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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독후감

조회 수 1476 추천 수 0 2018.10.29 15: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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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독후감>

 

1. 로마서 축약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와 허성갑 목사님의 헬라어 직역 성경 참고)

 

삼라만상을 통하여 하느님의 신성은 뚜렷이 드러나고 있지만, 헬라인은 물론, 토라를 가진 유다인들도 똑같이 하느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따라서 토라의 유무에 관계없이 누구나 다 똑같은 죄인이며, 하느님의 진노는 양자에게 똑같이 내립니다. 그렇지만 토라와 예언서의 정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죄 없다 하심을 받은 다윗과 할례 전 아브라함은 토라가 아닌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서 의인으로 용납되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그는 할례자와 무할례자 모두의 조상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 되었으나, 예수의 은혜로 모든 사람들이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예수와 함께 살아남으로 죄에서 죽고 하느님 앞에서 살아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죄의 종에서 의의 종이 되었고 죽음에서 영생으로 왔습니다. 남편이 죽은 여인은 그 남편에게서 해방되듯이, 우리는 토라에서 해방되었습니다. 토라는 선한 것이지만 죄는 토라 뒤에 숨었다가 드러나면서 힘이 강해집니다. 나는 선을 행하고 싶으나, 또 다른 나는 악을 행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육의 삶에서 영의 삶으로 가야 합니다. 또한 종의 영에서 벗어나 아들 됨의 영으로 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맏아들 되신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들인 우리와 공동 상속자입니다. 멸망의 종살이 속에서 고통 받는 피조물들은 하느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희망도 하느님의 아들들이 되어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움을 통하여, 인내와 기다림을 낳는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이 계획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나에게는 동족 이스라엘을 향한 아픔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토라의 행위에 집착하게 되어, 도리어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이삭같은 약속의 후손이된 것은 하느님의 선택이며 뜻입니다. 토라는 그들에게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믿음에서 나오는 의를 붙잡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찾으러 하늘로도 깊은 바다로도 갈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은 - 그리스도는 - 우리 곁에, 우리 입에,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유다인들 중에도 엘리야 때처럼 은혜로 선택받은 자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그 원뿌리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다인과 헬라인은 한 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위에서부터 오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특별히 음식 규정의 문제에 있어서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배려하고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나는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의 형제들이 가난한 예루살렘 형제들을 위해 모금한 연보를 전해주고 난 후 스페인을 거쳐서 여러분을 꼭 만나러 갈 것입니다. 분열을 조장하며 자기 잇속 차리기에만 여념이 없는 삯꾼들을 조심하십시오. 브리스카와 아퀼라 부부를 비롯한 로마에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 인사를 전합니다. 또한 디모테오와 가이오 및 여러 형제들의 인사를 대신 전합니다.

 

2. 로마서가 쓰여진 배경

 

2 성전기 이후에 나타난 에쎄네파나 바리새파는 틀림없는 미드라쉬 운동이었다. 그들은 경전 - 구약 - 의 창조적이고 새로운 해석을 통하여 경건한 유다인들의 종교적 삶을 이끌었다. 로마서를 비롯한 바울 서신도 미드라쉬의 형태로 볼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들이 경전이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메시아와 하느님의 나라가 임박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공관복음이나 요한복음은 바울 서신과는 달리 자신들의 공동체가 처한 상황에 맞게 그려낸 예수의 공적 생애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예수의 공적 생애를 경전 - 구약 의 빛으로 채색하여 사진이 아닌 각기 다른 그림으로 그려냈다는 점, 그리고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구약에 나타난 예언의 성취로 본 점에서 미드라쉬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베스파시안 황제 시절 디도 장군에 의해서 성전이 파괴되고 유다교의 구심점이 사라진 상태에서 유다교 적통을 누가 차지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경쟁이 치열해진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도 그 경쟁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유다교의 스펙트럼 안에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참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했다. 예수의 제자들은 유다교의 정결례와 규례들을 철저히 지켰고, 특히 예수의 동생 야고보는 유다교의 짜딕’ - 의인이라는 뜻을 지닌, 영적으로 신비한 힘을 가진 유다교의 지도자 - 으로, 바리새파와 에쎄네파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통적 유다교에서 결국 끝까지 살아남은 종파는 바리새파였고, 바리새파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게 있어서 강력한 라이벌이었다. 열심당이 로마에 저항하던 당시에 베스파시안 황제의 선처로 야브네란 지역으로 연구 본거지를 옮긴 바리새파는 새로운 미드라쉬 운동을 통하여 엄청난 부흥을 경험했고,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큰 위협을 느끼게 된다. 그 흔적들은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 바리새파에 대한 적대적 감정의 형태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에서 큰 충격과 함께 영감을 얻었다. 그들에게 성전의 파괴는 전통적 유다교의 붕괴와 종말의 시작을 의미했고, 유다교의 중심이었던 성전의 자리는 예수로 대체되어, 곧 다시 오실 예수를 통하여 성전이 회복될 것이라는 주장이 그들로부터 나오기 시작한다. (복음서에도 예수가 성전 파괴를 예언한 내용이 나오고,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가 말한 성전을 헐면 3일 만에 다시 세우리라는 이야기를 근거로 성전 모독죄를 죄목 중의 하나로 추가하기도 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예수의 임박한 재림을 믿은 그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성전의 잔해에 모여서 공동생활에 가까운 삶을 이어간다.

