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귀향'을 보기 전

조회 수 1504 추천 수 0 2016.03.02 09:3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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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이 지나갔다. 
어제 아침 아파트 스피커에서 태극기를 달자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집 안에 태극기가 언제부터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사라진 것이 그것 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마 애국심이란 것도 비슷하게 사라진 것 같다.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이나 삼일절의 태극기 달기를 통한 애국심의 고취 같은 것들이 동일한 메커니즘에서 유래한 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과거 항쟁의 기억이 반드시 현실의 투쟁 동력으로 전환되어 있는 것 또한 아니다. 
기억은 순수하지 않으며 그것은 과거가 아닌 현재를 기반으로 구성된다. 
삼일절의 기억은 민족의 항쟁을 통해 국가 간 대립의 현재적 애국심으로 전환되어 있기도 하다.


최근 '귀향'이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다.
보지는 않았다.
인터넷을 통해 영화의 줄거리 등을 살펴보았을 뿐이다.
가까운 시일에 볼 생각이지만 비인간적인 일본군인과 인간적인, 혹은 가련한 위안부 소녀라는 관계설정은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영화를 보게 만들 것 같다.

귀향.jpg

조선의 어린 소녀처럼 일본의 앳된 청년 또한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아들이고 연인이며 사랑과 같은 언어와 연결되어 있던 사람, 전쟁이 싫지만 강제로 끌려온 이들도 있을 것이고, 좀 더 적극적으로는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던 사회주의자 청년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박유하 교수의 이야기처럼 <제국의 위안부>에서 표현되듯이 한국의 위안부와 일본의 군인들 사이에 인간적인 유대관계 또한 있었을 것이다.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눌 수 없으며 선과 악으로 통칭할 수는 없는 상황과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식의 이야기는 박유하 교수와 동일한 이유에서 동일한 강도로 공격당할 표현들이다.


나는 박유하 교수의 민간동원이나 자발적 동원의 근거가 되는 사료들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것은 동원의 강제성을 증명하기 위해 제출된 다른 사료들과 동일한 비중에서 그러하다.
그것은 공평함 때문이 아니다. 
역사적 실증주의가 얼마나 무력한지는 논쟁이 도달하여 있는 강제성과 자발성의 실증적 상쇄과정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가능한 것은 좀 더 철저한 '사실'을 위해 끝이없는 실증의 여정을 계속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포기하고 이미 자리 잡아 있는 민족적 감정에 호소하는 길만 남아있을 뿐이다.


강제성과 자발성은 처음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들이다.
물론 모든 것이 구조적인 것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구조적인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것 또한 아니다. 
구조가 개인들에게 거침없이 작동되는 경우 강제는 무의식적 자발성을 통해 관철된다.
라캉처럼 이야기 한다면 구조와 같은 타자의 질서가 무의식을 통해 자발적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스톡홀름 신드롬에서 인질과 납치범의 유대감이나, 그런 상황에 처한 인질의 자발성은 그것의 구조적 문제를 떠나 심리적 범주에서만 해석되는 것을 가능하지 않게 한다.
그렇기에 '인간적인유대감' 같은 표현 그 자체에 대한 공격은 온당하지 않다.
당연히 그런 사태는 일어날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의 해석에 있다. 
많은 경우 잔인함은 비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이다. 
그것은 폭력적인 것만이 아니라 평화적인 것과 혼재되어 있다. 
인간적인 조건에서 탄생한 것이고 그것을 위해 강요되는 것들이다.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 적인 것을 대립시키는 것은 인간적인 것에 내재하며 작동하고 있는 잔인함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잔인함은 항상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것을 통해 나타난다고 믿게 만든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은 같은 메커니즘에서 유래한 것일 수 있다.


인간성 속에서 나타나는 잔인함은 흔히 이야기 하듯 인간적인 것 속에서 분리되고 추출되어 나타나는, 혹은 인간적인 것이 지나간 이후에 등장하며 시차적으로 작동하며 대비되거나 혹은 배신감이라는 것을 통해 체감되기에 훨씬 가혹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이기에 동일한 공간과 시간에서는 느낄 수조차 없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인간성속에 숨겨진 어떤 것이 아니라 포괄적 인간성이 어떤 것들과 만나며 만들어 내는 것 자체를 의미한다.


