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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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헌책방에 갔다가 우연히 원서 코너에서 Karen ArmstrongBible 이라는 책을 발견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샀어요. 예전에 신을 위한 변론을 읽고는 너무 큰 임팩트를 받아서 이 사람 책은 무조건 읽고 싶었죠. 구약의 형성 과정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이 많았던 터에 너무 재밌게 읽다가 번역 겸, 정리 겸 해두면 두고두고 읽기에도 좋을 거 같아서 한 번 시도해 보았어요.. 스크롤의 압박이 느껴지지만 읽어보면 구약 성서를 읽는데도 도움이 많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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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스라엘의 탄생: 부족 연합 국가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척박한 가나안의 고산지대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3세기경부터이다. 이 곳은 기원전 19세기 이후로 이집트의 통치 하에 있던 곳으로서, 기원전 13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그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유래에 대해서는 이야기들이 많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해안가의 평야 지대에 위치한 도시 국가들이 몰락할 때 거기에서 빠져나온 유민들을 지칭하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 곳에서 남쪽에서 온 다른 부족들과 합류하게 되는데, 이 부족들이 가져온 신의 이름이 야웨였다. 그리고 야웨는 시나이 산 주위의 남쪽 지역에서 유래된 신이다.

 

모세와 히브리인들의 이집트 탈출 이야기는 역사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는 증거를 찾기 힘든 사건이다. 다만 이집트가 가나안의 고산지대를 지배하던 시기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곳에 살던 시기가 1세기의 기간이 겹치므로, 그들이 이집트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집트 탈출 이야기는 실제 역사에 기반한 픽션, faction 이라고 할 수 있다. 모세도 어떤 의미에서든 실존인물일 가능성은 있다.(사실 뒤에서도 다룰 것이지만, 성서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정말 많다.)

 

원시적인 신들을 섬기면서 미신적인 신화와 의식을 만들어가던 주변의 다른 종족들과 달리, 이스라엘 인들은 이 세상에서 야웨와 함께 살아가는 삶에 초점을 맞추었고, 애초부터 인과율에 따라서 사고하는 역사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스라엘은 열 두 부족이 연합을 이루는 국가 형태로 존재했고, 당시엔 어떤 통일된 거대 서사 - 이를테면 모세의 이집트 탈출 서사 같은 - 는 존재하지 않았고, 각 부족들은 원시적인 형태의 각기 다른 이야기로 구전하고 있을 뿐이었다. 또한 각 부족들은 자신들의 영웅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단 부족들의 제사장들은 자신들이 모세의 후손이라고 생각했고, 아브라함은 남쪽의 부족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았다.

 

2. 두 왕국의 탄생

 

기원전 11세기에 이르자 이스라엘은 부족 연합으로 국가를 유지해나가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 고산 지대에 두 왕국을 탄생시켰다: 하나는 남쪽에 존재했던 유다 왕국이고, 다른 하나는 비교적 땅이 더 넓고, 더 번영했던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이었다.

 

고래로 성서 사가들은 유다 왕국과 다윗의 계보이념에 경도되어 있었기 때문에,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의 종교 제례(cult)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유다 왕국의 종교 제례의 큰 얼개는, 야웨는 건국의 아버지 다윗 왕과 무조건적인 언약을 맺고 그의 후손들은 예루살렘을 영원히 통치하면서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3. J 전통과 E 전통

 

기원전 8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구전들은 글의 형태로 쓰여지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전해온 여러 갈래의 구전들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가들에 의해서 결합되어, 일목요연하고 일관성 있는 국가적 영웅 전설로 만들어지면서 구약 성서의 첫 부분을 차지하는 모세오경의 초기 형태가 만들어진다.

 

남쪽의 역사가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서사문학은 그들의 신을 야웨라고 지칭했으므로 J 전통이라고 부르고, 북쪽의 역사가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은 그들의 신을 더 격식있는(formal) 명칭인 이라 지칭했으므로 E 전통이라고 부른다. 나중에 이 두 가지 다른 전통은 한 명의 편집자에 의해서 합쳐져서, 히브리 성서의 근간이 되는 단일한 이야기 - JE 문학 -로 만들어지게 된다.

 

J 전통에서는 신을 인간을 닮은 이미지로 표현해서 후대의 해석자들을 당황스럽게 한다. 신은 중동의 절대 군주처럼 에덴 동산을 거닐기도 하고, 노아의 방주 문을 닫기도 하며, 화를 내기도 하고 마음을 바꾸기도 한다.

