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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은 정의

악의 피해자와 가해자에 위한 하나님의 정의





위르겐 몰트만


 

1977년 저는 6주 동안 아르헨티나와 브라질과 트리니다드를 돌며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강연 여행의 마지막 부분에 저는 두고두고 기억될 만한 해방신학자 회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회의 자리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진지하게 진리를 말했습니다. 물론 저는 제가 “제1세계 신학자”로 취급받는 것 때문에 개인적으로 감정이 상해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임은 저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고, 저를 어떤 신학적인 인식으로 인도했습니다.

유럽과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가 라틴아메리카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 신학”을 정말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도 억압하는 자의 해방 신학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해방이 억압받는 쪽이나 억압하는 쪽 모두의 인간됨을 위한 해방이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인류가 억압과 학대와 착취라는 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양쪽이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억압당하는 사람들에게 해방은 자명한 것입니다. 억압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못합니다.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사역의 하나이고,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만든 것은 다른 또 하나의 사역입니다.

저는 그 강연 여행에서 돌아와 “억압하는 자의 해방”에 관한 논문을 한 편 썼는데 그 논문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 제가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그리스도교의 모든 주류 신학과 영성이 범하고 있는 근본적인 실수 하나가 얼마나 끔찍스런 것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중세의 고해 성사가 일방적으로 가해자 중심이라는 사실입니다. 죄인은 자기의 악행을 뉘우치고 회개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도 일방적으로 가해자 중심입니다. 죄인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죄와 악행의 피해자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불의와 폭행을 겪어야만 했던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서 자기의 권리를 찾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스도교 교회는 항상 가해자가 죄에서 구원받는 문제에만 골몰했지, 무고하게 고난을 당하는 피해자의 탄원은 흘려듣지 않았습니까? 죄인의 칭의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피해자의 칭의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는 아주 세속적인 이유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서구 법률 체계의 토대가 되고 있는 로마의 법률 체계는 일방적으로 가해자 중심입니다. 예컨대 도둑이 처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는 벌을 받음으로써 속죄를 받습니다. 하지만 자기의 악행을 보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피해자는 그냥 도둑질 당한 사람으로 남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정의는 단순히 선과 악을 판단하는 정의, 선한 것은 상을 주고 악한 것은 벌을 주는 정의(justitia distributiva)가 아니라 공의를 바로 세우고 굽은 것을 곧게 하는 정의, 즉 창조적인 정의입니다.

오늘 강연을 통해서 저는 바로 이 창조적인 정의, 치유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정의를 천착하고자 합니다. 새로운 칭의론을 쓰고, 최후의 심판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그려내고자 합니다.


우선 전통적인 참회론(고해성사 Busssakrament)과 신앙론의 결점을 나열해 보겠습니다.


1. 가톨릭의 고해성사는 악의 힘을 “죄”로 규정하고 그것을 인간의 잘못으로 환원시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잘못한 사람의 죄를 사면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해자 중심의 사유로서 피해자는 완전히 잊히게 됩니다.

2.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용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죄의 용서는 부활 없는 십자가 신학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념과 실천도 철저하게 가해자 중심이고 죄의 종들에게만 국한된 것입니다. 이런 사유는 그 죄의 피해자들을 잊어버립니다. 중세의 고해성사와 마찬가지로 칭의론도 너무나 개인주의적인 사유입니다. 모든 사람이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홀로 자기 자신의 문제를 안고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3. 사죄의 말씀과 용서의 언약은 인간의 믿음을 수동적인 수용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칭의, 즉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고 당신의 뜻을 행하시는 적극적인 칭의의 차원을 잃어버립니다.


이와는 달리,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하여 죄인의 새로운 정의를 주장합니다.(로마서 4:25) 이와는 달리, 구약성서가 주장하는 하나님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폭력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공의를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정의는 구원하는 정의(시편 31:1)이며, 악의 희생자들을 치유하고 일으켜 세우는 정의입니다. 그 정의는 언제나 사회적인 차원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를 함께 고려하지, 피해자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정의의 목표는 영혼 구원 혹은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정의가 거하는 새로운 땅입니다.


1. 정의를 향한 외침


피해자: 오늘 우리는 정의를 향한 외침을 어디서 듣고 있습니까? 그 외침은 가해자, 큰 죄를 진 사람한테서 들려오지 않습니다. 폭력의 희생자들, 불의로 인해 가난해진 사람들에게서 들려옵니다. 그들에게는 정의를 향한 외침이 곧 하나님을 향한 외침입니다.