이런 것들이 영화 속에 담겨 있기를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영화보기가 두려운 것은 영화가 주는 아픔이나 슬픔을 견뎌야 하는 부담 보다는 상징화되고 실체화된 영상을 접하면서 느끼게 될 동시대적 자괴감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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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6.03.02 10:03:33
*.94.91.64

저도 저 영화를 볼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직 짬을 못냈습니다.

저 영화가 떡진 님이 언급하고 있는

그런 철학적 담론을 담아내지는 못했을 겁니다.

인터넷 상에 돌아다니는 영화 촌평을 들어보면요.

떡진 님이 한번 관람하고

본격 평을 한번 해주시면

영화 보는 제 안목도 좀 깊어지지 않을까 합니다.

어쨌든지 그 소녀들도 오늘과 같은 따뜻한 봄날을

그 지긋지긋한 상황에서도 경험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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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떡진머리

2016.03.02 11:38:09
*.237.98.48

목사님 영화를 꼭 보고 촌평을 날려보겠습니다. ^^

지긋지긋한 상황에서 봄을 맞기도 하겠지만 

대체로는 봄 자체가 지긋지긋 하게 느껴집니다.

많은 봄들이 추위를 벗어난 기지개를 켜지도 못한 상태에서 

아픔과 슬픔, 분노, 당혹감을 남겨둔채 지나가버립니다.

아마 그 날의 소녀들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리곤 또 그 상황에 젖어들어 버티고 살아갔을 것입니다.

슬픔은 억압 그 자체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것에 무력하거나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저항했거나 거부했다면 고통스러웠겠지만 슬프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필리버스터의 정국도 그렇게 지나갑니다.

그것을 반기며 좋아했지만 공존했던 불안과 조심성의 근원이 드러나며 

봄을 맞이하는 3월의 초입에 또 하나의 슬픔을 남깁니다.

마치 짜여져 있던 시나리오처럼 흘러갑니다.

좋아했던 행동들이 마치 시나리오에 놀아난 연기처럼 느껴집니다. 

분노가 만들어지지만 그 분노는 본래 우리를 향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들은 그런 존재라는 것을 또 다시 잊어버리고 있던 우리에 대해서...


요즘 독감이 엄청 유행합니다.

저도 얼마전 독일에 가자마자 독감을 알아 별로 다니지도 못하고 있다고 돌아왔습니다.

목사님도 건강에 유의하시기를 바랍니다. ^^

[레벨:12]staytrue

2016.03.02 11:17:37
*.222.164.212

왜 인간은 자발적으로 노예가되려는가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피를 흘리며 혁명을 성공해도 결국 또다른 왕권을 세워 지배받는 모순적인 욕구는

영화 내부자들 속 '어차피 대중은 개돼지입니다.' 라는 명제가 참이라는 생각이 드는 씁쓸함입니다. 


말씀하신 라캉대로라면 자아 자체가 사회, 구조라는 거울을 통해 굴절된 자아라서,

노예의 운명은 벗어나지 못할테고, 세상 어디를 보나 영화를 보며 느끼는 동시대적 자괴감은 여전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제 생각은 노예가 어차피 자발적 노예라면 그런 노예 연기가 지칠 때즘 알아서 멈추지 않을까 ... ㅋㅋ 하는 생각입니다.


ps)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다비아에서처럼 열심 신학공부하고, 수행하고 하는 모든 일들이 결국 모두 노예짓이고,이 노예짓을 열심히 함으로써 남들보다 조금 빨리 지쳐 노예짓을 스스로 그만두려는 노력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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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떡진머리

2016.03.02 11:58:43
*.237.98.48

스피노자는 네델란드의 제상 요한 드 비트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하자 칼뱅파의 선동을 통해 죽음에 이르는 것을 목격합니다. 대중들은 칼뱅파의 선동과 함께하며 공화정을 저버리고 예속을 위해 싸웁니다.

이 장면에서 그는 예속이란 주어진 본성을 억압하는 것이라며 타고난 삶을 부정하는 것, 바로 자기 자신에게 죽음을 선사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의 구원을 위한 것인 양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우고 한 사람의 허영을 위해 피와 목숨을 바치는 것을 수치가 아니라 최고의 영예라 믿는다." 

ㅎㅎㅎ 마치 요즘을 보는 것 같습니다. 

