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인도8차 기꼬 공부 후기

조회 수 4809 추천 수 0 2009.06.21 07: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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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우리것만 아니다.

신약성서편을 배웠습니다. 이번 분량은 전번에는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다 읽어 오기도 만만치 않았죠. 그런데도 대단한 분은 역시 대단하게 떡하니 소화를 해서 공부에 임하는 모습이 고마왔습니다. 더구나 오늘은 인도에 공부하러 오신 화가후보생 자매님이 처음 참여한 터라 분위기가 새로웠습니다. 물론 갑자기 만난 식중독으로 인하여 맛있는 감자와 랏씨(냉수 요거트)를 제공만 하고 오지 못하신 조이님이나 생일로 인해 삶을 다시금 조용히 혼자서 반추하고 싶다는 러브님이 빠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꼬 8차공부는 정해진 길을 기억에 남게 진행이 되었습니다.

기억에 남을 이야기는 아무래도 기꼬에 쓰여진 내용보다는 진리 이야기가 전개되다 끝 무렵에 나온 전혀 생각지 않는 주제였습니다. 8주차 한다고 했지만 아직 서로가 인문학적 소양, 조직신학적인 공부가 입문도 들어가지 못한 일천한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라 해프닝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뤄진 이야기는 상당히 무게가 있는 이야기였지요.

이야기의 주제는 제목이 던져주는 것처럼 열려진 진리논쟁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사땨의 이야기인즉슨 기독교진리가 완성된 것이 아니다. 종말이 올 때까지 열려있다. 창조신앙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이 다른 종교에게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길, 진리에 이르는 길을 열어두셨다. 그때까지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진리를 두고 경쟁해야 한다. 이렇게 자신도 잘 알지도 못하는 무거운 주제를 들고 나왔다가 쁘리야님께 당장 반격을 당했지요. 그랬다면 우리의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기독교의 진리를 주장하고 있는 우리의 뿌리는 뭐냐? 무슬림이나 유대인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힌두교도들에게까지 진리의 문이 열려있다니 도대체 말이 안된다.

그러자 사땨는 깨닫는 만큼 이야기 했죠. 그것이 조직신학적으로 옳은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지옥에 내려가서까지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이다.(루비님은 아직도 여기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힘) 크로노스적으로 2천년전에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님이시지만 카이로스적으로 이 구원의 범위는 전우주적이다. 카이로스적이고 우주적인 이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은 힌두교도와 같은 이교도들에게도 여전히 제한되지 않고 열려있다고. 이때 루비님이 그렇다면 선교는 뭐하려고 하느냐? 당신은 선교를 어떻게 하고 있느냐? 아주 실제적인 질문을 했죠. 사땨왈, 이러한 구원은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자력으로 구원을 이루려고 하지 말라는 내용을 전한다고 했지요. 여전히 차근차근 풀어나가야 할 말이 많은데 너무 뭉툭한 이 말을 받아들일 듯 말듯한 애매한 표정이 루비님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구요.

