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발품인생

조회 수 1033 추천 수 0 2019.03.23 03:2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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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강의를 찾아 생존하다 보니 이제는 워싱턴 디시에서 뉴욕으로 발품을 팔아야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ㅜㅜ 지난 반년 간, 주중엔 워싱턴 디시에서 주말엔 뉴욕으로 정신 없이 왔다갔다 했습니다. 나름 재밌기도 했지만 가족들이 힘들어져서 그게 좀... 차를 매 주 몰고 가면 경비가 너무 많이 들어 고속버스를 타고 다녔지요. 그 가운데 쓴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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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접지몽의 삶


맨해튼을 떠나 워싱턴으로 향하는 야간버스에 몸을 싣고 난 지금 가족의 품으로 허둥대며 달려가고 있다. 버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경치라곤 초라한 불빛을 가까스로 움켜잡고 시커먼 도로 위를 황급히 내달리는 외로운 차량들 뿐이다. 다들 나처럼 하루의 고통을 접어두고 쉴 수 있는 그 곳으로 본능적인 날개짓을 하며 도망가듯 질주하고 있다. 


차량의 불빛 사이로 도시의 콘크리트가 희끗희끗 나타난다. 삭막하기 그지없는 그 콘크리트는 왠지 서러운 사연을 안고 도시를 배회하는 한 노숙자의 고독한 인생을 보여주는 듯 하다. 어찌보면 현대인은 자신이 노숙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기 위해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을 발버둥 치며 확인하며 살아가는 듯 보인다. 질주하고 있는 저 차량들 처럼 말이다. 


이렇게 늦게 집으로 돌아가면 어차피 모든 가족들은 잠자리에 든지 이미 오래이다. 아빠가 왔다는 사실도 모른채 내일이면 지식습득의 고통을 넘나드는 그들만의 인생으로 아이들은 졸리운 눈을 부릅떠야 할 것이다. 피곤에 묻혀버린 아내의 얼굴은 맞벌이 부부의 고독한 여정을 고스란히 담은 채, 남편이 왔다고 감히 생색낼 수 없을 정도로, 하염없이 고달프고 적나라한 생얼의 자태를 나를 향해 풍기고 있다. 조용히 아내 옆에 누워 나도 이내 깊은 잠에 빠져 든다. 


잠들기 직전 한 삼분간의 정리시간이 주어진다. 정리라기 보다는 차라리 포기하는 시간이라 해야 할 것이다. 하루의 삶을 정리하기에는 삼분은 어림도 없기 때문이다. 오늘의 마무리와 내일의 다짐이라는 거추장스런 도덕심을 던져버리고 일단 육체가 요구하는 다급한 보챔을 먼저 달래주어야 한다. 포기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삼분이면 충분하다. 


난 이제 잠이 들었다. 의식의 세계에서 무의식이 넘실대는 안식의 세계로 단 삼분만에 진입했다. 


막상 진입하고 나니 안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잠만 자고 있던 아내 옆으로 아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피곤하고 지친 아빠 주위를 떠나지 않고 수다를 떨고 있다. 무슨 말인지 알 수없는 몽롱한 대사들을 쏟아내고 있는 아이들의 눈동자는 내가 헤쳐나가야 할 고독한 구도자의 초월적 삶을 눈물로 요구하는 듯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보다 더 서러워 보이는 야간버스 운전수가 나타나더니 버스가 고장이 나서 더 이상 날 집으로 데려다 줄 수 없다 한다. 같이 버스에 타고 있던 다른 승객들은 처음엔 거의 난동 수준의 불평을 쏟아내더니 차갑게 식은 야간버스를 뒤로하고 하나 둘씩 사라져간다. 집으로 돌아갈 방편을 찾은 것 같다. 결국 운전수도 사라지고 나 혼자만 남아 깜깜한 차도를 배회한다. 문득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 두려움 뒤로 어찌된 영문인지 맨해튼이 다시 나타났다. 원래 꿈은 늘 그렇게 영문이 없다. 집으로 돌아오기는 커녕 다시 맨해튼으로 돌아간 이 황당한 상황이 여기에선 상식이다. 하지만 지나가는 행인들이 있으니 조금은 안심이다. 잡다한 길거리 음식을 먹고 싶어 주머니에 현금을 확인하지만 항상 예상했던  것보다 적은 금액이 손에 잡힌다. 부족한 돈을 지불하니 음식에 벌레가 들어있다. 하지만 그 벌레를 먹지 않으면 집에 돌아갈 수 없다 한다. 벌레를 먹는 척 하면서 슬쩍 그 벌레를 맨홀속으로 던졌다. 그걸 본 행인이 그 맨홀 속에 내 버스표가 있다고 하면서 그 더러운 시궁창으로 몸을 던졌다. 그 사람이 살아 나온다면 난 집으로 갈 수 있다. 그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는데 어느 순간 그런 몽롱한 세계가 갑자기 사라지며 난 다시 현실의 냉정함으로 돌아오게 된다. 


