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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카레라스의 ‘Panis Angelicus(생명의 양식)’을 듣고

나는 음악과 미술에 대해 문외한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니 알지 못하는 세계인 음악과 미술을 감상하러 가끔 미술관과 음악 콘서트에 간다. 종교 음악과 종교 미술이 내게 큰 감응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제 종교 음악과 종교 미술뿐만이 아니라 모든 음악과 미술, 심지어 유행가까지 즐겁게 감상한다.

음악과 미술을 감상하게 된 계기가 있다. 언젠가 어느 목사님의 집에서 음악을 한 곡 들었는데 내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 목사님은 딸이 성악을 전공하여 집에 음반이 많이 있었다. 내가 방문한 그 날 내게 운명과도 같은 그 곡을 틀어주셨다. 나는 그 곡을 들으며 성악이 자기 과시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로맨틱한 힘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를 사로잡았던 그 곡은 스페인 출신의 호세 카레라스의 ‘Panis Angelicus(생명의 양식)’이었다.

그 곡을 처음 들었을 때 나를 엄습했던 그 거룩함이 아직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루돌프 오토가 이야기했던 누미노제(numinose)’의 경험이었다.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 선 모세처럼 나는 그 음악을 통해서 거룩함을 마주했고 하나님께로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었다. 인간의 즐거움을 위한 인간의 창작물로서의 영역을 넘어선 음악의 또 다른 힘을 체험했다. 애초에 음악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인간과 소통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이었던 것이다.

오병이어의 사건 이후에 주님은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6:35)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6:51)라고 말씀하셨다.

‘Panis Angelicus’는 우리 말로 생명의 양식으로 번역되었지만 원래는 천사들의 빵이라는 의미이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635절과 51절에서 말씀하신 생명의 떡, 즉 영생하게 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노래를 천사의 빵이라고 하지 않고 생명의 양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 곡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찢기신 예수의 몸이 우리를 구원하는 빵이 되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가 우리를 구원하는 잔이 된다. 그것이 우리의 영혼의 양식이며 천상의 양식이다. 그 양식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이 살고 우리의 인생이 살게 된다.

그 곡의 가사를 보자.
Panis angélicus fit panis hóminum: 천사의 양식은 우리 양식 되고

dat panis cǽlicus figúris términum: 천상의 양식을 우리게 주시네

O res mirábilis! mandúcat Dóminum: 오묘한 신비여, 가난한 주님 종이

pauper, servus et húmilis: 주님을 모시는 커다란 이 감격

임마누엘의 은혜로 낮아지신 예수를 통해 낮고 비천한 우리가 천사들의 양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오묘한 신비요 커다란 감격이다. 하지만 오늘날 특히 한국교회의 일원들 중에 그 신비와 감격을 진정 체험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6:35)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4:14)을 먹고 만족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생명의 말씀(요일 1:1, 6:68)이신 그분을 향한 굶주림과 갈급함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육신의 굶주림과 배고픔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평생 가장 배고팠을 때와 가장 목말랐을 때를 떠올려 보는 것이다. 배고픔과 목마름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고통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육신에 비하면 우리의 영혼의 감각은 날 수 없는 새만큼이나, 두더지의 시력만큼이나 퇴화해 있다.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 영혼의 감각을 다시 깨워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독하게 육신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는 육신의 감각을 통해 영혼의 굶주림과 갈급함을 회복할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가장 배고프고 목말랐을 때보다 더 예수님을 사모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된다. 또한 가장 배고팠을 때 처음 먹었던 그 음식을 기억할 것이다. 가장 목말랐을 때 처음 들이켰던 그 음료를 기억할 것이다. 가장 배고팠을 때 그 배고픔을 달래 주었던 음식처럼, 가장 목말랐을 때 갈증을 해소시켜 줬던 그 물이나 음료처럼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에 감사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자. 그러면 점점 우리의 영적 감각이 깨어나게 될 것이다.

반면, 우리의 몸과 마음의 감각은 매우 예민하게 날이 서 있다. 조금만 배고파도 짜증이 나고 조금만 목말라도 마실 것을 구한다. 예전에 비해서 너무 쉽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구할 수 있기에 우리가 그 배고픔과 갈급을 모를 뿐이지 육신의 욕망은 더욱 자극적으로 변하고 있다.

육신의 욕망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생명의 양식과 생명수의 샘물로 우리의 영적 배고픔과 갈급함이 먼저 채워져야 한다. 왜냐하면 육신의 감각은 사망이요 영의 감각은 생명과 평안이기 때문이다(8:6). 육신의 감각에서 영의 감각으로 돌이키는 것이 바로 회개이다. 회개라는 단어 ‘metanoia’는 생각이나 감각을 돌이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회개함으로 육신의 감각에서 영의 감각으로 돌이켜 생명의 양식이시고 생명수의 샘물이신 주님의 말씀을 먹고 마셔야 한다.

생명의 양식, 생명수의 샘물은 바로 우리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숨결, 예수님의 흔적, 예수님의 향기, 예수님의 살과 피, 예수님의 미소, 예수님의 눈물, 예수님의 탄생, 예수님의 삶, 예수님의 발걸음,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의 승천을 비롯한 예수님의 모든 것을 다 받아들여야 한다. 먹는다는 것은 그것을 의미한다. 온전히 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먹는다는 것은 입으로 섭취해서 배가 부르는 것만이 아니라 완전히 내 안에서 소화되어 나의 일부가 됨을 의미한다. 머리로만, 경험으로만, 몸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 존재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먹는다는 행위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스스로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이 되셨다.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고)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고) 살리라”(6:57)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먹는다는 헬라어 단어 ‘trogo’는 씹어 먹다(masticate)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그분께서 거듭난 새사람 안에 생명의 방식으로 흡수되실 수 있도록, 그분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우리가 받아들인 그분으로 말미암아 재조성되어 산다. 이런 방식으로 부활하여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신 주님은 우리 안에 사시면서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을 넘치게 공급하여 주신다(14:1-20, 벧후 1:7, 1:19. 3:5). 그로 인하여 우리의 영혼은 살아나 우리는 생명 안에서 생명으로 살게 된다.

생명의 양식을 먹고 사는 그 오묘한 신비와 커다란 감격을 호세 카레라스의 ‘Panis Angelicus(생명의 양식)’을 들으면서 조금 더 가까이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24.08.26 18:47:09
*.137.91.200

저도 오늘 호세 카레라스 음성으로 저 노래를 들어봐야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으로요.

profile

[레벨:15]들길

2024.08.27 14:28:20
*.48.181.162

예전 새벽기도 다녀 오던길, 마침 차에서 내리려는 찰라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처음들어보는 호세카레라스의 ‘생명의 양식’에 얼마나 감동이었던지 

새벽 여명의 어스레한 풍경과 더불어 감동은 배가 되었어요

이 노래만 들으면 늘 그날의 그 새벽 풍경과 신비한 감동이 고스란히 되풀이 되곤 합니다

좋은 글과 함께 다시 노래 듣고 있으니 지금도 그때 그느낌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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