그런데 더 재미있는 일이 있었지요. 쁘리야님은 계속 우리의 설 자리, 기독교 진리의 우월성, 즉 열려져 있지만 그래도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다른 종교나 이념들에 대해서 탁월한 우월성을 갖고 있는 기독교 진리가 이들과 종말의 그날까지 경쟁관계에 있다는 그 말에 의문을 표했지요. 선포하면 받아들이는 그런 관계지. 경쟁관계에 있다는 말이 무엇이냐고 도무지 말도 안된다고 그랬지요. 여기서 사땨가 불을 질렀지요. 그런 도그마적인 자세를 가져서는 다른 종교와 대화가 안된다구요. 그것이 도그마인 것은 우리가 알고 있다는 기독교 진리 세계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상태에서, 문자적으로 알고만 있는 상태에서 다른 종교를 재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랬죠. 그러자 쁘리야님은 ‘그것은 곧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공부하는 이런 모습은 또 다른 도그마가 아닙니까’라고 조금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를 했구요. 그 말에 사땨는 ‘제가 뭐 그렇게 이 길만이 그 길이라고 하지 않았잖습니까?’ 스르르 꼬리를 내렸지요. 그 참에 전화가 와서 타오르던 불이 꺼져 버려서 좀 아쉽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했습니다. 사땨는 어 뜨거라 하면서 재빨리 신약 뒷 부분을 정리하고 끝을 맺었지요.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선취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 진리가 가져다주는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며 사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 풍성함 자유와 평화의 세계를 누리고 산다면 그것이 곧 선교죠. 항상 웃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남들이 고통 자체로 반응할 뿐인 그 상황에서 부활의 영으로 인해 희락과 화평을 가질 수 있는 모습을 보고 그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이것이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으면 그것이 선교지요. 그럴 힘도 없고 그런 세계가 있는 것조차 희미한 가운데서는 차라리 나의 구원에 천착하는 것이 훨씬 더 났습니다.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서 받은 교리가 주는 압박감에 눌려 복음, 즉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에 전혀 감이 없으면서도 머리로만 이해하고 입으로만 그것을 선포하는 자신에 은혜를 받아 사는 그런 신자는 위험천만입니다.  지렁이처럼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그냥 엉금엉금 기어가면서 생명의 영이 허락하시는 은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나의 리얼리티일진대 어떻게 영생과 구원과 부활과 하나님 나라와 종말에 대해서 겁도 없이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기독교에 대해서 내가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잘 다듬어진 교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나는 복음을 가진 자, 그러니 이 복음을 전해야 할 자, 이 말을 영접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며 영접하지 않는 자는 멸망을 받을 것이야. 이렇듯 자기도 빠져나오기 힘든 교리를 들고 닫힌 마음으로 접근을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 역사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를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뭐하란 말이냐? 어쩌란 말이냐? 돈으로도, 지식으로도 힘으로도 들어가지 못하는 그 하나님의 나라를 앙망하며 모든 촉각을 그 쪽으로 향하여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길이 성서속에 있으니 성서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인문학적 공부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하며 짬이 나는 대로 조직신학 책읽기도 지속해야 하겠지요. 사용하지 않는 근육이 아프더라도 성숙을 위한 아픔을 감내해야 하겠지요. 건승바랍니다.

  1. [2014/02/11] 서문 by 사띠아 (2422) *4
  2. [2012/05/26] 80년 오월, 스므살 예수를 아십니까? -오마이 뉴스 by 떡진머리 (2549) *2
  3. [2009/07/01] 38강 녹취록 - 제9장 부활 (5) by 사띠아 (5359)
  4. [2009/06/20] 37강 녹취록 - 제9장 부활 (4) by 사띠아 (4793)
  5. [2009/06/20] 36강 녹취록 - 제9장 부활(3) by 사띠아 (4726)

[레벨:7]늘오늘

2009.06.21 07:33:54
*.178.197.197

 

박진감 넘치는 주제이기도 하고,

각자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는 기풍이 참으로 소중해 보입니다.


한 사람의 내면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일어나고 끝없이 변화해가는 것을 감안하면,

여러 사람의 의견이 일시적으로 일치된다는 것이 무에 그리 중요할까요.


오히려 그렇게 의견을 교환하는 행위 자체, 그것을 계기로 진리를 다시 묻게 되는 것으로,

살아 꿈틀대는 신학함의 현장, 우리네 삶의 진지한 아름다움, 소중한 은총의 시간, ,,,

ㅋㅋ^^ 암튼, 제가 기대하는 가장 다비아다운 모습입니다.

부럽고 감사합니다. 사띠야 선교사님~ ^^*


profile

[레벨:26]사띠아

2009.06.21 08:25:48
*.163.196.143

늘오늘님 답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학함의 현장이라구요.
갑자기 우쭐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참석하시는 분들이 모두 진지하시죠.
진리에 대해 갈급해 하시는 분들이기도 하구요.
다만 제가 많이 부족해서 잘 섬기지 못하는 점이
늘 자괴감의 앙금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매순간 한계죠.
그러나 그 한계의 벼랑에 설 때에라야만 열리는 세계
그 세계가 주는 매력때문에
이런 토론에 정말 익숙하지 않지만
그래도 한번 거치고 나면 얻는 것이 정말 많습니다.

그리고 다비아 선배님들이 걸어가신 길을 통해서도 많이 배웁니다.
가끔 다비아속에서만 머물기에는
너무 답답해 하시는 늘오늘님의 글을 통해서도 많이 배우구요.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 다비안은 늘오늘님과 조금 다른 듯하기도 하군요.