아내가 일어난 것이다. 그 소리에 내가 깨어난 것이다. 계속 자는 척 하는 것이 양심에 찔린 나머지 난 위로하는 척 아내에게 “왜 더 자지 않고?” 라고 말하지만 이내 반격을 당한다. “그럼 남편이 애들 도시락을 싸던가...” 난 겸연쩍게 “아!” 하며 절대로 한다 안한다 정확하게 대답하지 않는다. 방금 전 꿈속의 몽롱함처럼 말이다.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들었지만 사실 난 그 둘 사이의 차이를 정확히 규명할 수가 없다. 현실이든 비현실이든 난 늘 실패의 두려움을 안은 채, 그것이 실패가 아니라는 초월적 관념을 찾아 주변의 동의가 별로 없는 혁신적인 해석에 늘 목말라 왔기 때문이다. 나를 괴롭히는 두려움은 언제나 삶의 소유에 대한 보편적 정의가 가져다주는 압박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나름의 위치에서 이루어야 할 삶의 업적이 있다. 굳이 거창하게 세계 평화를 외쳐대지 않아도 된다. 각 개인은 본인의 선택과는 상관 없이 상황이 요구하는 무수한 생존의 처절함에 늘 노출되어 왔다. 그 요구가 각 개인에게 왜 주어졌는지 알 길은 없다. 그런 소탈한 의문을 가슴에 머금고 그저 우주를 바라볼 뿐이다. 그 요구를 의무라 여기고 보편 타당한 원리를 잣대로 삼아 하루하루를 규정하며 자기 삶의 점수를 매기며 살아간다. 그 점수가 평균치를 웃돌게 되면 그것을 성실이라 정의한다.  


현실이든 꿈속에서든, 그 점수를 올리기 위해 쫓기는 심정으로 발버둥치며 살아가기는 마찬가지이다. 갖은 불법으로 더럽혀진 현실 세상을 보며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고 한탄할 필요는 없다. 현실이 꿈보다 못할 때가 많지만 반대로 악몽에서 깨어나 꿈이었길 다행이라 생각할 수 있는 현실이라는 축복이 우리에게 존재한다. 현실이 꿈보다 더 상식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꿈이 현실보다 더 달콤한 것도 아니다. 우린 규명하기 힘든 그 두 가지의 인식 속에서 박쥐처럼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박쥐라는 비유적 존재에 거부감을 느낄 이유는 없다. 오히려 그런 불완전함을 인정하며 솔직하게 사는 것이 인생을 즐길 수 있는 명분있는 자세가 아닐는지... 


그러면 우리는 더 나은 현실을 위해 꿈을 꾼다는 비현실적 이야기를 현실처럼 이야기 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profile

[레벨:10]예베슈

2019.03.23 03:42:12
*.160.93.30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비내리는 맨해튼입니다.

1.JPG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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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9.03.23 21:43:01
*.182.156.135

예베슈 님, 이 사진이 마음에 듭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다가 샘터교회 표지 사진으로 한번 사용하겠습니다.

가로등이 일품이네요.

그나저나 우리나라 학생들은 학교에서 점심을 주는데

미국 학생들은 여전히 도시락을 싸는가보군요.

마음이 싸하면서도 행복감이 밀려오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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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예베슈

2019.03.26 08:55:10
*.219.238.174

사용해 주시면 영광이지요. ㅎㅎ
학교의 급식과 제가 만들어 준 점심은 맛이 없다네요. 그래서 맨날 엄마만 힘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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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하늘연어

2019.03.23 17:32:58
*.86.237.246

꿈인지 생시인지 물아일체의 호접몽 가운데 

"악몽에서 깨어나 꿈이었길 다행이라 생각할 수 있는 현실이라는 축복이 우리에게 존재한다."는

깨침이 그럴듯하고 재밌습니다. ㅎ


저는 현실위몽이든 현실몽이든 멀리서 바라보는 입장이 된 것도 같은데

아무렴 어떨까요.....,  ^^;;

profile

[레벨:10]예베슈

2019.03.26 08:57:47
*.219.238.174

꿈과 현실의 전지적 작가 시점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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