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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동성애 관련한 질문입니다.

조회 수 2774 추천 수 13 2004.11.26 18:05:09
관련링크 :  

>며칠전에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나온
><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를 재미나게, 감동있게 잘 읽었습니다.
>
>대부분의 진단과 평가에 공감하면서도
>딱 한부분 수긍이 안되는 부분이 있어 질문을 드려봅니다.
>
>수긍이 안되는 내용은
>정용섭 목사님의 글중에
>하용조, 이동원 목사님의 설교내용을 비판하면서
>동성애 부분에 있어서 두 목사님의 설교가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즉,
>성경 말씀을 무조건 규범적인 말씀으로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이것이 동성애에 적용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
>결론인즉
>동성애를 죄 혹은 일탈행위로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
>제가 드리는 질문은
>과연 동성애를 죄로 안보는 것이 올바른 입장인지 이것입니다.
>
>목사님과 같이 동성애에 관하여
>성경 교훈을 규범으로 하여 접근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신다면
>
>기타의 여러 계명들에 관하여는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요?
>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이런 계명들도 규범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을 불허해야 하는지요?

바울의 동성애 비난에 대해서

이길찬 목사님,
대다수의 독자들은 아무리 궁금하거나 다른 생각이 있더라도 직접 질문하는 경우는 드문데, 목사님은 이렇게 홈피에 회원으로 등록하는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질문하셨습니다. 원래 목사님이 찜찜한 대목은 끝까지 해결을 보는 성격 때문인지, 아니면 이 문제가 특히 민감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저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질문을 받고 보니 약간 당황스럽기까지 합니다. 내가 설교비평에서 동성애 문제를 다루기는 했지만 그 주제를 구체적으로 다루었다기보다는 동성애자들을 향한 하용조, 이동원 목사님의 태도를 문제로 삼았을 뿐입니다. 동성애에 대한 적극적인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은 가운데 성(性)적 마이너리티를 향한 설교자의 공격적인 태도가 바로 청교도적 근본주의에 의한 결과라는 점을 밝힌 것뿐입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질문은 그런 맥락보다 훨씬 더 들어가서 동성애 자체에 대한 나의 생각을 물어보셨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상황 가운데서 직접 다루기 힘든 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았기 때문에 좀 당황스럽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아마 기독교 윤리신학자들 중에서도 이 주제를 정식으로 다룬 분들이 그렇게 많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안락사, 폭력, 이혼 같은 문제들을 제법 다루어지는 것 같은데 동성애 문제는 예민하기 때문인지 논의가 활발하지 않습니다. 어쨌든지 그 설교 비평에서 내가 동성애 자체에 대한 가치 평가를 실증적으로 내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동성애자들을 간접적으로나마 비호한 흔적이 있으니까 목사님의 질문에 대해서 대답해야겠습니다.
