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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복과 부자

조회 수 830 추천 수 2 2024.10.24 10:4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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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복과 부자

유대교가 하락한 것은 두 가지 때문이다. 첫 번째는 율법이라는 교리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지키는 데만 열심이었지만 율법의 더 중요한 것들인 율법의 영을 버렸기 때문이다(마 23:23). 두 번째는 하나님과 풍요와 다산의 신인 바알 사상과의 혼합, 즉 맘몬, 곧 재물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겼다(마 6:24).

바알은 물질적인 풍요와 다산을 주관하는 농경신이다. 이 신은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신이었다. 바람과 비를 주관하며 땅을 지배하면서 인간에게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이었다. 광야에서 겨우 만나와 메추라기만으로 연명하던 이스라엘이 가나안 문명에 마음을 빼앗긴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음을 빼앗기면 그들의 신인 바알을 섬길 수밖에 없다. 오늘 우리가 자본주의를 신처럼 추종하듯이 말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산 이후로 그들은 알게 모르게 바알 신앙과 여호와 신앙이 혼합되어 있었다. 그런데 종교 혼합주의 현상은 특정한 시대만이 아니라 구약의 전반적인 시대에 해당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 신앙을 완전히 버린 적은 없지만 그 신앙만으로 삶을 버텨내지 못해서 다른 것을 더불어서 섬겼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총체적으로 이런 혼합주의에 빠져 있다. 자본주의를 신처럼 섬긴다. 신앙의 모든 항목을 물질적인 풍요와 연결시킨다. 이게 한편으로 이해는 된다. 개인들이 국가적 차원에서, 더 나가서 지구의 차원에서 작동되는 자본주의를 벗어나기는 힘들다. 아무리 하나님을 깊이 있게 믿는다고 하더라도 돈과 아무 상관없이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런 현실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영혼이 철저하게 돈의 지배받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말에 실감이 나지 않을 수 있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이 말 자체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거나 관심이 아예 없는 것이 하나이고, 영혼이 돈의 지배를 받거나 받지 않는 삶의 객관적인 기준이 모호하다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그런데 삶의 객관적인 기준을 기쁨으로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돈으로 기뻐한다면 그의 영혼은 돈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돈으로 인한 기쁨은 사이비 기쁨이다. 이런 사이비 기쁨이 혼합주의의 가장 큰 특징이다.

오늘날 교회에도 혼합주의는 유효하다. 아니 어쩌면 출애굽 후의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이나 주님 당시보다 더 심한 것 같다. 왜냐하면 오늘날은 맘모니즘, 즉 배금주의가 극도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교회의 하락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아예 교회도 나오지 않는다.

주님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마 19:24)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부자는 영영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일까? 이 말씀은 결론은 “사람으로는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으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 19:26)라는 것이다. 부자라도 하나님은 주님을 믿고 영접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해주신다.

현대인들은 돈을 신으로 숭배하나 그리스도인들은 돈을 가치 중립이라고 말한다. 돈에 대한 가치 중립적 해석, 즉 돈은 좋은 데 쓰면 좋은 것이고 나쁜 데 쓰면 나쁜 것이라는 입장은 맘몬에 대한 몰이해에 근거한 순진한 해석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쟈크 엘룰은 인류 역사상 돈에 대한 가장 정확한 해석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돈은 ‘하나님과 맞먹는 전능성을 가진 경쟁 신이고 자신에게 모든 것을 헌신하도록 영감을 불어넣는 영적, 인격적 존재’라는 것이다.

돈이 가치 중립이라는 생각에서 언젠가 ‘청부’, ‘깨끗한 부자’라는 말이 교회 내에서 인기를 끌었다. 아마 지금도 유효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몇 가지 면에서 성서적 의미가 있기는 하나 결국 돈에 대해 ‘신성성’을 부여하는 언어에 불과하다. 깨끗한 부와 거룩한 부는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한국 교회의 기복 신앙의 또 다른 면일 수 있다.

자본주의 시대이며 물질문명이 엄청나게 발달한 현대는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이다. 교회 지도자들조차 물질적인 부유함이 곧 하나님의 복이라고 가르친다. 교계 지도자들도 부자들을 칭송하고, 덩달아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긴다. 세상과 엇박자를 내며 진리를 수호해야 할 교회가, 돈과 권력에 굴복해버린 모양새다.

하나님을 잘 섬겨 물질적으로 복을 받자는 것은 교묘한 속임수다. 결국 물질을 섬기고 하나님을 이용하게 된다. 예수님이 요청하신 것처럼 마음 전부를 하나님께 드릴 때 물질에 대한 바른 시각이 생기고 제대로 관리하고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교회 지도자들은 “사명감은 돈에서 나온다.”라고 선포한다. 이 선포는 불경적인 말 같으나, 현실적으로는 그럴듯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살만한 명제이다. 현대사회에서 돈 없이 살 수 없다. 최저임금제가 법제화되어 있는 것은 민주사회에서는 매우 타당한 일이다. 존엄함이라는 것이 최소한의 생활비 위에서 지탱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사명감이라는 명분으로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것은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이단들이나 하는 짓거리이다(눅 16:14).