라캉을 종종 인용하지만 라캉의 전반적인 논조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조를 담론과 비담론의 이질적 복합체로 이해하고 그것으로 부터의 탈주 가능성을 제시하는 푸코나, 들뢰즈가 훨씬 매력적입니다. 

노예짓은 본성이 아니라는 스피노자의 말을 깊게 사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레벨:12]staytrue

2016.03.02 12:22:54
*.36.135.153

네 ^^
소위 후기에서 그렇다면 그런 구조는 어떻게 가능하냐는 식의 물음으로 부터 파생되는 말씀하신 사유들에 관심은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법.
목이 안마른 사람은 삶이 쉼이 될 수 있어 좋을 것 같습니다.

[레벨:13]석진혁

2016.03.02 17:28:42
*.77.9.71

가족과 함께 영화를 봤는데 좀 거시기 합니다. 썩 감동적이지도 않고  성노예문제를 재해석하는 담론도 없고

철학적이지도 않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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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떡진머리

2016.03.03 09:56:06
*.237.98.48

영화를 보셨군요.^^

저의 글이 영화를 보시는 많은 분들의 피로도를 높이지 않을까 고민됩니다. 

그냥 영화를 보는 능력이 필요한데...

그게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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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2016.03.02 17:50:17
*.201.249.31

박유하 교수가 주장하는 민간동원이나 자발동원의 근거가 있으나

그것을 요구한 것은 일본이고

식민지 조선인의 중간역할이 있었더라도

성노예의 당사자가 그 역할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다면 응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박교수가 근거로 삼는 것으로

일본이 동북아에 저지른 성노예 동원의 대세를 설명하기에는 난망입니다.

 

나치수용소에서 독일군과 유태여자의 러브가 표현되는 영화들이 가끔있지만

극히 일부이죠. 나머지는 어쩌라구요.  박교수가 예로 드는 위안부는 극소수이죠.

인간사에 있을 수 있는 경우이지만 그것으로 <제국의 위안부>를 설명할 수는 택도 없습니다.

지옥에서도 인간적 유대는 있을 겁니다.

 

슬픔과 고통을 나누셨는데 그것이 따로 가지않는다고 생각해요.

저항할 수 있으면 고통스러우나 슬피지않다고 하셨으나

꽃같은 인생이 짓밟힌 것이 슬픈 겁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과 폭력은 서로 유기적이어서

어느 한토막을 표현하는 것을 가치부족으로 여길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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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떡진머리

2016.03.03 01:03:32
*.237.98.48

하시는 말씀의 논점이 명확히 이해되지 않아 이런 댓글이 적합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본문의 글은 '강제성'과 '자발성'의 카테고리를 통해 위안부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의미없음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자발성은 전혀 자발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타자의 자발성일 뿐이고 강제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구조로 환원시킬 수는 없습니다. 

자발성이 구조화된 무의식적 주체의 행위라면 자발성이란 강제성과 구분되지 않기에 이 둘은 애당초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사실 지금 대립하고 있는 것은 다른 것들 입니다. 

강제성을 옹호하고자 하는 입장은  박유하 교수의 '자발성'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그 자발성이 연관된 다양한 관계들의 소거를 통해  만들어진 위안부 동원의 다양한 권력관계, 구조적 문제를 외면하거나 은폐하고 있는 것을 문제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관계를 소거시킨 자발성은 실체화된 공허한 말일 뿐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들을 구조적인 것으로 환원할 수는 없기에 자발성을 포함하는 모든 것에 대해 또한 강제적인 것으로만 환원하여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사건은 강제적임과 자발적임을 이야기 하기 이전에 그냥 그렇게 일어난 어떤 것일 뿐입니다.

강제와 자발의 언어는 그것이 관계하는 수 많은 것들을 떠나 언급되는 순간 실재계를 벗어나 상징계에 머무르게 됩니다. 

우리들은 쉽게 당시의 상황을 이미지로 떠올리고- 물론 이것은 수많은 사료들을 통해 뒷받침 됩니다.-그것을 통해 강제성과 자발성이란 언어를 선택하게 되지만 그 선택은 과거의 사실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늘의 떠올림과 해석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물론 과거 위안부 동원의 현장에서 이 언어를 선택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전히 그 상황은 다양한 시선을 통해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신체가 직접적으로 느끼는 어떤 것입니다.

그리고 슬픔은 그런 신체가 생산하는 어떤 감정을 이야기 합니다. 

