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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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추워졌습니다. 모두 건강조심하셔요..
키에르케고르의 [공포와 전율]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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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점점 더 숫자에 익숙해 져 가고 있는듯 합니다.
마치 그 숫자속에 진리가 있는듯 끊임없이 숫자에만 집중합니다.
그러다 보니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가치도 숫자로 드러나는 시대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일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자본주의에 터해 있는 직장에서야 그것이 너무나 당연히 여겨지는 시대가 되었지만
교회에서까지도 그렇게 천박한 자본주의-제 개인적으론 싫어하는 표현입니다만 그렇게밖에는
표현할수 없다는 것이 그저 한탄스럽지만-에 너무 익숙해 져 가고 있음이 안타깝습니다.
소유에만 집착하다보니 삶의 터전이 언제나 숫자입니다.
그 숫자에 삶의 안정을 찾고 그 숫자에 삶 전체가 불안해 집니다.
또한 눈에 보이는 외형-비본질-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남들의 입방아인 ‘좋다’와 ‘나쁘다’에 우왕좌왕합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도대체 나는 무엇을 신앙하고 있는지..
신앙의 운동은 무한한 체념을 통해 시작됩니다.
무한한 체념은 신앙에 선행하는 최후단계입니다.....
무한한 체념속에서 자신의 영원한 가치를 발견할수 있다고 키에르케고르는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신앙의 역설인 비약이 있습니다.
아케다사건(창22:1-19)을 통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써 이삭을 체념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하여 이삭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해 보면
나는 나의 힘을 체념하는데에 모두 사용을 하지만
신비(신앙)의 기사는 신앙을 통하여 부조리의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게 되는 영혼의 구원에 이릅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사고가 끝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군중, 무리가 아니라 ‘나’라는 주체성을 잃지 않는 단독자(개별자)로
영원이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실존으로 무한한 체념을 통한 신앙의 운동으로
숫자가 아닌, 외형-비본질-이 아닌
당신의 영원한 가치를, 본질에 집중해 신앙의 비약을 통해 그 길을 시작할수 있기를..
네.. 키에르케고르를 읽고는 칼바르트의 신학정체성(?)의 출발점을 발견합니다.
전체인 절대정신(헤겔)에 반대하여 개인의 정체성을 이야기 하던 키에르케고르를 보다가
판넨베르크와 칼바르트를 또 한번 더 보고..그렇습니다. 하하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이미’와
‘아직’의 긴장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한번더 사유하게
됩니다.
세례라는 예식을 통해, 성찬이라는 예식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이미’ 자기의 죽음과 삶을 경험하는 것이지만, 순간이라는 지금의 삶에서 선택의 순간 -실존앞에서- ‘아직’이라는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 존재라 언제나 ‘무지’를 깨달으며 그 순간이 영원이라는 하나님의 시간에 잇대어 있음을 믿으며 희망하며 삽니다.
어제 목사님 말씀처럼 신학대학교 총장으로 계셨으면 그 학교 한번 입학해 봤을텐데 말입니다. 하하!
이제 북소리 님은 평신도 설교자로 활동해도 좋겠습니다.
'아케다'가 무슨 단어인지 몰랐다가 인터넷 사전에서 확인했습니다.
케에르케고르 책을 읽었군요.
칼 바르트의 신학적 회심에 큰 영향을 준 실존주의 철학자지요.
그의 관점은 하나님 앞에 단독자 서여할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합니다.
자칫 우리가 정치와 경제 선동에 휘말려서 삶의 중심을 잃어버릴 수 있거든요.
전쟁터같은 대한민국 정치판에서 한걸음 떨어져서 지내는 게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요즘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절실하게 합니다.
혼자서 숨을 쉬고, 혼자서 걷고, 혼자서 먹고 마셔야 하듯이
결국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홀로' 대처해야겠지요.
늙어갈수록 더 외롭게 살아가는 능력을 배워야 할 겁니다.
'홀로' 죽음의 문을 통과해야하니까요.
북소리 님 덕분에 키에르케고르의 <공포와 불안>을
오늘 다시 맛볼 수 있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