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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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군,
자네의 질문은 근본적인 것에 가까이 접근하기는 했지만
아직 정곡을 찌르는 것 같지는 않군.
우문이라는 뜻은 아니네.
그냥 좋은 질문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아직은 핵심으로 들어가지 않은 사람으로서 던지는 질문이라는 뜻이네.
사실 핵심 안에 들어가면
더 이상 질문도 필요 없겠지.
신묘막측한 세계에 자신을 맡겨 놓기만 하면 되니까.
우선 명시적으로 언급된 것만이 아니라
은폐된 것을 노출시키는 학문적 행위가 바로 해석학이라는 말을
좀더 설명해야 할 것 같네.
어쩌면 이런 설명이 이미 자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안고 있을지도 모르지.
만약 어떤 작품이 진리를 경험한 사람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 작품은 그것을 만든, 혹은 쓰거나, 그린 사람의 인식과 경험 그 너머에까지
맞닿아 있다네.
그러니까 그 그림, 음악, 시, 건축물은 그것을 이 세상 안으로 끌어들여
형상화한 사람을 초월해 있다는 뜻이지.
글쎄, 여기에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이 해당될지 모르겠네.
예컨대 괴테가 쓴 파우스트는
괴테보다 훨씬 더 문학적 깊이가 있는 사람이 나온다면
파우스트를 통해서 괴테가 얻은 영감보다 더 깊은 세계를 잡아낼 걸세.
왜냐하면 파우스트는 괴테가 집필하긴 했지만
작품이 된 다음에는 역사적 한계 안에 있는 괴테를 초월하고 있다네.
이런 점에서 고대의 미술품과 고전들이 역사를 거듭해서
인류의 정신 발달에 공헌하고 있는 것이라네.
성서의 세계로 우리의 관심을 좁혀서 생각해보세.
자네는 성서의 진리를 기독교인들은 깨달을 수 있지만
비기독교인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고 말했네.
자네의 말을 내가 정확하게 이해했는지 모르지만.
그런데 기독교인들이라고 하더라도
성서를 정확하게 해석하기는 쉽지 않을 걸세.
왜냐하면 성서는 다른 고전들과 마찬가지로 은폐의 방식으로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네.
그런데 자네가 표현한 것 중에서 성서를 통해 절대자인 하나님이라는 꼭지점에
가 닿을 수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 있는 것 같던데,
여기에 약간의 인식론적 착오가 있는게 아닐까.
성서를 깊이 파게 되면
이미 그 안에 존재하고 있는 절대자 하나님을 만난다고 말하면 좀 곤란할 걸세.
하나님은 이미 그렇게 완료된 방식으로 존재하는 분이 아니니까.
물론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걸로 알겠네.
이렇게 말해야 정확하네.
우리는 성서가 은폐의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 그 세계로 깊이 들어가는 것 뿐이라고.
그 결과가 어떤 데에 이를지는 아무도 모르네.
하나님은 이미 그렇게 된 분이 아니라
앞으로 그렇게 될 분이라는 말이지.
과거 완료가 아니라 미래형이라고 해야지.
따라서 은폐라는 말은
우리가 어렸을 때 숨바꼭질 하듯이 이미 숨어 있는 어떤 존재를 찾아내는 게 아니라
아직 결정되지 않은 그 누구, 혹은 그 어떤 생명을 열러가는 것이라네.
자네의 질문으로 직접 들어가세.
교회 밖의 사람에게는 성서 해석이 진리 경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내가 자네의 질문을 해석했네.
그 말은 일단 맞네.
우리가 모짜르트 음악을 통해서 어떤 음의 절대 세계를 경험할 수 없듯이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성서도 비슷할 걸세.
바로 이 대목에서 신학자들이 해야 할 일이 있네.
그러니까 성서가 노출하고 있는 그 절대 생명의 세계,
우리가 그 세계를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르지?
그 세계를 보편적 언어로 변증하는 작업이 바로 신학자들에게 필요한 것이네.
물론 자네는 이렇게 질문하겠지.
그게 도대체 가능하냐?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성서 해석을 통한 진리 경험이 가능하냐?
아직 카이로스는 도래하지 않았지만 그 때를 향해서 우리는 가네.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 처럼 희미하지만
그때가 되면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처럼 확실하게 나타날 걸세.
그때를 우리 신학자들은 선취적으로 이 역사 안에 현실화해야 하네.
그게 가능하냐고?
가능하지 아닌지 나는 아직 예단할 수 없네.
다만 희망할 뿐이지.
그 희망은 막연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믿음의 대상이네.
너무 신학적으로 말한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네.
우리가 우리의 현실에서 일상적인 개념에 편향되어 있으며,
또한 신학적 언어와 개념이 현실성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갈등이 있을 뿐이지
신학적 진술은 철저하게 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네.
오늘의 내 짧은 대답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학문의 도정에 약간의 길잡이가 되었으면 하네.
어쩌면 더 혼란스러워졌는지도 모르지.
우리 모두 안개가 낀 숲길을 가고 있는데,
한 발자국 앞서 있다고 하더라도 역시 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야.
다만 자기가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지, 아닌지
이런 정도만이라도 정확하게 깨닫고 있다면
언젠가는 숲속의 길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보네.
오늘 밤
많은 비가 내린다고 하는데,
평안하게 잠을 청하시게나.