 

반면에 E 전통의 엘로힘은 좀 더 초월적인 성격을 띤다. 그는 거의 말조차도 하는 법이 없고사자를 보내서 자신의 뜻을 전하기를 더 좋아한다.

 

JE 전통 공히 그때까지 유일신 개념이 그렇게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야웨는 신들의 신성한 모임의 한 구성원이었고, 엘이 자기의 아내인 아세라와 모임의 우두머리로 존재했는데, 야웨가 엘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어떤 신도 그를 넘볼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J 전통에서는 아브라함에서 다윗에게로 그 영웅 계보가 이어진다. 반면에 E 전통에서는 야곱과 그의 아들인 요셉에 집중하고, 영웅은 단연 모세다. 천지 창조, 가인과 아벨, 홍수와 바벨탑과 같은 원역사 이야기는, J 전통은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지만, E 전통에서는 그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또한 JE 공히 시내산 꼭대기에서 모세와 장로들이 야웨의 현현을 경험한 것만을 기록하고 있지 십계명을 새긴 돌판을 야웨로부터 모세가 받는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다. (이것은 후대에 첨가된 이야기로 보인다.)

 

4. 앗시리아, 예언자들, 그리고 히스기야

 

전무후무한 강대국 앗시리아가 출현했을 때, 북쪽 이스라엘 왕국은 주변국들과 동맹을 맺고 대항하다가 결국은 수도 사마리아가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이스라엘의 지배 계층들은 강제로 추방당한다. 반면에 남쪽 유다는 앗시리아와 화친을 맺고 속국이 되면서 비교적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난민들과 망명자들이 유다 왕국으로 탈출하면서 문서들을 들고 왔는데, 이 문서에는 E 전통의 영웅 서사들과, 이스라엘의 비극을 내다보았던 호세아와 아모스의 예언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문서들은 유다 왕국의 궁정 기록 보관소(royal archives)에 포함되어 세월이 지난 후에 궁정 사가에 의해서 J 문서들과 합쳐지게 된다.

 

북쪽 이스라엘 왕국 출신의 호세아와 아모스 예언자는 그 정치와 종교, 그리고 사회적 상황에 대해서 비판적이면서 체제 저항적이었으나, 남쪽 유다 왕국 출신의 예언자 이사야는 상당히 유다의 체제와 전통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따라서 그의 이야기는 다윗 왕가 전통의 이념에 충실했다. 그는 성전에서 야웨의 현존에 사로잡힌 경험을 통해서 유다가 멸망하고 거주민들이 뿔뿌리 흩어지리라는 기분 나쁜 메시지를 받았지만, 그는 앗시리아를 겁내지 않고 땅위에 가득한 야웨의 영광을 보면서 시온산에 있는 성전에 전사이신 야웨가 좌정하고 계신 한 유다는 안전하다고 보았다.

 

거기에다가 이사야는 다윗 왕의 계보에서 한 아이가 젊은 여자 - 보통은 처녀로 잘못 번역되는 - 를 통해서 태어날텐데,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며, 고통과 깊은 어둠의 그림자 속에 있는 북쪽 사람들에게 큰 빛이 되고 희망의 상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한다. 그가 바로 히스기야였고, 이사야는 그가 모든 다윗 계보의 왕들처럼 신성한 인물이 될 것이며, 대관식 날에 기묘한 모사, 전능하신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자라고 불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5. 신명기주의(Deuteronomism)의 탄생

 

성서 사가들에게 히스기야는 유다 왕국에서 이방신을 불법화한, 종교적으로 신심 깊은 위대한 왕으로 평가받지만, 그의 외교 정책은 재앙에 가까웠다. 그는 잘못된 충고와 정보를 통해 앗시리아에 반란을 일으키다가 유다 왕국은 황폐화 되었고, 많은 땅을 빼앗기게 되면서 아주 작은 소국으로 전락해버렸다.

 

그의 뒤를 이은 므나쎄 왕은 앗시리아에 항복하고 유다 왕국은 다시 속국이 되면서 다시 번영하게 되었고 그는 히스기야 왕이 했던 모든 종교적 개혁을 다시 뒤집어버렸다. 그러나 므나쎄가 죽고 난 이후 므나쎄의 그런 정책에 반대하던 사람들은 궁정 반란을 일으켜서 므나쎄의 아들 암몬 왕을 폐위하고 그 자리에 요시아를 앉힌다.

