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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 구라인가 사실인가?

조회 수 7898 추천 수 0 2009.11.27 15:4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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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과학자 “외계인 지구에 이미 존재”  
 

불가리아 정부과학자들이 외계인 존재에 대해 언급해 눈길을 모으고 있다.

불가리아 과학 연구소 산하 우주연구소(Space Research Institute)는 다른 행성에서 온 생명체가 이미 지구에 존재하며 외계인들과 교신을 한 적도 있다고 최근 주장했다.

라케자르 필리포브 소장은 “외계인에게 질문 30개를 던졌고 그들이 이에 답변을 하고 있다.”면서 “외계인들이 지구 곳곳에 남긴 미스터리 서클의 암호를 분석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미스터리 서클은 밭과 논 또는 해변 등에 새겨진 의문의 무늬로 영국 남부 지방 등지에서 4월부터 9월 사이에 종종 발견된다.

필리포브 소장은 이어 “외계인은 늘 우리 주변에 있으며 항상 주시하고 있다. 인간에게 적대적이지 않고 언제나 우리를 도와주고 싶어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인간은 아직 외계인과 교신할 만큼 진화하지 않아서 전파로 연락을 할 순 없지만 향후 10년~15년에는 직접 교신도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우주연구소 측은 “로마 가톨릭 교회도 외계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주장했으나 이 같은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사진설명=외계인 이미지(왼쪽), 미스터리 서클(오른쪽)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









[   
 
  바티칸 "외계인 있다면 그 역시 신(神)의 창조물"

신정선 기자 violet@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기사100자평(33)입력 : 2009.11.12 03:04


로마서 학술회의 열어
400년 전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i)를 종교재판에 회부하고, '지구 외에도 행성이 있다'던 철학자 지오르다노 브루노(Bruno)를 화형에 처했던 로마 교황청이 종교와 과학의 접목 가능성을 탐구하는 학술회의를 열었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6일부터 5일간 열린 학술회의의 중점 논의 대상은 외계 생명체의 존재 여부. 비(非)가톨릭 신자를 포함한 미국·프랑스·영국의 과학자 30명이 참석했다. 지오바니 라졸로(Lajolo) 추기경은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연구결과 밝혀질 진실이 아니라 무지(無知)가 낳을 수 있는 실수"라고 이번 회의의 개최 의미를 말했다.


 

. 로마 교황청은 400여년 전 태양이 우주의 중심 이라고 주장한 갈릴레이를 종교재판에 회부했지만, 이제는 외계 생명의 존재 가능성 을 연구하는 학술회의까지 개최하고 있다.


/AP연합뉴스교황청 천문대장 호세 가브리엘 푸네스(Funes) 신부는 10일 회의를 결산하며 "신(神)의 무한한 창조력은 지구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면서 "외계에 지능을 갖춘 존재가 있다면 그도 역시 신(神)의 창조물"이라고 말했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외계 존재가 없는 것으로 밝혀질 경우에 대해서는 "지구가 매우 특별한 창조물이라는 뜻이며, 인간은 지구를 보호할 의무에 더욱 충실해야 한다"고 말했다. 회의에 참석한 미국 애리조나대 천문학과 크리스 임피(Impey) 교수는 "생명체를 발견할 가능성은 이미 다 차려진 저녁상에 비유할 수 있다"면서 "존재할 만한 과학적 요소가 모두 갖춰져 있으며, 수년 내 생명체를 발견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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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정성훈

2009.11.27 15:50:03
*.55.70.61

이런 말에 대해 어떻게 대응 해줘야 할까요..

로마가톨릭까지 외계인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은데요..

이제 우주관에 대해 페러다임 쉬프트를 해야하나요?

(사진은 참 그럴듯하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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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병훈

2009.11.27 17:55:05
*.183.92.105

외계인..ㅎㅎ

실체를 알 수 없으니 언제나 이야기거리가 되는거 같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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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정성훈

2009.11.27 19:05:29
*.55.71.163

제가 생각하는 촛점는 왜 로마가톨릭이 외계인 문제를 공식화 하느냐?.입니다

[레벨:16]안희철

2009.11.27 20:12:48
*.1.31.156

판넨베르크는 그의 조직신학 2권 95-6에서 외계 생명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외계생명체에 대한 존재를 부정할 필요도 긍정할 필요도 없다는 겁니다.
아직 아무런 결과도 나오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존재의 등장으로 기독교가, 더 정확히는 기독교의 교리가
동요될 필요는 없다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지적 생명체가 등장한다 해도 우리 신앙이 헤쳐지지는 않는다고요.
단지 신학적인 과제가 주어질 뿐이거든요.
말씀이신 예수와의 관계가,
그리고 우주 전체의 창조와의 관련성이 논의되어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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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병훈

2009.11.27 21:49:29
*.183.92.105

만약 외계에 지적 생명체가 있다면 우리의 모든 생각과 개념들을 그들의 것과 비교해 본다면 엄청 재밋는 일이 될거 같습니다..
먼저 외계 생물체를 찾아야 되겠지만요..^^

[레벨:16]안희철

2009.11.28 02:00:28
*.1.31.156

재밌을 것 같지요?
외부 생명의 등장에 불안해 할 이유가 없는데 말이죠.
이런 불안이나, 혹은 이에 대한 몇몇 몰지각한 과학자 부류의 비아냥이
사실 좀 우습기도 합니다.

참 안타까운 건
한국에서 이슈꺼리가 되는 이런 것들이
이미 지난 세기 신학 테제로 다 다뤄지고 논의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한국(적) 신학도 좋지만
서구신학이 묻고 답한 것들에 대해서는
반복할 필요 없이 주의깊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레벨:16]맑은그늘

2009.11.27 22:17:13
*.122.65.16

하지만부터 생각해볼 때, (정말 무의미한 생각인걸 알면서도 그냥 적어봅니다.)
우주 전체의 창조와의 관련성에 관한 논의는 해 볼만한 것 같은데요.
예수와의 관계는 어떻게 논의해야 할까요?

[레벨:16]안희철

2009.11.28 01:57:00
*.1.31.156

질문 감사드립니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나사렛 예수, 하지만 로고스,와 외계 생명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지요.
당연한 질문일 겁니다.
150억년의 역사를 가진(것으로 지금까지 관측되는) 우주 속에
깨알만도 못한 지구에 등장한 "인간" 예수를
저 광대한 우주로부터 출현한 외계 생명과 어떻게 관계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요?
아시겠지만,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 창조는 태초의 창조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종말론"까지 포함될 수 있습니다(뭐 대부분의 신학자 견해입니다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 사건이 우주 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창조" 사건이라는 데 있습니다.
예수사건은 흔히들 말하듯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틀의 변화를 가져왔지만
창조신학적 입장에서는 예수 사건은 창조 사건의 핵심이고 클라이막스가 되는 겁니다(두번째 아담).

좀 복잡한 얘기지만 이것도 간단히 말씀드리면
로고스의 성육신 사건으로 드러난 것은 성부와 성자의 "구별"입니다.
이러한 구별성으로부터 종말에 있을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구별"이 예지됩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결국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어떤 잡종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까지의 교리사를 통해 파악하는 "삼위일체"의 "방식"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방식"이 될 것이라는 (유비적으로든 혹은 실질적으로든) 점이지요.

이것 말고도 많이 있지만 이정도면 이에 대한 답변이 될 듯 하네요.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을 읽으셨다면
예수의 현실성과 창조의 현실성이 왜 중요하고 그것을 확보하는 일이야말로
신학의 가장 큰 주안점이 되는 것임을 의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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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떡진머리

2009.11.28 01:41:34
*.202.39.253

창조가 지구와 태양계에 갇혀 있을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이는 창조론을 부정하기 힘든 영역이 무한히 작은 점, 무에서 유가 생성된 우주의 탄생에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어마어마한 우주를 탄생시킨 그 무한히 작은 점을 존재하도록 했는지, 그리고 그토록 작은 원자의 세계에 원자력 같은 엄청난 힘을 가두어 놓았는 지에 대한 것은 현대과학으로도 답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빅뱅으로 부터 시작된 우주는 창세기에 나와있는 고대인들이 사고할 수 없었던 세상이었습니다.
그러한 고대인들의 생각과 경험과 한계가 담겨있는 창세기의 설화적 내용속에 창조의 우주를 가두어 둘 수는 없을 것이며 이는 우리들의 사고에서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의 야훼 하나님만 존재했고 동양의 세계에는 야훼하나님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사고와 동일 선상에 놓여있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있다면 우주의 생명체들에게도 그러할 것입니다.
신의 섭리는 우리들이 체험가능한 3차원의 세계만으로 보아서도 불충분 할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아주 작은 부분만을 왜곡해서 보게 할지도 모릅니다.
무한히 작은 양자의 세계에도 창조의 섭리가 담겨있으며 무한히 확대되는 우주에도 그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그 확대는 3차원적 공간의 기하학적 팽창이 아니며 11차원의 세계이고 이는3차원적 고정관념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으며 시공간만이 의미있는 세상이며 그것 조차도 무쌍하게 변화하는 세계입니다.
창조된 우주가 이러할 진데 신의 섭리 또한 3차원적 시간과 공간에 가두어 놓아서는 결코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너무 단순하게 신의 섭리를 완결짓고 규정하며 아주 먼 옛날에 가두어 버립니다.
성경은 2천년 전 쓰여지고 완결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씌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완결을 2천년 전에 가두어 버린 것은 신의 의지가 아니라 종교지도자들의 의지입니다.
초월적 체험의 시대에만 쓰여진 성서가 의미를 가진다면 그 뒤로는 어떠한 신의 섭리도 정경으로 기록되지 않은채 이 성경만을 울궈먹고 있다는 것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인간이 선과 악을 구분하게 된 것은 신이 금지한 일을 행한 것이지만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신의 섭리를 알게되는 출발점이기도 했습니다.
창세기 3장 22절의 의미심장한 구절은 이렇게 주어진 인간의 능력이 신의 의지 및 능력과 무관하지 않음을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그 능력은 글자대로 선과 악을 구분하는 단순한 의미만을 이야기 하지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이해한다면 그동안 선과 악을 제대로 구분해오지 못했던 역사에서 보여준 인간의 능력과는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인간이 고뇌하고 사유하며 학문하고 실험하며, 또한 사랑하고 증오하며 기뻐하고 슬퍼하며 만들어 놓은 각 분야의 학문과 자연과학, 그리고 문학과 예술 및 다양한 문화가  그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주의 어느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많은 지구와 비슷한 환경이 존재할 수 있다는 과학적 의견은 외계인이 존재할 가능성을 이야기 합니다.
또한 학문적 논리는 이러한 가능성을 부정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과학적 발견이 모든 것을 보여 주지는 못하지만 많은 것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외계인이 있다면 있는대로 창조의 우주를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티칸의 견해는 아마도 중세시대 때 범한 무식한(?) 과오를 의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이런 무식한 과오를 지금은 개신교가 범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지금까지 주장되는 외계인 사진이나 우주비행물체 등의 이야기는 구라라고 생각하지만 생물체의 존재 자체가 구라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로스웰 우주인 사진이 진짜라면 아마도 이 엄청난 돈벌이를 자본주의가 숨겨두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우주인을 전시하고 해서 돈 버는 약장수 식의 찌질한 돈벌이 말고 말입니다.
NASA는 우주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엄청난 예산과 자금을 끌어들일 것이고 기업들 역시 이에 발맞춰 온갖 사업거리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또한 각 연구소에서는 우주선이나 우주인으로 부터 추출한 물질을 분양받아 새로운 물질이나 유전자적 연구 또는 생물학적 연구를 통해 상품화를 이루어 냈을 것입니다.
전 지구적으로 어마어마한 새로운 산업의 활성화를 이루어 낼만한 엄청난 사건을 정치적 의도나 서구의 종교적 가치관 때문에 숨겼다는 것은 정말로 찌질한 음모론일 뿐입니다.



[레벨:16]안희철

2009.11.28 02:24:18
*.1.31.156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다만 세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빅뱅의 "특이점"은 "무"가 아닙니다. 차라리 무에 가까운 것입니다.
0에 수렴하는 것은 수학에서 0이라고 말할지언정, 결코 "무"는 아닙니다.
둘째, 처음 빅뱅이 발표되었을 때 기독교계는 환영했습니다. 드디어 무로부터의 창조가 과학적으로 증명된 듯이.
하지만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과학이 가져온 결과를 너무 쉽게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신뢰할만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갈릴레이 이전 사람들이 비과학적이어서 천동설을 주장한 게 아니거든요.
지금도 마찬가지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물론 빅뱅 이론이 오늘날 내놓은 가장 합리적인 이론입니다만
신학은 과학에 매우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게 제 의견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빅뱅을, 그 무한히 작은 점을 일으키신 분으로 묘사하는 것은
신인동형론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신의 행위와 존재의 문제입니다.
그렇게 고백될 수는 있어도 그렇게 신학적으로 기술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창조 또한 신비한 방식으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신학적으로는 "영원"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피조물의 "시간"과 대비가 되는 개념이지요.
영원은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무한"은 아닙니다.
영원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어쩌면 영원한 현재입니다.
판넨베르크가 말한 것처럼, 2천년 전 성만찬에 참여함으로 성도의 교제를 이루는 것이
동시성으로서의 성도의 교제인 것처럼 그렇게 신비한 방식으로
영원으로서의 시간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시작과 끝이라는 것은 피조물의 처음과 나중이겠으나
신의 영원한 시간은 영원한 현재로서 동시적입니다.
너무 형이상학 처럼 들리나요?
하지만 판넨베르크는 오히려 형이상학의 필요를 역설했지요.
신학은 신비한 세계에 대한, 세계의 존재방식에 대한 기술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과학이 오늘날 발표하는 것들에 대해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고
더불어 철학의 사유와 방식에도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날 신학의 출발점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과학이 신학의 입장을 대변해주거나 반증해주는 것이 아니라
과학의 토대 위에서 신학은 자기에게 주어진 질문에 답하는 것 뿐입니다.
신의 창조에 대해서 말이죠.

