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관련링크 : |
---|
동성애와 성경, 그리고 중보 종교와 나치 이데올로기
김준우 (무지개신학연구소)
퀴어축제에서 동성애자들을 축복했다는 이유로 이미 정직 2년 징계를 받은 이동환 목사가 또 다시 몇몇 감리교 목사/장로들로부터 고발을 당해 재판을 받게 된 날, 어느 감리교 목사가 쓴 “신앙으로 동성애 이슈 보기”라는 글이 국민일보에 실렸다(2023/6/27). 그는 미국 연합감리교회(UMC)가 동성애 문제로 인해 분열되는 사태가 “우리에게도 곧 불어닥칠 조짐이 보인다”고 우려하면서, “예수님은 죄인들을 용납하셨지만 그들의 죄를 승인하지는 않으셨다”고 주장했다. 즉 “동성애는 예수님이 승인하지 않은 죄”라고 전제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승인 여부 이전에 동성애 혐오는 감정의 차원이기 때문에, 머리의 문제라기보다는 가슴의 문제이다. 예수처럼 인습과 전통을 뛰어넘는 사랑만 있으면 쉽게 해결되는 것이 모든 혐오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나 신학적 논리를 통해 설득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동성애자들의 숨 막히는 고통에 대해 각자 가슴을 열고 자신의 에고중심성을 깊이 성찰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동성애자들이 집단적 조롱과 혐오, 차별을 받으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겨우면 자살까지 하게 되는가에 대해 이성애자들이 이해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이 동성애자들에게 “죄인들”이며 “너희는 지옥에 간다”고 저주하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며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전혀 모를 수도 있다. 신명기 율법(신 28장)에 따라서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이에게 “죄인”이라고 저주했던(요 9장) 사람들처럼, 성경 말씀에 근거한 목사들의 거룩한 저주가 예수의 반율법주의와 정반대된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다. 수많은 동성애자들과 트랜스젠더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성소수자들의 권리를 외쳤어도 여전히 “소돔과 고모라 /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는 이야기 / 가식적인 십자가를 쥐고 목사들은 / 우리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육우당) 있는 이유는 목사들이 동성애자들의 성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 얼마나 자신들이 완악할 정도로 가슴이 닫혀 있는 줄 전혀 모르고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국가인권위원회의 <국민인식조사> 결과가 보여주는 것처럼,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해 국민의 88.5%는 찬성하며, 73.6%는 “성소수자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며(한겨레, 2020/6/23), “유림과 천도교도 찬성하는데 개신교만 반대한다”(한국일보, 2020/9/24)는 점에서, 개신교(일부)만 국민의 일반 상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동성애자들에 대한 편견과 혐오에 사로잡혀 있다는 명명백백한 사실조차 믿음이 좋다고 자부하는 개신교인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믿음이 흔히 우리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게”(마 7:3) 만들기 때문이다.
첫째로, 그는 동성애와 동성결혼을 반대하여 연합감리교회를 탈퇴하기로 결정한 교회가 2023년 6월 16일 현재 5,800 교회로서, 연합감리교회 전체 43,000여 교회의 14%에 불과하며, 나머지 86%는 계속 잔류한다는 분명한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동성애와 동성결혼을 찬성하는 대다수 연합감리교회의 큰 흐름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말이다(물론 계속 잔류하는 교회들 가운데는 다른 요인들이 작용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탈퇴하는 일부 교회들 모습만 보고 전체 흐름을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면 그의 시야가 좁고 편향된 것이며, 대다수 교회가 잔류한다는 분명한 사실을 알고도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면 어떤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로, 그는 동성애자들을 “죄인들”이며, 동성애는 예수가 볼 때에도 “죄”라고 못박았다. 동성애자들의 성 정체성을 “죄인”이라고 정죄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그들의 존엄성을 부정한 것이다. 성경에 근거해서 동성애자들을 죄인들로 정죄하는 태도는 동성애자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 폭력, 살인의 근본 원인이다. 기독교인 가운데는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은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동성애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긴 죄를 지음으로써 은총을 받지 못하는 죄인들”이라고 정죄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성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수가 동성애에 관해 직접적으로 가르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예수가 “동성애자들의 죄를 승인하지 않으셨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예수의 일반적인 가르침과 행적들을 자세히 검토해서 뒷받침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주장이 동성애자들에 대한 자신의 편견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장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예수가 타파하려고 목숨을 바친 “율법주의”에 근거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성찰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는 예수가 동성애자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하는 근본적 질문을 묻지 않았다. 그는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이 노예를 뜻하는 일반적인 명사 ‘둘로스’가 아니라 ‘파이스’가 아프다고 말하는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왜 예수는 백부장과 그 ‘파이스’(소년 애인)의 관계를 알면서도 무조건 치유해주었는지도 묻지 않았다. 또한 그는 왜 사도 바울이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성경 문자에 따라 육체적 할례를 요구하는 대신에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할례”(롬 2:29), 곧 “영적인 할례”(골 2:11-12)를 요구했는지, 만일에 바울 사도가 성경 문자에 충실해서 육체적 할례를 요구했다면 과연 예수의 복음이 한국에 전해질 가능성이 있었는지 하는 매우 중차대한 교회사적인 결정의 의미에 대해서도 묻지 않는다. 어느 누구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서 배제하는 것은 예수의 복음이 아니라는 것이 존 웨슬리의 분명한 입장이다.