고통은 슬픔과 짝을 이루기도 하지만 때로는 기쁨, 쾌락과 짝을 이루기도 합니다.

고통이 쾌락과 짝을 이루는 것을 우리는 '마조히즘'이라 부릅니다.  

물론 마조히즘은 우리에게 '변태'등과 연결된 부정적 언어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많은 경우 고통과 함께 있는 즐거움을 경험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더욱 그러합니다.

자크 라캉은 이런 쾌락을 '주이상스'라고 표현합니다.

좀 거칠기는 하지만 제가 사람들에게 종종 이것을 풀이하는 예로 지압을 이야기 합니다. 

지압은 몸에 고통과 쾌락을 동시에 주는 행위이며 그것을 통해 신체가 건강해 지는 과정입니다. 

고통스러운 상황을 다른 것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조건이 존재하고 그것이 관철된다면 슬픔의 감정은 전환된 즐거움이나 쾌락을 통해 소멸되게 됩니다.  


고통만 있다면 우리는 어떤 일을 행할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그래도 있다면 그것은 미래의 어떤 보상 때문일 것입니다.

그 속에 항상 기쁨이 있기에 우리는 기꺼이 어떤 일을 행합니다.

80년대의 운동도 그랬고, 지금의 여러 활동들도 그렇습니다.

이런 삶 만이 지금 행하고 있는 어떤 것을 보상심리 없이 행하게 됩니다.

희생, 숭고, 고통의 감수 같은 것은 그것의 보상의 요구하게 됩니다.

386이라 불리며 대거 정치권으로 이동한 이들이 바로 이런 '보상권 청구자들'이며 보상을 챙긴 자들 입니다.

고통과 함께하는 쾌락은 성찰이니 수양과 같은 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 우리의 이러한 본성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피노자가 이야기 했던 '코나투스', 즉 모든 존재가 자신을 지속하고 강화하기 위한 욕망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있기에 우리는 항상 기쁘게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과 폭력은 어떤 조건하에서만 유기적이 됩니다. 그것을 유기적으로 보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해석입니다.  

사물은 무위한 것이고 그것을 연결하는 의미들을 통해 유기적이 되거나 '기관 없는 신체'가 됩니다. 즉 유기적이지 않은 어떤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대충 저의 생각을 말씀드렸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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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웃음

2016.03.02 22:42:12
*.195.198.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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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수준높고 좋은글입니다.

저도 사실 '동주'와 '귀향'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나온 영화는 대부분 보았습니다.

다른 영화들은 다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주와 귀향을 보지 못한 제 마음의 불편함을 어디서 표현할 길이 없지만...

이글에 나타나 있네요...

어제는 영화 '사울의 아들'을 봤습니다. 그 영화도 누군가에게는 '귀향'이었겠지요..


저는 '동주'와 '귀향'이 저에게 짜증을 줄수 있을까봐 걱정입니다.

일방적으로 왜곡하고 편견을 같게하여 반일감정만 늘리려 한다면 저는 그에 대한 반동으로 튕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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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떡진머리

2016.03.03 01:49:10
*.237.98.48

ㅋㅋㅋ 반골기질이 출중하시군요. 

[레벨:12]staytrue

2016.03.06 14:15:26
*.143.57.209

그런데 참 .. 들뢰즈의 사유들을 많이 인용하시는 듯한데,
들뢰즈 사유와 다비아, 신학은 참 어색하지 않나요? ㅎㅎ
신화를 물리치는 일, 제 댓글에서 말씀하신 스피노자의 본성, 영혼의 동요를 극복하기위해 신이 아닌 자연이란 관념이 필요하고, 그것이 철학이 해야할 일이라고 말하는 들뢰즈의 사유와 신학이 어떻게 조우하는지, 또 여러 신학자들의 사유를 촉발하는 하나님 경험은 소위 사유의 이미지에 해당하려나요? 아무튼 그것은 어떻게 비판하고 자시고 할 수 없는 신성한 곧 신화적인 것이라 ... 잠깐 들어왔다 의문이 들어 댓글 남기고 떠납니다 ... 휘리릭 ~~ ㅋ