진리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갖는 것에 대해 동의를 하지만
저로서는 정목사님의 열어 가시는 세계에 아직 많이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명검 하나 들려 주시면서 하산해도 좋다는 사인이 올때까지
조직신학劒끝에 이는 검강의 묘리를 깨닫기 전에는
물긷고 장작패고 밥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저 열심히 배움의 길을 가려고 합니다.

조금 구식티가 나기는 하지만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란 말이
여러가지 배움의 길(구슬치기, 딱지치기, 노가다, 납땜하기,
오실로스코프등 전자기기 다루기, 오토바이, 운전, 지게차,
컴퓨터 조립, 뽀샵, 엑셀, 비쥬얼베이직, 복식부기, 리서치기법...)을
걸어온 저에게는 거의 절대 진리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정목사님의 많은 것이 가감없이 담긴 기꼬 공부는
수십번을 읽어도 아직 더 읽어야 할 정도로 담긴 내용이 엄청납니다.
아직도 기가 질리고 있습니다.
얼마의 세월이 지나야 이 분이 스쳐 지나가듯이 보이는
그 현기를 따라 잡을 수 있을까요?
이런 자세를 갖고
하산의 그날까지 꾸준히 배워 나가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다비안입니다.

아내는 이런 저가 너무 외골수로 빠지는 것이 아닌가 염려를 합니다.
주유소 습격사건의 명대사같은
한 놈만 죽어라고 잡는 아니 실수, 하나만 보는 그런 삶을 살아왔거든요.
뭔가 하나 옳다고 생각이 되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그냥 무소처럼 우직하게 길을 걸어왔습니다.

늘오늘님의 가장 다비안 답다는 말씀에 자극을 받아
제가 생각하는 다비안에 대해 써보았습니다.

좋은 다비안님들 가운데서 사시는 늘오늘님이 부럽습니다.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7]희망봉

2009.06.21 10:47:35
*.109.66.56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스스로에게 놓여진 장소 시간 여건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시는 모습이
오늘은 깊은 겸손의 덕으로
제 마음에 다가 옵니다
잘 읽고 있는데
이 대목에서 저를 흥분시키네요

"진리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갖는 것에 대해 동의를 하지만
저로서는 정목사님의 열어 가시는 세계에 아직 많이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명검 하나 들려 주시면서 하산해도 좋다는 사인이 올때까지
조직신학劒끝에 이는 검강의 묘리를 깨닫기 전에는
물긷고 장작패고 밥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저 열심히 배움의 길을 가려고 합니다."

이미 명검 받으실 날이 도래한 것 같은데
사띠아님이 명검을 받게 되는 날
꽃다발은 제가 준비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행복한 주일 되시길~~^^*
profile

[레벨:26]사띠아

2009.06.21 12:29:41
*.163.196.143

그 날이 오면
사띠아가 명검을 받는 그날이 오면
성서 신구약 66권 1189장 31173절이
저마다의 삶의 자리를 들고 일어나는 모습이 보일 것입니다.
사띠아는 그들과 더불어 칼 춤을 출것입니다.
카일라시(에베레스트)산도 덩달아 일어나 더덩실 춤을 추고
갠지스강물도 따라 용솟음칠 것이외다.

아 그날이 이 머리 백발이 되기전에
인도의 더위에 숨막혀 숨거둘 그날 전에 
와 주기만 할량이면
희망봉님 주신 꽃 다발 가슴에 안고
고적한 저 공원 한 밤중이라도
어허 두둥실 밤새도록 춤이라도 출 것입니다.

그리고 미련없이
다비아산을 훌훌 날아가듯 내려올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새벽마다 샘터에서 샘물 길어오고
판할아버지의 사도신경 근육비틀기 심법도 비명없이 견뎌야겠죠.

그러나 아직은 아닌 듯합니다.
내 갈길 멀고 밤은 깊기만 합니다.