 

그러는 사이에 앗시리아가 기울고 이집트가 다시 뜨게 되면서 두 나라가 서로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 다툼을 하는 사이에 힘의 공백이 생겼고, 유다는 잠시 동안의 독립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유다에서는 민족주의적 경향이 크게 일어났다.

 

풍운아 요시아 왕은 유다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솔로몬 성전을 재정비 하면서 다시 종교 개혁에 불을 붙였다. 그 와중에 대사제였던 힐키야는 두루마리를 하나 발견하게 되는데 이 것은 신명기주의의 탄생을 알리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힐키야가 발견한 두루마리는 신명기의 초기 판본이었을 것이며, 모세가 죽기 바로 직전에 두 번째 율법을 선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신명기는 모세의 입을 빌려서 만든 완전히 새로운 경전이라고 말해야 정확하다.

 

요시아는 신명기의 가르침에 정확히 기초를 둔 정책들을 선포했고, 므나쎄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는 종교 개혁을 했다. 그는 동시에 북쪽 이스라엘의 궁정 성전제단(royal shrine)을 불법화 하고 사마리아와 베델의 성전들을 파괴했으며, 지방의 성소를 지키던 제사장들을 다 죽이고 제단을 훼손했다.

 

신명기주의를 따르던 사람들은 경전중심적 정교주의(scripture orthodoxy)를 최초로 드러냈다. 그들은 토라 중심의 사회를 만들어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면서 왕에게 씌워져 있던 신성을 걷어내고 왕조차도 토라에 복종하도록 만들었다. 신명기 전통에 따라 유다 종교는 신비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상당히 이성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 토라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야웨의 현존 경험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들은 JE 문학을 그 시대 상황에 맞게 재구성하고 새로운 내용들을 첨가하여 이스라엘의 역사를 새로 쓰기 시작했다. 예컨대 요시아가 이집트의 파라오로부터 유다의 독립을 꿈꿀 때에는 해방자 모세 이야기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고, 요시아가 옛 북쪽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는 꿈을 꿀 때는 이집트 탈출기에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사를 끼워 넣었다. 사무엘서와 열왕기에 두 왕국의 분열 이야기를 끼워 넣음으로써 다윗 왕조를 잇는 왕들과 유다 왕국만이 정통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강변하였고, 그 정통성의 정점에는 모세와 다윗보다 더 위대한 왕 요시아가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었다.

 

그러나 당시 예레미야 예언자는 그런 사가들의 붓을 교활한 것으로 여겼고, 그렇게 쓰여진 경전에 바탕을 둔 종교는 지혜를 주기는커녕 얕은 종교적 지식의 피상성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며 비판을 가했다. 구전으로 내려오던 전통이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하면서 종교는 경직되는데, 신명기주의자들의 종교가 그 좋은 예이다. 또한 그 때는 경전화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라서 종교적 문서들은 시대와 상황의 필요에 따라서 첨삭이 가능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그들은 앗시리아 점령 후에 이방화 되어버린 북쪽의 옛 이스라엘 왕국에 대해 극도의 증오심을 가졌는데, 그 것은 어쩌면 앗시리아 점령기동안 그들의 잔학성을 도리어 학습한 결과일 수도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집트 군대와 벌인 작은 전투에서 요시아가 전사하면서 그들이 꿈꾸던 새로운 시대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고,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가 바빌로니아에 의해서 함락되면서 유다 왕국의 짧았던 독립의 시대는 끝이 난다. 그 이후 왕들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사이에서 저울질하며 사대 외교를 해나간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바빌로니아에 대항하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경고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성전에 야웨가 좌정하고 계시는 한 유다는 안전할 것이라고 믿었고, 바빌로니아에 대한 두 차례의 반란이 의미 없이 끝나면서 예루살렘과 성전은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초토화 된다.

 

왕을 비롯한 유다 왕국의 중요한 요인들은 바빌로니아으로 끌려갔지만, 바빌로니아는 그들에게 운하가 지나가는 곳에 살아갈 땅을 내주고 성채를 지어 왕과 더불어 정착하게 했고, 그들은 비교적 평화롭게 살아갔다. 그런 상황에서 젊은 사제 에스겔은 야웨가 폭풍과 같이 몰아치는 소리와 불 속에서 큰 전차를 타고 예루살렘을 떠나 바빌론으로 와서 그들과 함께 하는 환상을 보게 된다. 또한 그는 야웨가 준 두루마리를 삼키는데, 꿀과 같이 달았다. 이것은 그들의 종교가 성전 중심의 종교에서 경전 중심의 종교로 옮아갈 것이라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바빌로니아로 온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의 궁정 기록물 보관소에서 가져온 두루마리들을 가지고 와서 연구하고 또한 편집하기 시작했다.

