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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 우주론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인간은 갈릴레오 갈리레이가 지금의 초등학생들이 가지고 관찰하는 망원경보다 못한 망원경으로 우주를 관찰하여 지동성을 주창한 이후 망원경의 발달로 천문학은 엄청나게 발달을 거듭하였고 지금도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1990년 4월 24일 NASA가 궤도에 올린 허블우주 망원경이 천문학과 물리학의 발전을 가속하고 있다.
작년 7월 13일, 인터넷과 유튜브에서 난리가 났다. 물론 자신의 관심사가 아니면 눈 돌리지 않는 사람이나, 지구와 우주 역사를 6천 년으로 믿고 있는 일부 크리스천에게는 ‘흥칫뿡’일 테지만 말이다.
이날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 차세대 우주망원경 ‘제임스웹(JWST)’으로 촬영한 완전 천연색의 우주 사진을 공개했다. 이것은 현재까지 촬영한 우주 사진 중 가장 높은 해상도를 자랑하는 사진이다. 사진들은 우주 상상도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선명하고 화려했다.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우주는 아름다웠다. 용골자리 성운 사진은 내가 비슬산에서 새벽에 마주한 어슴푸레한 산등성이와 영롱한 별빛을 닮아 놀라기도 했다.
우주의 기원을 알고자 하는 인간은 제임스웹(JWST) 외에 LUVOIR로 명명된 차세대 우주망원경 계획도 가지고 있다. 이 망원경은 제임스웹 우주망원경과 같이 작은 거울들을 모아서 큰 주경을 이루는 식으로 만들어질 예정인데 주경의 크기는 12m로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의 두 배에 달한다. 천문학자인 칼 세이건 탄생 100주년인 2034년에 발사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지만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의 전례대로 중간에 변수가 발생하면 늦춰질 수도 있어 보인다.
1광년은 빛이 1년 동안 가는 거리를 말한다(빛의 속도는 1초에 30만km). 빅뱅 이론에 의하면 지구, 태양이 속해 있는 태양계는 약 45억 년 전에 탄생했고, 우주 나이는 138억 년이다. 천문학에서는 오랜 세월을 날아와 우리에게 발견되리라 예측된 빛을 ‘우주 배경 복사’라 부르는데, 이를 통해 우주 나이를 계산하는 것이다.
추석 때에 내려온 중학교 1학년 외손자와 물리학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외손자는 수학과 물리를 좋아한다. 그래서 물리학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다. 외손자에게 천문학자들은 우주 공간을 이렇게 표현한다고 했다. 태양계에는 태양과 같은 별이 1000억 개 정도 모여 있는 ‘우리 은하’ 중심으로부터 2만 6000광년 정도 떨어져 있다. 태양계는 ‘우리 은하’의 변두리에 있다. 그리고 ‘우리 은하’는 우주에 있는 1000억 개 정도의 은하 중 하나이다. 그런데 외손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예전의 이야기이고 지금 우리가 관측 가능한 은하는 1700억 개로 늘어났다고 한다.
