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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소요유(逍遙遊) - 놀고 놀고 놀다
내가 비슬산 정상의 천왕봉, 조화봉, 대견봉이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고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가 온전한 하나를 감춘 듯 적나라하게 노출된 이곳 대견봉 아래 깃들게 된 지가 벌써 햇수로 20년이 넘었다. 비슬산에는 유명한 절이 셋이 있는데 대구 달성군 옥포읍의 용연사, 대구 달성군 유가읍의 유가사, 청도군 각북면의 용연사가 있는데 나는 용연사 옆의 대동골에 자리잡았다.
웅자한 정상, 삼태극(三太極) 휘하의 대견봉이 내가 사는 이곳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를 돌보고 살피시는 산신 할매인 셈이고, 그로부터 왼쪽 너머로 비슬산의 주능선에 포르테를 찍고 있는 한 무더기의 암석들이 세계 문화 유산이 되어 뽐내고 있다. 대견봉 능선을 따라 오른쪽으로 감고 떨어지면 움푹 패인 폭포가 셋이 있는데, 이것이 길이 20미터를 자랑하는 비슬산 산지기의 폭포이다. 장마철이나 태풍이 휘몰아치며 퍼부은 폭우가 맨 위 용천(湧泉)의 물줄기의 시원을 형성하고, 날 좋게 개어 맑은 하늘 아래 허연 물보라를 쏟아내는 광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날 것 그대로의 원시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탄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
글머리에 왠 장광설이냐고 할 터이나, 나에게 장자가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래 ‘산’이다. 산들이 겹겹이, 층층이 쌓인 숲이라고 말하고 싶다. 장자의 무변광대(無邊廣大)한 철학과 사유의 세계를 말할 때, 바로 나는 그것을 ‘숲’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냥 숲이 아닌 ‘비밀의 숲’ 말이다.
장자가 노닌 마음의 세계는 겹겹이 쌓인 ‘존재의 대 둥지’(great nest of being, 동서양의 신비주의의 전통에서 말하는 물질체, 감각체, 마음체, 혼체, 영체와 같은 존재의 상태)의 그것과 같이, 밖에서 안으로, 안에서 밖으로, 겹겹이 층층이, 감싸 안고 들어가는 비밀의 숲이다.
그 숲이 영원한 우주적 비밀을 간직한 채, 말 없는 가르침, 즉 불언지교(不言之敎, 노자)으로, 은밀한 속삭임으로, 우리 마음을 손짓하고 있다. 이 숲은 미혹에 빠진 현대인과 현대문명을 때론 대갈(大喝)하며 질타하고, 때론 그 문명과 문명을 지탱하고 탐닉하는 자기 만족적 지식을 희롱하고 홍소(哄笑)하고 있다. 내가 굳이 바쁘게 사는 현대인들을 꼬드겨 그 비밀의 숲인 장자를 함께 산책하고 싶어 하는 간절한 이유가 그것이다.
숲 속에 숲이 있고, 그 숲 속에 또 숲이 있다. 장자를 산책하다보면 표층의식에서 잠재의식으로, 무의식으로, 더 깊은 심층의식으로, 우리 존재의 근원으로, ‘참나’를 탐구해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내면으로 들어가서 우주적 존재로서의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인 신성(神性)과 불성(佛性)을 깨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장자라는 한 인간을 통해 드러낸 우주, 그 숲의 비밀 속으로 들어가는 목적이 된다.
그리하여 장자가 일러주는 ‘참사람’(眞人), 즉 하나님의 사람은 바로 “지금, 여기에”, 비밀의 숲 속에, 아니 그 비밀의 숲 자체,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가 달도(達道)하게 될 온 우주의 본령으로서, 진실 그 자체로서, ‘도(道)’로서 존재하게 된다.
이 참사람, 참존재로 인도하는 첫 관문이 ‘소요유(逍遙遊)’다. ‘소요유(逍遙遊)’는 글자 그대로 “놀고 놀고 놀다”라는 말인데, 잘 놀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유명한 소요유(逍遙遊)의 첫 대목은 이렇게 시작된다. “북쪽 깊은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그 이름을 곤(鯤)이라 했다. 그 크기가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물고기가 변해서 새가 되었는데, 그 이름을 붕(鵬)이라 했다. 붕(鵬)의 등 길이가 몇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었다. 화를 내서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았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돌아 일어나는 움직임을 타고서 남쪽 깊은 바다로 날아간다. 남쪽 바다를 말해서 ‘하늘의 연못’(天池)이라 한다(北冥有魚 其名爲鯤 鯤之大 不知其幾千里 化而爲鳥 其名爲鵬 鵬之背 不知其幾千里也 怒而飛 其翼若垂天之雲 是鳥也 海運則將徙於南冥 南冥者 天池也).
요원한, 심원한 경계(境界)에서 노니는 것, 그것을 말해 소요유(逍遙遊)라 한다. 세간에 회자되는 기막힌 유머가 있다. “기는 놈 위에 뛰는 놈이 있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고, 그리고 나는 놈 위에 ‘노는 놈’이 있단다.” 언어의 유희를 논할 때 이 경우엔 이보다 더 나은 표현이 있을까 싶다.
