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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심(平常心)과 무상심(無常心)과 옴니부스 옴니아(Omnibus Omnia)
불교는 평상심(平常心)을 노자는 무상심(無常心)을 바울은 옴니부스 옴니아(Omnibus omnia)를 말한다. 이 세 가지는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다.
평상심(平常心)은 선(禪)의 화두이다. 평상심(平常心)은 고요한 마음의 상태를 일컫는 말로서 불교에서는 평상심을 곧 도(道)라고 한다. 이 말은 남전(南泉) 선사와 조주(趙州) 스님과의 대화에서 비롯되었다. 조주 스님이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 남전 선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다.” “그 도(道)를 행하여 나아갈 길이 있습니까?” “행하여 나아가려고 하면 벌써 도(道)와는 어긋난다.” “행하여 나아가지 않고 어떻게 도(道)를 알 수 있습니까?” “도(道)는 아는 데도 있지 않고 모르는 데도 속하지 않는다. 유식함이란 허망한 것에 속하고 무식함이란 무기(無記)다. 만일 도(道)를 알게 되면 마치 허공이 탁 트인 것과 같으니 이 경지에 다다르면 옳고 그름의 외적인 증거에 의해 인위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세계다.” 그 말에 조주가 크게 깨달았다.
따라서 선사들이 말하는 평상심(平常心)과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평상심(平常心)과는 다른 것이다. 깨달아서 마음의 성품을 본 사람은 어떤 경우에 처하더라도 그 일에 대한 판단에 걸림이 없기 때문에 시비(是非)에 막히지 않는다. 성품을 보지 못한 사람은 대나무라 하면 대나무에 집착하고 법신(法身)이라 하면 법신(法身)에 걸리고 반야(般若)라 하면 반야(般若)에 집착한다. 그러므로 모두 집착해서 시비(是非)를 일으킨다. 그러니까 다 같은 평상심(平常心)이라 해도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깨친 이에게는 일상의 모든 것이 법신(法身)일 수 있다. 그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사건에 부딪혀 반응하는 것이 물속의 달과 같다. 아무 흔적이나 막힘이 없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무명(無明)의 눈으로 일상을 본다.
무상심(無常心)은 노자의 화두이다. 노자도덕경 제49장은 이렇게 말한다. 성인무상심 이백성심위심 선자오선지 불선자오역선지 덕선 신자오신지 불신자오역신지 덕신 성인재천하 흡흡언 위천하훈기심 백성개주기이목 성인개해지(聖人無常心 以百姓心爲心善 者吾善之 不善者吾亦善之 德善 信者吾信之 不信者吾亦信之 德信 聖人在天下 歙歙焉 爲天下渾其心 百姓皆注其耳目 聖人皆孩之).
해석하면, 성인은 고정된 마음의 상(相)이 없다. 오로지 백 가지 성(姓)의 사람들의 마음으로 그 마음을 삼을 뿐이다. 좋은 사람은 나도 그를 좋게 해주고 좋지 못한 사람이라도 나는 또한 그를 좋게 해준다. 그리하므로 나의 좋음이 얻어지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나도 그를 믿는다. 믿음이 없는 사람 또한 나는 믿을 뿐이다. 그리하여 나의 믿음이 얻어지는 것이다. 성인은 세상에 임할 때에는 자신의 의지를 거두어들이고 세상을 위하여 늘 그 마음을 혼연하게 한다. 백 가지 성(姓)의 사람들이 모두 귀와 눈을 곤두세울 때, 성인은 그들을 모두 어린아이로 만든다.
노자가 말하는 성인은 자연의 도(道)를 담지한 사람이다. 자연은 본래 어떤 의도를 갖고 만물을 이끌어가거나 만물의 마음을 한 방향으로 결집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성인이 무상심(無常心)이라는 말은 성인의 마음도 자연의 도(道)를 닮아서 자기 자신의 고정된 생각을 갖고 일과 사람들에 응접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원래 상(常)은 노자의 언어의 세계에서 매우 각별한 말이다. “도(道)는 도(道)라고 말하게 되면 상도(商道)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노자도덕경 제1장)에서 언명한 상(常)은 ‘영원하다’, ‘늘 그러하다’의 뜻으로 쓰였으나, 여기 나온 무상심(無常心)은 ‘고정된 마음’, 혹은 ‘분별하는 마음의 상(相)’이 없음을 뜻하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 그래서 성인은 자기의 주관적인 마음의 상(相)을 갖지 않은 채로 백성들을 대할 수 있고, 그렇게 되니 백성들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게 된다(以百姓心爲心)라고 했다.
성인이 자신의 마음을 따로 갖지 않고, 백 가지 성(姓)을 가진 사람들의 백 가지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게 되니, 성인의 눈에는 선한 사람(善者)과 선하지 않은 사람(不善者)을 나누어 차별하는 마음이 없다. 선한 이에게도 선하게 대하고(善者吾善之), 선하지 않은 이에게도 선하게 대한다(不善者吾亦善之). 그러하니 얻어지는(德)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참된 ‘선’(善)이다. 그것을 ‘덕선(德善)’이라 했다.
그리고 성인은 믿음이 있는 사람도 믿고(信者吾信之), 믿음이 없는 사람 또한 믿는다(不信者吾亦信之)고 했다. 그렇게 되니 진정한 ‘믿음’(信)을 얻게 된다(德). 그것을 ‘덕신(德信)’이라고 했다.