[레벨:18]눈꽃

2009.06.21 12:01:34
*.187.19.193

사티아님의 인도 <기꼬>공부모임 후기는 제에게 신선한 자극입니다

다비아를 통해서 백태가 낀 눈이 열려지듯 새로움에 눈뜬 이 희열이 내 삶을 추동시켜
나가고 근본주의에 물든 성서관에 입각한 교육을 받아오며 답답해 죽을 지경이였던
나의 신앙 여정속에서 이제 자유로움의 맛을 느끼면서 ...
가열차게 신앙에 필수인 신학을 공부하면서 배움의 길이 고통만이 아니라 희열도 있다는 것
새삼 느낍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할때는 당장 이공부가 대체 내게 무슨 필요람 수학  미술 음악 등 이론을 배울때 느끼는 것들이 살아가면서 그 필요성과 효용성을 느끼지만, 성서나 신학공부는 과정속에서 체험합니다.
원래부터 독서를 좋아했지만 , 다비아를 만난 이후 정말 읽어야 할, 아니 읽고싶은 책이 너무 많아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냥 흘려 보냈던 시간들이 너무 아깝지만 그래도 감사하지요 이제도 시간은 있으니......

신학마당 온라인강의실에 < 135번 신학의 철학적 착상과 그 영향 >편을 읽고.
"철학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어렵다 골치 아프다 지루하다 난해하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은데 나 역시 매한가지"라고 댓글을 달았고  정목사님은 "<신학과 철학> 과목에는 눈을 주지 마세요.골치만 아프거든요........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뭔가를 얻을 수는 있겠지요 "라고 답해 주셨지요
요즈음 칼바르트의 신학묵상과 함께 키에르케고르 ,폴틸리히, <폴틸리히와 칼바르트의대화>를 읽으며 다시 위의 신학마당 글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읽어보았는데....
넘 재미있고 쏙쏙 들어오는게ㅎ  ㅎㅎ.emoticon

인도의 <기꼬>공부모임 소식과 더불어 인도인들의 삶의 모습도 기대 합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웃음을 잃지 않으시기에 "너는 왜 웃니? " 라는 물음을 갖게 하시는
사티아님!
건승을 빌며~~~
요즘 제가 너무나도 공감하는 구상 선생님의 시 한편을 올립니다
 
<말씀의 실상>
      
      영혼의 눈에 끼었던 / 무명의 백태가 벗겨지며 / 나를 에워싼 만유일체가 /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노상 무심히 보아오던 / 손가락이 열 개인 것도   / 이적에나 접하듯 / 새삼
       놀라웁고/
       창 밖 울타리 한구석 / 새로피는 개나리꽃도 / 부활의 시범을 보듯 / 사뭇
       황홀합니다./
       창창한 우주, 허막의 바다에 /  모래알보다도 작은 내가 / 말씀의 신령한 그 은혜로/
       이렇게 오물거리고 있음을 / 상상도아니요, 상징도 아닌 / 실상으로 깨닫습니다.

profile

[레벨:38]클라라

2009.06.21 12:45:36
*.234.35.112

"요즘 눈꽃님께서 존재의 신비에 눈을 뜨셨군요. 네, 좋습니다!"
 하하, 이거 목사님 버젼이어요.^^
정말 장난 아니시네요.
눈꽃님, 저 이런 말씀 드리면 좀 거시기 할라나요?
꼭 늦바람 나신 것  같어요...헤헤

앗, 구상선생님이시군요!!
아, 그리운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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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사띠아

2009.06.21 12:47:08
*.163.196.143

눈꽃님.
구상시인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이의 감격을 너무나도 잘 묘사해 두었군요.
깨닫고 놀라웁고 황홀한 그 모습에 대한 감격이
이 시 한편으로 다시 새롭습니다.

감사합니다.

머리에 쥐가 나고 졸리는 책들을 어떻게 그렇게 신명나게 읽어 내려가시는 지
그저 부럽기만 합니다.

기꼬로 한번 오리엔테이션이 되어 있으니
어떤 책을 읽어도 그렇게 낯설지 않고 딴나라 이야기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요?
또 가끔 가다 정말 가끔 가다 이해되는 내용들이 풀어져 나오면 저절로 신이 나기도 하구요.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삶의 원리를 풀어낼 수 있지?
선배들의 영성의 길을 따라 가면서 나오는 감탄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거목사이를 걷다보면 저절로 키가 커지는 느낌을 받듯
거듭 감탄을 하면서 그들의 사유의 궤적을 더듬다 보면 구름에 달가듯
그렇게 시나브로 영성에 눈을 떠가는 자신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구요.
그래서 바르트의 책도 읽고
몰트만의 책도 읽어야 하는가 봅니다.

