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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기원과 역사(2)
프랭크 바이올라, 조지 바나/ <이교에 물든 기독교: 현대 교회에서 행하는 관습의 뿌리를 찾아서> 중에서
종교개혁
16세기 개혁자들은 가톨릭의 사제 제도에 대해 날카롭게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은사제에게 포도주를 피로 변화시키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사상을 공격했다. 그리고 사도권의 계승설을 부정했다. 그들은 성직자에게 결혼하도록 격려했다. 그들은 의식을 개편해서 회중에게 참여의 기회를 더 넓혀주었다. 아울러 고들은 감독의 직책을 폐지하고 사제의 권한을 줄여서 장로로 되돌려 놓았다. 그렇지만 불행스럽게도, 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의 성직자/평신도의 구분을 개신교 운동으로 그대로 옮겨왔다. 그들은 또 가톨릭의 안수 개념을 그대로 보존시켰다. 그들이 감독의 직책은 폐지했다 할지라도, 단일 감독체제를 부활시켜 새 옷으로 갈아 입혔다.
종교개혁의 강령은 전 신자 제사장주의의 회복이었다. 그렇지만, 이 회복은 단지 부분적인 데 그쳤다. 루터, 캘빈, 그리고 츠빙글리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관하여 신자가 제사장임을 긍정했다. 그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인간 중재자의 필요 없이 하나님께 직통한다고 옳게 가르쳤다. 이것이야말로 획기적인 회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반쪽짜리 회복이었다. 개혁자들이 실패한 것은 공동체적 차원에서 신자가 제사장임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구속사적으로는 모든 신자 제사장주의를 회복시켰다 - 즉, 구원에 관계된 것에는, 그러나 교회적으로는 그것을 회복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 즉, 교회에 관계된 것에는.
달리 표현해서, 개혁자들은 단지 신자(단수로서의)가 제사장이라는 부분만을 회복시켰다. 그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개인적으로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상기시켰다. 그 자체는 참 훌륭한 것이지만, 그들은 모든 신자(집합적 복수로서의)가 제사장이라는 사실은 회복시키지 못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상호 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복된 진리이다. (이 진리를 회복시킨 사람들은 아나뱁티스트: 재침례교인들이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것은, 개신교와 가톨릭의 칼이 아나뱁티스트들을 피로 물들인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의 회복 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개혁자들은 교황과 그의 종교적 계급을 반대했지만, 그들이 물려받은 사역에 대한 좁은 견해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역'이 '부르심을 받고' 또 '안수 받은' 소수에게 국한된 제도라고 믿었다. 따라서 개혁자들은 계속해서 성직자 - 평신도의 구분을 지지했다. 그들에겐 오직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고 사역자라는 말만 무성할 뿐이었고, 그들의 실제 삶에서는 그것을 부정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화염이 사라지고, 우리는 가톨릭이 남겨준 것을 고스란히 간직하게 되었다. - 선택된 제사장제도!
루터는 설교하는 사람들은 특별히 훈련받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고수했다. 개혁자들도 카톨릭처럼 오직 '안수 받은 사역자'만 설교하고, 침례(세례) 주고, 주의 만찬을 인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결과로 안수는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되는 신적 은총의 특별한 기운을 사역자에게 제공했다. 비극적인 것은 루터와 다른 개혁자들이 교회에서 모든 지체가 기능을 발휘하게 하는 아나뱁티스트들을 심하게 비난했다는 사실이다. 아나뱁티스트들은 모임에서 일어나 말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권리라고 믿었다. 그것은 성직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루터는 이것을 너무나 반대한 나머지, 그것이 "지옥의 구덩이"에서 나왔다고 했고, 그것의 죄를 범한 사람들은 사형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요약하자면, 개혁자들은 안수가 교회 안에서 권위를 갖는 열쇠라는 개념을 그대로 유지했다. 하나님의 계시를 그분의 백성에게 전하는 것이 안수 받은 사역자의 사명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역할을 위해 급여를 받았다.
가톨릭의 사제와 마찬가지로 개혁자들의 사역자도 교회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 사이의 유급 중재자. 죄를 사하는 중재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 주는 중재자였다. 그래서 개신교에서는 옛적에 있었던 문제가 새로운 형식을 취했다. 용어는 바뀌었지만, 오류는 그대로 남았다. 17세기 청교도 저술가인 존 오웬과 토마스 굳윈은 루터와 캘빈과 마찬가지로 목사직을 하나님의 역할에 모든 권위의 초점을 맞추도록 인도했다. 그들은 목사가 '열쇠의 능력'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했다. 오직 목사만이 안수 받고 설교와 성례의 집전과 성서봉독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목사만이 논리학과 철학뿐만 아니라 성서원어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개혁자들과 청교도들, 이 두 부류는 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유능한 전문가여야 한다는 생각을 고수했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그들의 직책을 수행하려고 광범위한 학문의 수련과정을 거쳐야 했다.
