험이 없어, 한국에서의 선교부와의 관계,
한국인과의 관계, 선교사들 간의 원활한 관계 등을 정립하지 못하고
많은 시행 착오와 갈등을 겪었다.

이에 선교사들은 본국 선교부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선교부는 1890년, 당시 중국 체푸에 파견되었던 선교사
네비우스(John L. Nevius) 부부를 서울로 보냈다.
그는 이미, 중국에서의 선교 경험을 토대로, 1855년에,
[선교 방법론(Methods of Mission Work)]을 발표하여
선교부로부터 큰 평가를 받은 바 있었다.
그는 내한하여 서울에 2주일 동안  머물며 선교사들과 회합을 갖고 강연을 하였는데,
그의 논문과 강연이, 당시 한국에 파견되어 있던 선교사들의 선교 원칙이 되었던 것이다.
이후 미국 북장로교는, 한국에 새로 파견되는 선교사들에게
한국에 도착한 이후,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 관한 책을 나눠주어,
이 원리를 완전히 터득하게끔 요구했다.

네비우스는 선교 사업의 궁극 목적을 ‘독립적, 자립적, 진취적인 토착 교회 형성’에 두고,
선교 정책의 기본 이념으로 자진 전도, 자력 운영, 자주 치리(治理)의 세 가지를 내세웠던 바,
그가 내세운 원칙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선교사들 개개인의 복음 전도와 광범위한 순회 전도.
② 자립 선교. 즉, 신자 개개인이 다른 사람에게 성서의 교사가 됨.
③ 자립 정치. 모든 신자들은 그들이 선택한,
봉급을 받지 않는 지도자 아래에서 전도와 교회 경영을 한다.
④ 자립 보급. 모든 교회 건물은 순전히 그 교회의 교인들 스스로 장만하고,
전도인의 봉급은 교회가 조직되자마자 지급하기 시작한다.
⑤ 체계적인 성서 연구와, 모든 활동에서의 성서의 중심성을 관철한다.
성서 연구는 반드시 여럿이 함께 한다.
⑥ 성서의 교훈에 따라서 엄격한 생활 훈련과 치리(治理)를 한다.
⑦ 다른 교회나 기관과의 협력 및 일치의 노력을 계속하며,
최소한 다른 기관과는 지역을 피차 뜻에 맞게 분할하여 전도한다.
⑧ 지역과 프로그램의 분할 이후에는 피차 절대 간섭하지 않는다.
⑨ 그러나 경제나 그 이외의 문제에서는 항상 폭넓게 피차 돕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
  
자진 전도, 자력 운영, 자주 치리(治理)의 이념은,  이미 각국 선교회들에서 제기되었던 바로서,
19세기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개척과 함께 추진했던 토착 교회 육성 방안이었다.
특히 네비우스는, 토착교회의 자립 능력을 강조하여,
선교부의 재정적 도움 없이,
토착 교인들이 토착 전도인들의 봉급과 교회 건축비를 부담하게 유도했다.

또한, 이 선교 정책은 성서에 대한 압도적인 강조와 성서 공부를
강고한 핵심 토대로 삼고 있었다.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대개가
성서의 무오류한(축자적인) 절대 권위를 철저히 신봉하는 근본주의자들이었고,
이 선교 정책 또한 그 바탕 위에서 구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성서를 모든 신앙과 사역의 기초로 강조하고, 성서 공부 모임을 통한 훈련으로,
신자들 및 전체 한국 교회의 성격이 규정되어,
자립, 자치, 자전 또한 귀결로서 파생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선교사들은 각 지방의 교회 지도자들을 배출했고,
이 지도자들은 각자의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며 성서를 가르쳤던 것이다.
(위 원칙의 ⑤항)
이같은 조직적인 성서 공부 제도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주 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이른바 '제자훈련', '셀', '순' 모임 등 처럼,
평신도 리더를 먼저 훈련시켜 이들이 조원들을 다시금 가르치는 방법이었던 바,
이같은 성서 공부 방식이 모든 교회 현장에서 실천에 옮겨져,
초기 한국 개신교회는 설교보다 성서 공부를 더 중시했고,
지금까지도 그 맥은 꾸준히 내려오고 있으며,
(심지어, 대학 내의 소위 '선교단체'들까지도 이 측면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국 개신교회를 규정하는 성서축자적 근본주의 또한, 이로써 철저히 뿌리내린 것이다.