창세기를 통해 ‘하나님의 우주 창조설’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학계에서 오래전부터 정설로 받아들이는 ‘우주 빅뱅론’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나의 생각은 이렇다. 기독교 신앙은 현대 과학이 발견한 사실들을 거부하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진지한 대화와 수용이 필요하다. 사실 과학이 우주의 모든 신비를 밝혀내지는 못한다. 지금까지 우주 에너지에 대해 천문학이 밝혀낸 것은 중입자라 불리는 바리온 물질이 4%, 그리고 암흑물질이 24%, 암흑에너지가 72%라는 사실이다. ‘암흑’이라는 표현은 그 실체를 분명히 알 수 없을 때 쓰는 표현이다. 아직 우리가 우주에 대해 정확히 아는 영역은 4%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성경에 암흑물질이 나올까? 출애굽기를 보면 애굽에 내리는 하나님의 흑암의 재앙 예고가 나온다. 출애굽기 10장 21절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내밀어 애굽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 만한 흑암이리라.”(출 10:21)라고 말한다.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손을 내밀어 이집트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할 것을 요청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빛이 없게 하라’는 일반적인 표현이 아니라, ‘흑암이 있게 하라’는 독특한 표현이 사용됐다는 것이다. 보통 흑암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빛이 없는 것’이라고 답하기 마련이지만, 사실 이런 정의(定意)는 흑암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은 것과 같으며, 일종의 부정(不定)적인 정의를 내린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빛이 없는 상태를 흑암이라고 정의해봤자 여전히 흑암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제공받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흑암이 있게 하라고 하신 것은 빛이 없는 상태의 흑암이 아닌, 전혀 다른 종류의 흑암을 전제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빛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정의되는 흑암이 아니라, 어떤 실체로서의 흑암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그 자체로서 실체를 갖고 존재하는 흑암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흑암, 즉 어둠의 근거를 성경 본문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창세기 1장 2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제일 먼저 “빛이 생겨라"(창 1:3)라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빛을 창조 사건의 단초라는 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렇게 강조하고 있다. 당연한 시각이다. 그러나 여기서 빛만이 아니라 그 반대 현상인 어둠도 역시 우리가 주목해보아야 할 우주적 현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왜냐하면 빛은 비록 하나님의 첫 번 창조 사건으로서 존재론적 근거를 갖고 있긴 하지만 그것 자체로가 아니라 반드시 어둠이 있어야만 가능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만약 온 세상이 빛뿐이라고 한다면 굳이 빛이 있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듯이 밤이 있기 때문에 낮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북극에 가까이 가면 일 년이 반은 낮만 계속되고 반은 밤만 계속된다고 한다. 그런 곳에 사는 사람들은 아침이 되어도 날이 밝았다고 말하지 않으며, 반대로 밤이 되어도 어두워졌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개의 지역에서는 밤과 낮이 반반씩 나뉘어 있어서 그 두 현상은 반대 개념이면서 동시에 한 묶음으로 이해되고 있다.그런데 빛은 분명히 하나님의 피조물인데 반해서 어둠은 그렇지 않았다. 창세기에 "어둠이 생겨라"는 말씀은 없었다. 단지 빛만 창조했는데 어둠이라는 현상까지 생긴 것이다. 생성(生成)되었다기보다는 빛이라는 현상에 반사되는 그 어떤 것이다. 또는 이 세상의 만물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어둠만은 그런 피조성에서 벗어난 보다 본질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직접 창조하지는 않았지만 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한 현상이 바로 어둠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 행위가 있기 전에 이미 어떤 어둠이 있었다.
출애굽기 10장 21절 후반부에서는 “곧 더듬을 만한 흑암이리라.”라는 말씀이 나온다. 어떻게 보면 흑암의 재앙이 기록된 본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좀 더 히브리어 본문에 가깝게 다시 번역하면, “그 흑암은 만져질 수 있는 것이다.”로 읽을 수 있다. 무슨 뜻인가? 흑암을 어떻게 만질 수 있다는 것인가? 이것은 “흑암이 있게 하라”는 명령과 불가분 관련이 있는데, 실체가 있는 흑암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존재감을 지닌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야만 비로소 ‘만져질 수 있는 흑암’이라는 표현이 잘 와닿게 된다. 빛이 없는 상태로 정의되는 일반적인 흑암은 실체가 없으므로 이런 표현을 사용할 수 없지만, 실체가 있는 흑암은 그와는 달리 우리가 만질 수 있는 존재이다. ‘만져질 수 있는 흑암’은 실체가 있는 흑암이기에, 불을 켠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수많은 이집트 사람들이 불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를 바라볼 수도 없었고, 일어나 움직일 수도 없었다(출 10:23). 그것이 이 우주에 있는 암흑물질이 아닐까?성경에서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한 후 드린 기도에서 “여호와는 짙은 어둠 속에 거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왕상 8:12)라고 말한다. 이 기도를 물리학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암흑 가운데 거하신다는 말이 된다.