억압당하는 민중의 침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정의를 향한 소리 없는 외침을 듣습니다. 철저하게 약탈당하고 있는 이 땅 피조물의 신음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정의를 향한 목마름을 느낍니다. 이것은 하나님마저 떠나버린 것만 같은 밑바닥 상황에서 치솟아 오르는 절규입니다. 악의 세력에 힘없이 내맡겨져 있는 고통입니다. 우리 같이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20세기 인간 대학살의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세상에서 굶주리고 또 이른 나이에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수, 그 소름끼치는 숫자를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접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숫자 뒤에는 사람의 운명이 있습니다. 그 운명이 우리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으로 살고 있습니다.

정의와 하나님을 향한 외침은 인류의 큰 범죄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아시아의 인구 밀집 지역에서 벌어지는 자연 재해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들려옵니다. 쓰나미와 싸이클론과 지진은 수천 명의 생명을 앗아갑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 걸까요? 어떤 사람은 죽고 어떤 사람은 살아나는데, 이것은 단순히 우연일까요? 우연은 변덕스럽고 운명은 눈이 멀었습니다. 범행과 자연 재해의 피해자들은 고통스러운 질문 앞에 섭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인가?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가해자: 하나님과 정의를 향한 또 다른 외침은 가해자의 외침으로, 그 가해자가 자기의 행동을 의식하게 됐을 때 터져 나오는 외침입니다. 가해자들이 희생자를 약탈하거나 억압하거나 심지어 살해했을 때, 그들은 악의 충실한 하수인이었습니다. 누가 그들에게 시켜서 그런 일을 했거나, 그걸로 이익을 보기 때문에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악의 희생자였습니다. 물론 그 악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희생자들과는 다르지만 가해자들도 악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죄책을 떠안게 되었고, 점점 더 깊은 악순환에 연루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정의를 향한 가해자들의 외침을 우리가 들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이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그 맹목성과, 여러 가지 고발을 대하는 완고함과, 우리 사회의 고통에 대한 냉담함과, 사랑 없음, 냉소주의, 다른 사람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이기주의 속에서 그 외침을 인식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하나님과 정의에 대항하는 외침이 될 때가 많습니다. 1944년 한 장교가 러시아에서 우리 아버지에게 하는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만일 하나님과 정의가 존재한다면, 유대인에 대한 대량학살 때문에 전쟁 이후 독일에 잔인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죄의 희생자들이 하나님에게서 버림 받은 상황 속에서(in Gottverlassenheit) 정의를 향해 부르짖는다면, 그 죄의 가해자들은 하나님을 부인하면서(in Gottlosigkeit) 하나님에게 저항합니다. 자기들이 행한 잘못을 저주하는 정의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체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우리도 이렇게 거친 인간이 아니라 착한 사람이 될 수도 있었어. / 하지만 이 세상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네.” 실제로 우리가 악을 경험할 때, 개인적으로 그 악의 피해자와 가해자로 경험하거나, 사회적으로 가해자 집단과 피해자 집단 사이에서 경험할 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사회적 관계, 경제적 구조, 정치적 체계, 즉 우리의 행동을 규제하는 체계로서의 악을 경험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적 구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독일처럼 사회보장이 잘 돼있는 나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인간을 승자와 패자로 양분하는 경쟁 사회 속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강자를 약자와 분리해 놓는 정치적 체제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자연을 체계적으로 파괴하고 동식물의 다양한 종을 매년 감소시키고 있는 인간 사회 속에서 먹고 마시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 세대를 희생시켜 가면서 우리의 현재를 즐기고 있으며, 우리의 다음 세대는 우리 세대의 잘못 때문에 비싼 대가를 치루지 않으면 안 될 상황입니다. 이러한 체제 속에서는 생명의 힘만이 아니라 죽음의 세력이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런 체제는 정의롭지 않은 체제이며, 그 체제 안에서 살고 일하는 우리를 죄인으로 만듭니다. “패배자”인 가난한 자, 약한 자, 이 땅, 우리 자녀들에게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우리가 행하는 악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지 않는 선이 우리를 고발합니다. 우리가 이런 불의한 체제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진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의 불의가 하늘을 향해 소리칩니다. 이런 불의의 체제에 적응해서 살아야 할까요? 여기에 저항한다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일까요? 저는 지금 우리의 삶의 조건이 되고 있는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체제를 만든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 그 체제를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언자 요나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처럼, 니느웨도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니느웨”에 살고 있으며 예언자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2. 하나님 - 정의의 태양


