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해석학에 대하여...

조회 수 6547 추천 수 191 2004.07.13 22:11:31
관련링크 :  
"말한 바를 제대로 듣는 사람은 훌륭한 청취자이다. 그러나 말해진 것에 비추어 말해지지 않은 바를 듣는 사람은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이다. 텍스트가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의 긍정적 성격에만 촛점을 맞추게 되면 해석학적 과제를 올바르게 수행할 수 없다. 텍스트가 말하지 않았던 것 - 그리고 아마도 텍스트가 말할 수 없었던 것 - 을 찾아내기 위하여 텍스트의 배후에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꼭 필요하다."

좀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지난 학기 배운 해석학에 대해서 한 가지 질문 드립니다. 위의 글은 하이데거가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에서 언급했던 말을 팔머가 자신의 책(해석학이란 무엇인가, p 337)에서 다시 재인용했던 말입니다. 윗글의 하이데거의 말대로라면 텍스트의 배후에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 가능하다는 입장인데, 과연 우리는 이 명제를 성서에도 적용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약간 소극적이고 회의적인 생각이 듭니다. 신앙적 입장에서 우리는 분명히 성서의 배후에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신앙적 입장에서 성서라는 텍스트 만으로 하나님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아보입니다. 이 물음은 비단 성서에게 뿐만 아니라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의 경전(텍스트)으로 확대할 수 있는 물음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모든 종교적 경전(텍스트)에서 그 배후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 과연 가능한지, 일정부분 가능하다고 하더라도,그 텍스트 만으로 꼭지점에 존재하고 있는 절대자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는지...

문득 노자가 말한 "道可道 非常道"가 생각납니다. 정목사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다른 분들의 고견도 참고하겠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4.07.14 13:50:15
*.203.138.154

팔머의 글에 있는 "텍스트가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의 긍정적 성격에만 촛점을 맞추게 되면"에서 '긍정적'은 '실증적'이라고 해야 되는데, 아마 오역인 것 같군. positive라는 단어에 맞는 우리 말을 찾기가 참 어렵다네. 실증적, 적극적, 긍정적 등등. 문맥을 보고 우리가 찾아야겠지. 道可道 非常道"도를 도라고 하면 변하지 않는 그 도가 아니다? 常道는 늘 변하지 않는 도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변하는 도라고 하오. 성서를 거정된 실체로 이해하고 그것을 우리의 삶에 있어야 할 규범으로만 받아들인다면 결국 그들은 바로 해석이 아니까 하오. 앞으로 어떤 신학자가 이 성서가 맞닿아 있는 그 미래의 존재와 절대의 세계로 기독교 신앙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레벨:1]황성훈

2004.07.14 18:59:21
*.80.181.103

팔머의 책에서 "긍정적"이란 말이 참 해석하기 쉽지 않았는데... 목사님의 부연설명 감사드립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4.07.15 13:59:58
*.203.136.10

위이 내 콤멘트에서 오자가 발견되는군.
"성서를 거정된 실체로 이해하고 그것을 우리의 삶에 있어야 할 규범으로만 받아들인다면 결국 그들은 바로 해석이 아니까 하오."에서
<거정된>은 <결정된>으로, <그들은 바로 해석이 아니까 하오>는 <그것은 바른 해석이 아닐거요.>로 바꿈.

이길용

2004.07.15 22:40:51
*.113.130.158

노자의 원 텍스트 道可道에서 앞의 道와 뒤의 道는 그 의미가 다르답니다. 한문을 습득치 않은 일반인들이 흔히 겪는 오류들 중의 하나인데요~ 처음의 道는 길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때 길이란 늘상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는 길 그 자체를 의미하지요~ 보통 중국인들의 사유습관은 지극히 사실적이고 실천적이라서 추상적인 의미 역시 구상적인 단어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원리니 원칙이니 혹은 이치 등등으로 새기기도 하지만, 본디 이 도는 그냥 길입니다. 모든 사물이라면 마땅히 가야하는 각자의 길을 뜻한다고 봐야겠지요. 그렇담 뒤의 道는?

그건 동사입니다.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지요. 그것은 바로 그 앞에 조동사 可가 붙어있는 것을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可는 영어로 따지면 be able to, 혹은 can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사로서의 道는 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담 이 부분의 직역은 다음과 같을 수 있겠습니다.