 

6. 사제 문서 전통의 탄생

 

신명기주의자들은 므나쎄 왕의 잘못된 종교 전통 때문에 유다 왕국이 바빌로니아의 포로가 되었다고 믿었지만, 사제 출신의 어떤 집단은 과거의 역사에서 새로운 관점을 발견하며 희망을 찾기 시작했다. 이들이 쓴 저작들은 사제 문서라고 불리며, 이들의 전통을 신명기 전통과는 다른 P전통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JE 문서를 재구성하여 레위기와 민수기를 추가하게 된다.

 

그들은 출애굽기를 신명기주의자들과는 다른 각도에서 읽어냈는데, 출애굽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모세가 받은 율법이 아니라, 광야 생활 동안 야웨가 그들과 항상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던 바로 그 부분이었다는 것이다. 그 약속은 광야 생활과 같은 바빌로니아 포로 상태의 유다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보았고 따라서 바빌로니아의 유다인들은 그 당시 상황 속에서 야웨의 현존을 경험하면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고 했다.

 

또한 그 거룩함은 구별된 정결한 삶과 더불어 약자들을 비롯한 타자들에 대한 존중, 심지어 바빌로니아와 같은 적들과의 화해로 드러난다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배타적인 신명기주의자들과 달랐다. 레위기와 민수기에서도 드러나지만 그런 정신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창세기 1장의 창조 설화이다.

 

그런 점에서 창세기 1장의 창조 설화는 우주의 기원에 대한 사실을 적은 문서가 아니라 야웨의 창조의 힘을 통한 화해와 치유의 메시지를 담은 내용으로 볼 수 있다. 바빌로니아의 포로가 된 유다인들은 야웨가 바빌로니아의 신 마르둑에게 패배했다는 열패감을 은연중에 가지고 있었고, P전통주의자들은 야웨는 패배자가 아니며 영원하고 완전한 승리자이자 창조주라는 사실로 그들을 위로하고 싶었다.

 

바빌로니아의 신 마르둑을 비롯한 근동의 신들의 창조 이야기는 창조의 과정 중에 신들 간의 다툼, 파괴와 죽임을 담고 있지만, 완전한 승리자 야웨는 아무런 다툼도 없이 세상을 구성하는 피조물들을 평화롭게 지어내고 축복한다. (물론 이스라엘인들은 태초에 야웨가 바다 괴물들을 죽이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 P전통주의자들은 그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심지어 야웨가 축복하는 피조물에는 바빌로니아도 포함 된다.

 

7. 바빌로니아의 멸망과 새 시대의 도래

 

기원전 6세기경에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고레스)는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역사상 유래 없이 큰 왕국을 이룬다. 키루스 왕은 포로로 잡혀왔던 유다인들을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었고, 바빌로니아에 의해서 무너진 성전 재건도 허락하였다. 2 이사야는 이 상황을 야웨의 완전한 승리로, 키루스는 야웨의 뜻을 이루어 가는 종, 구원자로 인식하였고, 이때부터 야웨 유일신 사상이 점점 더 뚜렷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 2 이사야는 야웨가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물리치고 정복하는 공격적인 비전과 함께 고난 받는 종의 노래가 보여주는 것처럼 모든 나라들이 화해와 치유를 경험하고 구원받는 아주 상반된 비전을 이야기 한다.)

 

본국으로 돌아온 바빌로니아 유민들은 9개의 두루마리 -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와 열왕기 - 를 들고 들어온다. 덧붙여 예언자들의 구전을 담은 책(느비임)과 바빌로니아 포로시기에 지어진 새로운 시들이 담긴 송가도 함께 들어온다.

 

8. 에스라의 귀환과 경전화의 시작: 토라와 미드라쉬

 

바빌로니아에 의해서 무너졌던 성전은 키루스의 칙령으로 다시 시온산에 세워졌지만, 솔로몬 성전의 아름다움에 미치치 못하여 유다인들은 실망감에 빠졌다.

 

기원전 398년에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는 유다인 관련 주무 담당 장관이었던 에스라를 예루살렘으로 파견하여 모세의 토라를 그 땅의 법으로 확립하라는 칙령을 내린다. 말하자면 바빌로니아와는 달리 페르시아는 페르시아의 국법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식민지 국가들의 자치권을 인정해주는 정책을 편 셈이다. 토라에 정통했던 에스라는 페르시아의 국법과 모세의 율법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을 이루어냈고, 키루스는 그래서 그를 적임자로 본 것이다.