많은 걸 이미 알고 계시네요.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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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2009.11.28 10:57:55
*.104.196.104

요즘은
'신학은 발견이다.'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정 목사님께서 가끔 하나님의 세계에 대하여 우리의 알아감을 퍼즐에 비유하셨는데요,
저는 때로는 무한한 광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성령의 조명 아래 광맥을 찾아 이어 확장하는 것...

외계인의 출현이 지구인에게는 일상적인 사고에 큰 충격이어서
피조물 간의 인정함에 상대적 혼란이 있겠지만
범 우주적 관점에서는 별 일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안목사님의 답글에서 많이 도움을 받았습니다.
profile

[레벨:32]자유의꿈

2009.11.28 11:11:57
*.15.13.154

제가 최근 읽었던 아래 판넨베르크의 글에 대해 좋은 해설을 해주셨군요. 고맙습니다.

"하나님이 자연 만유의 기원이라는 부적절한 개념은 하나님을 우주 과정의 대표자로조차 여기지 않고 다만 세계의 창조를 하나님 안에서의 세상의 발생이라는 견지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생각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은 창조된 실재의 모든 측면을 포괄하는 이러한 창조에 관한 이해를 마지막 때에 축복받은 자들이 보게 될 하나님의 형상(vision)과 관련 지어 바라보도록 요구됩니다. 임시로,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우리 지식의 유한한 본질에 의해 결정되고, 이로 인해 추측과 이 추측들의 시험을 통한 교정을 통해서만 가능해집니다. 반면에 기독교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라는 기반에서 하나님을 세상의 창조자로 간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신학은 세상의 사건들을 모든 세부사항까지 설명할 수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에세이 '창조신학과 자연과학' 중에서)

[레벨:12]라크리매

2009.11.28 13:48:11
*.41.16.153

평소 궁금증이 있던 단어가 나와서 안목사님께 몇가지 질문 드려봅니다

말씀하신 < 영원 >이란 단어와 판낸베르크 서적에 나오는 <종말> 이라는 단어가 독일어로 무엇일지 굼금합니다

그리고 독일어 rucksichtigkeit를 한국어로 번역하면 어떤 단어가 될까요?

[레벨:16]안희철

2009.11.28 21:50:36
*.206.196.53

영원은 Ewigkeit, 종말은 Eschaton입니다.
Rücksichtigkeit는. 뒤를rück 돌아볼 수 있는sichtig 성질keit 따위겠는데...
문맥에 따라 판단해야 할 듯 합니다.
신학용어인가요? 잘 모르겠네요.

[레벨:12]라크리매

2009.11.29 14:59:18
*.41.16.153

답변 감사합니다
신학용어가 대부분 -keit로 끝나는게 많아서 드려본 질문입니다
nichtigkeit , ewigkeit, rucksichtigkeit  등등...아마도 형이상학적인 용어라 그런가봅니다
그런데 사전에 종말론이란 단어는 있는데 종말이란 단어는 없네요...

[레벨:10]Transzendental

2009.11.29 01:28:50
*.67.83.67

아마 <존재와 시간>에서 보신 듯 합니다만, Rücksichtigkeit는 1부 내존재 자체 분석장에서 나오는 개념인 것으로 기억이됩니다. 소광희 선생님은  '돌봄'으로, 이기상 선생님은 '뒤돌봄'으로 대개 번역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이데거가 용재자(손안에 존재자)에 대한 배려의 둘러봄을 Umsicht(배시)로, 타자에 대한 고려의 돌봄을 Rücksicht로, 현존재가 궁극목적으로 삼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봄을 Durchsichtigkeit로 표현합니다만..  확실히 번역하기가 까다로운 것 같네요.
주제넘게 댓글 달아 죄송합니다.

[레벨:16]안희철

2009.11.29 03:24:47
*.1.4.181

오랜만에 뵙는군요. 잘 지내셨어요?
한국에서 굿바이 인사도 못했군요.
설명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봄(das Sehen, die Sicht)의 고찰이었군요.
둘러봄, 돌아봄, 뚫어봄이라.

[레벨:12]라크리매

2009.11.29 14:41:06
*.41.16.153

존재와 시간에도 이 단어가 나오는군요
저는 다비아 신학단상에서 판넨베르크에 관한 글을 읽다가 '역망' 이란 단어의 개념이 모호해서 정목사님께 여쭤본적이 있습니다 원문의  독일어로는 rucksichtigkeit 라 말씀하셨구요
그런데 rucksicht는 사전에 있는데 이단어는 없어서 궁금증을 풀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안목사님의 글을보니 신학용어 또는 형이상학적 용어가 대게..
명사파생 형용사를>형용사형 명사로 만든  단어가 많은것 같아서  이단어도 같은 맹락일 것 같다는 추측이 들었구요
어쩌면 rucksicht란 동사에서 파생된 형용사를 다시 명사로 만든 단어일수도 있겠네요
이런 단어의 의미을 이해하려면 < 동사나 명사 + 시간>에 대한 철학적개념이 필요해야 할것 같네요
답변 감사합니다   다른 단어의 예가 있어서 용어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내존재 자체분석장...이런 단어들은 직역한 것인가요? 듣기만해도 딱딱한 뭔가가 떠올려지니...쩝~

[레벨:16]안희철

2009.11.29 17:28:47
*.1.0.119

Rücksichtig가 사전에 있다고요? 왜 물어보셨어요^^
좋은 사전 가지고 있나보군요.
다른 전공자(조직 말고)들은
조직신학에 너무 한자말이 많다고 아우성입니다만...
한자어를 이용하지 않고는 번역이 불가한 경우가 너무 잦아서.
"역망" 좋네요.
구체적으로 대입해 볼 만한 글들 속에서 대략 맞으면
이용해도 좋겠네요.

[레벨:12]라크리매

2009.11.29 22:22:56
*.41.16.153

앗! 오타를...
사전에 나와있는 것은 rucksichtig 가 아니라 rucksicht 입니다
안목사님 사전에도 안나왔군요 ...^^
profile

[레벨:20]떡진머리

2009.11.29 14:51:08
*.202.39.253

음~
제가 말씀드리는 '무'는 빅뱅의 '특이점'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빅뱅의 초기 상태는 무한이 작은 점으로의 상태가 타당하겠지만 그 이전 즉, 빅뱅 이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물질도 없고 아무런 공간도 없고 나아가 아무런 물리법칙도 없는...'
빅뱅 이전은 결코 알 수 없는 영역그러기에 신의영역 또는 신화적이라 말할 수 밖에 없는 영역을 말하는 것이며 그러기에 무에서 만들어졌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빅뱅을 신이 일으켰는지 아닌지는 그다지 의미없는 이야기 입니다.
무에서 갑자기 무엇인가가 만들어 졌다는 것이 매우 불완전해 보이지만 현재로선 별다르게 설명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물론 막의 충돌 등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과학 이론들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아이디어 수준에 머물 뿐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근거없는 무에서 유의 생성이 불만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으로서는 별다르게 서술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갈릴레이 이전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갈릴레이 이후의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종교적 도그마가 과학의 '진실'을 덮어버리는 중세의 카톨릭의 권력과 폭압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의 영원함은 '영원한 현재'에 있다기 보다는 '현재가 아니라 현재가 포함하고 있는 것 으로서 비현재적인 것'에서 찾아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영원의 시간은 '영원한 현재'보다는  엄밀하게는 '현재와 공존하며 현재가 포함하고 있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현재화되어 눈앞에 존재하는 존재자들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그 존재자의 존재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신은 현재가 포함하고 있는 영원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시간이 없어 줄이고 다음에 시간을 내어 좀더 내용을 추가할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좋은 교제 감사드리고 좋은 의견을 함께 나누기를 바랍니다.
 

[레벨:16]안희철

2009.11.29 17:24:44
*.1.0.119

아직 제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계시네요.
빅뱅 "이전"이란 없습니다.
아니, "특이점 이전"이란 말 자체가 모순입니다.
(논의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무런 물질도 없고 아무런 공간도 없고 나아가 아무런 물리법칙도 없는...'

이라고 하셨는데요. 가장 중요한 게 누락되어 있네요.
"아무런 시간도 없는"이라는.

종교적 도그마가 과학의 진실을 덮어서도 안 되지만
과학적 발견이 종교적 도그마에 결정적일 이유도 거의 없습니다.
단지 그것은 인식론적 "기초"가 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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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떡진머리

2009.11.30 01:09:31
*.202.39.253

저의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님의 단정이 문제가 아닌 가 생각합니다.

빅뱅 '이전'은 없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알 수 없는 영역'입니다.

빅뱅 이전이 없다는 것은 어떤 근거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물론 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신화의 영역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물론 현대 물리학에서는 이 상태에 대한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덴마크 과학자 닐손(H. Nielson)-물리학 분에에서 매우 탁월한 천재 과학자라고 합니다.-은 '이전'의 문제에 대하여 '현재의 물리법칙은 가능한 모든 법칙들 중에서 그것들이 그곳으로 흘러들어가서 형성된 것'이라고 합니다. '카오스의 상태로부터 물리법칙이 등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모두가 잘 아는 스티븐 호킹 같은 경우는 우주의 시작점을 회피하기 위해 시적점이 없다는 이론을 제시했습니다만 이견이 많은 이론입니다.

또한 4차원 막 사이의 충돌을 빅뱅의 시작으로 생각하는 아이디어도 있습니다.

물론 모두 다 검증된 것들은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과 이론들이 빅뱅 이전이 존재하지 않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전'에 대한 고민의 산물입니다.

'이전'을 '무'라고 명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아무런 시간도 없는'이라는 표현은 저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고려하고 있지 않던 님에 의하여 등장한 표현입니다.

'이전'을 '아무런 시간도 없는'이라고 이야기 하려면 우주의 시작 이후에는 시간의 존재를 가정해야 하는데 사실 우주에 존재하는 시간이란 없다는 사실이 그러한 표현을 무의미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란 것이 공간에 존재하는 것의 위치와 상태의 변화를 표현하기 위한 개념이고 그것은 임의적이기 때문입니다.

변화가 잡혀버린-시간이 멈춘-공간은 존재하지만 공간이 없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음이 공간에 의하여 규정된 '개념' 만으로의 시간의 의미를 드러냅니다.

이런 근거에서 저는 '시간'이란 개념을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과학적 발견을 억압하거나 애써 무시한 적은 있지만 과학적 발견이 종교를 윽박지르거나 의식한 경우는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적 발견은 애당초 종교적 도그마에 결정적 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종교가 마주친 과학적 발견에 대한 당혹감이 스스로 그렇게 느끼게 할 뿐입니다.

신의 시간을 형이상학적 설명으로 포장하지만 역사에서 드러난 신의 시간은 사실 중세의 성직자들이 종교적 기념일을 측정하기 시작한 것으로부터 개념 지워진 것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부활절이 언제인지를 정확히 계산할 수 있어야 했고 날짜를 세어 그날이 오늘인지 내일인지를 알아야 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계산 방식을 가지고 큰 놀란이 있었으며 이로부터 날짜계산 방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수도원은 하루를 시과(時課)라고 하는 일곱 개의 시간으로 나누어 엄격히 통제했는데 이처럼 율법적인 규율로, 즉 신의 시간에 따른 엄격한 복종을 통해 자신들이 신에 속해 있음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의 시간은 농업의 시간과 무관함으로 인하여, 고유한 시간도 가지지 못했고 측정할 능력도 없었지만 신체적으로 체득하고 있던 농민의 자연의 순환의 시간과 대립하게 됐고 수많은 타협을 겪게 됩니다.

예수의 승천부터 성신강림절까지의 제의적 연표는 농민들의 농한기에 맞추어 짜지게 되었으며 기독교의 대축제는 대부분 자연적인 시간과 관련되는 이교도들의 축제일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성탄절이 동지의 태양축제를 계승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입니다.

또 다른 대립은 상인들의 시간과의 균열인데 이는 이윤이나 이자 등과 긴밀히 관계지워져 있습니다.

상인들의 별도의 시간에 대한 필요성은 결국 수도원과 별도로 도시에 시간을 알리는 종을 등장시키고 이는 성의 방어를 위한 동원, 노동의 시간을 알림, 형의 집행을 알리기 위하여 종을 사용했습니다.

사람들은 종소리에 따라 '뚱보 자클린'이니 '롤랑의 종'이니 하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시계의 발명과 도시의 청사에 설치된 시계탑은 상인의 시간이 도시의 시간을 장악하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1210년 설립되 급속히 확산된 프란체스코 교단은 이자나 상업 이윤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가졌으며 고리대금업자들에 대해 신의 시간을 팔아먹는 사람들 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원래 시간이란 것이 신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니 주장했던 성직자들은 이들이 신의 시간을 훔치고 팔아먹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주장한 것입니다.

이는 상인들의 환어음을 금지시키고 이자율의 제한을 가져오게 합니다.

하지만 14세기를 지나면서 환어음과 이자는 흔한 것이 되어버렸고 1511년 라트란 공의회, 1565년 밀라노 종교회의에서 이자를 금지하는 결정을 하지만 이는 상업자본주의의 전제인 이윤의 원리와 신용의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의 시간은 상인의 시간과 대립할 수밖에 없게 되며 시간의 판매를 금지하는 순간 시간의 절약과 낭비, 판매 등의 개념을 성립시키며 시간의 현실적 사용이 신이 아닌 인간에 의한 행위임을 고백하게 됨으로, 즉 인간이 의지대로 처분할 시간이 있음을 뜻하게 되면서 신의 시간의 독점성은 딜레마에 빠지고 말게 됩니다.

이 딜레마로 부터의 도피가 '영원의 현재'같은 형이상학적이라기보다는 모호한 신의 시간을 탄생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혐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영원한 현재'가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잉여의 역사'이며 신의 시간에서는 형이상학적으로 설명되는 '영원한 현재'보다는 그것을 출발시켰고 존재시켰던 '잉여적 역사'가 오히려 신의 시간을 규정짓는 중요한 부분이고 본질적 부분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장황하게 '신의 시간'에 대하여 이야기 한 것은 바로 현재의 '신의 시간'이 기초하고 있는 '신의 시간'의 시작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는 역사성 속에서 형성된 개념이지 신비하게 하늘로부터 뚝 털어져 내린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간의 개념조차 성직자들의 셈속에 존재하는 것이지 결코 현실에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닙니다.