이 원칙들은, 1년 전인 1889년에 조직된
[미국 북장로교 선교 및 빅토리아(호주) 선교 연합 공의회]에서
한국 개신교회에 적용할 가능성이 연구되었다.
그런데, 애초에는 교파간 연합 사업으로 구상되었으나,
이러한 연합 사업에 소극적이었던 남감리교, 성공회, 침례교가 불참하여,
결국 장로교만의 선교 연합 기관이 되었다.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한 장로교단들은,
미국 북장로교, 남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호주 장로교 등)
이 공의회는, 호주 장로교의 데이비스가 죽은 이후, 1893년에,
[장로교 정치 체제 연합 공의회]로 재편되었던 바,
이 공의회의 목적은,
한국에, 개신교 신경(信經)과 장로교 정치를 쓰는 연합 교회를
궁극에 가서 설립한다는 것이었다.

이 [공의회]는, 선교 지역을 분할하여,
남장로교는 전라, 충청, 호주 장로교는 경남,
캐나다 장로교는 함경, 북장로교는 평안, 황해, 경북,
1892년에 이르러서는 북장로교와 북감리교가 합의하여,
한국 전 지역을 지리적으로 분할 책정,
5천명 이상의 읍 정도 이상의 지역은 양 교파가 함께 선교하지만,
그 이하의 지역에서는 기득권을 피차 인정한다는 선에서 지역 분할을 실시했다.

요컨대, 이러한 분할 선교 정책은, 교파간의 선의의 발로였으나,
해방 이후 한국 개신교 분열의 지방적 배경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공의회]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을 바탕으로,
핵심적인 몇 가지 원칙을 첨가 확대하여,
마침내 한국에서의 선교 정책을 정식 채택한다:

① 상류 계급보다는 근로 계급을 상대로 전도하는 것이 좋다.
② 부녀자에게 전도하고, 그리스도인 소녀들의 교육에 특히 힘쓴다.
여성들, 즉 가정 주부들이 후대의 교육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③ 그리스도교 교육은 시골에서 초등 정도의 학교를 경영함으로써
크게 효과를 볼 수 있으므로,
이런 학교에서 젊은이들을 훈련하여 장차 교사로 보내도록 한다.
④ 장차 한국인 교역자도 결국 이런 곳에서 배출될 것이므로,
이 점을 유의하고 있어야 한다.
⑤ 사람의 힘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으로 개종이 가능하므로,
되도록 빨리, 안전하고 명석한 번역 성서를 이들에게 주어야 한다.
⑥ 모든 종교 서적은 외국어를 조금도 쓰지 않고,
순 한국어로 씌어져야 한다.
⑦ 진취적인 교회는 자급(自給)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선교사의 도움을 받는 사람을 되도록 곧 줄이고,
자급하여 세상에 공헌하는 개인을 늘려야 한다.
⑧ 한국의 대중들은 동족의 전도에 의해서 신앙해야 한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직접 나서서 전도하기보다,
전도자들을 교육하는 데 전력을 쏟아야 한다.
⑨ 의료 선교사들은 환자들과 오래 친숙하게 지냄으로써
가르칠 기회를 찾게 되고,
또 깊은 마음의 문제에 골몰하는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약과 치료만으로는 별 효과를 낼 수 없다.
⑩ 병원에서 치료받은 사람은 고향 마을에 자주 오가게 해서,
의료 선교사들의 인애에 넘치는 치료를 본받아,
전도의 문을 열도록 해야 한다.

이 열 가지 원칙과 방법들은,
한국 교회의 발전과 신앙의 형태, 목회자의 지적 수준과 신학,
교회의 형태와 조직 양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같은 선교 정책은, 장로교 뿐만 아니라,  
연합에 불참한, 감리교, 성결교, 성공회, 침례교 등 타 교파 또한
실질적으로 채용함으로써,
그야말로, 한국 개신교를 꼴지은 원칙들로 깊게 자리매김했다.