 

에스라는 바빌로니아에 있던 유민들(Golah)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왔지만, 그는 그 땅의 현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예루살렘 거민들은 이방인과 구별이 되지 않았고,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는 것이 일상화 되어있었다. 따라서 그와 그들은 예루살렘에 살던 이방인들 뿐 아니라 남아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도 환영을 받지 못했다. 왕의 사절인 에스라는 길 가에서 옷을 찢으며 울부짖었고 사람들은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정월 초하루 날 에스라는 광장에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나무 연단에 서서 토라를 읽었고, 토라에 정통한 레위인들은 사람들의 사이를 다니면서 그것을 해설해주었다. 처음 들어보는 토라의 요청 - 미드라쉬 - 에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끼면서 울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절기 규정에 따라서 나뭇가지로 움막을 짓고는 매일 저녁 에스라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이 때부터 토라는 어떤 문서들보다도 격상되어 모세의 율법이라고 불리우면서, 단순히 일상적으로 읽혀지는 책이라기보다는 종교 의식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종교적 의무와 부담을 지우는 경전으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바빌로니아 포로기 이전에는 제사장들이 야웨의 뜻을 구하는 것이 우림과 둠밈이라는 신성한 물건을 이용하여 제비를 뽑아서 점을 치는 형태였다면, 이제는 학자들이 성서를 해석하는 형태 - 미드라쉬 -로 바뀌었고, 또한 그 것은 학문적인 훈련이 아닌 영적인 탐구와 실천적인 목적을 띠는 것이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가진 자들을 Golah와 토라에 복종하는 사람들에게로 국한했고, 이방 출신의 아내들을 다 돌려보내라고 명령하면서 사람들의 거센 저항과 위협에 부딪힌다. 결국 경전-토라-중심적 열광주의는 배타적이고, 분열적이었으며, 잠재적으로는 잔인한 정교주의를 낳게 한 셈이다.

 

그러나 미드라쉬 전통은 야웨의 계시를 단회적인 사건으로 보지 않고, 해석을 통하여 새로운 가르침들이 계속적으로 드러나는 끝없는 과정으로 보았다는데 의의가 있다.

 

9. 지혜 문학 전통의 탄생

 

이미 확정된 경전인 토라와 느비임 -예언서- 외에 다른 형태의 책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 것은 저작이라는 뜻을 가지는 케투빔이었다. 예를 들면 신명기 사관에 입각해 서술된 사무엘서와 열왕기에 P 사가들이 논평을 달아놓은 역대기가 케투빔의 일종이다. (사무엘서와 열왕기가 그리스어로 번역될 때는 번역자들이 P 전통에 충실한 나머지 그 속에 드러나는 북쪽 이스라엘 왕국에 대한 적대적 표현들을 다 생략해버리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고 궁정의 현자들은 토라와 느비임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면서, 솔로몬 왕과 관련시킨 케투빔 전통을 발전시켰는데, 그 것을 지혜 문학이라고 이야기한다: 신적인 근원으로부터 나와서 우주의 바탕에 깔려 있지만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원리를 그들은 지혜 - 호크마 - 라고 불렀고, 그 지혜가 한 번씩 그 모습을 드러날 때 현자들이 그 것을 깨달아 금언(maxim)의 형태로 만든 저작을 말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잠언, 전도서, 그리고 아가서가 있다. 그 중에서 허무함의 지혜를 전하는 전도서는 모든 토라 전통과는 대척점에 서서 그 전통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성격의 지혜 문학 저작인 욥기는 공의로운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상에서 왜 무죄한 사람이 고통을 받아야만 하는지에 대한, 풀리지 않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결국 야웨는 출애굽 사건을 언급하지 않고, 욥으로 하여금 창조 세계의 저변에 깔려 있는 신적인 계획을 관조하게 하는 것으로써 대답을 대신한다. , 욥기를 쓴 현자는 토라를 연구하는 것이 아닌, 피조세계의 경이로움에 대한 명상을 통하여 지혜를 얻었던 것이다.

