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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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엡 4:1)라고 한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다(빌 1:27).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부르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 자신의 나라와 영광 안으로 부르셔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라고 하였다(살전 2:12).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주님께 합당하게 행하게 되고(골 1:10), 다른 성도를 합당한 예의로 영접하게 된다(롬 16:2). 주님께 합당하게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안 결과이다. 우리가 주님께 합당하게 행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빌 1:19-21상).
그렇게 말해도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 막연하기만 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합당한’이라는 단어의 뜻을 알아야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적확하게 알 수 있다. ‘합당한’이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axios’이다. 헬라어 ‘악시오스’(axios)는 신약 성경의 영역본에서 대개 “합당하다”(worthy)로 옮겨진다. 하지만 그 독특함이 어떤 구절에서는 ‘~와 일치하여’(in keeping with)로 표현된다(마 3:8, 행 26:20). ‘악시오스’(axios)의 어원은 다른 많은 헬라어 단어와 마찬가지로 배후에 한 그림이 있다. 그 단어는 “본래 ‘저울의 한쪽 편을 높이다’, ‘저울대로 평형을 놓는다’, ‘평형을 이루다’를 의미하고, 결과적으로 ‘동등하다’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의 기본 개념은 복음이 메시지의 형태로 가르치는 바를 삶의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삶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 즉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신성을 반영하는 모습을 띤다(벧후 1:4, 골 1:15). 이것이 바로 ‘악시오스’(axios)라는 단어가 품은 그림이다.
하나님의 저울의 한편에는 복음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 즉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신성이 있고 다른 편에는 우리의 삶이 있다. 바울의 권고는 이렇다. 우리의 삶이 복음과 ‘똑같은 무게가 되도록’ 살라는 것이다. 복음과 ‘일치하도록’ 살고, 복음과 ‘어울리도록’ 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균형을 이룬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에 대한 예를 구약에서 볼 수 있다. 바빌론의 벨사살 왕의 때이다. 그때 사람 손의 손가락들이 나타나 왕궁 석회벽에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글을 썼다. ‘메네’라는 말은 '숫자'라는 뜻이다. 숫자라는 말이 가리키는 뜻은 하나님께서 임금님의 나라가 지속될 햇수를 세고 계신다는 것이다. 언제 끝내버리실까 하고 세고 계신다는 뜻이다. 그다음 ‘데겔’이란 말은 '무게'라는 뜻이다. 이 무게라는 말이 가리키는 뜻은 '임금님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저울에 달아 보니 너무 가볍다, 부족하다'라는 뜻이다. ‘우’는 '그리고'라는 뜻이며 마지막으로 ‘바르신’이라고 하는 말은 '분열'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임금님이 다스리고 계신 이 제국이 두 동강이 날 것이라는 뜻이다. 곧 메대와 바사로 갈라질 것이라는 말이다(단 5:5, 25-28).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이고, 우리 삶은 그 좋은 소식의 구현이어야 한다. 달리 말해,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이고, 우리는 그 능력으로 구원받은 대로 살며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빌 2:12).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은 테크닉, 즉 원숭이가 사람의 흉내를 내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가장이고 위선일 뿐이기 때문이다(마 23:1-12). 그런 것은 사탄이나 그의 사자들이 하는 것이다(고후 11:13). 그것은 성령의 열매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 즉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신성으로 조성되는 것과 관련된다(갈 5:22-23, 벧후 1:4).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사람이 되고 무엇에 적합하게 될지에 관한 것이다(살전 1:5). 그러므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산다는 것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천국, 즉 하나님 나라, 곧 그리스도를 사는 문제이다(롬 14:17, 빌 1:21).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 자주 인용되는 유명한 문구처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의 의미를 알고 행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 종말의 때에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았는가에 대해 저울에 달아보실 것이다. 저울의 한쪽은 복음 속에 나타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 즉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신성이고 다른 쪽은 우리의 본성일 것이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 안으로 부르셨다는 것은 우리를 종말론적인 삶인 부르심에 합당한 삶으로 부르셨다는 것이다. 주님이 재림하셔서 우리를 심판하시려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으로 부르셨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고후 5:10). 그때 우리가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 부족함이 없으면 우리는 생명과 본성과 표현과 인격과 형상에서 주님과 같이 될 것이다(요일 3:2).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잘하였다고 칭찬을 받게 될 것이다(마 25:21). 이를 위하여 지금 여기서 우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푯대를 향하여 박차를 가하며 달려가는 삶을 살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마 26:41, 빌 3:12-14). 아멘.
이 무더위에 깔끔한 설교 한편을 작성하셨군요.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