우리는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정의라는 아주 독특한 개념과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 개념을 로마적 개념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공의를 세우는 분이며, 공의를 보증해 주는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정의는 하나님이 친히 맺으신 언약에 대해, 또 그분이 직접 만드신 피조세계에 대해 그분이 보여 주시는 신실함입니다. 제1계명에 따르면 하나님은 아무런 법적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고 억압당하던 노예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언약의 땅, 자유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이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공의를 세우”시되(시편 146: 7, 103, 6)이라고, 그들이 어디에 있건 그렇게 하실 거라고 기대합니다. 이 하나님은 “과부와 고아”의 권리를 변호하시되(신명기 10:18, 시편 82:3, 이사야 1:17), 그들이 어떤 사람이건 그렇게 하십니다. 그분은 “이방인의 권리”에 관심을 가지시니, 이는 이스라엘이 한 때 직접 이방 민족 사이에서 이방인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악의 희생자가 된 사람은 시편 31편 1절에 기대어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정의로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이렇듯 해방하는 정의, 권리를 찾아주는 정의, 구원하고 치유하는 하나님의 정의를 “자비”(Erbarmen)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정의와 자비는 서로 모순이 아닙니다.

이렇듯 해방하는 정의, 공의를 세우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정의야말로 이스라엘의 근원적인 하나님 체험이기 때문에, 이것은 이 세상 모든 민족과 온 땅을 위한 이스라엘의 희망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이스라엘의 언약의 메시야는 “가난한 사람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세상에서 억눌린 사람들에게 바른 판결을 내립니다.”(이사야 11:4) 그분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며(이사야 42:1) “세상을 정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시편 96:13)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의 영을 부어주시면, “광야에 공평이 자리 잡고, 기름진 땅에 정의가 머물 것입니다. 정의의 열매는 평화가 될 것입니다.”(이사야 32:15-16) 그러므로 예언자 말라기는 하나님을 “정의의 태양”이라 부릅니다.(말라기 4:21)

이 정의 개념은 이집트나 로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바빌론에서 온 것입니다. 두 강의 땅2)에서는 왕이 곧 재판관이요 태양신 샤마슈(Samas)의 제사장입니다. 그는 태양을 모범으로 삼아 신적인 정의를 집행합니다.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면 만물이 - 식물과 동물과 인간이 - 다시 소생합니다. 그의 인간적인 정의도 이처럼 만물을 살게 합니다.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은 정의롭습니다. 건강한 것은 정의롭습니다. 자연의 법칙에 알맞게 사는 것도 정의롭습니다. 재판은 형벌과는 무관하며, 일으켜 세우고 바로 잡고 치료하는 것과 연관됩니다. 그러므로 왕은 강자가 약자에게 손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고, 과부와 고아도 자기의 권리를 지키며 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또한 왕은 땅을 인간의 착취로부터 보호해야 합니다.

이러한 “정의의 태양” 관념을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재판과 그분의 심판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이 세상의 구원으로 환영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세상을 정의로 심판하십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서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태양을 떠오르게 하신다는 산상수훈의 말씀(마태복음서 5: 45)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의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공의를 세우심으로써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정의로운 분으로 계시합니다. 인간이 악의 지배 아래서 고난을 당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분이 현존하십니다. 그분은 폭력의 희생자들과 연대하십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당하는 일은 곧 그분이 당하는 일입니다.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정의가 자기들 편이라는 것을 느낄 때 그 정의의 계시가 시작되고 그 정의의 부활이 시작됩니다.


3.  예수 그리스도 - 피해자와 가해자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정의의 계시


피해자: 우리가 복음서를 펴서 읽으면 그 앞장에서 곧 바로 알게 되는 것은, 예수의 처음 시선이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 아웃사이더, 그러니까 죄의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에게 머물렀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서 61장 1절의 약속에 따르면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병든 사람에게 치유를 선포하며, 갇혀 있는 사람에게는 자유를, 앞을 못 보는 사람에게는 빛을, 억눌린 사람에게는 그들의 권리를” 약속하십니다.(누가복음서4:18-19) 예수께서 하나님 영의 치유 능력을 병든 사람에게 보이신 것처럼,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폭력의 희생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정의를 보여 주십니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누가복음서 15:2) 여기서 “죄인과 세리”는 부유한 사람과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한 사람들, 공동체 바깥으로 내몰린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받아들인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인정해 주심을 의미하며, 그 사람들의 사회적 치유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멸시와 천대를 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그들의 영적인 감옥을 깨뜨리시며 그들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들과 연대하심으로써 하나님이 희생자들과 연대하신다는 사실을 그 사람들을 통해서 계시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얼굴을 보려하는 사람은 그런 희생자들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까지 예수가 걸어간 수난의 길은 죄의 희생자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 속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의 그리스도 찬가에 잘 드러난 것처럼, 그분은 부자유한 종, 능욕을 당하고 착취를 당하는 종의 형상을 취하셨습니다. 그로써 예수는 하나님에게서 버림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되돌려 주십니다.