사제에서 목사로
존 캘빈은 사역자를 칭할 때 사제라는 말을 쓰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목사라는 말을 선호했다. 캘빈의 생각엔 '목사'가 사역을 표현하는 말로서 가장 그럴 듯했다. 그는 성서가 예수 그리스도를 "양의 큰 목자"(히 13:20)라고 칭했기 때문에 그 말을 좋아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목사라는 사람에게서 신약성서의 감독을 회복하고 있다고 캘빈이 믿었다는 사실이다.
루터도 개신교의 새 사역자들을 사제라고 일컫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우리는 사람 중에서 말씀과 성사를 주관할 사람들을 사제라고 칭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칭해서도 안 된다. 그들이 사제라고 불리게 된 까닭은 이방 사람들의 관습 때문이거나 유대 나라가 남긴 자취 때문이다. 그 결과는 교회에 크게 해를 끼치게 된다." 그래서 그 역시 이 직책을 일컫는 말로 설교자, 사역자 그리고 목사라는 용어를 도입했다.
츠빙글리와 마틴 부처도 목사라는 말을 선호했다. 그들은 그것에 관해 논문을 써서 널리 보급했다. 그 결과 그 용어는 개혁자의 교회들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개혁자들은 설교에 사로잡혀 있었으므로, 그들이 사역자를 일컫는 데 선호한 말은 설교자였다. 그리고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역자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18세기에 가서야 비로소 설교자와 사역자라는 말은 빛을 잃었고 목사라는 말이 통용되었다. 이 영향은 루터교의 경건주의자들에게서 왔다. 그때부터 이 말이 기독교 주류 안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개혁자들은 목사를 교회의 실제적인 우두머리로 높여 놓았다. 캘빈에 의하면 "태양과 음식과 물이 영양을 공급해서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것보다, 목사의 직책이 지상에서 교회를 보존시키는 데 있어 더 필수적이다." 개혁자들은 목사가 신적 능력과 권위를 소유한다고 믿었다. 목사는 자기 이름으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캘빈은 더 나아가서, 사역자를 향한 모욕이나 조롱 행위를 심각한 국사법 위반으로 취급함으로써 목사의 우위를 더욱 강화시켰다. 캘빈이 무엇을 사역자의 모델로 삼은 것인지 알게 되었을 때 당신은 별로 놀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는 사도 시대의 교회에서 모델을 따오지 않았고, 오히려 2세기 단일감독체제 방식을 본떴다. 이것은 다른 개혁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것은, 로마 가톨릭의 교회가 성서가 아닌 "인간이 고안해낸 것들" 위에 그 관습들을 정했다고 캘빈이 탄식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캘빈도 매한가지였다. 캘빈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과 성사를 주관하는 것이 참 교회의 특징이라고 가르쳤다. 그의 생각에는 설교와 침례(세례)와 성찬이 회중이 아닌 목사에 의해 수행되어야 했다. 개혁자들 모두에게 있어 사역자의 우선적인 역할은 설교하는 것이었다. 설교가 우위를 차지한다는 것은 일요일에 세 번의 예배를 하는 루터의 독일식 미사에 가장 잘 반영되고 있다. 오전 다섯 시 또는 여섯 시에 그날의 서신서를 설교했고, 오전 여덟 시 또는 아홉 시의 대예배에서는 그날의 복음서에서 말씀을 전했다. 오후의 기도회에서의 설교는 구약성서를 기초로 했다.
루터도 캘빈처럼 목사를 구별되고 고귀한 직책으로 만들었다. 그가 천국의 열쇠는 모든 신자에게 속했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의 사용은 교회에서 직책을 맡은 사람들에게 국한했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모두 다 제사장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사장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우리의 이름으로 사역하려고 우리 중에서 택함을 받은 사역자들이고, 그들이 맡은 제사장으로서의 활동이 곧 우리의 사역입니다." 루터는 그가 거부했던 희생제사 제도를 믿는 가톨릭과는 결별했지만,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 특별한 직책을 맡은 사람들에게 속했다는 것을 믿었다.