세 번째로, 그는 왜 인간의 “전적 타락”과 “이중예정론”을 믿는 칼빈 전통의 미국장로교회(PCUSA)조차 2014년 총회에서 동성결혼을 승인했는가 하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질문도 묻지 않는다. 또한 그 자신은 왜 존 웨슬리의 “선행은총론”과 “보편적 구원론”의 전통에 속하면서도 동성애자를 죄인으로 간주하며 동성결혼을 반대하는가 하는 질문도 묻지 않는다. 또한 왜 개신교 전통이 강한 북미와 유럽의 대다수 국가들과 가톨릭 전통이 강한 남미의 대다수 국가들, 심지어 유교권의 타이완 등 32개 국가에서 동성결혼을 합법화했는가 하는 매우 중요한 질문도 묻지 않는다. 또한 미국에서 성인들의 10%에 해당하는 2천만 명이 성소수자인 이유는 무엇인지, 하나님은 왜 그토록 많은 성소수자들을 만드셨는지, 또한 레오나르드 다빈치, 미켈란젤로, 헨리 데이비드 쏘로, 레오나드 번슈타인 등 수많은 성소수자 예술가들을 만드신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다. 성경 문자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틀림없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의 신학 전통에 따라, 성경뿐 아니라 전통, 이성, 경험에 근거해서 판단하지 않고, 성경에만 근거해서 신학적 문제를 판단하는 것은 감리교회의 신학적 판단 방법이 아니라 침례교의 방법이라는 점도 성찰하지 못하는 것 같다.
네 번째로, 그는 인간의 섹슈얼리티와 젠더에 관한 기초를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대체 왜 “제3의 성”이라는 간성(intersex)이 존재하며, 트랜스젠더들, 동성애자들, 양성애자들이 존재하는지에 관해 생각해보지 않은 것 같다. 또한 한국의 성소수자들 가운데 28%는 자살을 시도한 경험이 있으며, 청소년 성소수자 가운데 자살 시도율은 46%에 이른다는 안타까운 사실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또한 믿음이 중요하다고 응답한 동성애자들의 자살 시도는 38%나 더 많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따라서 동성애자들에 대한 교회의 지원이 매우 절실한 현실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근거해서 동성애를 죄라고 규정한다는 것이 스스로를 방어할 신학적 무기를 갖지 못한 취약한 동성애자들의 존엄성을 부정함으로써 그들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것이라는 점에서 얼마나 잔인하며 비열한 짓인지를 그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수십 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자녀들 중에 동성애자가 있는 부모들의 고통을 들을 기회가 없었을 가능성은 있다. 교회가 성소수자들이나 그 부모들에게 결코 안전한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성애 문제가 차별금지법 논란의 핵심이며 또한 미국 연합감리교회를 분열시킬 정도의 중대한 사안이라는 점을 깨달았다면, 동성애자 문제를 다룬 영화 “윤희에게”나 다큐멘터리 “너에게 가는 길”을 통해 최소한 동성애자들이 겪는 근본 문제가 무엇인지, 또는 넷플릭스에서 “Pray Away”를 통해 미국에서 30여 년 동안 탈동성애 운동을 벌였던 사람들이 왜 모두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전환 치료를 포기했는지에 대해 배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성소수자들의 고통에 대해 알아보려는 마음조차 갖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이유는 “죄인들”이라는 선입견 때문일 것이다. 동성결혼은커녕 차별금지법조차 통과시키지 못하게 만드는 한국의 일부 기독교인들의 성경문자주의가 얼마나 편협하며 인권을 무시하는 야만적인 관점인지를 성찰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말이다.