목사님의 지적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동성애를 비난하고 있는 성서 윤리를 (절대)규범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가? 둘째, 만약 동성애에 대한 비난을 규범으로 가르치지 않아야 한다면 그 이외의 모든 계명들까지 해체되는 것 아닌가? 만약 우리가 이런 주제를 본격적으로 담론의 장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하면 신학대학원에서 한 학기 정도 다루어도 충분하지 못할 것입니다. 윤곽만 잡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동성애를 비난하고 있는 텍스트를 분석하기 위해서 성서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을 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성서를 문자의 차원에서 오류가 없는 문서로 보는지, 아니면 분명히 유대인들의 역사라는 한계를 안고 있는 문서로 보는가에 대해서 생각해야만 합니다. 동성애는 바로 인간의 문제이니까 성서의 인간론으로부터 시작해서 헬라인들의 인간이해, 중세기와 근대주의를 거치는 인간론에 대해서 기본적인 것이라도 더듬어보아야 합니다. 동양의 인간론도 역시 우리의 대화에 필요한 요소들입니다. 신약성서에서 동성애를 비난한 대목은 대표적으로 로마서 1장에 기록된 텍스트니까 신약성서 시대의 로마 윤리관과 바울의 윤리관에서 대해서 어느 정도는 검토해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바울보다는 예수님의 생각에 더 귀를 기울어야 하겠지요. 왜 예수님은 동성애에 대해서 비판한 적이 없을까요? 물론 예수님이 동성애에 대해서 아무런 가르침이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우리가 동성애를 변호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약간 간접적인 예이긴 하지만 간음한 여자를 향해 돌을 던지려고 마음먹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인간이해가 우리에게 더 중요할지도 모르죠. 어쩌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가 집중하고 있는 모든 것이라 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합니다. 인간의 행동에 대한 가치론적 판단은 늘 상대적인데 비해서 하나님 나라는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 기준이니까 그렇습니다. 약간 인문학적 관점에서도 우리가 고려해야 할 요건들을 끝이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도대체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성’이란 무엇일까요? 왜 인간의 성적 욕망은 폭발적인 힘으로, 또는 파괴적인 방식으로 작동할까요? 우리가 침팬지의 공동생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가장 우월한 수놈이 나머지 수놈을 억압하고 혼자서 암놈 침팬지를 독점하는 것은 개체의 성적 욕망이면서 동시에 침팬지가 종족을 보존하기 위한 본능일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인간에게도 성적 욕망이라는 것은 그런 차원에서 우리의 이성을 무력하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한다고 보아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겠지요. 인류학 공부도 우리가 동성애 문제를 다룰 때 도움이 됩니다. 어떤 종족은 귀한 손님이 왔을 때 딸과 잠자리를 함께 하게 합니다. 이슬람권은 오랫동안 일부다처제를 용인해왔습니다. 지금도 몽골의 어느 유목민들은 일처다부제로 살아간다고 합니다. 사실 아브라함이나 야곱 같은 성서의 족장들도 둘이나 네 명의 여자와 살았으니까 이런 제도 자체는 인간의 윤리를 다룰 때 그렇게 절대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아마 목사님은 제가 질문의 핵심을 피하기 위해서 변죽을 울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럴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위에서 동성애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요소들을 두루 짚은 것은, 그것도 충분하게 짚은 것은 아니지만, 동성애 문제를 회피하기 위한 게 아니라 설교자가 해석해야 할 성서의 주제와 가르침들은 단지 배타적인 도그마로서가 아니라 보편적인 진리의 차원에서 접근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서의 전승과 그 역사에 참여한 개인이나 민족이나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모두 우리와 똑같은 본능, 이성, 한계, 허무, 희망 등등, 이런 실존 안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전제한다면 이 세계와 삶, 역사 전반에 걸친 깊은 이해와 인식을 통해서만 성서가 바르게 풀린다는 사실은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공연히 뜸을 많이 들인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의 공동 관심사로 직접 들어가겠습니다.