이 선교 정책으로 말미암아, 교육에서 소외된 민중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여,
한국 사회 전반에 커다란 기여가 되었고,
성서 말씀을 통하여 신앙적으로는 물론이요,
사회적, 민족적으로도 각성하게끔 만든 것도 사실이나,
반면에, 단순한 성서 문자주의와,
신학적 사유의 빈곤, 이와 연결하여,
한국 목회자들의 지적 수준을 낮게 제한하여,
(실제로, 이 정책에 의하여,
한국인 교역자들에게는 고등의 신학 교육을 시키지 않게 되어 있었으며,
선교사들의 인근에 거주하게끔 묶어 두었다)
한국 개신교회의 반지성성과 맹목성, 근본주의적 분파 의식이라는
비극의 씨앗을 뿌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 스스로의 자립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개교회주의를 고착시키고 공교회성을 탈각시켰다는 점,
(여기에 대해서는,
선교사들이 소속된 19세기 서구 부르주아 시민계급의 개인주의와,
이들 선교사들의 섹트적 근본주의 신학에 의해 규정된 '자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이, 당시 선교사들은, 보편적 공교회성에 반하는 선교 정책을 수립, 시행했고,
이 점은 작금의 한국 개신교의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자립과는 반대로,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는,
19세기 미국의 근본주의를 한국인들에게 그대로 강요하고,
선교사들의 서구 그리스도교 우월주의를 견지함으로써,
(사실, 이 선교 정책의 수립에 있어, 한국인들의 참여는 철저하게 제외되었다)
한국 교회의 자율성을 억압하여,
한국 개신교가 식민성과 몰신학성, 시대착오적 근본주의라는 속성에서,
지금까지도 벗어나지 못하게끔 만들었다는 점,
그리고, 자주적 치리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교회 안에 계급 조직이 형성되어, 교회가 이들 임원진에 의해 좌우되게끔 했으며,
자급 운영을 강조하여 교회 재정을 오로지 개교회의 유지와 부흥에만 쓰는 것으로 인식시켜,
복지 등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점 등,
많은 점에 있어,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자급과 자치, 독립을 표방했으나, 실제적으로는,
19세기 서구 자본주의 열강들의, 피식민지에 대한 지배와 수탈로서의 선교의
연속 선상에서 바라보는 편이 더 타당해 보인다.
이같은 선교 정책이,
한국 개신교를 철저하게 꼴지웠고,
그 영향은 한국 개신교의 모든 면에서, 지금도 뼛속 깊이 뿌리박혀 숨쉬고 있다.


* 참고문헌: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82.
박용규, [한국교회 선교 정책으로서의 네비우스 방법]
이덕주, [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 기독교의 역사 I], 서울: 기독교문사, 1989.

[레벨:0]求道者

2007.04.30 05:25:00
*.241.161.130

수고하셨네요.
한국의 개신교 역사를 돌아볼 때,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 보다는,
그들이 끼친 악영향으로 인해 얼마나 화가 나는지...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7.04.30 08:49:15
*.150.14.186

무명재 님, 수고했습니다.
나도 한국교회사를 공부하던 30 여년 전을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정리가 잘 되었군요.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대한 전문적인 평가가 더 있겠지만
어쨌든지 장단점이 골고루 있는 것 같군요.
좋은 점들을 발전시키고,
문제점들을 개량해나갔으면 좋았을 텐데,
오히려 거꾸로 된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핵심은
아마 한국교회의 재정적인 독립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건 좋은 건데
그것이 어떻게 교파주의를 강화시키는 기제로 작용하게 되었는지 궁금하군요.
궁금하다기보다는 안타깝꾼요.
언제나 우리는 공교회성(교회 보편성)을 회복할 수 있으려나.
어쨌든지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들을 연결시킨
무명재 님의 시각이 돋보이는 것 같네요.
수고, 감사.

[레벨:0]sydney

2007.04.30 09:12:29
*.107.153.46

신학교 때 한국 교회사 시간에 이렇게 잘 썼다면 A 학점 받았을텐데.
내가 거의 40년 전에 침례교 선교사에게 직접들은 이야기.
침례교 선교부의 선교비사용 방법이 3 가지가 있는데
선교사들이 현지인들에게
1. 돈 주고 다 맡기는 경우.
2. 돈 주고 영수증 받아 오게 하는 경우
3. 돈 안주고 직접 쓰는 경우

1의 경우는 일본, 2의 경우는 한국, 3의 경우는 아프리카였답니다.