다섯 번째로, 그가 이런 질문들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성경 이해의 한계와 편견을 성찰하지 못하는 지적인 태만 때문일 것이다. 그는 도대체 왜 동성애자들은 부모에게 쫓겨날 각오를 하면서도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히는지, 나이 팔십이 넘어서도 커밍아웃하는 노인들처럼 성 정체성이라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의도적으로 동성애자가 되는 사람이 과연 있는지, 왜 히틀러의 나치 정권은 동성애자들 약 10만 명을 체포하여, 5만여 명을 기소했으며, 1만 5천 명을 처형했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1970년대 초부터 거의 모든 의사들과 학자들은 동성애를 질병이 아니며,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으로 이해한다. 또한 탈동성애 운동을 벌였던 사람들 모두는 사기극이었다는 것도 이미 여러 차례 밝혀졌다(미국 장로교회 총회장을 역임한 잭 로저스가 쓴 <예수 성경 동성애>를 보라). 또한 성경이 금지하는 것은 동성애가 아니라 성폭력과 성적인 착취라는 사실 역시 이미 많은 성서학자들이 밝힌 사실이다(감리교 신학자 월터 윙크가 편집한 <동성애와 기독교 신앙>을 보라). 오늘날 의학적으로 유전자 편집을 하며, 심지어 로봇이 교향악단을 지휘하는 첨단 과학기술 시대에, 그가 여전히 동성애를 “예수님이 승인하지 않은 죄”라고 정죄하는 율법주의적 편견을 되풀이하는 것은 그 자신이 얼마나 최근의 신학 연구에 관해 무지한지를 드러낸 것이다. 코페르니쿠스 이후에도 여전히 천동설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지적인 태만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동성애자들을 죄인들로 정죄하는 것은 결국 예수의 복음이 아니라, 동성애자들을 하나님의 귀한 작품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나치 이데올로기를 반복하는 것임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여섯 번째로, 그는 이런 편견과 지적 태만은 특히 대형교회 목사들의 사회적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무의식적인 욕구를 정당화시킨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었던 존 웨슬리조차 노예제도에 단호하게 반대했지만, 1844년 남부 감리교회는 노예제도를 지키기 위해 감리교회에서 탈퇴했고, 결국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여 약 75만 명이 살해당했다. 웨슬리가 아무리 노예제도를 반대했어도, 남감리교회로서는 노예제도를 유지하는 것이 백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방법이었고, 또한 목사들은 노예제도를 정당화함으로써 그 기득권에 편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백인 목사들이 노예제도를 정당화한 대표적인 방법은 흑인은 온전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 이하의 짐승과 같다는 주장이었다. 그런 신학적 주장에 따라 아프리카에서 1,200만 명을 잡아 노예선에 선적했고, 열악한 노예선에서 병에 걸려 죽은 사람들 300만 명을 대서양에 내던졌으며, 노예시장에서 판매했으며, 강제노동을 시켰고, 1968년까지 린치를 자행했다. 노예무역과 노예제도를 통해 영국과 미국의 자본주의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존 웨슬리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서울에 다시 나타나,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키고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친다고 해도, 많은 대형교회 목사들은 동성애 반대를 계속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나님의 뜻보다 성경 문자에 매달리는 것이 목사들의 지적 태만과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훨씬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교인들을 우매하고 맹목적인 성경 문자주의자들로 만드는 것이 목사 자신의 성경 해석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도록 만들어 대형교회의 권위주의적인 목회 지도력을 행사하는 데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로, 그는 도대체 왜 세계의 모든 정신병동에서 성경을 찾아볼 수 없는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며 병자들을 치유한다고 기독교인들이 의심하지 않고 믿는 성경이 정신과 의사들이 볼 때는 정신질환자들에게는 불필요하며 심지어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는지에 대해서도 성찰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는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인간의 지식이 얼마나 제한된 것이며 틀릴 수 있는 것인지, 심지어 성경조차도 비판적으로 읽지 않으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다른 민족들이 살고 있던 땅을 하나님이 조상 아브라함 주셨다고 빼앗는 영토 탈취 사건은 지금도 팔레스타인에서 계속되고 있지만, 대다수 기독교인들에게는 문제조차 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하신 구원 역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일본이 한반도를 점령하고 자신들의 신이 주신 땅이라고 주장한다면 어쩔 것인가?) 또한 개신교 종교개혁자 존 칼빈과 달리 마틴 루터는 도대체 왜 유대인들이 개종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마지막까지 유대인 회당들, 학교들과 가정들을 불태우라고 촉구하다가 죽었는지에 대해서도 묻지 않는다. 루터처럼 위대한 성경학자조차도 자기 편견에 사로잡히면 얼마나 파괴적인 악마의 하수인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성찰할 기회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무의식적인 편견과 혐오감, 성경 이해의 한계 때문에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을 죄인으로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모든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며, 헌법이 보장한 행복할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성소수자들을 죄인으로 낙인찍는 일은 그들의 성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는 만행이다. 따라서 목사 자신의 이런 편견과 혐오를 성경에 입각해서 정당화하는 것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다. 항상 혐오와 차별에 근거하여 저주해야 할 원수들과 만만한 희생양들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는 기독교인들의 자기 의로움과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폭력적으로 표출해야 직성이 풀리는 문자 근본주의자들의 폭력적 이데올로기일 따름이다. 분노에 기초한 종교의 이런 폭력적 특성은 프로이트가 이미 오래 전에 지적한 것이다(존 쉘비 스퐁 주교의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를 보라).