 

기원전 2세기경에 벤 시라를 비롯한 어떤 지혜 문학가들은 토라와 지혜 문학의 접점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 지혜 - 호크마 - 를 인격화하여 여성의 형태로 표현했다. 야웨의 말씀과 원대한 계획으로서, 신성한 그녀는 이미 그녀를 만든 야웨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온 땅에 편만하게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녀는 야웨의 신성한 숨결, - 루아흐 - 그리고 모든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야웨의 말씀이다. 또한 그 숨결은 창조의 과정이 시작될 때 태고의 바다 위로 운행하던 바로 그 것이다. 지혜는 모세의 율법과 동일한 것이 되어, 결과적으로 토라는 더 이상 단순한 법조문이 아니라 최고의 지혜와 가장 초월적인 선의 표현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또한 토라를 연구하는 것은 사랑하는 여인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은 연모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이 것은 아가서가 지혜 문학에 포함된 이유이다.

 

10. 다니엘서: 지혜문학과 예언서의 만남

 

벤 시라는 지혜 문학의 가르침은 예언처럼, 다가올 모든 세대에게 유산의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성서연구가들은 단지 예언서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것에 대한 해석 - 미드라쉬 -을 통해서 예언자가 된다고 했다. 그 것이 여실히 드러난 작품이 다니엘서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마케도니아 왕국을 만들었고, 그 아들들에 의해서 4개의 헬레니즘 제국으로 갈라지는데, 그 당시 유다는 그 제국들 중의 하나인 셀류코스 제국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왕의 치하에 있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 헬레니즘 종교 의식을 도입하면서 성전 모독을 자행하였고, 유다인들에게 헬레니즘을 강요하면서 자신의 통치를 반대하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기원전 164년 마카비 형제는 반란을 일으켜 성전 산으로부터 그리스인들을 축출했고, 전쟁은 20년간 계속 되다가 결국 셀류코스 제국이 물러나면서 꿈에 그리던 유다의 독립을 이루면서 하스몬 왕조가 80년이 이어지게 된다.

 

다니엘서는 바로 이 마카비 전쟁 동안에 쓰여진 책이다. 다니엘은 바빌로니아 포로기 시절 유민으로 경건하고 학식 있는 유대인이었다. 다니엘서는 이 역사적 인물을 차용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다니엘서 속의 다니엘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성전 모독 전후로 다른 유형의 인물로 묘사가 된다. 성전 모독 전에 다니엘은 모든 종류의 꿈과 환상들을 해석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전형적인 중동의 궁중 현자로서 나타나고, 성전 모독 후에 마카비 형제가 승리하기까지 다니엘은 경전의 연구를 통해서 예언자적 통찰력을 가지게 된 사람으로 나온다.

 

그는 꿈에서 괴수로 묘사되는 무시무시한 네 왕국을 본다. 연속된 네 왕국은 갈수록 더 끔찍해지며, 그 중에 전무후무한 악행을 저지르는 마지막 네 번째 왕국이 바로 셀류코스 제국이다. 다니엘은 안티오쿠스가 성전에서 헬레니즘 종교 의식을 행하는 만행을 저지를 것을 미리 내다본 셈이다. 또한 다니엘은 사람의 아들 같은 자가 천상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면서 동터오는 희망을 노래하는데, 그 사람의 아들 같은 자가 바로 마카비 형제이며 그들은 신비하게도 인간이면서도 인간 이상의 존재이다. 또한 그는 야웨의 현존으로 들어가 왕의 위를 받는다.

 

다니엘은 경전 속에서 깨달음을 찾다가 예레미야서의 ‘70에 맞닥드리게 된다. 이 것은 바빌로니아에 의해서 성전이 파괴되고 난 후 이스라엘이 회복되기까지 걸리는 대략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기원전 2세기의 다니엘서의 저자는 그 70년에서 과거의 역사적인 의미가 아닌 현재와 미래적 의미를 이끌어낸다. 즉 마카비 전쟁을 통하여 셀류코스 왕조 통치의 종식을 염원하는 유다인들에게 희망을 주려고 한 것이다. 이 것은 향후 전형적인 유다인들의 역사 해석 방법이 되는데, 말하자면 텍스트를 통해서 과거의 역사적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적 전망을 찾아내는 것이다.

 

다니엘은 70년이라는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을 때 단식과 같은 고행을 통한 수행으로 결국 신적 통찰력을 가지게 되었다. 저자는 다니엘의 깨달음을 이사야나 에스겔의 경험과 같은 반열에 두면서 결국 토라의 연구는 바로 예언자적 훈련과 같은 것이라는 점, , 텍스트의 원저자도 미처 알지 못하고 쓴 미래적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슬프게도 마카비 형제에 의해서 세워진 하스몬 왕조는 유다인들의 간절한 희망을 저버린다. 왕들은 잔인했고 타락했으며, 부당하게 대사제직을 차지함으로써 성전 규례를 어긴다. 경건한 유다인들은 분노하고 절망하게 된다. 결국 그들은 다윗의 반열이 아니었던 것이다.

