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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의 입장에서 본 "종교"

조회 수 1099 추천 수 0 2018.09.03 14: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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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고등종교는 궁극적으로 '하나' 가 되는 것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융은 각 고등종교가 최고의 것으로 지향하는 상징들, 이를테면, , 그리스도, 불성(佛性) 속에서 자기 원형의 상징을 발견하였다.

 

종교는 결코 프로이트가 본 것처럼 본질적으로 소아의 강박신경증 같은 것, 마르크스가 주장한 아편과 같은 것이 아니고 종교적 인류(homo religious)로서의 인간의 마음의 근원에서 생겨난 것이며 의식으로 하여금 자아를 넘는 커다란 신화적 원형층과의 연결을 가능하게 하여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기실현에 기여한다고 융은 보았다.

 

-이부영<그림자>-

 

첫 문장을 보고 싱크레티즘이니, 종교 혼합주의니 뭣이니 하면 곤란하다. 종교가 하나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각각의 종교들이 가진 궁극적 상징들이 표현하는 것처럼, 인간이 인격의 대극과 분열을 통합하여 온전한 인간이 되어가는 것을 말한다. (단순히 도덕적으로 착한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에 있어서 프로이트가 본 것, 마르크스 이전에 포이에르 바흐가 본 것은 현실적 종교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나름 신실한 지인에게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 무엇이냐라고 했더니 "죄책감을 강화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순간 순간 깨닫고 살아가기 위해서" 라고 이야기 했다. 또한 어떤 교회는 목회자의 카리스마에 의존하고 있던 교인들이 그 목회자가 다른 교회로 옮겨갔을 때 집단 우울증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일도 있다.

 

종교의 궁극적 목적은 자기 중심으로서의 을 붙잡게 하는 것이다. 자신이 인정한 외부적 권위에 - 그게 사람이든, 사물이든, 이념이든, 그 무엇이든 - 신을 투사해서 거기에 의존하는 것은 참된 종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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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종교적 인류(homo religious)로서의 인간의 마음의 근원에서 생겨난 것이며 의식으로 하여금 자아를 넘는 커다란 신화적 원형층과의 연결을 가능하게 하여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기실현에 기여한다고 융은 보았다.

 

요 부분을 다시 읽어보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생겨난 것' 이라는 표현이 아주 중요하다. 자연발생적인 것...

 

, 종교라는 것은 우리의 의식적 노력이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 무의식 속의 원형이 상징으로 표현한 체계이다.

 

그래서 그 상징 체계, 문화는 역으로 우리 속의 무의식 속의 신화적 - 종교적 - 원형층, 즉 자기 원형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성서 속에서 읽어내고 해석해내야 하는 것도 그리스도교라는 구체적 현실 종교의 상징 체계가 담고 있는 '그런 내용'이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가 지배 권력의 어떤 목적과 의도에 의해서 체제로 변해가는것이다. 이슬람과 그리스도교는 그런 과정을 많이 거친 것 같다.

 

성서에서 '은혜냐 율법이냐, 자유인이냐 노예냐' 의 공방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레벨:8]복서겸파이터

2018.09.03 19:09:58
*.175.120.34

선생님. 반갑습니다. 저도 마침 오늘 비슷한 글을 썼는데, 안에 선생님이 쓰신 표현을 인용했습니다(따옴표안 진한글씨). 어찌 내용도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 이게 동시성인가 싶네요. ㅎㅎ


종교와 과학

 

종교와 과학의 관계는 최근 나의 삶에 있어 가장 큰 화두이다. 아마 내 평생의 숙제가 될 것이다. 종교는 인류가 생겨났을 때부터 있었을 것이지만, 과학은 그렇지 않다. 대략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쓴 후라고 생각하면, 이제 300년이 좀 넘었을까? 물론 그 전에도 과학이야 있었지만, 인류가 과학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한 시점은 그 때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사실 과학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도 매우 힘들다. 과학적 사고는 본능에 거스르는 행동이며, 훈련이 필요하다. 인간의 뇌는 과학적 사고에 익숙하지 않다. 반면, 종교는 그 역사가 장구하고 칼 구스타프 융에 따르면 아마도 무의식에서 계시되고 발생되었을 것이다. 무의식은 신과 악마와 혼돈의 어머니이다.