노자가 설하는 법은 우리가 따르는 법칙들과는 다르다. 우리는 선한 자에게는 선하게 대하고 악한 자에게는 악하게 대한다. 아울러 우리를 믿는 자에게는 우리도 믿어주고 우리를 불신하는 자는 우리도 불신한다.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른 것이다. 인과응보의 논리는 거래의 논리와 다름없다. 가는 것이 있으니 오는 것이 있다. 사실 상대가 하는 만큼만 해도 잘하는 거다. 상대가 나를 믿어주는 것만큼만 내가 믿어줘도 잘하는 축에 속한다.
그런데 노자가 말한 덕선(德善)과 덕신(德信)은 차원이 다르다. 상대성의 논리에 따르지 않는다. 절대적인 선(善)의 영역에 존재한다. 절대적인 믿음(信)의 영역 안에 존재한다. 그것은 ‘나’의 생각과 ‘나’의 이해에 따라 거래하는 그런 유가 아니고, 다만 ‘내 안의 본성’의 자연스런 명령에 순응해서 나온 덕(德)이다. 그러하니 덕선(德善)과 덕신(德信)은 우주의 법칙에 따라 나온 성인의 자연스런 태도가 된다.
그리고 성인이 세상 사람들을 향할 때 대하는 태도를 묘사해 ‘흡흡언(歙歙焉)’이라 했다. 흡흡(歙歙)이란 ‘들이마시는 소리나 모양’을 나타내는 의성어나 의태어 같은 것이다. 무엇을 들이마시는가? 백성들의 마음을 들이마신다. 백성들의 생각과 필요를 받아들인다. 나의 것으로 상대에게 강요하거나 밀어붙이는 그런 태도가 아니다. 나의 필요와 이익을 위해서 상대방을 강제하고 억압하는 그런 모습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성인은 세상 사람들과 하나가 된다. 성인이 세상의 요구에 끌려 들어간 것처럼 보이나 기실 그렇지 않다. 성인의 빈 마음으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흘러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성인의 마음은 강과 바다가 아래에 처해서(處下) 온갖 물줄기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왕이 되듯이, 그렇게 온 백성들의 마음을 받아들이므로 그들의 진정한 지도자가 된다.
성인이 세상을 향할 때 내는 마음은 ‘혼연하다’(渾其心)라고 했다. 혼(渾)은 혼(混)과 같이 쓴다. 섞여 있는 마음이다. 분별 이전의 마음을 혼돈(混沌)한 마음, 혼연(渾然)한 마음이라 하는데, 바로 성인이 세상 사람들을 향할 때 내는 그 마음이다. 바꾸어 말하면 성인은 세상 사람들을 자기 잣대로 일방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백 가지의 성(姓)을 가진 백성들을 대할 때, 백 가지 잣대를 갖는다는 말과도 같다.
백성들은 그런 성인에게 그들의 눈과 귀를 집중한다. 그러함으로 성인은 그들을 어린아이로 만든다(聖人皆孩之). 이제 백성들의 마음이 아래에 처한 성인의 빈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성인의 혼연하여 분별없는 마음에 계합(契合)해 들어왔다. 그 마음은 바로 하늘의 마음, 즉 우주의 마음이니, 그것이 바로 갓난아기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옴니부스 옴니아(Omnibus Omnia)는 사도 바울의 화두이다. 옴니부스 옴니아(Omnibus Omnia)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전 9:19-23)라는 구절에서 나온다.
노자가 믿음이 있는 사람도 믿고(信者吾信之), 믿음이 없는 사람 또한 믿고(不信者吾信之), 선한 이에게도 선하게 대하고(善者吾善之), 선하지 않은 이에게도 선하게 대한다(不善者吾亦善之)는 것을 바울은 옴니부스 옴니아(Omnibus Omnia), 즉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이라고 말한 것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도 믿고(信者吾信之), 믿음이 없는 사람 또한 믿고(不信者吾信之), 선한 이에게도 선하게 대하고(善者吾善之), 선하지 않은 이에게도 선하게 대한다(不善者吾亦善之)는 옴니부스 옴니아(Omnibus Omnia), 즉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은 평상심(平常心), 즉 어떤 상황이나 어떤 처지에 있든지 고요한 마음의 상태가 될 때 가능하다(빌 4:13). 그래서 장자는 “승물이유심 탁부득이 이양중(乘物以遊心 託不得已以養中)”이라고 하였다. 해석하면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 있든지 그것을 부득이함(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기고 그 안에서 노닐어라. 그러면 내면세계를 잘 양육할 수 있고 건축할 수 있으리라. 내면세계의 건축은 오직 생명으로 건축할 수 있다. 생명 아닌 것은 우리에게 불안과 불평과 근심과 걱정 등을 가져다주지만 생명은 우리에게 평상심(平常心)을 가지게 하여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 있든지 그 상황이나 처지를 즐길 수 있고 누릴 수 있게 한다. 평상심(平常心)은 우리에게 무상심(無常心)과 옴니부스 옴니아(Omnibus Omnia)로 행하게 한다. 아멘.
생각을 많이, 그리고 깊게 만드는 글, 잘 읽었습니다.
'옴비부스 옴니아' 라틴어를 잘 기억해둬야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