바울이 비난한 동성애 문제가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규범으로 적용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내 쪽에서 작은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목사님은 성서에 대한 ‘축자영감설’을 지지하고 있으신가요? 오늘 극단적인 근본주의자들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하나의 오류도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습니다. 성서를 절대적인 것으로 믿지 않는 신자라고 한다면 참된 기독교 신자라고 할 수 없는 반론이 가능하긴 합니다. 상투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교회 목회자들은 신자들의 당연한 질문에 대해서 답이 막히는 경우에 “기독교는 이성이 아니라 믿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윽박지릅니다. 일종의 ‘신앙 일원론’이 안고 있는 무모성과 독단성에 대해서는 여기서 왈가왈부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기독교의 신앙론에서 핵심은 신앙하는 사람의 주관적 경험이 아니라 신앙해야 할 그 대상이라는 사실만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믿을만하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것이지 그럴만한 근거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믿는 게 아닙니다. 믿을만한 근거가 없는데도 믿는 현상은 건전한 믿음이 아니라 일종의 광신에 불과하지요. 그런 광신을 우리는 영생교, JMS, 또는 전도관과 통일교를 비롯한 온갖 사이비 종교단체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기독교 신앙의 보편적 지평을 확보하기 위해서 헬라철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정도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설교자들도 신자들의 주관적인 감정과 심리의 차원에서만 믿음을 강요할 게 아니라 그들이 믿어야 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보편적 해명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성서 역사 비평 시대를 지나왔기 때문에 그것을 문자의 차원에서 믿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 이야기가 너무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느 정도의 수준에서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좀 장황하게 보이더라도 일단 이해를 바랍니다.
이런 성서의 역사 비평 문제를 떠난다고 하더라도 성서는 결코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는 성서를 문자의 차원에서 무조건 따를 수는 없습니다. 성서 자체가 진술하고 있듯이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은 죽습니다. 죽은 사람만이 하나님을 직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서에 묘사된 하나님과 그 사건은 하나님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간접적인 경험의 진술입니다. 예컨대 유대인들은 출애굽 사건을 하나님의 계시사건으로 인식했습니다만, 우리가 아무리 좋게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출애굽 사건이 곧 하나님 자체는 아닙니다. 이사야는 성전 안의 스랍 환상을 통해서 어떤 신비한 힘들을 경험했으며, 엘리야는 세미한 음성에서 그런 신비한 힘을 경험했습니다. 성서에 묘사된 하나님 경험이 시대와 형편에 따라서 각양각색인 이유는 그런 모든 경험이 하나님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전승에 참여한 개인과 공동체는 자신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인식하려고 최선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경험과 인식들은 시대를 초월하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의 역사적 한계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것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경험들에 오류가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역사적 한계를 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뿐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먹을 수 있는 음식과 철저하게 거부된 음식을 구분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성서의 인식과 경험이 역사적 한계를 안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이었고 또한 옳았지만 역사적 초월하는 진리는 아니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가장 결정적인 사실만 하나 더 지적하겠습니다. 광야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을 정복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의 모든 사람의 씨를 말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대목에서 야훼 하나님은 곧 전쟁의 신처럼 인식됩니다. 요즘 어느 교회는 이런 성서 사건을 따라서 ‘여리고 함락 작전’이라는 선교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코미디 같은 일들이지요. 가나안 원주민들과 광야에서 유목생활을 거쳐 온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이제 ‘제로섬’ 게임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대화와 타협이 아니라 오직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선택만 남아있던 그 상황에서는 남녀노소를 죽이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정당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역사적 한 순간에만 타당한 것이지 그 역사의 자리에서 한 발작만 움직인다면 6백만 명의 유대인을 죽인 히틀러 집단의 행동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위에서 언급하고 있는 논점의 핵심은 성서 텍스트가 역사를 초월하는 무오류의 문서가 아니라 역사를 통해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간접적인 경험에 대한 진술이라는 점입니다. 비록 그 문서에 민족적이고 역사적인 한계가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하고 믿는 데 아무런 걸림돌도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한계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인격(자유)에 의해서만 활동하시고 계시하신다는 반증입니다. 그 성서를 읽는 우리는 그 성서에 진술되어 있는 문화와 역사에 치중할 게 아니라 그런 방식으로 경험된 근원, 즉 야훼 하나님에게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텍스트 자체에 묶이는 게 아니라 텍스트가 가리키고 있는 근원을 포착하는 입니다. 동양식의 비유로 설명한다면 성서는 ‘달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입니다. 손가락은 각양각색일 수 있지만 그런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은 하나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손가락만 보고 그것을 달이라고 고집을 피운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과 더 이상 대화할 수 없습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그 성서의 전승에 참여한 민족이나 개인의 신앙을 배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영적인 관심을 집중해야만 합니다. 