그러나 우리 인생에 지속가능한 행복감을 선사해주는 것은 공공재들이다. 돈으로 결코 살 수 없는 것들이 우리 생명을 유지하는 데 가장 필수적이다. 희소성이 높은 것이 비싸지만, 역설적으로 흔한 것이 귀한 것이다. 하늘, 공기, 바람, 햇빛, 꽃, 흙, 물, 달, 별, 쓸모없는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없다면 우리네 세상은 잿빛이 되고, 또 우리의 내면은 황량해질 것이다.

지구별 여행자로서 속도를 줄여 천천히 걸으며 그 선물들과 마주하는 것이 참 소중하다. 전력 질주하는 말을 타고 가면서 길가의 꽃을 볼 수야 있겠지만(走馬看花) 그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음미할 수는 없다. 가만히 들여다보아야 온전히 맛을 볼 수 있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낭만 역시 그러하다. 이런 것들을 어찌 감히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는가.

안타깝게도 금보다 별이 아름답다고 말하면서도, 금을 향해 손을 내미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그만큼 우리의 마음은 돈에 중독되기 십상이다. 자꾸 해독해내야 한다. 사치나 호화를 부리는 것은, 환경파괴를 촉진하여 기후 위기를 맞이하게 하고 결국 6번째의 지구 멸망을 향해 치닫게 하고, 이웃들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게 되는 까닭에 그리스도인에게 덕이 되지 않는다. 절제, 소박, 검소함이 우리의 영혼을 더 맑고 깨끗하게 만들어준다. 사소한 일에도 경탄하고 감사하고 경이로워하는 마음, 그것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그런 사람을 나는 한 사람 알고 있다. 헬라의 디오게네스라는 철학자는 고목 나무 둥치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그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어느 날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이 그에게 찾아와 “당신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 줄 게 없소?”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은 지금 옆으로 비켜 달라는 거요. 당신의 그림자 때문에 내가 햇볕을 받을 수 없소.” 이 일화가 뜻하는 것은 디오게네스가 당대의 최고 권력자에게 냉소적이었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누가 와서 무슨 말을 했던지 그는 자기를 비추고 있는 햇살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었기 때문에 알렉산더에게 했던 똑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그는 절대적인 것에 자기 존재의 근거를 의존시키며 살았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이란 하나님과 연합하여 그분 안에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것이 참된 행복인 이유는 존재의 근거이신 하나님과 연합함으로 진정한 안식을 누리고, 하나님 안에서 소명을 발견함으로 의미로 충만해지고, 그 소명을 이루어감으로 자신의 존재가 영원함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관계적인 상태에서 주어지는 것이므로 하늘에 속한 신령한 영적인 복만이 참 복이다. 그런 복을 받은 자가 부자이다. 한문의 복(福)은 그에 대해 말해 준다. 사람들은 복(福)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복을 받으려고 온갖 애를 쓴다. 문제는 복(福)이 무엇인가 어떻게 받는가 하는 것을 모르는 데에 있다.

복(福)이란 글자는 ‘보일 시(示)+찰 복(畐)’이다. 보일 시(示)는 제단을 형상화한 글이다. 찰 복(畐)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는 항아리의 모습을 본떠 만든 글자이다. 그러므로 항아리가 가득 차 있다는 뜻이다. 둘째는 부할 부(富)에서 움집 면(宀)을 뺀 글자이다. 움집 면(宀)은 집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복(福)이란 글자의 뜻도 두 가지이다. 첫째는 제물이 가득 찬 항아리를 제사상(示)에 올리며 복을 빌다 라는 뜻이다. 이는 기복신앙(祈福信仰)을 의미한다. 둘째는 제단(신의 존전: 示)에 나아갈 때 가득 찬 것이 보인다는 뜻이다. 찰 복(畐)은 부할 부(富)에서 움집 면(宀)을 뺀 글자이므로 가득 찬 것이 집 안이 아니라 집 밖의 온 우주에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신의 존전에 나가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 즉 영적인 축복을 받는 것이다.

한문의 복(福)이라는 글자는 물질적인 복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영적인 복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복을 물질에 얽매여 생각한다. 복(福)은 하늘과의 관계에서 오는 ‘관계적인 상태’이므로 하늘과 올바른 관계를 형성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왜냐하면 복(福)이란 글자가 ‘보일 시(示)+찰 복(畐)’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 즉 영적인 축복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 역도 성립한다.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 안으로 들어가면 집 안의 재물, 즉 돈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 즉 영적인 축복을 받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며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롬 5:17). 이런 사람이 부자이다.


[레벨:24]브니엘남

2024.10.24 10:50:53
*.118.117.232

지난 주 설교와 설교 복기를 듣고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24.10.24 19:58:32
*.137.91.200

브니엘남 님의 해박한 지식과 하나님 신앙이 잘 녹아있는 유익한 글을 읽다보니

깊어가는 가을 밤이 더 풍성하고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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