정용섭.
자네의 질문은 근본적인 것에 가까이 접근하기는 했지만
아직 정곡을 찌르는 것 같지는 않군.
우문이라는 뜻은 아니네.
그냥 좋은 질문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아직은 핵심으로 들어가지 않은 사람으로서 던지는 질문이라는 뜻이네.
사실 핵심 안에 들어가면
더 이상 질문도 필요 없겠지.
신묘막측한 세계에 자신을 맡겨 놓기만 하면 되니까.
우선 명시적으로 언급된 것만이 아니라
은폐된 것을 노출시키는 학문적 행위가 바로 해석학이라는 말을
좀더 설명해야 할 것 같네.
어쩌면 이런 설명이 이미 자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안고 있을지도 모르지.
만약 어떤 작품이 진리를 경험한 사람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 작품은 그것을 만든, 혹은 쓰거나, 그린 사람의 인식과 경험 그 너머에까지
맞닿아 있다네.
그러니까 그 그림, 음악, 시, 건축물은 그것을 이 세상 안으로 끌어들여
형상화한 사람을 초월해 있다는 뜻이지.
글쎄, 여기에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이 해당될지 모르겠네.
예컨대 괴테가 쓴 파우스트는
괴테보다 훨씬 더 문학적 깊이가 있는 사람이 나온다면
파우스트를 통해서 괴테가 얻은 영감보다 더 깊은 세계를 잡아낼 걸세.
왜냐하면 파우스트는 괴테가 집필하긴 했지만
작품이 된 다음에는 역사적 한계 안에 있는 괴테를 초월하고 있다네.
이런 점에서 고대의 미술품과 고전들이 역사를 거듭해서
인류의 정신 발달에 공헌하고 있는 것이라네.
성서의 세계로 우리의 관심을 좁혀서 생각해보세.
자네는 성서의 진리를 기독교인들은 깨달을 수 있지만
비기독교인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고 말했네.
자네의 말을 내가 정확하게 이해했는지 모르지만.
그런데 기독교인들이라고 하더라도
성서를 정확하게 해석하기는 쉽지 않을 걸세.
왜냐하면 성서는 다른 고전들과 마찬가지로 은폐의 방식으로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네.
그런데 자네가 표현한 것 중에서 성서를 통해 절대자인 하나님이라는 꼭지점에
가 닿을 수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 있는 것 같던데,
여기에 약간의 인식론적 착오가 있는게 아닐까.
성서를 깊이 파게 되면
이미 그 안에 존재하고 있는 절대자 하나님을 만난다고 말하면 좀 곤란할 걸세.
하나님은 이미 그렇게 완료된 방식으로 존재하는 분이 아니니까.
물론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걸로 알겠네.
이렇게 말해야 정확하네.
우리는 성서가 은폐의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 그 세계로 깊이 들어가는 것 뿐이라고.
그 결과가 어떤 데에 이를지는 아무도 모르네.
하나님은 이미 그렇게 된 분이 아니라
앞으로 그렇게 될 분이라는 말이지.
과거 완료가 아니라 미래형이라고 해야지.
따라서 은폐라는 말은
우리가 어렸을 때 숨바꼭질 하듯이 이미 숨어 있는 어떤 존재를 찾아내는 게 아니라
아직 결정되지 않은 그 누구, 혹은 그 어떤 생명을 열러가는 것이라네.
자네의 질문으로 직접 들어가세.
교회 밖의 사람에게는 성서 해석이 진리 경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내가 자네의 질문을 해석했네.
그 말은 일단 맞네.
우리가 모짜르트 음악을 통해서 어떤 음의 절대 세계를 경험할 수 없듯이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성서도 비슷할 걸세.
바로 이 대목에서 신학자들이 해야 할 일이 있네.
그러니까 성서가 노출하고 있는 그 절대 생명의 세계,
우리가 그 세계를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르지?
그 세계를 보편적 언어로 변증하는 작업이 바로 신학자들에게 필요한 것이네.
물론 자네는 이렇게 질문하겠지.
그게 도대체 가능하냐?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성서 해석을 통한 진리 경험이 가능하냐?
아직 카이로스는 도래하지 않았지만 그 때를 향해서 우리는 가네.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 처럼 희미하지만
그때가 되면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처럼 확실하게 나타날 걸세.
그때를 우리 신학자들은 선취적으로 이 역사 안에 현실화해야 하네.
그게 가능하냐고?
가능하지 아닌지 나는 아직 예단할 수 없네.
다만 희망할 뿐이지.
그 희망은 막연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믿음의 대상이네.
너무 신학적으로 말한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네.
우리가 우리의 현실에서 일상적인 개념에 편향되어 있으며,
또한 신학적 언어와 개념이 현실성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갈등이 있을 뿐이지
신학적 진술은 철저하게 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네.
오늘의 내 짧은 대답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학문의 도정에 약간의 길잡이가 되었으면 하네.
어쩌면 더 혼란스러워졌는지도 모르지.
우리 모두 안개가 낀 숲길을 가고 있는데,
한 발자국 앞서 있다고 하더라도 역시 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야.
다만 자기가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지, 아닌지
이런 정도만이라도 정확하게 깨닫고 있다면
언젠가는 숲속의 길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보네.
오늘 밤
많은 비가 내린다고 하는데,
평안하게 잠을 청하시게나.
정용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