간혹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치켜세우는 일이 많은데, 엄격하게 말한다면 그런 성서읽기는 여전히 핵심을 놓치는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도 역시 야훼 하나님이 중심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이삭을 제물도 바치려고 했다는 사실이 그렇게 좋은 믿음일까요? 성서는 오히려 그의 그런 태도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을 아닐까요? 물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인정했다는 사실을 로마서에서 지적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아브라함의 믿음이 인정받을만한 것이었지 그의 모든 행동이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성서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일까요? 왜 우리가 성서를 읽고 거기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까요? 성서는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있습니다. 성서는 단지 문자의 차원에서 자동적으로 절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정당한 해석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해석’되어야 한다는 이 말은 그렇게 이상한 게 아닙니다. 이미 성서 자체가 성서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다른 경우는 접어두고 예수님도 구약의 말씀을 문자의 차원에서 수용한 게 아니라 새롭게 해석하셨습니다. 그런 해석이 바리새인들의 구미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소모적인 갈등을 유발했지만 예수님이 율법을 새롭게 해석한 것은 분명합니다. 텍스트가 해석을 통해서 계시의 사건이 된다는 것이 바로 에벨링과 푹스가 말한 ‘언어사건’ 개념입니다. 성서의 언어가 죽은 문자에 머물지 않고 해석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다시 가다머(Gadamer)의 용어로 바꾸어 말한다면 해석을 통한 ‘지평융해’입니다. 제가 여기서 목사님을 이런 해석학에 관한 학문적인 논의로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실 저도 이런 주제에는 전문적인 이해가 없습니다. 다만 상식적인 차원에서 가다머가 말하는 ‘지평’이라는 개념은 성서를 해석해야 할 설교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만은 지적하고 싶습니다. 모든 뛰어난 작품들은 그것의 지평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문학이나 철학작품, 그림과 음악, 모든 것들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성서는 두 말 할 것도 없습니다. 아마 성서는 유대민족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독특한 세계 이해라는 지평이 녹아 있겠지요. 그런데 그런 지평은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변화됩니다. 초기 기독교의 구원과 세계 지평은 2천년의 역사를 흘러오면서 오늘 우리에게까지 변화되어왔습니다. 이제 2천년, 혹은 3천년 전의 성서 텍스트의 구원 지평은 비록 고대인의 낡은 틀 안에 들어있지만 그것으로 고정되거나 완료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지금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제 그 고대의 텍스트를 접하는 오늘 우리가 우리에게 새롭게 열린 지평 안에서 성서의 지평을 받아들인다면 이 두 지평은 융해됩니다. 융해라는 말을 쉽게 풀면 ‘소화’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위에 밥과 반찬이 들어가서 소화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융해가 일어나면 이 두 지평이 포착하지 못했던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됩니다. 밥과 반찬이 소화되어 포도당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목사님, 그럴듯하게 말해보려다가 공연히 학문적인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그래도 인내심을 갖고 읽어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해석’이라는 작업입니다. 성서 텍스트는 해석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해석이 있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말일까요? 그런 뜻은 아닙니다. 해석이 없는 성서는 은폐된 말씀에 머물러 있습니다. 해석을 통해서만 탈은폐의 사건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어쨌든지 이런 정도의 논의를 통해서 우리가 도달한 자리는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성서 텍스트는 해석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해석학’에 관한 이야기가 좀 있어야 하겠지만 다시 이론적인 쪽으로 흐를 것 같아서 그만 두고, 아무래도 ‘동성애’ 문제로 직접 치고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 목사님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을 테니까요.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동성애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더라도 이런 정도로 내 설명을 끝내더라도 목사님께서는 이미 저의 생각을 충분히 파악했을지도 모르죠. 그래도 가능한대로 ‘끝’은 보아야하지 않겠어요?
바울은 로마서에서 동성애 문제를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타락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부끄러운 욕정에 빠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여자들은 정상적인 성행위를 버리고 남자까지 정욕의 불길을 태우면서 서로 어울려서 망측한 짓을 합니다. 이렇게 그들은 스스로 그 잘못에 대한 응분의 벌을 받고 있습니다.”(롬 1:26,27, 공동번역). 비록 바울이 동성애(homosexuality)라는 직접적인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않지만 누가 읽더라도 이 본문은 동성애에 대한 묘사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동성애 현상을 비난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설교자라고 한다면 텍스트를 꼼꼼하게 따져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 동성애를 죄(Sin)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죄의 결과라고 진술합니다. “인간이 이렇게 타락했기 때문에 ...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26절). 인간이 타락한 결과로 이런 망측한 짓을 한다는 진술만 보더라도 바울은 여기서 동성애라는 주제를 다루는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것을 논증하기 위한 하나의 자료로 이 문제를 제시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 근원적인 것은 죄, 곧 인간의 타락입니다. 그 타락의 결과는 동성애 이외에도 부정, 부패, 탐욕, 악독, 시기, 살의, 분쟁 등등, 여러 형태로 나타납니다.