 

경건한 이방인들은 유다교 회당에서 명예 회원으로 집회에 참석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베드로를 만난 코르넬리우스와 자신의 병든 종을 고쳐달라고 예수 앞에 나왔던 이름 모를 백부장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유다교인이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할례라는 걸림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다 받아주었다. 유다인들로만 이루어진 폐쇄적 요한 공동체를 제외하면 마태, 마가, 누가 공동체는 이방인들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였고, 그 중에서 누가 공동체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많은 이방인들이 공동체로 모여들었다. 그러던 중에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공동체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심심찮게 나오기 시작한다. 지도자였던 야고보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갑자기 어느 곳으로도 돌아갈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충격에 빠진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이 원래 살아갔던 사회에서도, 자기들의 새 고향인 그리스도 공동체에서도 다 버림받게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서 자신이 살았던 사회의 관습들을 다 버렸던 것이다. 그 당시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경건한 유다인들과 다름없는 정결례적이고 고결한 삶을 살면서 하느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을 드러냈고, 자기 초월적인 상태에서 예언과 기적, 그리고 방언을 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인다.

 

바울은 이 것을 이방인들이 임박한 종말의 상황 속에서 이미 하느님의 임재 안에 들어온 증거로 보았고, 따라서 그들이 할례를 받지 않아도 그리스도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야고보와 마찰이 생기게 된다. 바울의 이야기는 유다교에 속하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거기다가 한 술 더 떠서 로마서에서는 토라에 얽매인 유다인들을 혈육의 자손들로 - 이스마엘의 자손들 - 예수의 은혜로 의인이 된 헬라인(이방인)들을 바로 약속의 자손들로 - 이삭의 자손들 표현하기까지 한다. 당시로서는 아주 도발적인 주장이었다..

 

유다교인들이 성전에서 하느님의 임재 - 쉐키나 -를 느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의 임재를 느꼈다. 바울의 서신은 하느님의 임재가 성전에서 예수로 옮아갔다고 해석한 미드라쉬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바울을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의 임재, 즉 누미노제를 경험하는 사람들이었다. 바울은 예수를 통하여 그리스도 - 마쉬아흐 - 를 발견했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임재 경험으로 들어가는 핵심 코드였던 셈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임재 경험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외적 규범의 생활이 아닌 내적 자유의 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민족과 종교를 넘어서서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적 온전함과 성숙, 그리고 완성으로 이끌어가는 존재였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바울은 유다인들 - Judahites - 자체가 아니라 이방인들을 유다화 시키려는 사람들 - Judaizers - 에게 비난을 가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복음서 저자들과는 달리 바리새파 사람들을 긍정했고 스스로도 바리새파라고 이야기하기까지 한다. 또한 그 당시 아직 종교화하지 않았던 그리스도교의 원류가 바로 유다교에 있음을, 로마서에서 가지와 원뿌리의 비유로 천명한다.

 

또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은 구약을 부정하고 가현설과 영지주의적 그리스도교를 주창했던 마르시온이 바울 서신을 애지중지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가 너무 멀리 궤도이탈을 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여기서, 마르시온이 입맛을 다셨을, 바울의 밀교적 그리스도 신비주의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합일과 종말에 만물이 하느님 안에서 하나됨 - 를 어렴풋이 느낀다. 각기 다른 상황적 특성을 가진 바울 서신 전체를 꿰뚫는 일관된 사상이기도 하다. 그 전통은 에크하르트를 비롯한 신비적 영성가들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상 로마서도 이런 빛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그냥 사변적 논리에서 끝나버리고 말 것이다.