여덟 번째로, 그는 도대체 왜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하는 데 앞장섰던 사람들이 다름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었는가 하는 매우 중대하고 심각한 질문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또한 미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신학자 로널드 사이더(Ronald Sider)가 <복음주의적 양심의 스캔들, 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Conscience>(2005)의 1장에서 여러 여론조사를 통해 지적한 것처럼, 도대체 왜 성경을 가장 열심히 읽고 기도를 가장 열심히 하는 미국 남부 바이블벨트 지역의 “중생한 복음주의자들”의 아내 구타 비율이 비기독교인들에 비해서 300%나 높은지, 왜 그들의 이혼율은 미국 평균 이혼율보다 50%나 높은지, 왜 남침례교 교인들은 가톨릭 신자들과 비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보다 인종차별에서 두 배나 높은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한 마디로 “중생한 복음주의자들”이 이처럼 성경을 가장 열심히 읽으면서도 반복음적이며 폭력적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성경 자체는 왜, 또 어떻게 비판적으로 읽지 않을 때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만드는지에 대해 성찰할 기회가 없었던 것 같다(존 도미닉 크로산의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를 보라).
아홉 번째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하는 데 앞장섰던 사람들이 바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무엇을 가장 경계해야만 하는지를 성찰할 기회 역시 갖지 못했던 것 같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처럼 오늘날 목사들과 신학자들 역시 “직접 종교”가 아니라 “중보 종교” 체제에 속해서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직접” 소통했던 모세 이후에 종교의 일상화를 위해 만들어진 “중보 종교” 체제는 구원을 위해 여러 “은총의 수단들”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제사와 예배, 사제직, 성전, 경전(성경), 안식일과 특별 절기들, 정통 교리, 신학 등이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은총의 수단들”이 절대화됨으로써 오히려 사람들을 억압하는 수단들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는 그런 억압적 “중보 종교” 체제(“강도들의 소굴” 막 11:17)에 도전할 수밖에 없었고,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종교 비즈니스를 방해하는 예수를 제거하는 데 앞장섰던 것이다. “은총의 수단들” 가운데 하나인 성경의 문자를 절대화할 경우, 성경이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메시아를 살해하는 흉기로 바뀌는 이유는 성경을 우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돈 큐핏의 <예수 정신에 따른 기독교 개혁>을 보라). 특히 최근의 예수 연구는 복음서 기자들이 어떻게 예수의 무차별적 사랑과 무한한 용서에 대한 가르침과 반대로 예수의 입을 통해, 개종하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한 자신들의 분노를 표출하도록 만들어 예수의 가르침을 정반대로 왜곡시켰는지를 밝혀냈다(존 도미닉 크로산의 <비유의 위력>을 보라).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조차 예수의 정신에 비추어 비판적으로 읽지 않으면, 예수의 말씀은 폭력을 정당화하는 흉기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열 번째로, 그는 동성애를 죄라고 전제함으로써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차별금지법을 적극 반대하도록 부추기는 신학적 입장을 제시했다. 동성애자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성경과 예수의 이름으로 정당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동성애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은 감정적 혐오에서부터 언어폭력을 거쳐 폭력적 행동으로 발전하기 쉬운데, 다음과 같은 심리적 단계를 거치게 되기 때문이다. (1) 동성애자들은 우리 이성애자들과 매우 다르다(different). (2) 동성애자들은 우리들 이성애자들의 마음을 매우 불편하게(discomfort) 만든다. (3) 동성애자들은 가정과 교회, 사회를 파괴하는 매우 위험한(dangerous) 자들이다. (4) 따라서 동성애자들을 우리들처럼 이성애자들로 만들거나(전환 치료), 아니면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게 만들 조치를 취해야만(doing something) 한다. 나치가 동성애자들뿐 아니라 유대인들이 눈에 보이지 않도록 게토에 가두어버리고 나중에는 절멸시키기로 결정한 이데올로기도 바로 이런 심리적 단계를 거쳐 끔찍한 학살을 자행했던 것이다. (5) 특히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에서 패배한 사람들(losers)은 자신들의 곤경에 대한 책임을 가장 만만한 희생양들에게 돌림으로써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확인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비열한 심리적 속성이기 때문이다(Peter Hayes, Why?: Explaining the Holocaust, 2017).