다음으로 인식론의 '기초'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는 모르겠지만 유럽의 철학으로부터 설명되어진 '인식'과 그것의 '기초'라면 그러한 의미보다는 과학의 발견이 종교적 도그마의 영토화에 대한 새로운 '탈영토화'의 접속점을 발견하는 것으로, 역사적 지층의 코드화로부터 '탈코드화'되는 배치의 변환을 가능하게 해주는 발견으로 이용됨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기에 과학의 지속적인 발견은 무수한 새로운 접속점을 생성시키는 근거이며 끊임없이 '재 영토화'되고 '재 코드화'되는 것으로 벗어나게 해주는 외부접속의 '탈주선'이자 '전쟁-기계'입니다.

권력화 되고 지배화 되며 동일화하는 것으로부터 탈영토화와 탈 코드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으로 과학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초월적 존재와 관계되는 인식을 위하여 그것의 근거를 제시해주는, 그리하여 그 '참된'인식에 도달하게 해주는 것으로 계열화되어 동일화작업에 포획되는 과학이 아니라 체제화로부터 탈주선을 그려나가는 과학을, 그리하여 모든 형식화된 것에서 탈 형식화된 절대적 흐름 그 자체로 나아가는 것, 형을 갖는 모든 것에서 어떠한 형상도 갖지 않는 절대적 흐름 그 자체를 보는 것으로, 그것은 과학적 발견과 이론의 강밀화나 가속화를 통해 도달하는 지점이 아니라 항상 거기에 도달해 있고 애초에 거기서 시작한 흐름, 새로운 접속을 통하여 항상 현재화되는 흐름, 항상-이미 모든 지층 안에 내재하는 흐름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찰나의 무한한 연속으로 영원한 것이 아니라 단절을 통해 항상 새로운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과학의 발견을 통하여 어떤 '참된'인식에 도달하려는 것, 좀더 분명하게는 스스로가 설정한 목적/초월/종말에 부합하는 준비된 어떤 요소만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과학을 새로운 접속점에 놓음으로 새로운 삶을 생성시키는데 적절히 이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형이상학적 사유나 그리스적 철학태도, 기하학적 사유방식 등 유럽의 근대적 철학과 사유가 가지고 있는 초월성이란 고유한 질병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좋은 의견을 가지고 사유할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행선은 헤어지지 않는다'는 노래가 있다고 하니 희망을 가지고 의견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혹시 압니까 두개의 선분을 가로지르는 선이 쑤~욱하고 그어질지... 

[레벨:16]안희철

2009.11.30 04:11:38
*.1.18.184

이거 다시 확인차 질문하지 않을 수 없군요.
시간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주에 존재하는 시간이란 없다는 사실"이란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는겁니까?
혹은 설마, 시간이 추상적인 개념일 뿐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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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떡진머리

2009.11.30 07:56:58
*.202.39.253

맞습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독립된 시간은 없습니다.
하지만 개념으로는 매우 구체적입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것은 시공간(space-time)인데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덧셈이 아니라 변화적 공간을 개념짓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빅뱅'이전'이란 없습니다.'는 논리는 사실 '빅뱅 이전이란 '무'입니다.'와 동일한 논리적 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의도를 유추해보면 뒤에 말씀하신 '모순'이라는 말씀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명제가 모순이기 위해선 논리가 성립되지 않아야 하는데 '백뱅 이전은 무의 상태다'라는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성립되지 않는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논의의 무의미성은 명제의 무의미성에서 있는 것이지 명제의 거짓으로 부터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나는 연필이 아니다.' 참인 명제지만 일상에서 의미를 획득하기 어려운 명제입니다.
이러한 명제는 일상에서 논의의 의미를 확보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것이 '논의의 무의미성'이라고 봅니다.
참과 거짓을 알 수 없는 명제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레벨:16]안희철

2009.11.30 19:28:49
*.1.61.174

1.
빅뱅이전(그런 개념이 존재하기나 한다면)이 말씀하신
"알 수 없는 영역"이라 생각하시고
상상의 나래를 펼친들 누가 뭐라겠습니까.
하지만 그걸 "무"라고 주장할 이유를 전 눈 씻고 봐도 모르겠네요.
신학에서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주장이 나온 데에는
다른 주안점이 있어요.
그걸 망각한 채 과학이 던져주는 떡밥으로부터
"무"가 무엇이고 무엇이 "무"인가를 찾는다면
그게 창조과학에서 주장하는 것과 뭐가 다른 것인지.
2.
떡진머리님께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을
"추상적인 것" 그 이상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네요.
로렌츠 변환을 염두에 두고 공간 개념을 설명하시는 듯 한데,
왜 공간 3차원 벡터에 시간 차원이 포함되어야 했는지 생각해보세요.
시간은 실제적인 물리량입니다. 기초 물리량이라고도 합니다.
측정 가능한 것이고요.
독립된 시간이야 당연히 없죠.
독립된 온도는 있습니까? 독립된 속도는요?
독립된 원자나 RNA는 있나요?
최소한 독립된 공간은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어디, 시간 없이 공간이 있다고 무슨 수로 말씀하실 수 있을런지.
그런 말씀은 로렌츠 변환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뉴턴 시대에
절대적 공간을 주장하며 어떤 "계"에서도 물리법칙이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낡은 이론에서 하나도 벗어난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시간을 "운동"과 혼동하시는 건 아닌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물리학에서
시간을 하나의 운동으로 표현하거든요.
여기서 시간은 물리량Größe이 아닌
파라미터Masszahl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시간이란 이전과 이후에 관련한 운동의 파라미터다"
(Phys. Δ11, 219 b 1-2 : τοῦτο γάρ ἐστιν ὁ  χρόνος, ἀριθμὸς κινήσεωσ κατὰ τὸ πρότερον καὶ ὕστερον)
오늘날 시공간을 공간의 새로운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시간이 공간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함께 얽혀 있다는 의미입니다(잘 아시다시피).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공간", 즉 시공간이란
뉴턴 시대의 "공간"과 같은 말이 아니예요.
시간은 "있는" 겁니다.
제가 빅뱅 "이전"이란 없다는 말은(제 표현이 미숙했나요?),
그런 말 자체가 없다는 말입니다(측정/비교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걸 형이상학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구요,
실질적으로 빅뱅으로 발생한 우주 건너편(특이점의 건너편. 이 말도 쓸 수 없는 말이지만 시간 개념에 관해 설명하는 차원에서 표현하자면)에
또 다른 우주가 있었다고 해도 그건 빅뱅 "이전"이 아닙니다.
이전인지 이후인지 어떻게 구분이 가능하나요?
심지어 로렌츠 변환에 따른 서로 다른 "계"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는 물리법칙을
저 건너편과 여기에 또한 동일하게 적용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빅뱅 건너편은 "무"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며
이전 이후의 구분도 없는, 그냥 건너갈 수 없는 건너방일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알 수 없는 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을겁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영역"이라는 말의 함의는
건너방이 우리 우주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의미이겠죠.
있으나 마나란 말입니다.
참고로 제가 드린 이 말씀은 과학의 발전으로 다 뒤집힐 수 있음도 밝힙니다.
즉, 제 말의 요지는,
3.
무로부터의 창조는 애초에 증명될 수 있는 게 아니고요.
게다가 그걸 자꾸 오늘날의 물리 세계에서 찾으려 하면 억지를 부리게 됩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현실성"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현실성 확보를 위한 작업도 물론 부단히 필요할 것입니다만,
무로부터의 창조가 신론과 얽혀 있는 이상,
그것은 결국 은폐된 방식을 취할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물리에 대한 설명들은
이미 틀렸거나, 혹은 조만간 낡은 것이 되거나 할 지도 몰라요.
처음부터 제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뭐 덕분에 오랜만에 파인만의 책을 들춰보았네요.
혹시 물리학도나 학자신가요?
제가 전문가 앞에서 객기를 부린 건 아닌지.
사실 뭐 전공자라 해도 자기 분야가 아니면 개론 수준에서 벗어나질 못하죠.
특수상대성이론 전문가가 나서주셔서 정리해주시면 좋을텐데.

질문이나 반론이 있으시다면 한번만 더 받을께요.
시간이 많지 않은 학생이니 양해 바랍니다.
profile

[레벨:32]자유의꿈

2009.11.30 20:39:17
*.15.13.154

두분의 재미있는 토론 잘 보고 있습니다.

시간은 빅뱅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인데요.
따라서 빅뱅 '이전'에 무엇이 있었느냐는 질문은 무의미하게 되죠(스티븐 호킹) .

그런데 시간이라고 인지하는 것은 단지 우주를 간단하게 바라보기 위한 방법일 뿐이고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좀 있네요. 이론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 교수는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시간의 개념이 사라지는데
이런 양자적 사고를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까지도 확장해야 한다며 시간에 대한 현재의 난관을 푸는 방법은 시간 그 자체를 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는데요.
(참조: http://www.sciencetimes.co.kr/article.do?todo=view&atidx=0000028963)
(http://discovermagazine.com/2007/jun/in-no-time -영문 자료 추가했습니다)
이쪽 진영의 주장에 대해서도 좀더 자세히 알고 싶네요.

시간과 공간(물리학) 그리고 신학... 참 재미있는 주제인것 같습니다. 
(끼어들어 죄송합니다^^)

[레벨:16]안희철

2009.11.30 21:06:45
*.1.61.174

오. 재밌는 글 링크 잘 봤습니다.
사실, 플랑크시간이라는 상수 자체가
지금 이론의 임계점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한계의 돌파가
저런 방식의 접근들 가운데 하나를 통해
이뤄질지도 모르겠네요.
몇년전 논란이 되었던 제로존 이론도 있었죠.
흥미롭기는 하더군요.
제가 죽기 전에 이런 난제들이
다시한번 풀렸으면 하는 바램이....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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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떡진머리

2009.12.01 22:47:06
*.202.39.253

많은 시간을 빼앗은 것 같습니다.
저 역시도 토론이 꼭 어떤 끝을 향해 나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나갈 수도 없고요.
또한 이론물리학자들이 아닌 사람들이 다루기에는 너무 먼곳까지 왔을 수도 있습니다.
토론 속에서 나의 생각을 정리해보고, 서로에게 영향을 준 것이 있고  또한 이 글들을 보는 다른 분들에게 유의미함으로 족할 것입니다.
끝까지 가기가 난망함은 우주 '이전'의 문제는 아직까지 물리학자들에게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이고 시간의 '존재' 또한 잘 아시다시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지금도 논쟁되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시간에 대한 사유는 특수상대성이론이나 양자론으로 부터 출발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철학적 사유로 부터 시작해서 과학적 영역으로 확장되어 나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것을 창조론의 근거로 삼고자 하는 의도 또한 내포되어 있지 않습니다.-은연 중 파고들었다면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또한  빅뱅의 동인을 신의 존재라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억울(?)하게도 빅뱅이전의 무를 이야기하는 자들은 "창조론과 무엇이 다른가?"는 질타를 창조론을 부정하는 과학자들에게 받고 있고, 또한 창조과학론을 부정하는 기독교인들에게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쩔 수 없이 의도와 무관하게 그런 지점에 도착하였기에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빛은 왜 항상 어느 상태에서건 일정한 속도를 가지는가?
특이점으로 부터 팽창한 우주는 유한한 시간(2009년 현재 137억년)을 가지는데 왜 우주의  시작점은 무한한가 하는 문제는 시간을 포함한 우주의 특이점 '이전'에 대한 사유거리를 주고 있습니다.
마치 100미터 앞에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 처럼 말입니다. - 50미터, 25미터, 12.5미터....
명확히 존재하는 듯한 시간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려고 하면 항상 모호해져버리고 마는, 결국은 물질의 운동에 대한 수율로 환원되어 설명되어지는 - 그것이 시계추의 운동이건 시계 초침의 움직임이건 아니면 세슘의 진동이건 어느 운동에서 건 동일하게 -  그리하여 시계의 추가 어떤 거리를 몇번 왔다갔다 했다고 해도 전혀 무방해져 버리는 시간의 잉여성에 대한 생각이 시간의 존재에 대한 회의입니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물질의 운동에 대한 '개념'으로 별도의 기표로 존재하는 사회적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점들 또한 시간을 다른 지층에서 회의하는 탈출선의 한 부분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론 물지학자들은 자신들의 편리대로 특정한 상수를 집어넣어 이론적 완결성을 확보하고 언젠가 검증되기를 기다리면 되는 습성을 가진사람들 이기에  이런 문제를 철학적으로 깊게 고민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이 그들의 일임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일단 우주의 시작 '이전'이 없다는 것이 성립하려면 시간이라는 것은 우주의 탄생과 함께 출발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지난 번 글에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에서도 공간의 성질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성질에 특별한 예외적 법칙이 없다는 동등성 -  민주성 - 은  우주에서 시간을 기술할 특별한 방법을 찾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아무도 '시간'이라고 부르는 절대적 현상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측정하는 것은 우주에서 일어나는 물리현상들의 변화율일 뿐입니다.
그것은 모래시계의 모래가 떨어지는 현상일 수도 있고 우주의 배경복사 온도의 변화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것도 근본적이거나 특별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시간은 잉여적 개념으로만 남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시공간이란 개념을 사용하는데 이는 시간과 공간을 구분해서 사용하는 것 보다는 근본적이지만 공간으로의 환원 - 정확하게는 시간의 배제를 통한 - 보다는 더 근본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을 아인슈타인의 타협으로 보고 있습니다. - 로렌츠 변환에서의 시간과의 타협
시간이란 개념의 잉여성은 양자우주론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시간이란 우주의 물질적 내용과 그 배열로 구성된 것이라고 할 때 우리는 방정식을 이용해서 이런한 배열들이 공간이라는 하나의 단면에서 또는 다른 단면에서의 변화를 기술 할 수 있는데 이런 맥락에서 보면 시간은 그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다는 것입니다.
양자 기하학에서는 4차원 공간 - 시공간이 아닌 - 과 3차원 표면이 필요했는데 스티븐 호킹과 제임스 하틀같은 과학자들은 시간을 또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봅니다. 
사실 양자역학에서는 문제를 풀 때 시간을 공간으로 바꾸는 방법을 종종 사용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대폭발과 같은 양자 중력적 환경에서는 시간을 실제로 공간과 같은 존재로 다룹니다.
잘 아시겠지만 공간과 질적으로 구별된다는 시간의 특성은  플랑크 시간이 지난 직후 구조화됩니다.
그런데 이 시간으로 부터 시작점을 향하여 거슬러가면 시간의 질적특성은 와해되고 시간은 공간과 구별되지 못합니다.
이와같이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초기의 양자적 우주 상태를 호킹은  '비경계 조건'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특이점을 회피해 있습니다.
이러한 비경계 조건에서는 무로부터 탄생한 우주가 가능하게 됩니다.
조금 복잡한 이야기로는 변환함수 에 따르면 이것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0의 시간으로 거슬러 감 - 저의 표현으로는 공간의 변화율이 0인 상태 - 에 따라 '시간의 개념'은 소멸되며 결국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고 이후에도 존재하지 못하게 된 것이 됩니다.
시간은 물리현상의  변화율과 다른 기표를 가지면서 동일한 지시체를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간이라는 개념이 소멸된 공간이 무에서 어떻게 유로 탄생되었는가 하는 점인데 이것은 사실 우리들의 상식적 관념에서는 이해가 전혀 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우주의 에너지, 각속도, 전하는 어떻게 하고 무로 향해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에너지보존의 법칙, 열역하 제2법칙 등등 온갖 자연의 법칙앞에 답을 내기에는 무력한 듯 보입니다.
그런데 질량의 다른 형태인 에너지가 양(+)의 값에서 음(-)의 값까지 변한다는 것을 안다면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빅뱅'더 이전'에 더해진 질량은 양의 값을 가지지만 이는 상호간의 중력을 유발시키고 이 힘은 음의 잠재적에너지를 가지게 됩니다.
이는 음의 에너지를 가지는 포텔셜에너지는 각각의 질량에 연관된 m*c제곱 에너지에의 합에 대해 양은 같고 효과는 반대임을 보여줍니다.  이 에너지의 합은 놀랍게도  0입니다.
우주 전체의 세 가지 보존량의 값이 늘 0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특이점의 우주나 경계적 조건의 우주에서나 동일합니다.
그러나 아직 이러한 0의 의미는 불명확 합니다. 하지만 무에서 유가 탄생됨을 막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좋은 토론 유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성결교 목사의 아들이고 교인입니다.
그리고 직업적으로 학문을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생의 방편으로는 조금 하려고 합니다.
내가 하고 있는 짓 - 직업, 놀이, 가사일 도와주기, 아이의 교육, 책읽기, 신문보기, 방송에 MB나오면 채널 돌리기 등 - 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기 위해서 입니다. 물론 어지간히는 알고 있습니다만.
2~30대에는 세상을 뒤집어 보려고 골방에 숨어서 모의도 해보고 눈이 뻘거니 설치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어느날 다가온 사회주의의 몰락은 나를 '진정한' 골방에 몰아넣었습니다.
늦은 나이에 근현대의 철학자와 과학자 그리고 예술가들을 통해서 이 골방으로 부터 탈출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독일에 계신 것 같은데 학문에서 좋은 성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레벨:16]안희철