과학과 종교의 차이는 간략히 말해서 진리에 대한 태도의 차이이다. 종교는 진리라는 것이 무엇인지 신이 이미 알고 있고 선지자가 그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전파된다. 진리는 이미 존재하며, 그러한 진리는 사람들에게 무비판적으로 수용된다. 그러나 과학은 진리가 무엇인지 우리는 아직 모르고 그 진리를 도달하기 위한 여정에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종교는 믿음을 강조하는 반면 과학은 회의와 의심을 그 기본 마음가짐으로 한다. 종교와 과학의 충돌은 피할 수 없다.

과거 갈릴레이의 지동설은 그 당시 교회가 가지는 종교관 가치관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한 것이었다. 현대인한테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던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던 그것은 가치 중립적인 과학적 사실일 뿐이지만, 그 당시에는 종교재판을 열어 갈릴레이의 주장을 철회시켜야 할 만큼 심각한 문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종교와 과학의 대결의 결과가 시간이 갈수록 어떻게 되었는지 다들 알고 있다. 과학이 승리한 것이다.

현대는 과학의 시대이다. 이 과학의 시대에 종교가 내는 목소리는 애처로울 정도이다. 진화론이야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예를 들면,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동성애를 정죄하고, 진보적인 기독교인은 성경을 새롭게 해석해서 동성애자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복잡한 신학적 이론을 이끌어 내고 있으나, 이미 현대 정신의학에서 동성애는 질병이 아니라는 과학적 판단이 나와있는 상황에서 동성애자들을 차별하지 않기 위한 법을 제정하는데 있어 굳이 신학의 논리를 이용할 필요는 없다.

현대에도 종교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적인 영역은 어디일까? 경제학적인 문제는 어떨까? 예를 들어 상위 10%의 사람이 부의 50%이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정의롭지 않다는 주장은 어떤가? 자연을 보자. 위계가 완벽히 잡혀 있는 유인원 사회의 경우, 가장 높은 계급의 원숭이는 더 좋은 음식을 먹고, 더 많은 배우자와 성행위를 즐길 수 있으며, 좋은 곳에서 사는 반면, 하위계급의 원숭이는 날마다 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며, 배우자를 구하기도 힘들고 불편한 잠자리를 가진다. 단체행동을 하지 않는 바닷가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바닷가재도 저마다의 영역을 가지며 자기 영역을 침범한 바닷가재와 싸워 이길 경우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이 신경계에 분비되어 이긴 바닷가재는 더욱 자신만만하여 다음 싸움에서도 이길 확률이 높아지고, 진 바닷가재는 의기소침해지면서 다음 싸움에서도 질 확률이 높아진다. 결과적으로 소수의 바닷가재가 먹이를 구하기 쉽고 천적을 피하기 쉬운 영역을 차지하게 되고 여럿의 배우자를 가질 기회도 늘어난다. 진 가재는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이 더 힘들어지는 것이다. 가진 자는 더 가지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다. 이것도 불의한 것인가? 물론 자연의 섭리가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경제환경이 그것과 반드시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반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장을 통제하지 않는다면 소수의 사람에게 부가 집중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고 이것이 과연 인류사회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 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시장을 어떻게 통제해야 하는 지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부의 불평등의 정도를 x축 사회의 발전가능성을 y축으로 둔다면 그래프는 아마도 종모양을 그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가 너무 균등해서도 너무 불평등해서도 안될 것이다. 어쩌면 백년 뒤 또는 이백년 뒤에 우리의 후손들은 우리가 지금 갈릴레이의 재판을 비웃듯이 우리의 설익은 경제학적 정의감을 비웃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종교의 사회적인 역할은 무엇인가? 점점 축소되어야 하는가? 이미 축소되고 있고 더욱 축소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잠시 융이 말한 인간 정신의 발달을 이야기 해 보자. 융은 인간의 삶을 무의식에서 의식이 발생하고 발전하고 다시 저물어 무의식으로 돌아오는 과정으로 보았다. 해가 뜨기 전, 빛이 전혀 없는 어둠처럼 태아 때나 간난아기일 때, 의식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어린 시절 정신적 삶은 무의식적인 삶으로 시작한다이 때의 정신은 의식이 무의식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 가깝다. 그러다가 사춘기를 즈음하여의식이 무의식에서 분리되어 나오기 시작하면서무의식은 의식에 의해서 억압이 되어 수면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하고의식이 정신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다. (사춘기 시절이 불안정한 이유는 주도권이 바뀌는 사춘기가 급변적 과도기이기 때문이다.)