道可道 - (개개의 사물들마다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길이 (언어로써) 말하여 진다면
非常道 - 그것은 늘있는 그러한 도는 아니다

정도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노자가 사용한 용례로서의 도는 서구적 의미의 실체론적 원리개념이 아니기에 常이라고 하는 것을 불변이라 새길 수는 없겠지요~

참고로 이 문구의 영역과 독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역) The Way that can be experienced is not true.
독역) Der Sinn, der sich aussprechen laesst, ist nicht der ewige Sinn.

위 서구 번역도 맘에는 들지 않지만, 한자의 문법적 구조를 이해한 번역이라고 볼 수 있겠죠. 모두 앞의 도와 뒤의 도가 적당한 품사로서 이해되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몇년전 김용옥씨의 노자 강의에 "노자를 웃긴 남자"라는 책으로 신나게 까댔던 한 아줌마의 일이 생각이 나는군요. 그때 그 아줌마는 저 도덕경 1장의 첫 문구에 대한 번역을 다음과 같이 해 버렸죠.

'도를 도라고 불러도 좋지만 꼭 도라고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거진 새로운 의미의 창작이었죠. 그 아줌마는 두개의 도의 의미를 제대로 구분할 만한 한자실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반증이죠. 그 아줌마의 번역을 영어로 바꾸어보면 "The Way can be the way"가 되겠죠. 음.. 저런 식의 영어는 거의 쓸모없는 것이겠죠?


이길용

2004.07.15 22:51:07
*.113.130.158

노자의 경우는 많은 경우 형이상학적 서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강한데, 최근에 발견된 마왕퇴 본의 경우 도덕경이 아니라 덕도경으로 되어있습니다, 그것으로 보아 몇가지 추론이 가능하기도 한데.. 우선적으로는 그 서물이 주도적인 한 작가에 의해 일관된 의도를 가지고 저술된 책이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많다는 것이겠고, 그 편집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도덕경과는 달리 다양한 판본이 가능하다는 말이겠죠.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도덕경은 당나라의 천재 소년 왕필의 편집본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당나라라고 하는 시대의 사상적 문화적 특색이 현학이라고 해서, 상당히 형이상학적 흐름이 강하게 지배하던 시대이기도 했죠. 이것은 중국으로서는 상당히 이질적인 경향성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제가 앞서 언급했듯이 중국의 경우는 상당히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는 문화적 경향이 있기에, 현학류의 형이상학이 극성을 부린 적은 그리 많지 않기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사조에는 나름대로의 시대적 배경이 깔려있는데, 그것이 바로 수당시대에 중국에 정착기에 들어선 불교와 당시의 정치제도가 귀족 중심이었다는 데서 찾을 수가 있겠죠. 여하튼 그런 와중에 한 천재가 등장해서 당시 회자되고 있던 도덕경과 노자사상에 대해 관통하는 나름대로의 주제를 선사한 것이겠고, 그 주제는 지금 우리가 알고있다시피 상당한 수준의 형이상학적 사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지금의 노자가 등장하게 된 것이죠. 하지만 그 이전의 판본들이 발견되고, 노자의 저술이 꼭 도덕경만이 아니라 덕도경도 가능했다는 것을 통해 보건데.. 만약 덕도경의 입장에서 지금의 도덕경을 다시 재음미한다면, 형이상학적 이미지가 상당수 처세술적 이미지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현실적이고, 치세와 처세와 관련된 문구들이 왕필의 형이상학적 해석으로 인해 변질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흔히 알고있었던 노자의 모습은 간데 없고, 상당히 현실적이고 처세에 밝은 또다른 노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학문을 한다는 것.. 그리고 역사를 기술한다는 것.. 이렇게 다양하게 포장된 이데올로기를 벗기고 가급적 그 생각과 사상의 본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좀더 이야기를 펼치고 싶긴 하지만, 쪽글로 이어가기에는 무리일 것 같아 이 정도에서 정리합니다~

[레벨:1]황성훈

2004.07.16 08:27:55
*.228.234.5

포장된 이데올로기를 벗기고 가급적 그 생각과 사상의 본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학문을 한다는 것이란 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러나 그 포장된 이데올로기를 벗기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새롭게 덧포장 될 가능성이 더 짙어보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하여간 노자의 道可道 非常道에 대한 설명, 감사하게 배웠습니다.

이길용

2004.07.16 09:12:18
*.113.130.158

그래서 '가급적'이라는 부사를 사용했지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