결론적으로, 사람들이 겪는 고통에 마음 아파하기보다 성경 문자에 근거해서 혐오와 차별을 주장하는 목사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일에 앞장섰던 당시 예루살렘 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율법학자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안타까운 사람들이다. 인간의 섹슈얼리티와 젠더뿐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오직 출산의 관점에서만 이해하여, 동성애자들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나는” 죄를 짓는 자들, 즉 출산하지 못하는 비정상적 성행위를 하는 변태자들로 혐오하는 것은 나치가 이용한 우생학의 출발점이었다. 동성애자들의 가장 큰 슬픔은 자녀를 출산할 수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런 슬픔을 헤아리기는커녕 출산 불가능성을 이유로 동성애자들을 “죄인들”이라고 정죄하는 것은 얼마나 야비하며 잔인한 짓인가! 동성애를 “창조질서에 어긋나는 죄”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과학자들이 “1,500종 이상의 동물들에서 동성애 행동을 관찰한 것”(Wikipedia, Homosexual behavior in animals) 모두가 “창조질서에 어긋나는” 동물들이라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성경의 이름으로 과학과 인권을 무시하고, 성경의 컨텍스트를 무시한 채 텍스트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목사들은 자신의 비과학적 편견과 반복음적 혐오를 하나님 이름으로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악마의 프리텍스트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독교의 흑역사를 통해 이미 충분히 목격했다.
학교 선생님들뿐 아니라 의사, 변호사, 기업인은 계속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자신의 업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그러나 많은 목사들은 너무 많은 업무에 쫓겨 새로운 성경 해석과 신학에 관한 책을 읽을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교회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배울 마음이 없는 것 같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도 목사직을 수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조차 목회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어느 종교사회학자는 자동차 세일즈맨이 자기가 파는 자동차에 대해 상세하게 아는 것에 비해, 목사들이 자신이 선포하는 복음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가 몰락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아무리 바쁘다는 핑계를 댄다 하더라도, 최소한 하나님의 무차별적 사랑을 가르치고 실천한 것 때문에 처형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목사들 가운데 여전히 성소수자들에 대한 자신들의 혐오와 편견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당시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처럼 성경 문자에 근거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또다시 죽이는 악행임을 깨닫지 못한 채 되풀이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보 종교” 체제의 가장 큰 위험성이며, 오늘날 기독교라는 중보 종교 체제에서 사역하는 목사들, 특히 대형교회 목사들과 재판위원들이 가장 경계해야만 하는 점이다. 모세 이후 은총의 수단들이 절대화되어 “억압적 중보 종교 체제”가 된 유대교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시작한 “직접 종교”인 기독교가 훨씬 더 포용적이며 위대한 “열방의 빛”(마 2:1-12; 엡 3:2-3)이라고 자부했던 기독교가 오히려 “역사상 가장 강고한 중보 종교 체제”가 되어 많은 신비주의자들(직접 종교)을 잔혹하게 박해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전혀 반성하지 않고, 여전히 동성애자들을 죄인들이라고 정죄하고 박해하고 있는 꼴이다. 하나님이 특별한 계획을 갖고 지으신 동성애자들이 겪는 숨 막히는 고통에 대해 함께 마음 아파함(compassion) 대신에 신학대학 교수들 수백 명이 하나님 이름으로 혐오와 차별을 부추기고 있으니, 오늘날 기독교가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몰락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태양신이나 바빌로니아의 마르둑, 또는 지중해 연안의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처럼, 종교 역사에서는 수천 년 동안 막강한 위력을 떨쳤던 신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경우들이 흔하다. 