 

융은 창세기의 선악과 설화는 인간의 정신적 급변기인 사춘기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본다선악과를 따먹는다는 것은 인간의 정신이 무의식적인 삶을 살던 어린 아이의 삶에서부터무의식에서 의식이 분리되면서 그 의식이 자신을 책임지며 살아가야하는 삶으로의 급변을 의미한다고 본다실낙원은 의식과 무의식이 분열된 이원론적 삶의 시작을 의미하는 상징이다.

 

사춘기를 넘어서 성인이 되어갈수록 인간은 의식이 주도권을 더 강화하고무의식은 완전히 수면 아래로 내려가 드러나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이 때의 삶은 사회화와 개인적 성취를 이루어가는 자아실현의 삶이다비유를 하자면 기초 없이 높은 탑을 쌓아가는 시기이다이 때는 의식과 무의식의 긴장이 극에 달하는 시기이며그럴수록 정신적 에너지는 넘치는 시기이다.

 

그러다가 마흔을 전후한 나이가 되면 자신이 쌓아온 탑은 그 기초가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지금까지의 삶이 높이적인 삶이었다면 이제는 깊이적인 삶이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다사춘기 이후 지금까지의 삶이 의식의 주도에 의해서 무의식이 억압된 삶이었다면지금부터는 내 속의 무의식이 의식화되어 드러나면서 의식과 화해하고 통합된 삶으로 가야하는 시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결국 마흔 이후의 삶은 무의식과 의식이라는 대극이 통합된 인격 완성의 길로 접어들어야 하는 것이다”(따옴표 부분은 발췌). 노년이 되면 이제 의식의 태양은 저물기 시작하며, 결국 다시 무의식 속으로 지게 되는 것이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발생학의 첫 시간에 배우는 말이다. 물론 엄밀한 과학적 명제는 아니다. 물고기나 새나 포유류나 사람이나 그 배아초기 시기에 비슷한 형태를 가지는 것이나 박쥐의 날개나 고래의 갈퀴, 사람의 손이 같은 수의 뼈와 비슷한 형태를 가지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어쩌면 저 명제는 본질적이며 기본적인 형태는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다른 표현인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종의 운명은 개체의 운명과 그 본질적인 형태가 닮을 수 있다는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을 한번 해보고자 한다.

, 현재의 인류를 한 명의 사람이라고 생각해본다면, 이제까지 인류는 종교의 지배아래(무의식) 살아오다가 과학의 발전으로 계몽되어 의식이 발달하는 시기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지난 세기의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와 같은 고통은 사춘기의 불안과 방황이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인류는 현재 초기 성년기에 해당할 것이다. 지금은 의식의 태양(과학)이 더 떠올라서 더 밝히 세상을 비추어야 하고 종교는 수면아래로 가라앉아야 할 시기이다. 그렇다면 인류의 중년이후 다시 종교가 필요해질 시기가 올 것이라는 예상도 가능하다. 그게 언제일까? 물리학의 Theory of Everyting이 완성되는 그 때일까, 인류의 인구성장이 멈추고 감소하는 때일까? 아니면 인류가 유전자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때일까. 그 때가 언제 인지 알 수 없으나 그 때가 반드시 올 것이라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과학이 사회의 많은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주장한 바는 종교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이야기일 뿐, 한 개체로서의 삶에는 어느 시대에나 종교는 필요하다. 개개인의 인간은 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개체로 산다. 인간은 무의식을 완전히 무시하고 살 수 없다. 마이클 셔머나 리처드 도킨슨 같은 무신론적 회의론자들도 꿈은 꿀 것이고, 뱀과 같은 파충류를 보면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러한 종류의 두려움은 우리 뇌에 각인되어 있고 심지어 인류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무의식에 존재해왔다. 뿐만 아니라 누미노제(신성)의 경험은 의식적 인간의 정신을 뿌리부터 흔들어 놓고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삶의 형태를 살지 못하게 한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서 무의식을 무시하고 살 수 없다. 우리(또는 우리의 의식)가 온 곳은 무의식이며 결국 돌아갈 곳도 무의식(죽음)이다. 그러므로 무의식을 무시하고 사는 사람은 부모와 고향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곳을 알기 위한 또는 그곳으로 가기 위한 가장 좋은 준비는 종교라는 것을 이제까지 인류역사에 있었던 선지자들이 증언하고 있다.

[레벨:28]첫날처럼

2018.09.04 10:47:51
*.168.51.35

오... 좋은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꼭 달고싶은 댓글이 있는데., 잠시 있다가 시간 날 때 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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