본문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동성애를 다루고 있는 본문이 포함된 로마서 1:18-32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죄는 곧 우상숭배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똑똑한 체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습니다. 그래서 불멸의 하느님을 섬기는 대신에 썩어 없어질 인간이나 새나 짐승이나 뱀 따위의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욕정대로 살면서 더러운 짓을 하여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22-24).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죄의 본질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물들어 있는 이방인들이 동성애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부패에 연루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방인의 우상숭배만을 언급하는 게 아니라 유대인들의 율법주의까지 문제 삼습니다. 이방인들의 우상숭배나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나 한결같이 인간의 죄인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결국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줄 뿐이라는 게 바로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입니다. 제가 여기서 강조하려는 바는 바울의 진술이 동성애 자체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설교자들이 성서 텍스트를 읽을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은 저자의 근본적인 의도를 놓치고 지엽적인 것을 중심적인 것으로 끌어들인다는 데에 있습니다.
신약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바울은 그 당시의 일반적인 로마 성윤리에 근거해서 본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은 이 동성애 문제를 신앙의 근본 문제로 삼아 깊이 성찰했다기보다는 그 당시에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던 건전한 윤리관에 근거해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을 뿐입니다. 로마 시대의 동성애는 여기서 모두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한 사정을 안고 있습니다. 원래 헬라인들은 출산을 목적으로만 아내와 성관계를 나누었고, 대신 소년이나 젊은이들과 여러 방식의 연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플라톤도 성인 남자와 소년과의 그런 관계를 가장 완전한 사랑의 상태로 묘사했습니다. “플라토닉 러브”라는 단어는 거기서 유래했습니다. 그런데 로마 시대로 접어들면서 이런 동성애 현상이 그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게 아니라 상대방을 괴롭히는 방향을 전개되었습니다. 세네카는 정욕에서 나온 동성애의 관습이 사치와 도덕적 방탕에 연관된다고 보았으며, 플르타크도 역시 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로마 도덕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동성애는 사치와 방탕에 연관된다는 점과 가학적이라는 점에서 크게 비난받아야만 했습니다. 아마 오늘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동성애자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헬라 시대의 동성애와 로마 시대의 동성애는 좀 구분되어야 하는데, 바울은 당연히 로마의 동성애 현상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우상 숭배의 결과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그래도 동성애는 나쁜 게 아니냐, 하고 질문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성서 텍스트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설교할 때 이런 점에서 상당히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은 여성들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머리를 그대로 드러내지 말고 너울로 가리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습관은 그 당시 고린도의 특수한 상황에서만 타당한 것이지 지금까지 유효하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가르침 자체가 잘못된 것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바울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지만 그것이 곧 우리에게도 여전히 최선이 될 수 없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합니다. 이런 문제는 앞에서 ‘해석’ 문제를 다룰 때 어느 정도 언급했기 때문에 그만 두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바울의 동성애 언급도 그가 이것을 핵심적인 주제로 다루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로마의 특수한 상황에서 진술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을 새롭게 이해해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일종의 ‘규범’으로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우선 달라스 남감리교대학교에서 신약학을 가르쳤던 퍼니쉬(Victor Paul Furnish)의 <바울의 네 가지 윤리적 교훈- 결혼, 동성애, 교회와 여성, 정치, 이희숙 역, 종로서적, 1994>에서 제시된 결론을 간단하게나마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로마서 1:26,27을 취급해야 할 기준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내립니다.
1) 바울은 그의 교회들에게 동성애의 주제에 대하여 직접적인 가르침을 주는 게 아니기 때문에 현대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이 동성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답을 거기서 찾을 수 없다.
2) 바울이 동성애의 심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을 현대는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바울시대와 달리 오늘은 동성애의 심리적 요소, 사회적 요소, 생물학적 요소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3) 동성애에 관한 바울의 근본적인 관심은 오늘 우리에게 역시 유효하다. 즉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비참한 상태에 대한 바울의 언급은 오늘 우리에게 타당하다는 말이다.
4) 동성애 행위에 관한 바울의 언급은 그것과 관련이 있는 보다 넓은 신학적 맥락을 간과한 채 단독으로 취급하면 안 된다. 동성애는 죄 자체가 아니라 ‘죄의 징후’로 볼 수 있는 다양한 악의 하나로 언급되어있다. 결국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은 모든 인간의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저는 퍼니쉬의 대답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말하려는 논점은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바울이 동성애를 중요한 신학적 이슈로 삼고 있지 않다는 게 하나이며, 이런 문제는 전체적인 신학 안에서 해명되어야 한다는 게 다른 하나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기본적인 자세를 유지하기만 한다면 “동성연애는 하나님의 저주입니다.”(하용조)라거나 “이 시대에 이런 성적인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에이즈입니다.”(이동원)라고 공격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동성애가 생물학적 요인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현상이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질지도 모릅니다. 사회 심리적 요인에 의한 현상일지도 모릅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오늘의 동성애자들이 로마 시대의 동성애자들처럼 사치와 정욕에 치우쳐 있다거나 상대방을 학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성적 취향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과 상대방의 삶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정직하게 살아간다면 아무도 바울의 비난을 그들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없습니다.