더군다나 지금은 제임스 웹 망원경을 통해 창조주의 신비 앞에 더욱 경탄하게 되며, 또한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한 온갖 전쟁들과 만행들로 인해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잘못 생각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더욱 겸손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점차 더욱 분명하게 깨달아가는 시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의 이름으로 동성애를 죄라고 정죄함으로써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정의 대신에 혐오와 정죄, 차별을 부추기는 목사들은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만들며, 하나님의 무차별적 사랑을 가르친 예수의 복음을 잔혹한 나치 이데올로기로 둔갑시키는 짓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하나님이 선물하신 인간의 섹슈얼리티와 젠더의 신비에 대한 분별력을 갖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려는 마음조차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슬픈 코미디의 어릿광대들이 아닌가 하는 참담한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더군다나 우리는 팬데믹 사태를 겪으면서 생태계 파괴가 계속되는 한 또 다른 팬데믹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전대미문의 폭염, 가뭄, 홍수, 폭풍, 해수면 상승과 같은 기후 붕괴 사태와 경제-생태-정치-전쟁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퍼펙트 스톰을 겪으면서,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기후 위기가 통제 불가능한 상태이며, 우리를 기다리는 미래는 “여섯 번째 대멸종” 시대의 장기비상사태와 대재앙임을 깨달았다. 곧 “기후 지옥”을 향해 질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영화 <돈 룩 업>이 보여주는 것처럼, 정치인들이 계속해서 억만장자 에너지 재벌들을 비호하기 때문이다. 결국 학자들은 “2040년대부터 북반구에서 동시다발적인 식량 폭동이 발생할” 것을 예상할 정도다(김준우, <인류의 미래를 위한 마지막 경고: IPCC 6차 보고서와 그리스도인의 과제>를 보라). 이런 장기비상사태에서는 흔히 극단주의가 승리하며, 근본주의 같은 단순논리가 팽배하는 시대라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기독교인으로서 믿음의 이름으로 자기 성찰을 하지 못하고 홀로코스트를 실행하는 “생각 없음”(한나 아렌트)은 바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세상을 볼 능력이 없음을 뜻한다. 이처럼 당시 독일 국민들의 97%가 기독교인이었지만, “성찰하지 않고 무조건 믿는다”는 것이 바로 나치즘의 첫 번째 신앙조항이며, 대다수 목사들과 대학 교수들이 혐오와 차별을 주장하는 히틀러와 나치당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의심 없이 히틀러와 나치당에 복종했던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대형교회 목사들이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를 위해 일인시위를 계속하고 있으며, 동성애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WCC 탈퇴를 위협하며 교회협의회 총무를 쫓아내는 일까지 앞장섰다. 이미 정치적 퇴행이 시작되어 민주주의가 급격하게 무너지는 한국 현실에서 앞으로 경제-생태-정치-전쟁 위기들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게 되어 히틀러에 버금가는 극단주의적 파시스트가 등장할 때, 대형교회 목사들과 신학대학 교수들이 또 다시 혐오와 차별에 앞장서서 누구를 대상으로 무슨 짓들을 할 것인지 상상만 해도 두렵고 참담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무차별적인 사랑과 평화의 일꾼이 되려고 수고하기보다는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면서도 그것이 악마의 하수인들이 되려고 수고하는 짓임을 전혀 모르고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는”(요 16:2) 것 같기 때문이다. 일베 집단의 혐오와 문자 근본주의자들의 폭력이 증폭될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해서 모든 신앙의 선배들이 깨달았던 “인류는 하나다”라는 우주적 인식과 웅혼한 영혼을 배우고 실천하는 과제가 인류 역사상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고 나는 믿는다. 세계의 젊은이들 절반 이상이 “인류의 멸망”을 믿을 정도로, 지금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던 당시보다, 또한 수운 선생과 소태산 선생이 개벽을 외쳤을 당시보다 훨씬 더 절망적인 현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