우리는 이것은 연대의 그리스도론(Solidaritätschristologie)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고통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복음서가 들려주는 예수의 수난 이야기는 점점 더 깊은 포기의 길입니다. 그는 병든 사람들, 악의 희생자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쏟아 부으셨으며, 끝내는 당신 스스로 로마 정치권력의 희생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것과 똑같이 - 그 의지가지없는 처지를 오히려 의미 있는 것으로 보셨고, 이 세상에서 내몰린 처지를 하나님에게서 부름 받은 상황으로 보셨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의 세상, 의롭다 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미래마저 빼앗긴 사람들에게 그분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선포하셨습니다. 독일속담에서는 “꼴찌”가 개한테 물린다3)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첫째”가 될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의 가치를 뒤집어엎은 예수에 대한 이 세상의 대답입니다.

예수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함께 계셨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처럼 예수 안에 바로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그 사람들에게, 즉 당신처럼 굴욕을 당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수많은 십자가들 사이에 서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권력자와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걸어간 그 피비린내 나는 길 양편에 늘어선 십자가, 스파르타쿠스의 십자가에서 독일 히틀러 독재의 죽음의 수용소,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 군도, 라틴아메리카 군사독재정권의 “실종자들”에 이르기까지.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에서 버림 받은 상황 속으로 친히 들어오셔서 버림 받은 사람들의 형제가 되어 주셨고 그들을 고통에서 건져주셨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죽음의 감옥에서 “오직 고난당하는 하나님만이 도우실 수 있다”고 썼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59세의 오스카 로메로(Oscar Arnulfo Romero) 대주교의 회심체험이었습니다. 혼 소브리노(Jon Sobrino)는 이렇게 썼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을 통해 그에게 나타나셨다 ……. 그는 가난한 사람들, 억압당하는 동포들의 눈에서 일그러진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

마태복음서 25장 31-46절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에 보면, 세상을 심판하시는 인자는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너희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희생자 중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희생자 가운데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은 어디계신가?’라는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대답입니다.


가해자: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아주 일찍부터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가해자의 죄에 대한 대속으로도 이해했습니다. 가해자들은 이사야 53장에 등장하는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 모델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세상의 죄를 지시는 분 ……. 그분의 상처를 통해 우리의 병을 낫게 하는 분”으로 이해했습니다(이사야 53:5). 이것을 우리는 대속의 그리스도론(Stellvertretungs-christologie)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시는 분, 하나님을 무시하고 불의를 행하는 우리까지도 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당신의 운명을 통해 계시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로마서 4:25)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있습니까?

저는 이 세상 어떤 죄인도 자기 죄에 대한 온전한 깨달음을 안고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죄인이 자기 죄를 깨닫는다면, 그는 모든 자기 존중을 잃어버리고 자기를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 대한 비난과 죄에 대한 깨달음을 거부합니다. 하지만 일단 우리가 희생자의 눈에서 우리의 죄를 인식하는 순간, 그 죄는 무거운 짐처럼 우리는 내리누릅니다. 우리는 스스로 일어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릅니다. 상황이 심각할 경우, 이런 죄의 무거운 짐을 계속 지고 사느니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도 전혀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도대체 죄의 용서라는 것이 가능합니까? 그 누구도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리거나 과실을 보상할 수 없습니다. 모든 죄는 한 사람을 그의 과거에 붙잡아 매고, 미래를 향한 그의 자유를 강탈합니다. 하나님도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대량학살은 계속해서 대량학살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일어난 죄의 사슬을 풀어 없애시며, 이미 일어난 일은 과거로 만드시고 생명의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해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지신다.”고 할 때 바로 그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 세상의 죄를 지시는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가해자를 죄의 종으로 만드는 죄의 세력에 대하여는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은 가해자에게 엄청난 사건입니다. 본회퍼가 제대로 말했듯이, 다른 모든 것은 “값싼 은총”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세 단계를 거쳐 일어납니다.