그런데 말처럼 잘 놀기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다. 진정 잘 놀 수만 있다면, 세상이 이토록 요지경일 것도 없을 것이고, 보이스 피싱 같은 사기술이 온 세상을 사달 낼 일도 없을 것이다. 제각기 삶의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면 그만일 것이기 때문이다. 일이 즉 놀이가 되고 놀이를 일삼는 삶이라면, 굳이 행복이란 단어를 앵무새처럼 뇌까리지 않더라도, ‘지금, 이 순간’ 행복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비밀의 숲인 장자의 첫 관문인 소요유(逍遙遊)의 비밀의 열쇠는 바로 ‘잘 놀기’에 있다. 소요유(逍遙遊)의 우언(寓言)은 일견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얘깃거리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유사 이래 동서고금을 통해 장자를 풀어낸 자들이 한둘이랴. 그런데 그 많고 지난한 노력에 비해 장자라는 ‘현명(玄冥)한 숲’의 비밀스런 경계에 온전히 달도(達道)한 위인들도 많지 않은 것 같다.
비밀의 요체는 상징과 은유로 가득 찬 위의 우언(寓言)에 있다. 소요유(逍遙遊)의 첫 대목의 각각은 인간 의식의 성장과 전회를 드러내고 있다. 의식과 삶의 큰 깨달음의 극적인 변화과정을 보여주는 네 단계 변화(transformation)을 암시한다.
첫 번째 변용은 곤(鯤)이라는 작은 물고기(혹은 물고기알)가 길이만 해도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물고기로 변화하는 것이다. 크기의 변형 또는 성장을 말하고 있다. 신체적, 물리적(physical) 크기, 힘, 그리고 건강의 증대 등과 이와 동반되어 자라난 지적, 정신적(mental) 능력의 증장이 이 단계의 변화의 요결이다.
두 번째 변용은 이 물고기가 변해서 큰 새(大鵬)가 된다는 것이다. 첫 번째 변용이 주로 물리적, 지적, 양적 측면에 적용되어서 일어난 것이라면, 두 번째 변용은 정신적, 심령적, 그리고 질적 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물고기는 일차원적 세계를 유영한다. 경험과 사고의 경계가 아직 일차원적이다. 그러나 이 물고기가 대붕(大鵬)이 되어 날게 되면 지금까지와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사유하게 된다. 물리적, 감각적 세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된다. 공중 부양의 신비로움의 신세계가 바로 대붕(大鵬)의 경계가 된다.
세 번째 변용은 대붕(大鵬)이 구만리장천(九萬里長天)에 날아오른다는 것이다.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 이 비밀의 열쇠다. 등정(登程) 구만리(九萬里)는 붕새(大鵬)가 자기성찰을 통해 에고 중심적, 모태적 패러다임을 과감히 초탈하여 천인합일(天人合一)의 대변혁을 달성함을 상징하고 있다. 일상성으로부터 탈출하여 초월하는 것, 소아(小我)를 십자가에 매달아버리고 하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차꼬를 벗어던지고 대해탈, 대자유를 성취하는 것, 그것은 색즉시공(色卽是空)의 큰 지혜안에 우리의 존재를 의탁하는 것이다. 태극이무극(太極而無極)의 현묘(玄妙)한 경계를 소요(逍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궁극의 지혜를 얻고 대원만(大圓滿)의 해탈(解脫)을 얻었음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극하고, 상대를 끊어 절대의 세계로 진입함이다. 지식과 생각의 흔적이 사라지니, 존재 그대로가 무상(無相) 삼매(三昧)로서다.
네 번째 변용은 구만리장천(九萬里長天)으로 비상한 대붕(大鵬)이 남녘으로 날아간다는 것이다. 그곳엔 하늘의 못(天池)이 있다. 남쪽 깊은 바다는 인간과 생명의 삶의 터전을 말한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물결치는 곳이다. 욕망과 분노가 넘실댄다. 생명들이 서로 기대고 서로 부둥켜안고 있다. 상생(相生)과 상극(相克)이 매일의 일상이다. 대붕(大鵬)이 돌아온 곳은 바로 그 생명의 바다, 중생의 바다가 된다. 그리하여 붕(鵬)새는 일상의 소용돌이가 그치지 않는 시장통으로, 아수라장으로 돌아왔다. 누군가 깨달음 후에 빨랫감이라 했던가?
목표를 향해서 기계적으로 전진 앞으로 달려가는, 그 숨 쉴 틈 없는 손길을 잠깐 멈추어보는 것, 그리고 긴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보는 것, 그리고 그것을 고요히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 바라보는 놈은 누구인가 하고 물어보는 것, 그것이 장자를 산책하는 첫걸음이 될 것 같다.
논다는 것은 불온한 것도, 쉬운 일만도 아니겠지만, 진정한 소요유(逍遙遊)의 비밀은 ‘잘 노니는 것’에 있다는 비밀의 숲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마음속에 한 번 울려보아야 할 것 같다.
추기: 이 글은 성경의 은혜와 변화(롬 12:2, 고후 3:18)를 염두에 두고 쓴 글입니다. 은혜는 ‘놀다’와 상통하고 변화는 이 글의 변용과 상통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