2009.12.02 18:19:48
*.206.196.130

댓글이 수정된 모양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제 입장하고 무엇이 명확히 다른지는 알겠고
수용될 수 없는 대척점에 결국 서게 될 것 같네요.
좋은 대화의 파트너인 셈이죠.
시간이 잉여적인지 아닌지는
아무튼 지금 시점에서는 단정지을 수 없겠네요.
그 돌파구는 어쩌면
전혀 엉뚱한 곳에서 나올 것 같다는 상상도 드네요.
역사가 증명하듯.

반가웠습니다.^_^

[레벨:12]라크리매

2009.11.29 22:39:30
*.41.16.153

떡진머리님 목사님과의 대화를 더 종용해봐도 될까요?  ^^
<영원한 현재>와 <현재가 포함하는 영원> 혹은 <현재가 포함하는 비현재적인 것>에 관한
두분의 대화를 좀 더 들어보고 싶어요...꼴딱~
철학이나 신학에서 이 시간(영원)에 관한 의견도 다양한 것인지...중요한 단초가 될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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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떡진머리

2009.11.30 01:17:14
*.202.39.253

목사님의 글에 댓글을 달아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레벨:12]라크리매

2009.12.03 17:20:28
*.41.16.153

두분의 대화 잘 들었습니다
과학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대화가 엄청나게 방대한 분량으로 나아가니 도무지 따라가질 못하네요
물리학과 자연과학에 문외한이라서...흠냐~

몇가지 무식한 질문을 드려볼께요
떡진머리님이 얘기하는 우주는 일반적으로 제가 알고있는 명왕성 목성..이런 태양계를 지칭하는
우주보다 훨씬 광대한 미지의 영역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
평범한 저로썬 은하계에서 태양을 공전하는 (지구처럼_)행성은 태양력 곧 시간을 산출하게 되는거잖아요
물론 말씀처럼 이건 공간(태양계)안에서 존재하는 시간이구요
그럼 말씀하시는 우주에는 또는 우주는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것인지..
우주(공간)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현재란 시간과 함께 존재하는 또다른 인간이 인지할수 없는
현재의 비현재적인 공간을 우주라 지칭하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말씀하시는 우주에 대한 짧은 정의 부탁드려봅니다

판넨베르크가 얘기하는 종말은 결국 인간이 인지하는 이시공간이 소멸하는 시점을 말하는 것으로 저는 판단되는데
그는 예수님의 부활이 이 종말의 선취라고도 표현합니다
그말은 예수의 부활이 우리가 인지하는 이시공간에서의 비현재적인
곧, 비시간적 비공간적인 사건이라 말로도 이해하게 되는데요
그렇담 과학에서도 상대성이나 양자역학에서 시공간에 제한을 받는 인간이 볼수 없고 느낄수 없는 육감의 능력을
 뛰어넘는 이현재의 비현재성혹은 비시공간적인 세계가
논리나 과학으로 어느정도 증명되거나 검증 되고 있는 것인가요?

저는 이 제한적인 시공간에 지극히 영향을 받는 음악을 업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소리는 곧 시간과 공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간은 심장의 박동과 뇌로 인지하고 느끼게 됩니다
물론 음악에서도  메시앙이란 작곡가를 기점으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혁명이 시작되는데
그럼에도  인간의 감각을 통해 표현하고 소통되는지라 그 지향점이자 시작점은 곧 죽음이 됩니다
인간의 심장박동이 소멸되는 이 지점에서야 비로서 비시간적인 작업이 가능한 것이죠
결국 상상력으론 존재할수 있지만 살아있는한 인지 할수없는 영역입니다
음악에선 그러한 상상력을 간접경험으로 일종의 소리로 표현하는 것까지인데...
그럼에도 영원한 현재를 말하는 것과 현재의 비현재적인 것은 제게 다른 이야기같아 보입니다

영원한 현재는 결국 미래를 말하지만 후자는 현재안에 내포되어 있는 것임으로 현재입니다
둘다 우리가 인지하거나 알수없는 영역임에도 전자와 후자는 현재의 그방향성이 서로 다를것입니다
서구의 신학전통은 전자를 향하고 과학은 후자의 방향을 가고 있다 보는 것인지 두분께 질문드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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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떡진머리

2009.12.05 00:50:44
*.202.39.253

저는 '영원한 현재'를 '공간을 차지하는 모든 물질의 지배'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비현재적인 것은 물질의 운동성에 대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항상 현재화되어 나타나지만 물질속에 내재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물질을 지배하는 원리가 아니고 현재에서 외부와 접속을 이루며 탈주하는 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질세계에는 과거나 미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간의 존재를 가정해서 표현하자면 과거는 지나갔기에 없으며 미래는 오지 않았기에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질은 항상 '현재'의 상태로만 존재합니다. 여기서 '현재'는 시간 부사가 아닌 공간적 의미를 지닙니다.
현재로만 존재하는 것은 시간이란 형태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시간은 과거나 미래와 함께 성립합니다.

시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무었이라 답하시겠습니까?
시계의 바늘이 원주를 이동하는 것, 해가 떠서 지는 것, 계절이 바뀌는 것 등으로 답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답들이 수 없이 많이 있겠지만 이러한 설명의 의미를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물어 5분이 무엇이냐고 하면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계의 분침이 12의 숫자에서 1의 숫자로 움직이는 것, 사우나의 모래시계가 밑으로 다 떨어지는 것, 끓는 냄비의 라면이 알맞게 익는 것 등입니다.
습관대로 12에서 1로 가는데 걸리는 '시간', 모래가 밑으로 떨어지는 '시간', 라면이 알맞게 익는 '시간' 이라고 '시간'이란 시간의 개념을 붙여 사용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그러한 것도 동일하게 물질의 변화에 시간이란 관념을 붙여 사용하는 것 이상의 의미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시간이란 개념을 물질의 변화 뒤에 붙인다 하더라도 결국 물질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벗어나서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시간은 항상 공간을 차지하는 물질을 이야기 해야만 설명이 가능한 개념입니다.
시간은 곧 스스로 설명되지 않는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물질현상의 변화에 대한 개념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시간을 시간 자체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가능성이 아니라 존재성을 의심받을 만한 사항입니다.
모든 계측기는 계측하고자 하는 사물에 대해서 피동적으로 작동합니다.
온도계는 물질의 열을 측정하는데 그것은 물질이가지는 열운동량에 반응합니다.
압력계도 마찬가지로 공기나 액체 등의 압력에 피동적으로 반응합니다.
자도 공간에 놓일 때 의미를 가집니다.
계측기는 항상 그것이 측정하고자 하는 것 그 자채의 상태를 포착하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시간을 측정하는 시계는 스스로 능동적으로 움직입니다.
시계는 시간을 측정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 자신의 변화량에 대한 대상물질의 대비적 변화량을 측정할 뿐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시계가 시간을 측정한다는 것은 대상 물질의 변화에 대비되는 시계의 변화량을 시간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
풀어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우사인 볼트가 100미터를 달리는데 9.58초가 걸렸다면 이 때 우사인 볼트가 100미터를 달리는데 전자시계가 0에서 9.58로 숫자가 바뀌었다고 말하는 것과 전자시계가 0에서 9.58로 숫자가 바뀌는 동안 우사인 볼트가 100미터를 이동했다는 것과 무엇이 다를 까요?
시계는 규칙적 변화를 가지기에 측정장치로 정확성을 가지겠지만  시간의 계측이 아닌 시간의 흐름과 존재자체는은 규칙성을 문제삼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동등한 의미를 형성합니다.  매월의 날짜가 가지는 불규칙 성에도 우리는 그것을 기준으로 삼듯이 말입니다.
또한 우사인 볼트도 100미터를 달리는 동안 상당히 일정한 보폭 및 이동거리 등  균등한  운동량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즉 시계의 변화를 육상의 거리변화로 측정하여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 경우 우사인 볼트의 거리이동이 시계의 변화를 계측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시계의 변화는 거리의 이동량으로 계측되는 물질의 운동이 되는 것입니다.
이 처럼 속도와 관련된 문제를 하나 더 살펴보겠습니다.
시속 100km란 것은 시계의 시침이 큰 눈금 하나를 지나칠 때 100km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계란 것은 표시부의 변화를 일정하고 규칙적이게 조작해놓은 기계입니다.
이는 일정하고 규칙적으로 변화하는 다른 기계와 대비해서 이야기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뜻입니다.
즉 이 기계를 세계적으로 통일시키고 시계라 부르지 않고 '물질현상 변화계'라 불러도 문제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는 오히려 정확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속도는 '눈금당 100km를 갔다.'고 이야기 해도 좋으며 시속 100km가 아니라 눈금당 100km라고 불러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사실 우리의 사고에서 시간의 관념을 삭제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오랜 습성과 영토화의 욕망은 그것을 쉽게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미 100년 전 상대성 이론이 시간과 공간을 시공간으로 바꾸었지만 우리들은 여전히 근대적 시간의 개념에 머물러 있습니다.

