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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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렘브란트의 <예언자 안나> 입니다.
안나는 누가복음 2:36-38 에 등장하는데
7년 간의 결혼 생활 후에 젊어서 과부가 된 후 84세가 될 때까지
성전에서 기도하며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린 인물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녀의 삶은 기구하며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막연한 것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그런 삶입니다.
렘브란트는 아무런 배경이 없이 적막한 어둠가운데 화면 가득히 안나를 그렸습니다.
이 모습 이대로 이 여인의 나이만큼 같은 자세로 살아오며 메시아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녀에게는 아무런 배경도 없는 현실의 어두움들이 그대로 표현이 된 것 같습니다.
특히 렘브란트의 하이 라이트가 앞에서가 아니라 뒤에서 주어지는 것이 의미심장해 보입니다.
안나의 굳건히 메시아를 기다리는 삶이,
그 삶의 백 그라운드가 바로 주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말하는 듯 합니다.
계시가 눈 앞에 확연히 드러나는 것과는 달리
본인은 알 수 없으나 계시로 부터의 추동력이 그녀의 삶을 밀어가는 것같은...
그리고 안나의 망토 표면에 하얗게 드러나는 반사광의 흔적은
바위덩이를 살포시 덮은 눈처럼으로도 생각되는군요.
그녀의 초라한 삶에 비하여 선연한 붉은 망토와 황금빛 두건은 어울리지 않는 듯 합니다.
그녀에게 단지 아름다운 표현으로써 이런 의복을 두르게 하였을까요?
하지만 저에게는 그녀의 망토와 두건이 많은 위안을 줍니다.
비록 평생을 과부로 늙어간 안나이지만
하나님의 세계에 거하는 내면적이고 영적인 기쁨을 표현한 것 같아서 말이지요.
유대에서는 고아와 과부를 늘 하층민으로 돌보아야할 사람들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림에서처럼 안나가 저 두터운 하나님의 책을 읽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드는데,
렘브란트는 메시아가 나타날 것이라는 계시를 저 책으로 형상화하였다고 생각해봅니다.
특별히 책의 한자한자를 자세히 묘사한 것과는 대비가 될 만큼
안나의 얼굴의 형체는 미미하게 표현하여서 눈, 코, 입조차 구분이 안됩니다.
이는 그녀의 삶이 개인적이거나 자기 중심적이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를 충실하게 살아갔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군요.
성서의 인물에서 존재감이 느껴지지않던 안나의 영성의 귀함을
알아간다는 것에 제 안이 조금씩 환해지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보배롭다고 표현하고 싶어지는군요.
이미 오신 메시아를 기념하는 성탄을 앞둔 때에
다시 오실 메시아를 기대하는 마음이 새로와지기를 바라며...
웃겨님, 공감하시니 제가 잘못 적은 건 아니라서 안심이어요..^^
댓글 마지막에 말씀하신 것처럼
존재의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여성의 관점에서도
아주 고무적인 그림입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컬렉터들이 '책을 읽는 여자'라는 제목하에 모은 그림들 사이에도
자리를 하더군요.
책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는 사고방식 하에서
특별취급된다는 자체가 참....^^
제가 예전에 대학부에 다닐 때
성서의 인물을 별칭으로 갖는 것이 유행이었지요.
모두들 이쁘고 능력있는 이름을 다 차지해버려서
(에스더, 드보라...)
저는 가질 이름이 없었는데,
어느 선생님이 행자 자매는 안나 하라고 하시더군요.
흣...저는 기겁을 했지요.
그녀의 인간적 삶이...아시잖어요.
그러나 지금에서는 인간적 운명이야 어떠하든
안나의 그 기다림, 지금은 종말에 연결지은 기다림이야말로
가치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점점 드는 중입니다..^^
세상의 모든 여성에게 위안이 되는...
들뢰즈와 라깡을 빌려
들뢰즈의 탈주는 '무엇-되기'를 통해 이루어내죠. 탈주는 들뢰즈의 핵심 개념이죠.
이른바 '동물-되기'가 그 대표인데.
그런데 그 '무엇-되기'에 남성의 '여성-되기', 여성의 '여성-되기'는 있는데
'남성-되기'는 아예 없죠.
여성만이 들뢰즈가 원하는 '무엇-되기'가 가능한 소수자에 속하죠.
프로이트는 외디푸스에서 남근만을 성으로 인정해 엄청 공격당하죠.
라깡도 성차 공식에서 여성의 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죠.
근데 라깡은 남성과 여성을 결정하는 것은 팔루스의 결여 여부가 아니라
주이상스의 유형이라 말하죠.
라깡에 따르면 남성의 팔루스적 주이상스와 달리
여성은 타자적 주이상스를 가지죠.
여성의 경우는 이 타자적 주이상스를 위해 팔루스적 주이상스를
포기할 필요가 없다하죠.
이게 라깡의 성차 공식이 말하는 바죠.
즉 남성이란 이것 아니면 저것, 둘 중 하나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 반면
여성은 둘 다를 가질 수 있는 존재죠.
여성이 훨씬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죠...
계속 그림이 두 개가 올라가는군요..
무슨 문제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