목사를 높이는 루터의 독특한 주장을 들어 보라: "하나님은 설교자를 통해 말씀하신다.... 기독교 설교자는 따로 택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역자이다. 그렇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요, 하나님이 보내신 바로 그 감독이요, 많은 사람의 구원자요, 그리스도 나라의 왕이고 왕자이다... 지상에서 그리고 이생에서 진실하고 믿음직한 성직자나 목사보다 더 고귀하고 숭고한 사람은 없다.“ 계속해서 루터의 말을 인용하면 "우리는 마치 목사가 자기 개인을 향해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듯, 혼자서 그 말씀을 선포하게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는 우리 모두의 입이고, 우리는 다 그와 함께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모든 목사의 입이 그리스도의 입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은 목사의 말을 사람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 당신은 루터의 입을 통해 울려 퍼지는 이그나티우스의 메아리를 듣고 있다.
루터는 교회가 우선으로 ‘설교소’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회중은 하나님 말씀의 설교와 기도 없이 모여서는 안 된다. 그 시간이 아무리 짧더라도 말이다"라고 말했다. 루터는 교회가 그저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믿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교회 건물을 '입의 집'이라고 불렀다. 또 그는 이런 경고 섞인 논리를 폈다: "귀는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신체기관이다." 이것이 개신교의 뿌리이다.
영혼의 치유
캘빈, 루터, 그리고 부처(Bucer)는 목사의 두 가지 주요 역할이 말씀의 선포(설교)와 성찬(성만찬)을 주관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캘빈과 부처는 거기에 제3의 요소를 가미시켰다. 그들은 회중을 돌보고 치유하는 임무가 목사에게 있다고 강조했다. 이것을 가리켜 "영혼의 치유"라고 한다. 부처는 이 주제에 관한 뛰어난 책, True Cure of the Souls를 1538년에 집필했다.
"영혼의 치유"의 기원은 4세기와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의 가르침 속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다. 그레고리는 감독을 "목사"라고 불렀다. - 환자의 질병을 진단해서 약이나 수술의 처방을 내리는 영혼의 의사. 루터의 초기 추종자들도 영혼의 치유를 시행했다. 그러나 캘빈의 제네바에서는, 그것이 예술의 형태로 높여졌다. 회중의 가정을 방문하는 데에 목사 한 명과 장로 한 명이 요구되었다. 병자와 옥에 갇힌 사람을 위한 정기적인 방문도 시행되었다. 캘빈과 부처에게는, 목사가 단지 설교자나 성사의 주관자가 아니었다. 그는 "영혼의 치유자" 또는 "성직자"였다. 그의 임무는 치료하고, 치유하고, 상처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온정을 베푸는 일이었다.
이 사상은 오늘날의 개신교에 그대로 살아남아 있다. 그것은 현대의 목회 돌봄 사역, 목회 상담, 그리고 기독교 심리학의 개념에서 쉽게 발견된다. 현대 교회 안에서, 그렇게 돌봐야 하는 부담이 보통 한 사람(목사)의 어깨에 지워져 있다. (1세기에는 그것이 교회 전체와 '장로들'이라 불리는 경험 많은 사람 그룹의 어깨에 지워져 있었다.
결론
현대 목사는 21세기 기독교에서 가장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존재이다. 하지만, 성서에는 이 직책의 존재를 지지해주는 단 한 가닥의 증거도 없다. 오히려 오늘날의 목사는 이그나티우스와 시프리안에 의해 널리 퍼진 단일감독체제에서 생겨났다. 그리고 감독은 지역 장로로 발전하였다. 중세의 장로는 가톨릭의 사제가 되었다. 종교개혁 때는 '설교자' 또는 '사역자'로 바뀌었고, 결국 개신교 전체가 목을 매는 '목사'가 탄생했다. 이 모든 것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개신교 목사는 ‘약간만 개혁한 가톨릭의 사제’일 뿐이다.(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어떤 개인이 아닌 직책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무렵, 가톨릭 사제들에게는 7가지의 임무가 있었다. 설교, 성사, 양떼를 위한 기도, 절제되고 경건한 삶, 교회의식, 가난한 자의 구제, 그리고 병자 방문이 그것이다. 개신교 목사는 위의 모든 임무를 자신에게 지우고, 거기에 때대로 지역사회의 행사들에 가서 축사해 주는 것을 첨가했다.
저명한 시인 존 밀턴은 다음과 같은 그럴 듯한 표현을 했다:
"새 장로는 옛 사제를 크게 썼을 뿐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현대 목사는 옛 사제를 큰 글자로 썼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