[레벨:1]균형

2007.04.30 15:36:57
*.96.174.252

역사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역사에 대한 평가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당시의 시대로 돌아가서
그 배경과 정황을 이해(해석)하는 작업과 갖습니다.
이 원리에 얼마나 충실하는가가
소설인지, 아니면 역사에 대한 정당한 평가인지를 가늠하는 기준입니다.
역사에 대한 공정한 시각을 담보할수 없다면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바람직 합니다.
한 가지 부탁은,
위 글에서 본인의 글과 인용한 저자의 입장을 구분해서 명시해 주었으면 합니다.

[레벨:0]無名齋

2007.04.30 15:47:31
*.6.213.211

"역사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역사에 대한 평가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당시의 시대로 돌아가서
그 배경과 정황을 이해(해석)하는 작업과 갖습니다.
이 원리에 얼마나 충실하는가가
소설인지, 아니면 역사에 대한 정당한 평가인지를 가늠하는 기준입니다.
역사에 대한 공정한 시각을 담보할수 없다면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바람직 합니다."

- 라신 대목은,
제가 올린 글에 다신 댓글이므로,
필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위의 본문에 해당되는 듯한데,
과연, 해당이 될런지요?

아마도, 균형님께서 원하시는 '공정'성은,
세상 어느 누구도 확보할 수 없을 듯하니,
아예, 공정하게,
저도, 균형님도, 함께 '침묵'함이 어떠할런지요?
저 혼자 공정해지려니(=무장해제하려니),
억울하거든요.

저의 이 말씀이 지나치다고 생각되신다면,
다르게 말씀드리지요.
제가 올린 글이 정당하지 않다고 판단되시면,
부당성을 지적하시거나,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긍정적인 측면들을 논하시면 될 줄 압니다.

[레벨:1]균형

2007.04.30 16:16:27
*.96.174.252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은 무명재님 글에 이미 언급 되었습니다.
다만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주관적인 해석을 기반으로
현재를 이해하려는 구도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지요.
이는 결국 현행 개신교를 비난하기 위한 의도로
역사적인 사실을 차용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만 들지요.
한국교회의 '식민성' 이라니요? '식민'이 무엇을 말하는지 아시지요?
'서 인도 주식회사'의 설립을 통한 대영제국의 영향력 확대라는
곧 식민지배라는 의도 아래
선교사를 파송한 교단이 어디인지 아시나요?
님이 소속되고 관심 갖고 계시는 성공회 곧 그 뿌리인, church of england가 아니던 가요?
그럼에도 개신교 근본주의 계열의 신민지배 야욕의 일환 이라니요?

많은 말을 하기보다는, 새겨 볼 만한 의미있는 한 마디가 더 필요합니다.

[레벨:0]無名齋

2007.04.30 16:21:58
*.6.213.211

성공회가 되었건,
(제가 성공회 소속이라는 점에 착안하신 듯한데,)
북장로교건, 진보적인 캐나다장로교건, 그건 문제가 안 됩니다.
서구우월주의의 식민성이 그대로 이식된, 더 나아가, 한국적 종교성과 습합하여,
그 단점이 더 증폭, 강화된 것을 두고 비판하는 게 부당합니까?
여담입니다만, 성공회 인구가 7천만에서 1억이랩니다.
극단적인 자유주의에서, 극보수 근본주의까지 공존하는 교단이예요.
개혁파(장로교)보다 교세가 더 큽니다. 그러니, 교단 갖고 꼬투리잡지 마세요.
그리고, 제가 성공회에 대한 비판은 기회 닿을 때마다 이 게시판에서 지겹도록 했는데요?

논의의 본질과 무관한,
상대의 신변에 관련된 것을 끌어붙여 비난하는 것,
'인신공격'이라 합니다.
그러하니, 저도 감히 '인신공격' 해 보겠습니다.
'균형'이라는 필명이 썩 어울려 보이지 않습니다.
고명사의(考名思意)라 했거니와, 명실상부한 글쓰기를 부탁드립니다.

조준을 제대로 하시고 반박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말을 하기보다는", 정곡을 찌르는 비판을 하시라는 거예요.
그게 안 되시면, "침묵"하십시오.