혼란스러운 물질의 세계나 카오스의 상태에서는 시간 역시 교란되거나 존재 불가능 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
음악을 하신다니 음악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박자의 빠르기에 관여하는 템포란 말은 이탈리어로 시간이란 뜻이며 프랑스어의 동일한 의미 땅(temps)도 시간을 뜻합니다.
박자는 시간과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규칙성을 가진다는 의미와 빠르기의 진행을 규제하는 척도라는 면에서 말입니다.
시계의 초침이 채-칵-채-칵 가는 것과 박자가 강-약-강-약 흐르는 것은 동일한 의미를 지닙니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란 곡을 감상하면 처음부분에 바순과 오보에 - 피스부분이 길쭉한게 계량된 듯 보입니다. - 의 아름다운 선율이 지나고 현악기들이 마치 북치듯이 한꺼번에 연주되는 부분에 가면 사실 박자의 강박이 뒤바뀌기를 불규칙하게 하면서 들어선 박자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음악은 악기의 진동이 공간의 공기를 공명시키면서 음을 발생시키는 것인데 이것 역시도 물질현상을 통해서만 전달됩니다.
TV드라마 베토벤바이러스에서 강마에가 음악을 정치인의 장식물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신임시장을 물먹이는데 사용되었던 존 케이지의 <4분 33초>도 피아노나 오케스트라는 소리를 내지 않지만 조용히 주변의 소리들로 연주가 되고 있고 여기에 귀기울여야함은 여전히 음악이 소리의 공명을 통한 물질현상으로 표현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경우 우리들은 박자를 통한 시간의 파악이 매우 곤란하게 되어버립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로 제가 인도네시아에 업무차 들렸을 때 이야기 입니다만 년중 날씨가 거의 비슷한 그곳에서 사회활동이 적은 여성의 경우 80%이상이 날짜의 개념이 없다는 것입니다. - 시간개념=문명, 시간의 무개념=미개라는 공식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시간은 권력화를 위한 영토화의 이데올로기 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며칠인지 물어보면 많은 사람이 답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날씨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지역의 사람들은 날짜의 개념역시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질현상이 없으면 시간도 생성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물질의 변화에 의하여 생성된 시간은 물질현상의 변화를 왜곡된 형태로 표현하는 착란적 관념의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물질현상과 별개의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 처럼 착각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나오고서야 좀더 명확히 드러나지만 그 역시도 공간으로 환원되어 공간과 통일적으로 쓰이는 시공간이란 개념을 사용하여 시간이 명확히 물질운동의 왜곡된반영인 허구적 관념임을 드러내지는 못했습니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과 이것을 시공간으로 표현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글 맨 앞쪽에서 '영원한 현재'는 '물질의 지배'라고 했던 것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시간이란 관념은 물질에서 변화하는 운동을 떼어낸 것입니다. 그리해서 물질을 피동적인 죽은 것으로 만들고 운동은 물질과 동떨어진 시간이란 추상으로 변해 버립니다.
영화 등에서 가끔 보는 장면중 시간이 멈추며 모든 세상의 운동이 정지되는 것은 그러한 것을 극명히 드러냅니다.
우리들 스스로도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시간이 멈추고 도시도, 차량도 사람도, 거리의 바람에 날리던 낙옆도, 심지어는 공중의 태양도 멈추어 버리는 광경에서 나혼자 움직이는 그런 상상 말입니다.
나는 시간을 지배하는 자가 됩니다.
이것은 시간의 멈춤과 흐름을 통제하여 물질의 운동을 지배하는 것이 됩니다.
여기에서는 물질의 운동이 시간을 개념짓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물질의 운동을 통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원한 현재'는 바로 '시간의 장악'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허구의 시간이 아니라 진짜로는 '영원한 현재'인 물질의 운동을 지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무위자연한 물질은 스스로 운동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항상 현재입니다.
신의 시간은 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을 장악하고 싶어하는 인간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중세의 성직자들은 신의 시간을 만들어 내고 그에 복종을 강요합니다
.
이들은 시간의 사용료를 요구.강제합니다.
절기마다의 제물과 헌금이 바로 그것입니다. 추수와 보리추수가 없어도 추수감사헌금과 맥추감사헌금을 내야 합니다.
우주를 시간의 장악을 통해서 신의 지배 - 사실은 교황을 비롯한 신부들의 지배 - 아래 두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의도는 시간의 장악과 콘스탄티노프 대제의 유언장 조작 - 여기서는 시간의 조작을 통한 내용의 조작을 이루어 냅니다. - 을 통하여 성공을 거둡니다. ( 중세의 신의 시간은 앞의 글을 참조바랍니다.)

지금도 상영중인 '선덕여왕'이란 드라마를 보면 미실이 책력을 독점하여 자연의 변화 - 시간으로 표현되는 - 를 지배하여 국가를 장악하고자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에 역사적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덕만공주는 책력을 공개하게 되는 과정이 전개됩니다.
드라마 장영실에서도 천문관측기구를 중국황실의 철저한 보안속에 관리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를 세종대왕이 장영실을 시켜 천문관측기구와 앙부일구로 불리는 해시계, 물시계 등을 조선에서 만들도록 하는데 여기서도 동일하게 우주의 변화와 시간의 지배를 독점하고자 하는 왕족들의 정책이 보입니다.
아마도 덕만공주의 책력공개는 역사적 사실이 아닐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의 공개는 중세를 지나 근대를 거쳐 상업자본이 활성화 되던 시점에서 부터 인듯 보입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철저한 시간관리를 요구하게 됩니다. 이는 시간소유의 독점이 아니라 시간관리의 일방화를 통해서 시간의 장악이 이루어 집니다. 시간은 공개되지만 관리는 노동자에게 있지 않고 자본에 있는 것입니다.
시간단축, 시간의 절약의 비밀은 사실상 노동강도의 강화에 있습니다. 즉 같은 시간에 많은 노동을 해야만 단축되고 절약되는 것입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노동의 강밀화를 통한 잉여의 착취가 시간 단축과 절약의 성과인 것입니다.
시간이 물질에서 운동이 떨어져 나와 이것이 다시금 왜곤된 개념인 관념의 시간으로 만들어진 이유입니다.
노동력을 쥐어 짜는 자본의 횡포가  시간을 절약하고 단축하는 미덕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 운동의이시간이란 속임수에 의해 절취당하는 것을 뜻하며 이는 곧 권력의 영토화 과정인 것입니다.
자본의 세계적 시간의 장악 - 물질의 운동의 장악 - 은 1875년 있었던 세계시간의 통일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자본의 세계적 지배를 의미하며 세계적으로 노동의 량과 강도를 측정할 기반을 생성시키며 세계적 차원의 수탈구조를 형성합니다. 이는 자본주의의 제국주의화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간의 규제는 물질의 흐름의 능동성을 절단하는 것입니다.
시간이라는 개념은 가치중립적이지 않으며 지배적 체제의 영토화에 기여합니다.
시간이란 관념을 머리속에서 지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 짐작이 가는 문제입니다.
물질운동이 우리의 뇌리에 남기는 잔상은 과거라는 시간의 허상을 만들어내고 이 허상에 의한 유추는 미래를 만들어 냅니다.
야구공의 궤적은 지나온 궤적이 과거를 만들고 지나갈 궤적의 유추가 미래를 만들어 내지만 야구공은 하나일 뿐입니다. 
과거와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그러기에 우리는 결코 과거와 미래를 여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질세계는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 곳에서 저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초기 힘에 의한 방향성을 가진 비선형적 움직임을 가지며 공간에너지에 의해 가속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찰나'라고 하는 말은 물질세계를 항상 찰나로 이해하는 자세인 듯 보입니다.
시간을 버린 다는 것이 매우 혼란스러울 수 있겠지만 조금 익숙해지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이해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더욱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로렌츠변환으로 파열구를 형성한 시간의 개념은 아인슈타인에 와서 파열구의 지름을 넓히게 되었으며 양자중력론에 와서는 폐기되어야 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글이 길어져 오히려 혼란 스럽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시간을 사유하는데 도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레벨:12]라크리매

2009.12.05 10:49:18
*.41.16.153

자세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얘기하시는 논점은 잘 알겠습니다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의 시간도 물질을 통해서만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
그럼 물질의 변화에 가속을 가하는 공간에너지에 무엇이 있을까 알아봐야겠네요
전 여기에 시간이 포함된다고 봅니다 째깍째깍... 반복적인 숫자개념이 아닌 운동을 야기시키는 존래로요

사실 제 질문의 논점은 영원한 현재란 안목사님의 표현에 떡진머리님이 현재의 비현재성이란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 얘기하셔서 그차이점과 그렇게 말하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드린 질문였습니다
반복적인 숫자놀이나 기계화된 습관적인 시간개념은 저도 흥미가 없습니다...^^
서구중세나 현재 자본주의에서의 시간의 도구화 권력화 십분 동감합니다
과거나 미래에 의한 현재의 유린도 늘 신앙안에서 고민하는 바입니다

그런면에서 판넨베르크가 얘기하는 종말도
결국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현재가 유린된 신의 시간같아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의종말론이 세기말적인 종말론과 구분되지만 시간에대한 거대한 사유과 관념이 만들어낸것이 아닌지 의문이 생긴거죠 이부분에 대한 의문 때문에 시간에 대한 그리고 현재란 시간 개념때문에 두분께 질문드려본 것입니다
한편으론 제가 종말이나 종말론에 대해 잘못 이해하는 부분을 찾아내고 싶었습니다

과학에서 물질의 변화에 의한 시간개념을 유추하는 것 당연합니다
물리적으로 시간이 단독적으로 존재한다 말씀 드린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반복되는 시계바늘의 움직임이 중요한 인간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구상 만물의 변화, 질서에 대한 약속으로 시간은 물질과 함께 존재한다 봅니다 단독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고 존재하지 않는다 말할수 있는지는 안목사님과 같은 의견입니다
물질세계에서 과거와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물질세계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하는 것과도 같은 맹락이라 봅니다 시간 존재만으론 증명할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신의 존재의 유비를 물질세계의 변화나 역사를 통해서 유추하는 것외엔 증명할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는거잖아요
그러면에서 시간과 신은 참 비슷한 점이 많네요...^^

음악을 비유로 드셨는데 박, 박자, tempo는 얘기하시는 초침, 시계 처럼 숫자로 변해가는 무형의 시간이겠지만
그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음악에서 사실 리듬입니다
그 리듬은 규칙성을 가지는 것 이상으로 음악에게 생동하는 살아있는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규칙성이 상실되어 청중에게 일종의 혼돈이 야기되지만 리듬은 살아있습니다
박이 모호해진다고 시간이 상실되는 것은 사실 아니지요?
그리고 엄연히 지휘자가 박자를 젓고 있는 음악이기도 합니다(청중은 박자를 못느끼고 있지만 연주자는 열씨미 박자를 세고 있는 것이죠...^^)
지휘자의 지휘도 어찌보면 시계초침처럼 박을 표시하는 것외엔 아무것도 없어 보일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 규칙적인 박 표시 제대로 못하는 지휘자도 허다합니다
그러나 박자를 세는것 이상으로 연주자의 연주에너지에 동력을 불어넣는 지휘를 하는 지휘자도 있습니다 
여러명이 함께하는 오케스트라곡은 지휘자가 변하는 박을 알려주는 모션을 하지 않으면 혼돈,카오스에 빠져 버릴겁니다 인류에게 시계가 필요한 것도 시간이란 약속을 정한 것도 이와 같은 맹락이라 봅니다
얘기하신 부정적인 결과도 간과해선 안되지만 우리에게 이러한 템포감의 질서체계가 무너진다면 상상만해도 끔찍합니다 자동차사고 비행기사고등등....
그리고 현대의 포스트 모더니즘도 박자를 쪼개고 늘이고 섞고.. 혼란을 야기하지만 그안에 미분화된 리듬이 존재합니다 더 복잡해진 것뿐이죠
일상의 빠른 시간사용의 변화는 음악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런 모던 타임즈에서 시간의 속박에 자유로와지는 길이 과연 시간에 대한 관념을 없에는 것,시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받아들이는 것일까요? 이부분에서 떡진머리님의 요점은 그명제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현재의 물리세계에 충실하기 위함이라 저는 이해했습니다

떡진머리님은 어떻게 시간에 대한 자유함을 갖을수 있나요?
어떨때 시간이 존재하지 않다 판단하시나요? 현재,즉 순간의 찰나를 인지 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할까요?

사실 모든 연주자들은 악보에 표기된 박,박자,템보,음계...로부터 기술적으로 자유로와지는 것이 우선적으로 요구됩니다 기술적으로 자유로와지면 정신적으로도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됩니다
연주자는 박자에 속박되서 기계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짤트나 스트라빈스키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함은 사실 명확한 박과 박자, 리듬,음정에 대한 인지와 훈련이 있은 후에나 다다를수 있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시간에 대한 관념이 없다면  이것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연주자가 정확한 tempo감을 우선적으로 가져야 tempo를 자유롭게 조율할수 있습니다
마치 운전자가 유려하게 자동차의속도를 조절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미흡한 운전자는 악셀과 브레이크를 밟는 타이밍을 놓치고 자동차와 엇박으로 가지만
숙련된 운전자는 자동차의 속도와 주변 시야의 거리를 통찰하고 인지하며 자동차를 통제하는 능력이 있죠
저는 그것을 리듬감이라 봅니다 리듬감은 음악을 자유롭게 만듭니다
리듬은 곧 질서입니다  그것은 규칙과 불규칙을 넘어섭니다
질서는 혼돈의 상태에서 자유로와지는 동력입니다
춤을 못추는 사람은 리듬을 못타는 사람입니다
개인적으로 춤을 잘춘다 못춘다라고 판단하진 않지만 자신이 춤을 못춘다 생각하는 사람을 보면 대게 그렇습니다
간혹 박치인 학생을 만나면 먼저 숫자에 대한 개념을 학습하게 하고 박, 박자의 약속을 가르쳐야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후 리듬을 타는 것,시간 또는 박자를 챗바퀴 돌아가는 숫자로 인지하는 것이 아닌 리듬으로 살아나게하는 것은
그후의 문제이고 개개인의 문제로 남게됩니다

시간이  물리변화를 통해서만 시간존재의 의미를 부여받는다는 점에 공감하지만
물리와 시간을 구별할수 있는 것도 시간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기에 가능하다 봅니다
그런면에서 시간은 존재한다 보는것이 저의 견해이기도 하구요

질문드렸던 논제와 다소 벗어난 대화가 되버렸지만
영원한 현재는 공간을 차지하는 모든 물질의 지배라는 것과
현재의 비현재적인 것은 물질의 운동성이라는 말을 기억하려합니다
시간이 허락할때 물리학입문서라도 읽어봐야할것 같네요....^^

제게 무척 유익한 대화였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일상의 리듬속으로 오늘도......emot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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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떡진머리