이길찬 목사님, 제가 앞으로 언급해야 할 부분이 상당히 남아 있긴 합니다. 동성애 자체에 대한 해명도 더 필요하고, 더구나 성서의 다른 계명들도 역시 ‘규범’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말인가, 하는 목사님의 질문에도 대답해야 합니다. 미안하지만 이런 정도로 끝내야 하겠습니다. 별로 하는 일도 많지 않은데 시간이 좀 부족하군요. 다음에 시간이 주어지면 나머지를 보충해보겠습니다. 목사님의 질문 덕분에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어서 감사드립니다. 마무리하지 못한 부분과 아울러 동성애 문제까지 포함해서 모든 기독교 교리에 대한 저의 기본적인 입장을 한 마디 하는 것으로 이 글을 끝낼까 합니다. “성서와 기독교의 도그마는 잠정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종말론적인 시각으로 인간과 세계와 역사를 보편적 진리의 지평에서 끊임없이 해석해나가야 한다. 진리의 영인 성령이 우리에게 깨우침을 주시리라.”




비슬산

2004.12.03 11:33:10
*.75.68.154

귀한글 잘 읽었습니다

이곳의 여러내용들을 함축한 글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말씀을 이해하고자 할때

가장 기본적으로 인식하고 있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이던 몰랐던간에 교회가 외면하고 있는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므로 나타나는 심각한 폐해들을

최근의 보수적 교회단체들의 엉뚱한 행동들을

통해서 우리는 잘 보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이데올로기로써 성경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곳의 소중함이 다시금 생각나는 하루입니다

좋은날들 되십시요..

[레벨:12]들꽃처럼

2008.10.12 11:25:19
*.152.85.102

인간세상에 난무하는 惡 때문에 신의 존재자체를 부정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목사님의 정리된 말이 없을까.... 찾다가 이 글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다비아를 알게된지 몇 달 된 것 같습니다.
부끄럽지만 다비아 마당 에서 언급되는 신학자들의 저술은 물론이고 이름조차도 저에겐 무척 생소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마당에 들어오면 제 맘에 불이 붙습니다.
동성애에 대한 답 때문에 끌어들이시는 도입부에서 제가 대하던 신학과는 다른 틀에 압도되는 군요...

더 길게 써봐야 괜히 목사님 시간만 뺏을 것 같아 이만 합니다.
여러가지 의욕을 갖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평화.

[레벨:18]은나라

2016.09.03 19:12:17
*.105.196.251

그동안 그렇게도 이해가 되지 않았던 단어와 설명들이 오늘 이 긴 글로 한꺼번에 이해가 됩니다.

단편적으로만 이해되었던 동성애 문제나 성서를 어떻게 볼 것인지? 등등

생각지도 않은 보물창고를 발견한 기분입니다.

예전의 질답 내용들을 이렇게나 많이 모아놓아 주셔서 저같이 멍청한 사람에게도 깨우침과 이해의 기회를 주시니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지평이 도대체 뭔지? 탈은폐는 뭔지? 참 이해가 안가서 답답 했는데..

누굴 붙잡고 물어 보기도 좀 난해하고, 대답해 줄이도 마땅히 없고, 신학책을 읽어도 뭔말인지 잘 모르겠고..

그랬는데.. 아주 조금 이해 됩니다.

기독교 역사를 왜 알아야 하는지? 도 조금 알게 됏구요.

우리가 지금까지 교회에서 배운 죄들이 죄의 결과라는 것에 대해 정확히 이해가 안됐는데..

이젠 이해가 됩니다.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주말 저녁 되셔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6.09.03 21:41:45
*.164.153.48

은나라 님은 어떻게 2004년에 쓴 글을

찾아서 읽으시는지요.

덕분에 12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했습니다.

복된 주일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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