a. 악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인식함으로써 그 악을 행한 사람들은 자기의 실상을 인식하게 됩니다. 첫 단계는 항상 진리로 진입하는 단계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아픈 것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가해자들은 언제나 기억력이 나쁘기 때문에, 희생자의 오랜 기억에 의지하여야 자기 인식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가해자는 희생자의 눈에 비친 자기를 발견할 때 비로소 자기의 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b. 두 번째 단계는 의식의 전환이요 삶의 방향 전환입니다. 이것은 결국 그렇게 많은 희생자를 양산하는 지배 체제를 깨뜨리는 것으로, 또 더 이상 가난한 사람과 자연을 희생시켜서 사는 삶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아무 의식 없이 죽임과 죽음을 지향하는 삶에서 의식적으로 생명과 정의를 지향하는 삶에 이르는 것입니다.


c. 가해자가 자기 스스로 일으킨 피해를 없애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때, 오직 그때 가해자도 마침내 희생자들과의 새로운 친교, 정의롭기 때문에 새로운 친교의 관계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회복”(Wiedergutmachung)이라고 부릅니다. 비록 아무것도 다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 좋아질 수는 없지만,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피해자와 가해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해자를 죄의 권세와 죄책의 짐으로부터 해방하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가해자를 반드시 희생자의 면전에서 해방하십니다. 인간적으로 봤을 때 가해자에게 화해를 제안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희생자입니다. 하나님께서 희생자 편에 계시기 때문에 희생자들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신적인 권위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의 희생자와 가해자가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면, 그들은 함께 이 죽음의 세력을 만들어 낸 죽음의 혼돈을 없애버릴 수 있습니다. 희생자의 칭의는 가해자의 칭의에 앞서며, 그 둘은 이 세상을 더욱 정의로운 세상으로 만들어 갑니다. 이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의 통치, 새로운 창조, 생명의 부활이라고 부릅니다.


4. 최후의 심판에 대한 새로운 비전


우리는 최후의 심판에서 어떤 것을 기대합니까? 전통적으로는 보상과 형벌, 천국과 지옥, 착한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 악한 사람들은 저주를 받는 것을 생각합니다. 맞습니까? 시편 96편 말씀을 한 번 들어봅니다.


“하늘은 즐거워하고, 땅은 기뻐 외치며,

바다와 거기에 가득 찬 것들도 다 크게 외쳐라.

들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도 다 기뻐하며 뛰어라.

그러면 숲 속의 나무들도 모두 즐거이 노래할 것이다.

주님이 오실 것이니, 주님께서 땅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주님은 정의로 땅을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뭇 백성을 다스리실 것이다.”


여기서는 보상과 형벌에 대해서 전혀 얘기가 없습니다. 인간에 대한 언급은 마지막 줄에만 나오는데, 하나님의 심판은 그 인간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심은 땅입니다. 창세기 1장 24절에 나오는 것처럼 식물과 동물을 내는 땅입니다. 하나님이 땅을 심판하러 오실 때 중심이 되는 것은 자연의 치유입니다. 땅과 거기 사는 모든 피조물 사이의 모든 파괴된 관계가 바로 잡혀야 합니다. 여기서 “심판”은 고발과 변호와 선고가 있는 법정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오히려 바로 잡는 것, 일으켜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이 땅에 사는 모든 피조물에게 권리를 찾아주어, 모두가 서로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합니다. 그래서 하늘이 즐거워하고, 땅은 기뻐하며 숲의 나무들도 기쁨의 찬양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분이 “정의로 땅을 심판하시러 오실 때” 자연은 활짝 피어나 새로운 산물을 내고 하나님의 평화는 모든 피조물 공동체를 감싸게 됩니다. 모든 것은 썩지 않은 새로운 형체로 변하고 창조주의 영원한 생명력에 참여하니, 이는 그가 “오셔서” 그분의 피조 세계에 영원히 머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11장을 보면 하나님의 메시아는 “가난한 사람을 정의로 재판”할 뿐만 아니라(11:4) 이 땅과 거기 사는 모든 피조물에게 창조의 평화를 안겨 주십니다.(11:6-11) 그렇기 때문에 성탄의 이야기에서 천사는 땅과 사람을 분명하게 구분합니다. “땅에는 평화, 사람들에게는 호의!”(누가복음서 2:14) 천사들은 땅에는 평화를,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호의를 선포합니다.    바울 서신은 그리스도께서 희생자들의 권리를 찾아 주시고, 가해자들을 바로 잡아 주실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의 통일”(에베소서 1:10)과 “온 우주의 화해”(골로새서 1:20)를 이루실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이것은 우주적 그리스도론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정의로 땅을 심판하셔서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로운 땅”이 생겨날 것입니다(베드로후서 3:13).