그래도 저는 아직 기꼬를 손에서 놓치를 못합니다.
기독교의 전부가 거기에 들어있는 듯하여서요.
까마귀님이 거의 다 잡아내신 오류 탈자외에 것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구요. ^*^
하루하루 세월이 흘러가는 사이에
아장아장 걸음하는 사이 자라난 아기처럼
그렇게 자라나는 자신을 지켜 보는 것도 사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희락인 모양입니다.

좋은 주일 되세요.

profile

[레벨:29]유니스

2009.06.21 19:25:30
*.217.40.115

사띠야님~~
인도 날씨의 열기와 공부의 열기로 후끈하십니다.
꼭지글로 보니 사띠야님의 공부 인도에 능력이 있으십니다요.

저는 도그마로 굳어지고 가물은 바닥을 딛고 있다가
이 곳에서 유영을 하니 얼마나 시원한지요.
나를 담글 수 있는 물,
내가 모르는 깊이가 있는 물,
그 끝을 모르는 물이
하나님의 이 때에, 나의 이 때에 주어졌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하산이요? 
계속 등산하는 길만 있어보입니다.
라라님의 권장도서 리스트를 보고 한숨은 나오지만
오히려 안심이 될 지경입니다.
아직 가야할 길이 머~~~얼다는 것은 갈 길이 있다는 거잖아요.
인도 기꼬반 아쟈~~~
인도반을 인도하시는 사띠야님께 주님의 은총이... 
profile

[레벨:38]클라라

2009.06.21 22:48:16
*.234.35.112

정정합니다!!
라라의 권장도서가 아니라 <정용섭 목사님 추천도서>랍니다^^
저는 은제쯤이나, 권장도서목록, 이런거 맹글어 볼 수 있을까여?
저도 사티야님 맨치로 우선은 장작나르는 일에나 힘써 볼라구요~~^^

유니스님, 믿어 지실라나요?
사실 제가 두어 주쯤 요런 일 해 봤답니다.
한겨울에 산사에 갖혀서요. 그때 노스님께 배운게 참 많답니다.
사티야님 글을 읽다가  익숙한 단어들이 나와서 그 때 생각이 살짝 났습니다.
그리고 하나 덧 붙여보고 싶은 말은.. 도제네요. 도제..
요즘 목사님의 말씀 들으면서, 제가 참 많이 빙 둘러 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인가봐요.
profile

[레벨:26]사띠아

2009.06.22 10:40:54
*.163.196.143

유니스님. 제일약국의 꼬맹이들은 여전히 잘 있지요?
반갑습니다.
격려도 감사하구요.
사건과 사물의 깊은 곳을 보시는 유니스님의 내공에 비하면
아직은 여러면에서 일천하기 그지없는 자신이 보여져서
감히 유니스님의 글에 댓글 달기가 만만치 않더라구요.
그 흐름 따라잡기가 만만치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구요.

가야할 길 함께 가는 도반님들이 많아서 좋습니다.
기꼬반을 이끌어가는 것도 좋지만
문득문득 다가오는 세계를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는
영적인 감수성이 늘 시퍼렇게 살아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profile

[레벨:14]저별과 달

2009.06.21 22:18:40
*.208.130.31

사띠아 님의 이런 평신도 공부의 자리가 부러운 1人 입니다.
저희 교회 평신도 공부는 교회에서 주는 교리적 교재를  달달달  반복 학습하는  형태이라
요즘은  구역 모임  빠진지가 꽤 오래 되었습니다.

저도 요즘은 다른 책 보다는 기꼬 한권을 붙잡고  밑줄  쫙쫙 그어가며  따라가고 있습니다. 
유럽 신학자들의 책들은  어렵기도 하지만
정목사님의  강의가 이런 신학자들보다  더 알기 쉽게 새로운 지평의 길을
열어 주는것 같습니다.
인도의 쁘리야 님을 떠올리니 꼭 예전에  제 모습을 보는것 같기두 합니다.
그렇다고 쁘리야 님의 신앙을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의 어느 신학자의 글에 구원에 관한 얘기를 잠깐 빌리자면..
불신자는 죽어서  내세가 없다고  하더군요..
불신자가 죽으면  그 영혼은 그냥 소멸되어 사라지는 것으로 끝이 난다고 하더군요.(계시록 20장9절에 근거)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 꺼지지 않는 불 유황못에는 마귀, 거짓 선지자,  적 그리스도, 이 세부류  악의
삼위 일체만이 들어가는 곳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구 성도는 죽어서도 내세를 보장 받고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간다고 하더군요
이런 글을 보면  주위 사람들에게 전도 하고픈 마음도 생겨 나기도 해서요^^  
  