 

11. 묵시적 경건주의( apocalyptic piety)의 탄생과 분파들의 출현

 

하스몬 왕조를 경험한 경건한 유대인들은 기원전 2세기 끝자락부터 종말론적인 전망을 가지게 되면서 여러 분파들이 생겨났고, 자신들만이 진정한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아직 경전이 확정되지 않았고 정교주의가 출현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토라와 느비임(예언서)를 창조적으로 읽고 새로운 경전을 만드는데도 주저함이 없었다. 1942년 꿈란 공동체의 도서관이 발견되면서 제 2 성전기의 분파적 다양성에 관해서 알려지게 되었다.

 

꿈란 공동체는 예루살렘을 떠나 사해 기슭에서 폐쇄적 수도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고, 토라와 느비임 속에 숨겨진 진실들은 자신들을 통해서만 해독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빛의 자녀들이 완전히 승리하는 날, , 야웨가 새로운 질서를 통하여 위대한 성전을 손수 짓고 모세의 율법을 새롭게 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보았고, 그들은 스스로를 사제적 정결례를 통하여 야웨의 완성을 준비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꿈란은 에쎄네 운동의 극단적 분파로서 기원전 1세기경에는 그 수가 사천 명에 달했다.(대부분의 에쎄네 파들은 사막이 아닌 마을에서 가정을 이룬 상태로 정결례적인 공동체 생활을 하였고, 공동 식사와 공동 재산 관리를 통하여 야웨의 궁극적인 통치를 염원하며 살았다.)

 

또 다른 분파는 바리새파로서, 그들은 인구의 1.2 퍼센트를 차지했고, 사람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았다. 그들은 평신도들이었지만 헌신된 정결례적 삶은 성전의 사제들 못지 않았다. 토라와 느비임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좀 더 전통적이었지만, 야웨의 궁극적 승리를 통한 의로운 자들의 부활을 믿었다. 그 때문에 경전에 대한 보수적이고 경직된 해석을 가지고 있었던 사두개파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떤 분파들은 경전을 다시 쓰기도 했는데, 에녹서와 희년서(요벨의 책)가 그 대표적인 것들이었다. 그들은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야웨의 뜻을 아예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버렸다.

 

12. 메시야 사상의 출현과 신약의 시작

 

기원전 1세기 이전에는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을 메시야가 올 것이라는 생각이 보편화되어있지 않았고 있다 하더라도 일관성 있는 전망으로 표현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야웨는 사람을 통하지 않고 직접 세상을 통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원전 63년에 로마의 폼페이 장군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로마 제국에 편입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물론 로마 제국은 헤롯을 통하여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새로 짓고 순례자들이 거기에 모여서 절기들을 지키도록 허락하는 등 시혜적인 모습도 보였지만, 폰티우스 필라투스같은 총독들은 유다인들의 감수성을 극도로 자극하면서 튜다스나 이집트인으로 알려진 예언자들은 사람들을 모아서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한 시도들은 잔인하게 진압되었고 심지어 봉기자들은 집단적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

 

기원후 20년경에 에쎄네 출신으로 보이는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사막에서 금욕적 생활을 하며 임박한 하늘나라를 설파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아 새로운 삶의 다짐을 통하여 곧 다가올 큰 심판을 준비하라고 가르치면서 큰 호응을 얻었다. 그는 로마 체제에 위협적이지 않았음에도 당국에 의해서 처형당하였다.

 

세례자 요한과 거의 같은 시기에 나사렛에서는 예수가 나타나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면서 하느님 나라의 임박한 도래를 설파하였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축제를 지키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로마 당국(을 등에 업은 유다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체포되었고, 유월절 폭동 가능성을 두려워 한 당국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해버린다. 그 이후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경험했고, 그의 부활은 마지막 날 의로운 자들의 부활을 예고하는 것으로서 그는 곧 새로운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유대교의 짜딕이었던 예수의 동생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그는 에쎄네파와 바리새파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예수 운동은 그리스어가 모국어인 디아스포라 유다인들 뿐 아니라, 심지어 회당의 명예 회원들로서 하느님을 경외하던 비유다인들에게도 역시 매력을 끌었다.

 

그 당시 바리새파와 에쎄네파는 이방인들에 대해서 적대적이었지만, 예수 운동은 그렇지 않았고,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이 그 운동의 구심점을 차지하게 되면서 배타성이 사라지고 헬레니즘에도 더 열린 태도를 취하게 된다.