 

3. 로마서로부터 현재를 비추어보기

 

나는 현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당시 바울이 비판을 가했던 경직된 토라와 성전 체제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우려한다. 그 이유는 뭘까? 한국의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는 성서에 대한 발전적이고 열려진 해석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그리스도교 토템으로서의 예수가 턱 버티고 있다. 당시 유대교에게 토라가 걸림돌이었다면, 지금 그리스도교에게는 예수가 걸림돌이다. “오직 예수라는 종교적 모토가 드러내는 폭력성과 억압성이 내 눈에는 뚜렷이 보인다. 바울이 말한 예수 그리스도는 오히려 신과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창조적인 자유로움, 유다인과 헬라인이 하나가 되는 모습에서도 보이듯이,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생명력()을 의미해야하지 않을까?

 

그리스도교는 2000년 역사 속에서 궁극적 관심을 표현하는 아주 훌륭한 종교 전통을 이루어놓았다. 그러나 인류사적으로도 대단한 전통을 가졌던 유다교에서도 스스로를 절대화하고 그 자체가 도그마가 되어버린 종파들은 결국은 도태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끝없이 쇄신에 쇄신을 거듭한 바리새파만이, 바울이 말한 남은 그루터기처럼, 현대 유다교의 계보를 이어오는 것처럼, 그리스도교도 진리에 대하여 끝없이 창조적으로 변화하는 열린 종파만이 미래에 그리스도교의 계보를 이어가며 살아남게 될 것이다. 유다주의적 그리스도교는 흔적도 없이 다 사라지고 바울의 그리스도교가 살아남은 것처럼 말이다.

 

바울이 로마서 초입에서 말하듯이 온 세상에 두루 편만한 신성, 그 보편적 신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긍정이 필요하다. 타종교와 문화, 심리학과 철학, 과학이 제공하는 을 통해서도 그리스도교와 성서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때, 복음에 대한 이해는 더 깊어지고 구체적인 것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또한 그는 7장에서 에 대한 위대한 통찰을 드러낸다. , 내 바로 곁에 있는 악에 대한 통찰이다. 자신은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 것을 하고야 만다고 이야기하면서, 자신은 비참한 사람으로서 누가 나를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구해줄까라고 탄식한다. 선을 바란다, 악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의 의식적 노력이자, 규범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요구이다. 그러나 그 것으로는 내 속에 있는 악을 이겨낼 수 없다. 악은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또 다른 이다. 이 것은 바로 융이 말하는 집단 무의식 속의 원형적 그림자이다. 규범과 의식적 노력은 기껏해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일부로 통합해야할 개인 무의식 속의 그림자만 억압만 할 뿐이다. 그 것은 정작 우리가 주시해야할 원형적 그림자에는 미치지도 못한다. 자기 원형을 통한 자기실현이라는 인격의 통합의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악 - 원형적 그림자 -과 대면할 수 있고, 그 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이다. 그 것은 바울이 말하는 대로 토라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악에서 구해질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예수는 기도할 때 '악을 물리쳐주시옵소서' 가 아니라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

 

마지막으로 로마서의 가장 큰 주제로서, 신실함으로 표현되어야 더 정확하다는 그 믿음’(삐스띠스)은 과연 무엇일까? 빤스런 목사나 동네 장돌뱅이 목사들이 말하는 믿음은 성서가 말하고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진정한 믿음의 의미에서 떨어져도 한없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또 말하면 입 아플 지경이다. 믿음, 신실함이란 뿌리 깊은 나무, 바위에 깊이 기초를 둔 집,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 시냇가에 심겨져있는 나무의 든든함과 싱싱함에 가깝다. 신적 근거에 뿌리를 든든히 내리고 있는 인간의 흔들림 없는 생명력이다. 이 것은 마치 융이 말하듯이, 내면 속 자기(Self) - 하느님의 형상, 그리스도 - 에 뿌리를 내린 자아(ego)의 안정감, 건강함, 그리고 창조성, 그리고 목적론적 과정성 - 종말의 완성을 향한 - 이다. 개신교의 문자적 교조주의와 피상적 종교성은, 우리가 그 믿음의 신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수도와 관상같은 아름다운 그리스도교의 전통이 뿌리내릴 틈을 주지 않는다. 나는 그 것이 너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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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8.10.29 20:14:30
*.182.156.135

묵직한 글, 많은 걸 느끼면서 잘 읽었습니다.

첫날처럼 님이 정말 공부 깊이있게 열심히 잘 하시네요.

평화로운 월요일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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