[레벨:1]균형

2007.04.30 16:39:41
*.96.174.252

무명재님,
모처럼 여분이 주어 졌으니, 말 동무 해 드리리다.
모르면 배우면 되는 것이고, 오해는 교정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간 본인이 무엇을 말해 왔는지 아시지요.
이 글만 보더라도 특정 신학적 입장에 대한 비난을
역사적인 해석과 연결시키려는 본인의 의도를 스스로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요.
근본주의 등등 열심히 언급해 놓고
이제와서 '서구 우월주의의 식민성'이라 말 바꾸면 곤란 하지요.
특정 교단가지고 이제까지 비난해 왔으면서
새삼 교단 가지고 꼬투리 잡지 말라면
더 이상 할말이 없군요.

인신공격과 정당한 지적을 구분하지 못하는 한계는
아직 '조선'식의 글 쓰기 영향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의 말 장난은 사양합니다.

[레벨:0]無名齋

2007.04.30 16:59:50
*.6.213.211

"더 이상의 말장난"이라.

균형님, 이런 식으로 계속 인신공격을 일삼으시면 곤란합니다.
인신공격이 아니시라면, 난독증이신 게로군요.
제가 뵈옵기에는, 정당한 지적도 아니고,
제 논지를 잘 파악하신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제 논지도 아닙니다.
위의 글 서두에서 밝혔습니다만,
참고문헌들을 짜깁기한 수준이고,
제 말은 몇 줄밖에 안 들어가 있습니다.

교회력에 대한 질문 글에 좀 전에 다시 댓글을 다셨더군요.
그 댓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전례학자들이 그렇게 말하고,
한국 개신교회사 학자들이 이렇게 보는데,
(정확한 인용 주를 붙이지 않은 불찰은 인정하지요)
저더러 추궁을 하십니까?
저도 문헌들을 통해 그러한 학자들께 배우는 사람인데요?
(뭐, 이렇게 말하는 걸 책임 회피로 몰아붙이시려면 그렇게 하시든지요)

"말 동무 해 드리라다"라구요?
나 참, 솔직히 말씀드려 웃깁니다.
제가 쓴 글에 댓글로 먼저 말을 건 쪽은 균형님입니다.

늦은 오후 시간, 피식 웃고 지나갑니다.
타국에서 잘 지내십시오.

[레벨:4]New York

2007.04.30 17:59:05
*.120.19.226

xx당은 오늘 당의 입장을 이렇게 밝혔다.
검찰은 오늘 기자회견에서 입장을 밝혔다..


위정자든
교회를 성공적으로 성실하게 이끄시는 목회자든
다비아의 대표 가족들까지도
자신교를 너무 오래 섬기어 와서
무신(무슨)교가 자신교이고 무슨교가 기독교인지
절대 해깔리니
자신의 입장 밝히는 정치적 행위를 전혀 안 할 수는 없겠지요.

“Verities

Into every life a little ax must fall.
Every dog has its choke chain.
Every cloud has a shadow.
Better dead than fed.
He who laughs, will not last.
Sticks and stones will break you,
and then the names of things will be changed.
A stitch in time saves no one.
The Darkest hour comes.

Kim Addonizio”

적어도 두 분은 아시겠어요?
무엇 하는 짓입니까?

입장 밝히는 것 참는 것:
공부입니다.

왜 그 기회를 놓칠려고 이렇게 노력을 하십니까?

그 좋은 기회를 말입니다.

예수님이 몸소 보여준
공부의 길인데요.

“He who laughs, will not last.”

[레벨:0]sydney

2007.04.30 23:09:19
*.107.153.46

무명제 님과 균형 님!
관전평 좀 하는 것 용서를 구합니다.
두 분 사이에 무엇인가 거시기한 것이 있으신 것 같은데.
거시기는 잘 모르겠고,
우선 무명제님이 네비우스 정책에 대해서 평가할 입장에 있지 않다는 점 입니다.
무명제 님도 스스로 그걸 잘 아시기 때문에 인용에 그쳤지 않나 생각 합니다.
군형 님! '식민성' 이야기는 구태어 무명제 님의 글이 아니더라도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저술 이후 학계의 공통적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명제 님의 글에
냉혹하게 평가한 부분이
보기에 따라서 감정적으로 비쳐지는 부분이 있어 보이지만
문제는 그것이 무명제 님의 의견이냐? 아니면 인용이냐? 만 밝혀지면 된다고 생각 합니다.
어떻튼
네비우스 원칙은 현재 한국교회의 문제점의 근원을 밝히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계속 잡고 늘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분! 밥 먹고 힘 내서
열심히 씨름 좀 해주시기 바랍니다.
구경하면서 배우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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