2009.12.05 12:44:50
*.202.39.253

음악에 대한 좋은 이야기 유의미하게 읽었습니다.
상상력의 에너지가 만들어 놓은 것이 리듬일지 아니면 불규칙과 규칙을 넘나드는 질서의 산물인지는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말은 님이 말씀하진 질서에서 초월적 원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기술적으로 자유로워 진다는 것이 질서=시간의 체화를 통하여 그것의 지배자로서 자유로움을 뜻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또 하나의 동일자의 과정을 향해 나가는 것인데 이는 또 다른 지배와 규제를 형성하는 것이고 결코 그것의 굴레로 부터 벗어나지 못함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진정한 자유로움이란 그것을 버리는 것으로 부터 온다고 생각합니다.
버린다는 것은 찰나의 버림입니다.
찰나의 탈출과 찰라의 영토화의 연속이 현재에 내재해 있지만 비현재적인 것의 흐름을 형성합니다
도덕경에 나오는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해석해 보면 "학문을 하면 날마다 얻게되고 도를 하면 날마다 잃게된다. 잃고 또 잃어 더 이상 하지 않을 때 무위에 의하여 안되는 것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뜬금없는 도(道) 이야기냐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현재의 비현재화라는 의미는 내재적 흐름에 대한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서양철학에서 내재적 흐름을 관조하는 스피노자나 들뢰즈의 철학과 통해있기도 하여 언급한 것입니다.
버린다는 것은 지금의 영토로 부터 끊임없이 탈주선을 그려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어떤 원리나 인과가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외부와의 접속을 통하여 새로운 영토를 찾아가는 것이고 또한 거기로 부터 탈출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도 이러한 탈출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아담과 이브, 카인, 야곱, 모세, 요나, 예수, 베드로 모두가 배신과 탈출의 선을 형성한 인물들이 기독교의 흐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기성 기독교가 이들이 다시금 영토화되는 과정을 중요시 합니다만 저는 탈출하는 과정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영토화하는 종교적 가치화 과정에 탈주선을 그릴 수 있다면  탈출이 있었기에 새로운 영토에 도착할 수 있었던 유대민족의 과정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화 되어 있지 않은 하나님의 의지는 항상 이러 탈주자들에 의하여 현재화 됩니다.
기독교가 수 천년을 이어온 동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신의 질서를 충실히 따르는 자들도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배반자들이 기독교의 전통을 형성하는 것은 그 의미를 짚어볼 만한 내용입니다.
영토에서 자유롭게 벗어나는 유목적 삶이 자유로움을 가져다 주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시간의 코드화로 부터 벗어나 신비한 우주공간의 자유로움을 느끼시길 바랍니다.
그곳은 시간을 가지고는 여행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시간을 버릴 때만 어느 곳이건 도달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질서와 원리를 가지고는 발견할 수 없는 개척지 입니다.
음악과 예술의 세계에서도 이러한 자유로운 여행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좋은 주말 되기기를...
참 그리고 물리학도 재미있지만 않읽으셨다면 들뢰즈의  <천의 고원>도 한번 권합니다. 예술하는 분들이 사유하고 탐험할만한 수 많은 고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대와 근대철학 등에 대하여 언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프랑스 철학자들의 거두절미는 유명하여 저도 내용이 쉽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만 가지고 뒹굴다 보면 분명 고원에 올라와 있음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레벨:12]라크리매

2009.12.06 00:02:05
*.41.16.153

네.. 저도 그질서 가운데의 초월적 힘을 가끔 느낍니다
리듬은 그 질서 가운데 음악의 가장 중요한 한 요소일뿐이구요
기술적으로 훈련된다 하더라도 연주자가 시간에 대한 온전한 지배자가 될수는 없습니다 흐르는 시간과 조율하고 밀고 당기는 긴장감과 긴장의 이완을 유도할 능력을 가질 뿐입니다 온전한 자유함은 현 물질세계에선 불가능하고 단지 순간,찰나의 자유함을 가질뿐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심장박동이 뛰는한 우린 이 물질세계의 지배를 받을수 밖에 없으니 시간의 영향 아래있는 것을 받아들임으로 부분적인 자유함을 갖는 맹락과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좋아합니다
특히 노자는  분석적인 서양철학보다 제게 많은 사유의 길로 안내해줘서 좋아합니다
프랑스 철학과 영미 철학이 동양의 철학과 그 방향성이 유사하다 느낄때도 있습니다(독일철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특히 서양 철학자중 들뢰즈와 화이트헤드가 그렇더군요
서점에서 몇개 번역본을 들춰봤지만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용어들이 많아서 아직 도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떡진 머리님이 보시는 책은 누구의 번역인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마도 현재 프랑스 현대음악의 기류의 흐름을 가장 크게 주도한 사상이 그의 철학일겁니다 
그래서 그의 사상이 어떤지는 감만 잡고 있습니다...^^

자세한 설명과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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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떡진머리

2009.12.06 18:00:32
*.202.39.253

들뢰즈는 '간결함'을 미덕으로 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신들은 당연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철학적 지식이 우리들은 개론적으로 접한 것이 전부이기에 더욱 책읽기는 힘들어집니다.
하지만 이는 서구철학에 익순한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오히려 그런 사조에 서 있는 철학자들에게 들뢰즈적 사유는 난해함과 함께 거부감을 일으킨다니 말입니다.
저로서도 어설프게 알고있는 서구철학의 지식과 그들의 '거두절미'하는 전개에 매우 어려움을 겪었으니까요.
그들은 각각의 장을 차례로 읽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읽다가 보면 저의 익숙해진 책읽는 습관 때문인지 아니면 그래도 조금씩 연결성을 가지는 전개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차례대로 읽게되어집니다.
저는 김재인씨가 옮긴 <천개의 고원>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출판된 것 같지는 않지만 이진경교수가 옮겨놓은 것도 자료로는 있는 것 같습니다.
이진경교수의 경우 기존에 나온 번역본들이 썩 잘 번역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가진 것 같습니다.
천의 고원을 곧바로 등정하기에 부담이 있다면 <디알로그>를 입문서로 삼는 것도 괜찮을 듯 합니다.
아니면 이진경교수의 노마디즘1,2권을 통해서 들뢰즈의 사유에 함께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해설서적 성격을 가지는 책들이 해설자들의 관점을 독자들에게 심어주지만 그나마 이진경교수는 실천적 문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던 분이기에, 특히 사회주의의 몰락 등에 대해 들뢰즈와 같은 선상에서 사유했다고 느끼기에 근접한 사유의 고원을 올라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초월자, 원리, 법칙 등 우주를 움직이는 힘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들뢰즈는 이런 힘의 영토로 부터 탈출하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이로 부터 한 걸음 한 걸음 탈출해 나올 수록 내용이 쉽게 우리들에게 다가올 것으로 생각합니다.
<안티오이디푸스>의 경우 정신분석학자들이 제일 이해하기 어렵고 거부감을 갖는 책이라고 하니까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수 많은 영토에서 탈출의 가능성을 능동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형식과 구조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예술과 문학일 것입니다.
철학 조차도 언어적 구조로 부터 벗어나기 힘드니까요.
철학적 사유가 음악으로 연주되고 그림으로 표현되고 문학적 문장으로 서술되는 그런 상태를 공상해 봅니다.
물론 많은 예술가들이 그러한 시도를 하고 있음을 잘 압니다.
악보로 부터 자유롭고 캔버스로 부터 해방되고 언어의 주조로 부터 벗어나는 그런 철학과 예술의 가능성을 생각해 봅니다.
말은 그럴싸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 역시도 답하지 못합니다.
아마도 끊임없는 탈출속에서 다시 탈출되야 할 무엇인가로 찾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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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2]자유의꿈

2009.12.05 12:18:43
*.15.13.154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물질의 일정한 운동에 대해서는 시간이라는 개념없이도 설명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라는 개념을 없앤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 걸까요?
떡진머리님께서는 여기서 노동력의 착취라는 개념으로 그 의미를 설명하셨는데요.
말씀하시는 바는 십분 공감이 가지만 물리학적 논의에서 직접 옮겨가기에는 너무 구체적인 예라고 생각되구요. 
시간이라는 개념을 없애는 것이 만드는 보다 근본적인 차이는 뭘까요?
물리학적으로는 달라지는 게 없으니 결국 철학적인 의미만 달라지게 될까요?
신학적으로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여기에 대해서도 논의가 계속되었으면 합니다.

[레벨:16]안희철

2009.12.06 08:23:35
*.1.30.45

자유의 꿈님.
물리학에서 실체가 아닌 걸 가지고 논의하진 않잖아요.
시간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물체의 운동을 전제하는 기초 물리량이잖아요.
운동과 시간은 분리할 수 없는 것 아닌가요?

결국 말씀하신대로, "물리학적으로는 달라지는 게 없으니"
즉, 그게 그거라면
시간이 없다고 말할 게 아니라
아무튼 우리가 인지해왔고 연구해왔던 그 시간은
계속 연구되어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 건 아닌지.
그런 점에서 신학은
물리학이 아무 의미 없다고 하면 의미 없는 겁니다.
추수감사절에 감사헌금을 걷느니 마니 하는건
정말 심각한 비약일 뿐 아니라 거의 음모론에 가까운 것이죠.
시간이 그 주범이라니.

3차원을 생각해보세요. x,y는 공간, z는 시간
(흔히 기초물리 공부할 때 써먹는 방법)
하나의 점(a)이
공간을 이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차원을 소모해야 할 겁니다.
제자리에서 자전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공간에 하나의 점만 있다면
그의 이동은 "운동"으로써
그냥 또다른 공간으로서의 시간축을 이동한 셈이겠죠.
시간이 완전히 공간의 운동으로 환원되는 건
딱 이 정도 뿐일겁니다.
상대성 이론의 핵심은 관찰이죠.
또 다른 점(b)은
그 점(a)의 "있음"을
자기(b)의 시공간의 상대적 관점에서 관찰하게 되므로
공간의 거리에 비례하여
시간차로 관측하게 되겠죠.
관측된 점(a)은 소위 다른 "계"에 속하는 것이지요.
변화가 관찰된 것이 아니라
시공간이 관찰된 것이구요.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물체 각자가 서로 다른 상대적 시공간을 가지는 것이잖아요.
과거를 관찰하는 이유는 아시다시피
빛의 속도 때문이고요.
게다가 점 a의 가속 운동이라도 할 참이면,
a는 b에 대하여 시공간적 수축이 일어나게 될 테지요.
길이가 짧아지는 것도 운동인가요?
속도가 느려지는 건요?
문제는 자기 자신의 계(a`)에서는 아무런 수축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다른 계(b`)에서는 수축이 일어나는 것으로 관측된다는 것입니다.
더 더 더 큰 문제는, 둘 다 맞다는 것이지요.
이걸 시공간의 수축으로 이해하지 않고
어떻게 가능한지?
이게 다 빛의 속도 때문이잖아요.
우리가 눈앞에 보고 있는 꽃병은
과거의 꽃병이지 동시적인 현재의 꽃병이 아니죠.
절대적 시공간 개념 하에서야
이 꽃병은 좀 전의 운동일 뿐이라고 표현할 지 몰라도
아인슈타인에 와서는
시공간적 계의 상대론으로 이해하는 것 아닌가요?
상대론에서 시간=공간이라고 해도
시간을 없앨 수 있나요??
기껏해야 z축으로 표현해보는 것일 뿐.
공간 10차원이 있는 것과 시간 1차원이 함께 섞여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일텐데.
시간 이동 없이 물질이 공간이동만 한다면
이동 자체가 성립이 안 되겠죠.
이동을 위해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어쩌죠?
도저히 납득이 안가는데요.
profile

[레벨:20]떡진머리

2009.12.06 19:54:45
*.202.39.253

물리학에서 특히 양자중력이론에서 시간은 공간으로 환원되어 계산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환원의 의미이기 보다는 시간이 존재의 의미를 상실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있던 것이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 없던 것이 없는 것으로 돌아감을 의미합니다.
양자이론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그것이 물질의 근간을 이루는 미시적 것들이고 거대한 우주의 이론과 함께 양자우주론으로 통일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통일장 이론이 과연 우주만물의 원리를 설망할 수 있을 까 하는 회의감이 들기는 합니다만 그러한 결과들이 무의미함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의 문제가 철학 및 신학과 관계를 형성한지는 매우 오래 되었습니다.
중세와 근대의 많은 과학자들의 과제는 초월적 존재의 원리를 밝히는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코페르니쿠스 역시도 천동설이 맞지 않아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신의 섭리에 의해 움직이는 태양계를 좀더 쉽게 설명하기 위한 방편으로 지동설을 상상해낸 것이니까요.
태양이 지구를 돌면 77개의 원으로 설명되어야 하고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면 34개의 원으로 간단해진 다는 이유입니다. 당연히 태양이 지구를 돌면 허구적 원이 형성되므로 복잡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케플러 역시도 우주가 신의 단순하고 아름다운 수학적 설계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과학은 신학과 항상 함께해 왔고 시간 또한 '신의 시간'으로 이들과 함께해 왔습니다.
시간이 자본주의에 와서야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서 문제가 된 것은 중세로 부터 성직자들에 의해 계산된 '신의 시간'이란 것이 인간의 시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사실은 타협을 통하여 슬그머니 파고들어 있었습니다. 연구해 보면 더 오래로 거슬러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정시간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은 것을 '신의 시간'을 팔아먹는 행위로 보았으니까 말입니다.
뿐만아니라 원격지 무역에서 발생하는 환어음도 신의 시간을 착취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물론 중세이전의 이스라엘은 모든 것이 신의 것이기에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습니다.
즉 '신의 시간'이 가지는 의미는 모든 시간에서 발생하는 이익은 신의 것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중세 카톨릭'의 시간입니다. - 신의 시간에 대한 것은 먼저 번 글에서 잠시 이야기 했습니다.
개신교의 시간 또한 따로 존재합니다만 그것은 그다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물리학과 예술과 문학 그리고 신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들이 본래부터 별개로 나뉘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학이 과학으로 부터 분리되는 것은 과학적 발견이 신학을 당황시키게 되는 시점부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갈릴레이의 지동설 부터일 것입니다.
신학은 스스로가 초월적 원리가 우주를 지배하고 있다는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과학으로 부터 끊임없이 도망치고자 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과학이 이렇게 입장을 밝혔으니 신학적 원리도 그에따라 수정되어야 한다거나 그 원리를 따라야 한다는 창조과학의 단순하고 순진한 발상을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에 의해 부정되지 않는 원리나 또는 수정되는 원리는 많은 이들과 성직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 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조용기의 신앙'과 '문익환의 신앙'에 어떤 원리가 함께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이명박의 신앙'과 '촛불의 신앙'이 어떻게 기독교속에서 어우러지는가를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설명되지 못한 채 종교의 굴레속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 그렇다고 이것이 배타적 원리주의의 입장으로 설명되는 것을  강력히 거부합니다.
신의 섭리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고 그 원리가 초월적 형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원리를 알고 있다는 사고의 흐름을 형성하며 독단의 늪으로 빠져들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바로  그러한 종교적 도그마에 도전하는 것이 과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은 기독교가 도그마의 영토를 형성하는 것으로 부터 항상 탈출구를 열어줍니다. 하지만 그것이 창조과학적 입장처럼 과학의 탈을 쓴 종교의 새로운 영토를 구축하고자 열린 문은 아닙니다.
이것은 과학의 인과론이 아닌 것으로 영원의 시간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원리로서가 아니라 현재속에서만 찾아낼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은 현재화 되어 나타나는 비현재적인 것으로 내재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초월의 원리가 아니고 찰나의 깨달음 입니다.
거기에는 영원의 시간도 의미없고 신의 시간도 존재가 없는 곳입니다.
깨달음은 과거의 시간으로 거슬러가 존재하는 원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흐름의 잔상을 통하여 찰나의 존재적 의미를 깨닫는 것입니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쉽게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변의 모든 것이 시간의 관념에 포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물의 흐름을 시간의 과거에 남겨두지 않고 기억의 잔상과 영상의 기록에 남겨둔다면 가능해 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설명되지 못하는 시간을 있다고 우기는(?) 의미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글들을 전개해 왔습니다.