 

13. 그리스어 70인역 구약성서의 탄생

 

이집트 북부의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도시로서 학문의 중심지였고, 거기에서 살며 그리스어가 모국어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그리스와 유다 문화를 융합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들 중에 고전 히브리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따라서 토라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심지어 팔레스타인에서 조차도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보다는 아람어로 대화했기 때문에 회당에서 토라와 느비임이 크게 읽혀질 때 해석 타르굼 이 필요할 정도였다.

 

따라서 기원전 3세기경에 유다인들은 알렉산드리아 해안에 인접한 파로스라는 섬에서 그들의 경전을 그리스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유대교 경전에 심취했던 식민지 이집트의 그리스 왕 프톨레미 필라델푸스는 그리스어 번역본을 자신의 서재에 소장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에게 12지파에서 원로 각 6명씩을 뽑아 파로스 섬으로 보내어 번역 작업을 돕기를 요청했다. 번역 작업은 훌륭하고 완벽했으며, 신적인 영감 속에서 그들은 말하지 않고도 마음이 통하여 어떤 히브리 단어에 일치된 그리스어 단어를 말하는 등 놀라운 모습을 보였다. 번역 작업은 그들을 사제와 예언자로 만들었고 새로운 토라 정신을 낳았다. 번역에 참여했던 칠십 여명의 사람들의 노고를 기려서 이 성서를 칠십인역(Septuagint) 라고 부르게 되었다.

 

14. 필로, 그리고 구약 시대의 종언

 

세례자 요한, 예수, 그리고 힐렐과 동시대의 사람으로서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명한 성서해석자였던 필로는 경전 해석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플라톤주의자였던 그는 셈족의 역사적 언어로 표현된 경전을 플라톤의 철학적 언어로 바꾸었다. , 경전의 표면적 언어를 넘어선 곳에 있는 깊은 철학적 원리를 발견하여 더 근본적인 진리에 도달하려했던 것이다.

 

그는 특히 창세기와 출애굽기에 많은 주해를 달았는데, 예를 들면 그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의 주제를 자기애와 하느님 사랑 사이에 일어나는 싸움으로, 또한 또 다른 뒤집어 읽기에 의해서 통제되지 못한 자기애가 우리 속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파괴할 때 일어나는 일로 읽어내었다.

 

그의 해석학은 단지 학문적 기교가 아니라 영성 생활의 실제를 의미했고, 실제로도 그는 성서를 해석하는 도중에, 사제가 종교적 제의를 행하는 동안 경험하는 탈아적 상태(extasy)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 당시 로마 제국은 유다인들의 봉기를 두려워했고, 기원후 66년에는 유다의 열심당 무리들이 팔레스타인에서 봉기를 조직하여 로마 제국에 4년간 끈질기게 맞서는 일까지 생겼다. 로마 제국은 이 봉기의 영향이 디아스포라 유다인들 사이에 퍼질 것을 두려워해서 약간의 낌새에도 가혹하게 대응했고, 그 때문에 필로가 죽은 후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사회는 대학살을 경험했다.

 

기원후 70년에 베스파시안 황제는 예루살렘을 완전히 함락시켰고, 로마 군인들이 예루살렘 성전 안뜰에 숨어있던 6000명의 열심당원들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결사항전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성전은 불태워졌고 그들은 황제의 아들이었던 디도 장군의 병사들에 의해서 전멸되었다.

 

성전의 파괴를 경험한 예수 운동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경전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8.10.22 21:39:07
*.182.156.135

와, 대단하고 멋지네요.

구약의 신학적 배경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군요.

저에게도 큰 도움이 되는 내용입니다.

[레벨:23]브니엘남

2018.10.23 07:14:39
*.118.77.224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당케

[레벨:8]복서겸파이터

2018.10.24 10:22:26
*.142.23.84

저도 이 책 읽어봤습니다. 선생님은 책을 이해하시고 그것을 요약해서 풀어주시는데 정말 탁월한 은사를 가지고 계신 듯 합니다. 감사드립니다. 두 번 감사드립니다 ㅎㅎ
profile

[레벨:40]새하늘

2018.10.25 14:26:38
*.126.124.2

열심히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레벨:8]복서겸파이터

2018.11.30 11:20:28
*.142.23.103

글 좀 퍼가겠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13]하늘연어

2018.12.01 15:01:31
*.86.237.246

좋은 내용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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