이 희망은 혼란스러운 자연의 힘이 인간 세계에 일으킨 파괴, 즉 쓰나미, 사이클론, 지진과 같은 자연 재해, 전염병 등이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는 그런 파괴에 대한 대답입니다. 하나님은 자연 재해를 통해 인간의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가 오실 것이니, 그는 땅을 정의로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 세상을 심판하실 때는 땅의 심판과는 다른 모습으로 하실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날은 죄와 악과 죽음의 세력이 인간의 세상에 가져온 모든 쓰레기를 치우는 최후의 심판 날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악의 세상은 해체되고, 죽음의 제국은 끝장나고, 지옥은 파괴됩니다. 그분의 심판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세력에 대해서는 진멸의 No(“아니!”)이지만,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에게는 빛나는 Yes(“그래!”)입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오늘 여기서 죄의 희생자들의 권리를 찾아주고 죄의 가해자를 바로잡는 일로 시작된 것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통한 죄의 극복과 악으로부터의 구원을 지향합니다. 어떤 사람은 종으로 만들고 또 어떤 사람은 희생자로 만드는 힘, 하나님을 거역하는 세력을 하나님께서 파멸하실 것입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칭의가 일어날 때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칭의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에 대한 당신의 권리를 주장하시면서 죄와 죽음을 몰아내십니다. 죄와 죽음은 그분의 피조물에 대한 권리가 없습니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의 권리를 무시하는 “강자의 권리”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봅니다. 누가 재판관이 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신약성서에서 그 심판은 “인자의 날”입니다. 그런데 인자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것을 찾으러 오신 분입니다(누가복음서 19:10, 마태복음서 8:11). 잃어버린 것 가운데 그분이 찾지 못하는 것이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실 그리스도께서 보복하고 앙갚음하는 분으로 오실까요, 아니면 죄와 죽음과 지옥을 이기고 부활한 승리자로 오실까요?

요한계시록 1장 18절은 그분이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열쇠를 가지고 무엇을 하실까요? 분명히 뭔가 잠겨 있던 것을 활짝 여실 것입니다. 그분은 살아계신 분으로,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로 모든 죽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실 것입니다. 어떤 정의로 심판하실까요? 그분이 죄의 희생자와 가해자를 대할 때 쓰셨던 정의 이외에 다른 어떤 정의로 심판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아무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오실 심판관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입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의 심판자로 오시는 분은 이 세상의 고난을 몸소 겪으셨고 이 세상의 죄를 지셨던 분이라는 뜻입니다. 희생자의 권리를 지켜주시고 가해자를 바로 잡으시는 하나님의 정의가 승리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최후의 심판은 어떤 목적을 위한 것입니까? 우리의 전통은 보상과 형벌의 문제를 대대적으로 결산하는 날에 관해 이야기했고, 결국은 그것이 이 세상의 종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날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정의가 하늘이든 땅에서든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세력을 누르고 이기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 심판은 죄와 죽음에 기여하는 결산(Abrechnung)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에 기여하는 심판입니다. 심판은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 최종적인 것 바로 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말씀은 이것입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이 영원한 새 창조는 정의에 기초하여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정의는 승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후의 심판을 여러 이미지나 관념으로 묘사하면서도 오직 이 세상의 과거만을 볼 뿐 그 심판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을 보지 못한 것은 그리스도교 전통의 실수입니다.

최후의 심판과 모든 것의 새로운 창조는 하나님의 새로운 날 아침에 정의 태양이 떠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시편 96편에 나와 있는 것처럼, 땅이 기뻐 외치고 들판이 환호하며 나무들이 손뼉을 치며 노래한다면, 우리 인간도 하나님의 공의의 상량식(上梁式 Richtfest)을 고대하며 노래해야 할 것입니다.


“정의의 태양이여

 우리의 시대에 떠오르소서.”


1) 독일어 성서는 말라기 3:20


2)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사이에 있는 메소포타미아를 의미함


3) 마지막 사람이 불리하다는 뜻


출처는 싸이월드 복음주의 클럽(http://evangelical.cyworld.com)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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