모쪼록 시간의 의미에 대한 모두의 고민이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축도의 마지막 같습니다. ㅎㅎㅎ





  

[레벨:16]안희철

2009.12.07 22:01:08
*.1.22.109

시간의 공간화(die Verräumlichung der Zeit)를 부정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시간은 명백히 공간화시켜 계산되어 왔어요. 그런데 그러한 환원이 왜 시간이 없음을 의미한다고 하시는지요. 거기서 비약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왜 시간이 공간화되어 물리학자들이 계산하고 있는 것인지를 되짚으셔야 하는데, 도리어 그게 시간 없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시니. 정상과학의 범위에서 너무 벗어난 것은 아닌지. 뭐 그래도 상관 없겠지만 그걸 인류 온 역사에 적용해보시려는 건, 굉장히 성급해 보입니다.
시간의 운동으로의 환원도 마찬가지예요. 시간은 기본적으로 운동(변화)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예요. 그건 당연한 말씀이고요, 제가 그걸 부정하자는 게 아닌데요. 그런데 그렇게 환원된다고 해서 시간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라면, 결국 인간은 DNA 덩어리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요.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경계를 넘나드는 물리학자들은 시간과 역사의 관계를 규정지어 왔던 것이죠. 판넨베르크의 주장도 이 점에 핵심이 있어요.
시간이 없다 하고, 다른 개념으로, 혹은 환원될 수 있는 개념들로 설명된다고 해도, 거기에 특별한 의미가 부여될 것 같지도 않네요. 시간이 무언가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은, 시간(Zeit)과 시각(Uhr)의 혼동에서 비롯된 것 뿐이예요. 아무리 설명해주신 예들을 읽어봐도, 시간 안에서 역사를 바라보며 그 역사속에서 종말로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창조 행위로 이해하는 것보다 매력이 없군요. 시간의 역사성과 인간의 역사성, 그리고 그 시간과 자연의 역사성을 "아는" 인간의 역사인식행위가 여기서 중요한 것이겠죠.

profile

[레벨:20]떡진머리

2009.12.08 23:18:19
*.202.39.253

인류 최초이자 최대의 비약은 물질의 변화를 통하여 시간을 상상해낸 것입니다.
저는 인과론을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물질의 변화로부터 시간을 상상해냄은 관념의 세계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인과관계를 형성하지 못합니다.
물리학에서도 0에 가까운 시간이란 무한소개념을 사용한 것 자체도 논리적 모순을 가지고 출발한 수학적 증명 방법입니다.
기초적인 수학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우리들이 고등학교 수학책에서 제일 처음 배웠던 논리기호학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알기 쉽게 표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기억이 새로울 것입니다.

A

B

A→B

거짓

거짓

거짓

거짓

거짓

이 표는 수학이 가지는 기본적인 증명방식인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A가 ‘거짓’이어도 B가 ‘참’이면 ‘참’이라는 수학적 결과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즉 '무한소'로부터 결과 된 우주의 빅뱅이 증명하는 것은 우주의 팽창이 있었다는 결과뿐이며 그 전제 - 무한소의 특이점이 존재했다는 - 가 참인지 거짓인지는 명확히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주의 팽창을 미분학적으로 무한히 나누어버린 결과일 뿐입니다.
모든 우주의 변화를 수학적으로 증명하는 물리학자들에게는 당연한 것일지 모르겠지만 철학적 입장을 가지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저 역시도 우주의 팽창을 수학적으로 풀이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방법은 잘 모릅니다만 우주의 팽창속도와 관계있는 순간속도를 구하는 미분공식을 적어보면 다음과 갔습니
v(t)=dz/dt=z(t+dt)-z(t)/dt
고등학교 때 공부 좀 하신 분들(? ㅎㅎㅎ)은 잘 아시겠지만 dt가 바로 0은 아니지만 0에 가까워지는 ‘무한소’를 의미합니다.
이 식은 v(t)= z(2t+dt)=2zt 으로 결론되어 버립니다.
즉 위의 식에서는 모든 분자와 분모의 항을 dt가 0이 아니라고 전제해서 나누어 버리고 뒤에서는 dt가 0처럼 취급해서 무시되어 버립니다.
거꾸로 앞의 dt가 0이라면 나누어서는 아니 되고 뒤의 식에서 dt가 0이 아니라면 무시해서는 아니 되는 논리적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논리를 거꾸로 놓으면 결코 순간속도는 결코 구해질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물론 이런 공식이 실증적으로는 좌표상의 곡선의 면적도 구해지고 지구의 팽창속도 등도 계산됨을 알고 있습니다만 말했다시피 논리적으로는 미분상의 순간속도도 구할 수 없고 적분상의 면적을 구할 수 없는 결과에 도달하게 됩니다.(왜 그런지 궁금하신 분은 따로 문의바랍니다.ㅋㅋㅋ)
이렇게 장황하게 ‘무한소’개념을 수학적 문제로 이야기한 것은 무한소의 개념이  미적분을 개발한 학자들 - 뉴턴과 라이프니츠 - 에 의해 공상적으로 만들어진 수라는 것입니다.
이 수는 수학적 미적분을 가능하게 해주기에 - 결과가 참이기에 - 의미가 있는 것이지 결코 참으로부터 출발할 마음은 없었다는 뜻입니다. 즉 ‘무한소’의 존재가 진리라는 근거는 과학적 - 수학적 - 으로나 (특히)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0에 무한히 수렴하는 ‘특이점’의 의미는 출발부터 공상적인 토대로부터 출발한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복잡한 물리학과 수학을 벗어나서 다시 철학적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물질로 환원된다고 하여 시간이 없다는 저의 주장이 비약 이라고 주장하려면 그것의 출발점인 인과관계도 없는 물질의 변화로부터 시간을 만들어낸 상상의 근원적 비약을 설명해야 합니다.
일상적 자명함이 실재적 명료함을 주장하게 하는 근거는 되지 못합니다. 
환원되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환원시키는 것 자체가 타협이라는 것입니다.
환원시킬 필요 없이 공간으로 계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래 부터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시간의 존재가 가장 필요한 곳은 종교일 것입니다.
종교에는 시간의 존재가 아닌 시간이 필요한 이유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Λ Ω 가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종말론은 시간적 종말론을 의미하거나 포함합니다.
시간적 종말론의 기만성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시간적 종말론은 인간의 시간과 자연의 시간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의 시간의 시작과 편입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적 천국과 종교적 이데아입니다.
이 시간에 편입되지 못한다는 것은 삶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종교적 용어로는 ‘구원을 통한 영생’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종말을 시간적으로 보는 것은 본질적으로 신의 시간에 편입되지 못하게 될 자들에 대한 협박이기도 합니다.
시간적 종말론은 수천 년간 결코 집행된 적이 없는 집행유예된 종교적 겁박장치일 뿐입니다. - 상관관계는 없지만 우리나라에서 존폐가 논란이 되는 선고만 있고 집행되지 않는 사형제도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와 반대로 공간적 종말론은 공간의 변화입니다.
이는 변화된 공간이며 모든 이들이 편입 가능한 땅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공동체이며 모든 이들이 함께할 수 있는 공간세상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배제의 논리가 아닌 포용의 논리이며 공동체적 삶의 지향입니다.
공간적 종말론은 현재화되어 있는 비현재적 종말이고 이는 현실에 내재화되어 흐르는 종말입니다.
이는 끊임없는 영토의 종말 - 탈영토화 - 를 통해 새로운 이데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시간적 종말론은 현대적 종말론은 시간의 역전, 즉 신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 - 농업의 시간, 상인의 시간 - 에서 패배한 쟁투에서 다시금 신의 시간으로 회귀시키고자 하는 이데올로기 싸움이며 이것은 가혹한 표현으로는 종교적 쿠데타의 의도를 지닌다고 할 것입니다.
추가로 DNA덩어리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시간의 존재만이 인간이 DNA덩어리만 임을 면하게 해준다는 상상력은 어디에서 근거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통속적 유물론의 유령으로부터 꺼내온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물론 그러한 상상력이 있기에 인간이 DNA덩어리만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게 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DNA덩어리라는 것을 부정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가지는 상상력의 의미는 공간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영토를 만들어가는 창조적 능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창조력은 신이 투기하던 선악에 대한 분별과 영생의 능력입니다.
이러한 힘은 공간의 변화를 통한 이데아의 건설의 에너지입니다.
이것이 시간을 동반하지 않은 공간에서는 불가능한 인간의 능력은 아닐 것입니다.

[레벨:16]안희철

2009.12.09 04:04:44
*.142.13.164

논리학에서 언급됐던 오래된 역설 하나를 들고 오셨군요.
기억력이 대단하십니다. 저는 고딩시절 저걸 배웠나 모르겠습니다.
수학 하면 저도 할 말 많거든요.
누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수학에 대한 불신(혹은 두려움)은 수학에 대한 무지에서 온다는 사실을.
오해는 마세요. 여기서 말하는 바는 무지가 아니라 앎에 대한 열망의 촉구입니다.
의미와 기호를 혼동하지 말라던 비트겐슈타인의 권면을 제가 또 한번 드려야겠군요.
A와 A→B는 별개의 함수랍니다.
A가 F(x)라면, A→B에서의 A는 F(F(x))라는 말입니다.
미적분을 해내실 실력이 되시니 지금 한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쉽게 이해하실 수 있겠죠?
"계"(영역)가 다른 것을 혼용해서 적용하면 안 되요.
수학은 사실 "계"의 문제입니다. 아래 한번 더 말씀드리죠.
아무튼, 기호를 의미의 영역으로 쉽게 옮기려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dt를 언제는 0으로 취급했다가,
언제는 0이 아닌 것으로 취급했다 하는지 의심스러우신가 봅니다.
예를 들어 드릴게요. 정확한 건 아닙니다만 개념만 잡으셔요.
이는 나눗셈과 덧셈의 문제인데요.
국민학교 때 아이들이 자주 하던 실수인데,
y=1/x+a 하고
x=1/(x+a) 하고 다르지요?
제가 이걸로 보여드리려고 하는 것은,
dt가 나눗셈의 영역으로 들어간 것 하고, 덧셈에 놓인 것 하고는
하늘 땅 차이라는 겁니다. "계"가 달라서예요.
곱셈/나눗셈과 덧셈/뺄셈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요.
심지어 분자 마저 0에 근사하는 dz로 가지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지요.
그건 모순이 아니예요.
수학을 매우 불신하고 계시는 모양이네요.
저는 불신할만큼 수학을 뛰어넘진 못해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수학은 단지 "제한된 범위(계) 내에서만" 행해지는
편리한 도구일 뿐입니다.
하지만 매우 정확하고 정교한 도구죠.
싫든 좋든.
하지만 도구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적용되는 건 아니고
다만 자기만의 "계" 안에서만 통용될 뿐이예요.
그런 제한성을 수학자나 물리학자 누구 하나 모르는 바 아니고요.

그래도 의심스럽죠?
시간이란 개념의 부재. 뭐 좋아요.
시간을 공간으로 환원해도 좋고
시간을 다 지우고 그냥 그 자리에 공간이라고 써도 좋습니다.
누누히 말씀드렸지만 어차피 이름씨는 별 의미 없어요.
제 말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시간이 있다 없다가 문제가 아닙니다.
떡진머리님께서 시간의 존재에 의심을 던지시는 것은
결국 기독교의 시간 개념을 통한 악마적 행위들에 대한
회의와 의심 때문이라고 생각되는군요.
지금의 시점에서 드려야 할 말씀은,
접근하고 계시는 방법과 태도의 문제예요.
예를 들어,
"아마도 시간의 존재가 가장 필요한 곳은 종교일 것입니다.
종교에는 시간의 존재가 아닌 시간이 필요한 이유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Λ Ω 가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이런 식의 넌센스가 글 곳곳에 베어 있네요.
제가 넌센스라고 하는 건, 여기 다비아 누구를 봐도
교리에 대한 연역적 접근으로 주어진 과학의 결과물들을
자기 꼴리는데로 쥐흔들 분은 없다는 겁니다.
그런 비판과 비난을 이해 못하는 바 아니고
지난 수천년간 유대교를 포함한 기독교가 시간으로 밥벌어먹은 일이
자주 있었던 것도 사실이예요.
하지만 그것을 비판한답시고 시간이 없음을 애써 주장하며
결국 주장하는 것이 "공간의 종말론"이라면
공간의 지배를 통해 밥벌어먹었던 만만찮은 치욕의 역사는
무엇으로 되짚으시려는 것인지.
종교가 뭔가를 해쳐먹으려 한다는 의혹이 있다면
굳이 공간의 종말론을 들고 오실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전 세계인, 전 영토를 기독교화하려는 욕망이
2천년이라는 "공간"(^^)과 함께 있어 왔으니까요.
애초에 그런 방식으로는 기독교가 변혁되지도 않으려니와
진보나 보수 어디에서도 이제는 먹힐 수 없는 것일 뿐입니다.