어둠의 한문은 흑(黑)과 현(玄)이다. 검을 현(玄)과 검을 흑(黑)은 둘 다 검은 색을 가리킨다. 그러나 흑(黑)과 현(玄)은 전혀 다르다. 흑(黑)은 글자 모양이 아궁이 아래 불이 타는 모습이다. 다 타고 남은 그 재의 검은 색을 의미한다. 이와 달리 현(玄)은 활시위를 형상화한 글자이다. 활시위에 옻이나 송진을 발라 검은 색을 띄게 된 탓에 현(玄)이 검다는 뜻이 되었다. 혹은 누에고치를 상형했다고 보기도 한다. 누에고치 속 어둠에서 검다는 의미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는 어둠이 바로 현(玄)의 검은 빛이 된다.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 시작하는 천자문은 하늘 빛을 현(玄)으로 본다. 밤하늘의 그 어둠이 바로 누에고치 속 어둠이라는 의미다. 새로운 세상으로 거듭나게 할 태중의 어둠이다. 누에고치 속 어둠을 현(玄)의 검은 빛으로 볼 때, 어머니 자(慈), 사랑 자(慈)도 그 의미가 깊어진다. 누에고치 두 개를 받들고 있는 마음(心)의 모습이 자(慈)이다. 새로운 생명을 품어 키워내는 어둠, 현(玄)은 어미 태중의 어두움이다. 현(玄)의 어두움을 받는 마음, 생명을 길러내는 어둠을 겹겹이 짊어진 마음, 그것이 바로 자비이자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자비와 사랑을 가지고 어둠 가운데 생명의 빛으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각설하고 천문학이 밝혀주는 우주의 신비는 인간과 우주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를 넓혀주고 사고를 깊게 해 준다. 거대한 우주 역사 앞에서 먼지 같은 존재인 인간이 마치 하나님이 된 것처럼 지구를 약탈하고 병들게 하는 모습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평생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누군가의 것을 빼앗고 싸우는 모습은 어떤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우주 앞에 인간은 해가 뜨면 사라지는 아침이슬과 같은 존재이다.
138억 년이 된 우주를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겸손하게 스스로 질문하게 된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이 질문은 우리가 영혼의 존재이며, 우주 일부임을 알게 해준다. 우리가 우주 일부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하나님이 내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이 그렇게 강조한 내용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하나님 안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일깨워주셨다.
또 하나 스스로 해야 할 질문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라는 것이다. 앞선 질문이 영혼에 관한 질문이라면 이 질문은 우리 몸, 육체에 관한 내용이다. 정해진 인생의 짧은 시간 속에 존재하면서 무엇을 위해 내 에너지를 집중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하나님의 자녀이며, 우주의 일부인 나는 이 짧은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이 두 질문은 욥기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죄한 자의 고난이라는 신정론(神政論)에 대해 욥은 하나님과 대화하고 있다. “너는 아느냐, 그리고 네가 할 수 있느냐?”(욥 38:5, 35)라는 질문을 하나님은 욥에게 하고 있다. 하나님은 과학적 물음을 통하여 신학적 답변을 하고 계신다(욥 42:5-6). 하나님은 인간에게 인간 능력의 한계를 깨닫게 해주신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담과 같이 창조의 능력에서 하나님이 되려고 애쓰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으니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면서 창조의 능력에서도 하나님이 되려고 애쓰고 있다. 인간이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이 되려고 지금도 애쓰고 있다. 하나님이 우주와 인생의 모든 것을 알려고 하고 있는 욥에게 묻고 있는 “너는 아느냐, 그리고 네가 할 수 있느냐?”라는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하는 질문이다.
<빅뱅 우주론>이 그리스도인들로 티끌에 불과한 그들의 한계를 깨달음으로 그들의 신앙을 더욱 강하게 붙들어주고, 겸손하고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로 이끌어주리라 기대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138억 년의 우주에서 티끌보다도 더 작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과학자들이 말하는 <빅뱅 우주론>이 우리를 겸손하고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로 이끌어주리라 기대해 본다.
재미있고 사유가 깊은 글, 잘 읽었습니다.
중1 외손자와 우주에 대해서 대화하는 할아버지, 멋지네요.
아득한 우주가 동시에 '지금 여기'와도 연결되어 있겠지요.
티끌도 역시 전체에 속해있듯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