[레벨:1]개독박멸

2016.03.08 10:45:49
*.187.250.187

글쓴 꼬라지들 보소!!하여간 개독들이란 답없다!!그러니 니들이 개독소릴 듣는거야!!이것들아!!자발적으로 노예가 됐다는 논리좀 보소

이십할개독새기들아  박유하책이 진실이냐??이런 개븅쉰들아

박유하나 니네 개독년놈들이나  위안부할머님들 앞에가서 그럼 진실이 이러하다고 쳐말해봐   이것들아!!다른나라 기독은 참좋은데 한국의 개독교는 성추행성폭행금전갈취가 다반사니!!니들 개독이나 자정시킬 노력이나해!!등쉰들아 예수나 하나님이름에 먹칠하지말구

야!!니들은  귀향  쳐볼 생각하지마!!이것들아

이것들은 아마 일왕에게 충성맹세까지 한 년놈들일거야

그만 좃까시구요들!!니들 개독들의 입에 귀향이란 단어자체가 오르내리는것도 영화자체를 모욕하는거다

걍 니들은 가서 기독영화나 단체관람으로 쳐봐!!눈물 찔칠 짜고 그렇게해!!참!!박유하도 개독이신가요??그리고 하나만 물어보자

버젓히 살아계시고 여자로썬 치욕적인 삶을 사신 할머님들이 박유하나 니들개독이 말하는 자발적으로 매춘부가 되었다고 보는가!??살날 얼마  안남으신분들이??이것들이  어디서  지들이 경험하지도 않은 일들이 그 따위식으로 표현하냐??

개독들아 조옷까지마시구요!!집단히스테리나 부리지마시구 조용히 일요예배나 교회에서 지내고계세요들!!당신들이 나서봤자 개독들이 또 지랄봘광한다  생각들하니깐!!그리고 축알금 많ㅇㅣ 내세요들!!천국 가야하잖아!!ㅋㅋㅋ하여간 개독들이란 답없다!!


[레벨:7]물가의나무

2016.03.11 14:53:31
*.79.221.251

님이 대상으로 삼는 제가 바로 개독먹사인데요. 솔직히 그리고 비아냥이 아니라 진심으로,
욕을 먹고있는데 속은 후련하네요.~~~~^^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총을 기도합니다.
profile

[레벨:20]떡진머리

2016.03.20 00:09:32
*.237.98.48

역시 수준 높고 훌륭한 글입니다. ^^ 
미안해요 웃음님 글을 인용해서 ㅋㅋㅋ


고마워요. 

'개독박멸'님 덕에 많은 분들이 나의 글을 읽어주셨군요. 

나의 글이 뭐 같이 읽혀 엉뚱한데로 가듯이 

님의 글 또한 의도치 않은 곳으로 가버렸네요. 

[레벨:1]개독박멸

2016.03.08 10:56:10
*.187.250.187

그리고  뭔철학을 말해??등쉰들 많네 !!이 영화가 무슨 플라톤 이나 스피노자 철학을 논할영화냐?사실에 기반을 둔 그당시 그상황을 리얼리티하게 보여주는 영화고 그 억울하게 죽은 할머님들의위령영화야

왜??니들이 이단 사탄이라칭하는 토테니즘이 나와서 그러냐?

니들이 강제적으로 끌려갔다 생각해봐 등쉰들아

그래도 개철학 논할래??한 과 고통과 삶과죽음의 인생을 다룬영화야 이것들아!!에라이 개독들아!!

[레벨:12]staytrue

2016.03.11 10:33:18
*.222.164.212

읭? 잘못이해하셨기 때문에 가상의 상대를 향해 허공에 돌을 던지고 계신거에요... 

혹시, 자발적인 노예라는 표현이 제 댓글을 보시고 말하는 거라면, 

저는 위안부 할머니를 향해서 한 이야기가 절대 아니에용 ~~~ 

그렇다면 돌맞아 죽어야 겠지요 ...;; 어떻게 한국민으로써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나요 ..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대한민국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ㅎㅎ


그냥, 자발적인 노예라는 표현은 구조주의 담론과 위의 영화, 글쓴 떡진머리님의 글과 연결지어 본 제 생각 이전에 흔해빠진 견해입니다.


굳이, 노예에 대해 변을 달면, 우리모두가 노예죠 ... 죄의 노예고, 욕망의 노예고, 돈의 노예고 ... 머 그런거고, 그런 노예에서 해방시킨 분이 예수님이라는 거에요.... 


그러니, 노여워 하지 마시고, 다비아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공부해 보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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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향'을 보기 전 file [17] [레벨:20]떡진머리 2016-03-02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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