제가 드리려고 하는 말을 제발 오해치 마세요.
저의 저 위 수학, 과학에 대한 말들 다 기억치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신학과 교회는 더이상 필요에 의해 시간을 끌어당겨
지지고 볶아 사람들 옭아메던 시절은 이미 다 지나갔고요,
주장하시는 바처럼, 더 이상 시간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이 명명백백히 밝혀지고
또 인간의 "의식"마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신학과 교회는 가차없이 시간개념따위 집어 치울 것입니다.
신학은 학문의 자리로 내려온 지 오래입니다.
한국 상황을 염두에 두진 마세요.
세계 교회로 보았을 때 소수일 뿐이고
가련한 중생들일 뿐이니까요.
정상적인 신학은 인문/자연과학 앞에서 정당하고 합리적으로 항상 서 있습니다....
가 아니라 서 있으려고 노력합니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신학사 안에서 사용되어온 과정과 경위를
조금 더 면밀히 살펴보시는 시간을 가지셨으면 합니다.
솔직히 한국에서 "시간"이라는 것의 신학적 개념에 대해
정당하게 기술하는 신학적 글은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번역서는 뭐 제대로 되어 있던가요.
중세가 암흑기라는 건,
이제는 뭐 한국어 번역의 암흑기인 시대라고 말해야 할 듯^^.

일단 이만 줄이고요,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시간의 존재만이 인간이 DNA덩어리만 임을 면하게 해준다"고 말한 적 없어요.
별개의 이야기이고 비유적으로 설명한 것 뿐이예요.
오해 마시기를.

추신/
공간의 종말론에서 주신 메시지는
상당히 의미깊었습니다.
되짚어 볼만한 다른 내용들도 있었고요.
혹시 떡진머리님께서 시간문제에 대해 말씀하신 것과
거의 같은 혹은 비슷한 견해를 가진
철학자, 과학자, 신학자와 그들의 책 가운데 중요한 것을
소개해주시고 싶은 만큼만
알려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충심으로 배움을 얻으려 합니다.
우리의 다소 지겨운 토론에 단비가 아닐런지.
미리 감사드립니다.
저와 비슷한 견해는
거의 대부분의 조직신학자들 책을 보시면 됩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판넨베르크의 책들도 유효하고요.
안타깝게도 번역이 안되어 있지만 조직신학2권7장을 보시면 좋은데
영역본도 있으니 한번 읽어보시면 좋겠고요.

이거 뭐 말이 너무 길어져서
다음에는 통화로 해야 할 듯^^



profile

[레벨:20]떡진머리

2009.12.09 22:13:25
*.202.39.253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기표가 가지는 의미의 이중성을 알고있습니다. - 언어구조학에 대한 이야기는 또 하나의 꼭지를 형성하기에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때로는 잉여적 의미가 기표의 내용을 규정하는 경우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야기 하고자 했던 것은 수학의 옹호가 아닌 수학적 기반이 가지는 허약함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 두가지, 즉 기호논리학의 명제에 대한 문제와 미적분에서의 '무한소'의 문제는 수학자들 조차도 비밀을 감추고싶어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기호논리학은 게임입니다. 일정한 규칙을 정해놓고 그것에 들어맞으면 참이고 아니면 거짓인 게임의 룰입니다.
영역이 혼용되는 아니든 상관하지 않는 게임입니다.
두개의 문장을 가지고 예를 들까 합니다. 
1. 오바마가 한국의 대통령이면, 2는 유리수다.
2. 오바마가 한국의 대통령이면, 2는 무리수다.
도대체 앞의 전제와 뒤의 결론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2가 유리수라는 명제는 '참'이고 2가 무리수라는 명제는 '거짓'입니다.
 하지만 앞의 전제가 '거짓'이기에 두게의 문장은 모두 참입니다. (앞 글의 표를 참조하기기 바랍니다.)
물론 기억을 하고 있으면 다행이겠지만 제 또래의 아버지들은 자녀의 교과서에서 볼 수 없다고 합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삭제하였다고 합니다. - 아마도 수학자들도 적어놓기는 넘사스러운 표였던 것 같습니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의 무의미한 문장을 축출시키기 위한 투쟁도 알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수학적 계산에 숨어있는 논리입니다.
그것은 문장의 의미가 아니라 오직 문장이 참인지 거짓인지가 수학자들이 생각하는 문장의 자격조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수학자들의 게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문장은 사실 우리의 실생활에서는 '구둥대둥' '횡설수설' 등으로 표현되는 것들입니다.
더 이상 수학의 문제를 언급하면 밑천이 드러날 것 같고 저는 공학을 전공했습니다만 공업수학에 나오던 미적분은 무척이나 싫어하던 공부이기에 그만하고자 합니다. 물론 글을 읽는 다른 분들도 지루해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공간의 지배는 공공연히 드러나 있지만 시간의 지배은 은밀하게 은폐되어 있는 점이 다를 것입니다.

사실 목회를 하시는 분과의 대화에서 교회의 문제에 대해 가혹하게 비판한다는 것이 썩 즐거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 역시 목회자의 자식으로 조금의 동류의식(?)을 가지기에 비판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봅니다.
독일의 신학과 철학적 토대가 얼마나 깊고 넓게 발전하여 있는지는 대충 말로 들어서 알고는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 하고자 하던 것들도 한국교회의 상황에 대한 성토는 아니었습니다만 현실적 상황이 주는 답답함이 자연스레 글들에 일부나마 표현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종교적 상황을 잘 알고계시겠지만 독일에서 느끼시는 체감과 제가 한국에서 느끼는 것이 다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그런 내용의 글과 함께 합니다. - 바로 우물안 개구리라는 말이 이래서 생긴 것 이겠지요. ㅎㅎㅎ
또한 예로 들던 중세의 암흑기가 왠지 자꾸만 한국의 기독교로 이어지는 것도 이유일 것입니다.
아버님 말씀이 "목회자도 평신도다. 이것이 개신교의 의미다."라고 말씀 하시던데 한국교회의 목회자는 어느새 신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듯 합니다. 헌금으로 면죄부를....
아 ~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렇듯 한국교회의 상황에 분개하는 것은 목회자의 아들로 살아온 삶은 제 존재감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일 것으로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좋은 대화를 나누어 주신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도 시간의 문제에 대하여 조금 더 넓게 생각을 정리해보는 의미있는 사유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실 시간의 문제에 대하여서는 20년 전쯤인 청년시절  존재에 대한 회의를 가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동일한 물질의 문제로 부터 출발한 것인데 더 이상 깊게 진행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지천명을 얼마남겨두지 않는 나이에 하늘의 뜻을 알게됨인지(ㅎㅎㅎ)  등따스고 배부르게 되어서인지 시간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아 그때도 내가 이런 고민을 했었던 적이 있었지"하고 그 오랜 시절 스치듯 지나갔던 고민이었던 것이 생각났다는 사실입니다. - 이게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인가요?
어찌 되었건 이러던 참에 저의 시간에 대한 생각을 외계인을 언급하는 댓글에 삽입하게 되었고 목사님의 반론을 통하여 좀더 깊게 고민을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저는 비적대적 토론이 가지는 의미를 서로가 동일한 지층을 형성하지는 못할지라도 이해는 하게 되는 지층간의 접속을 생성시키는 것으로 의미짓고 있고 이런 뜻에서 목사님과의 대화는 나름의 성과를 얻어낸 것 같습니다.

시간의 존재 문제만을 주요 주제로 해서 다룬 책은 없는 것 같습니다.
철학자중 첫 번째 일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일 것입니다.
양자론에 관한 개론적 책에서 아주 조금씩 언급되고 있습니다.
얼마전 부터 제가 빠져있는 '들뢰즈'의 철학책들에도 시간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고민의 연결선은 있지만 동일한 고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도 '배르그송'이 시간에 대하여 뭐라고 한 것으로 아는데 파리 '대감금 사건'에 대한 부분 빼고는 시간에 대해 언급한 저서는 아직 접하지 못하였습니다. - 시간에 대한 책으로 그의 저서들을 처번째로 뒤져볼 예정입니다.
그리고 국회의 도서관에 수 많은 시간에 대한 자료와 논문들에 대해 자료를 뽑아는 놨는데 관점조차도 알지 못하는 아득한 상황입니다. 모두 대충 살펴서 골라야 할 듯 합니다.
그러니까 자료들을 이제 모아볼려고 하는 상태입니다. - 죄송합니다.
아직 시간에 대한 저의 생각은 맹아적 상태입니다.
사실은 앞으로 한 2년 정도 시간에 대한 부분을 가지고 공부 - 독학 - 를 하여 체계를 형성 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 뒤 시간에 대한 글을 써보고자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저의 공부에 함께할 친구들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목사님과의 대화가 이런 생각을 하던 참에 형성된 것이라 쉽게 단절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책 읽을 시간을 많이 빼앗겼습니다만 다행이도 사유할 시간은 가진 것 같습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시간에 대한 글은 여기서 마칠까 합니다.
토론에  함께 하여준 안목사님과 라크리매님, 자유의 꿈님, 퀼리아 님 등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외계인에 대한 꼭지글을 올려주신 정성훈님께 댓글의 물꼬를 엉뚱한 방향으로 돌려놓은 것에 대하여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덕분에 좋은 토론의 장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더 풍부히 하고 체계화 하여서 다음에 다시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안녕 ~~~ ^^











[레벨:16]안희철

2009.12.10 00:02:24
*.142.8.87

제가 괜시리 비트겐슈타인을 언급했나보군요.
그럴거면 차라리 프레게나 더밋이 나을 뻔 했네요...
언어철학이나 혹은 쉽게는 기호학에
관심을 가진 적은 있는데, 별로 흥미를 끌지 못하더라고요.
아시다시피
수학이 명증하고 무모순이라는 생각은
괴델의 불완전성의 원리 1 그리고 2가 발표된 이후
박살이 났죠.
하지만 그게 곧 수학은 쓰레기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드리면
떡진머리님께서 소개하신 수리논리학은
힐베르트 프로그램이라고 하는
수학의 무모순성을 증명하고자 시도했던 20세기 초의
시도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말씀하신데로입니다. 문제가 있지요.
굳이 그렇게 수리논리의 불완전성을 언급하시지 않으셔도
괴델이 이미 한참 오래전에 이런 논리의 불완전함을 보여줌으로써
몇 개의 "자명한"(?) 공리로 수학체계를 세울 수 있다고 하는 자만을
자빠뜨린 사건이 있었잖아요.
쉽게 말해서 물리학계에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있다면
수학계에는 괴델이 있었던 것이죠.
(이 점은 판넨베르크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됩니다.)
이런 불완전성의 핵심은
같은 시스템 내에서 참과 거짓을 확증할 수 없다는 데 있고,
따라서 다른 시스템(예, F(F(x))같은...)의 경우는
완전하게 참과 거짓을 판별할 수 없는, "증명 불가"라는 의미일 겁니다.
(이런 참과 거짓 둘중 하나로의 판별에 대한 증명에 관해
이미 특별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얼마나 주도면밀하고 자명하게 논의했었는지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아무튼 수학적 기반(공리)이 흔들렸고,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건
부정하기 힘들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학자들이 스스로들 비밀이라 하는 건
좀 엄살 같아 보입니다.
일반인이 관심도 없는데 지들끼리 비밀이라니
정말 그러고 있다면
수학의 중세시대겠군요.
그런 바보짓 할거라면 당장 학문 때려치시라고 권면을...
"수학이 쵝오!"라는 생각 따윈 저도 안 합니다.
하지만 수학이나 물리학 등이 자기 범주, 자연과학을 넘어
사회 전반에 (긍정적으로) 미쳐온 인간의 역사를 압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오히려 사회가 지금보다 더 많이 그 결과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황우석이니 도킨스니 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
설치지 않는 세상이 오지 않겠습니까?^^

아무튼...
다비아는 비판에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간혹 비난이나 불만 등에도 어느정도는 자유로운 편입니다.
다만, 근거가 빈약한 비판에 대해서는
진보든 보수든 빨갱이든 파랭이든
가차 없어야 할겁니다.
(한국의 자칭 보수나 진보나 할 것 없이 문제가 많거든요)
이제 더 이상 유학이 가지는 장점이 없는 시대이지만
더불어 언어가 가지는 중요성은 더할나위없이 커지고 있지요.
번역에 더 게을러지고 있달까... 번역의 필요성이 줄어든 것일까...
아무튼 그런 연유로 공부는 어디서든 해도 좋으나
자료는 전 세계에서 뒤져야 하는 현실.
자기주장과 비판이 어려운 것은 이런데 있는 것 같습니다.
시간에 대한 글을 준비중이시라니, 좋은 생각입니다.
사실 이런 리플토론, 그렇게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출판의 형태여야 하죠.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그래요...뭐 어쨌든
토론은 합일점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똘레랑스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닐까요.
차이를 알면 그것으로 충분히 값을 한걸겝니다.

[레벨:16]안희철

2009.11.28 02:43:40
*.1.31.156

그나저나... 저 사진 속 외계인은, 좀 나이들어 보이네요.
얼굴피부가 탄력을 잃었....
profile

[레벨:20]떡진머리

2009.11.30 01:20:54
*.202.39.253

 ~ 음 사진이 그렇습니다. - -;;
머리는 조금 떡져 있지만 피부는 탱탱합니다.
나이도 아직 젊습니다. ㅎㅎㅎ
불혹을 지난지 아직 일곱해 밖에 되지 않습니다.
딸에게 부탁해서 멋진 캐리커쳐 준비하고 있습니다. 흠흠
목사님도 사진을 드러내시고 적나라한 얼굴로 맞장 뜨셔야지 공평한 것 아니겠습니까? ㅎㅎㅎ

[레벨:14]닥터케이

2009.11.30 11:35:49
*.90.149.125

목사님이 말씀하신 사진은 떡진머리님 사진이 아니라 본문에 올라온 외계인 사진을 이야기하신듯 한데요...???
profile

[레벨:20]떡진머리

2009.11.30 17:24:14
*.194.245.3

ㅎ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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