   
저도 걍 근본주의 신자였는데  어느 순간 부터인가  정 목사님의 가르침에 귀가 열리기 시작하더군요..
저는 한국에서 성서를 도구화해서  신자들을 세뇌 시키고 있는  목사님들보다는
정 목사님의 가르침이 훨씬 솔직하고 진솔하다는 것을 어느 순간 알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더  알고 싶고  궁금증이 유발되어 질문 하고 싶은  내용들도  더러  있지만은 
새로운 내용들을 자꾸 따라 갈려 하니 질문할 시간조차 잘 생겨나질 않는군요.. 
한가지 제 손에 잡힐려는 것은 정 목사님도 예전에는 보통 한국교회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 않나 싶기도 하면서  어느 순간엔가  누군가의 가르침에 의해서 turn 하는 계기가
되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 순간부터 목사님은 거룩한 도박에 운명을 맡긴것 같구요.(ㅎ 이게 맞는 표현인가 모르겠네)
좌우지간  기꼬를 읽어면서  목사님이 하시는 신학에 점점 저도 침잠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구요..
저같은 평신도들이 알아 듣기 쉽게  강의해 주셔서 고맙구요..
그리구 시간이 허락되면 대구 모임 같은데 가서 직접 강의를 듣고 싶기도 하네요.. 
좌우지간 저는 정 목사님의 가르침에  늦게 탄력이 붙은 상태라 지금부터 부지런히 따라 가고저 합니다..
기꼬를 보니 사띠아 님이 목사님의 강의를 녹취하여 책으로 만들어진 수고가  더욱 감사하게 느껴 지는군요..
사띠아님의  인도에서의  기꼬 공부에  좋은 열매가 맺어 지기를 기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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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2009.06.21 23:12:47
*.217.40.115

일전에 토론방에서 별달님의 답글을 보면서
드디어 별달님이 변심하시는가벼...ㄷㄷㄷㄷ...했었습니다.
사실 다른 신앙관을 악착같이 정목사님께 물어오시고
거기에 답하시는 목사님을 보며 두분 다 대단하시다고 생각했습지요.
별달님의 애증(?)이 교차하는 다비아 생활을 보던 1人으로서
계속되는 탄력과 가속도가 붙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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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사띠아

2009.06.22 10:56:03
*.163.196.143

저별과달님이 부러워하실 것 까지는 없는 것 같아요.
저도 잘 모르는 것 보이라 증명하라
그렇지 않으면 이 공부 왜하냐는 반복되는 요구에
거의 손을 든 상태이거든요.
그저 공부 좀 더해야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습니다.

위에 잠간 언급하신 어느 신학자님의 의견이
당장 뭔가 잡히고 그럴 듯하고
또  우리의 정서에 합치가 되는 듯도 하지만
그것이 문자 도구주의에 집착하여
살리는 영에 반하여 나온 사상이다.
그래서 따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라는 감은 생겨나는 군요.

늘 하는 이야기지만 제가 기꼬를 녹취하기는 해서
목사님의 함자밑에 덩달아 무임승차하는 영광을 누리기는 했지만
그것을 읽을 수 있게 제목을 다신 무위님의 수고가 더 크시답니다.

기꼬를 손에 들고
인도와 인도사람과 그리고 그 인도인을 선교하고자 하는 사람들
그리고 저 자신을 보니 그저 암담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다시 눈을 돌려보니 제가 할 일이 아니더군요.
길을 열어 주시는 대로 그저 묵묵히 가면 되더군요.

다시 평신도의 한 주가 시작되는 아침입니다.
하루 12시간을 보내야할 사무실에서 열려질 일상의 영성 도야를 위해
이야압~! 기합을 넣어봅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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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9.06.22 22:30:55
*.139.165.36

와, 꼭지글도 그렇지만 대글들이 흥미진진하군요.
나 스스로 다시 <기꼬>를 읽어보면
얼굴 붉어지는 대목들이 적지 않게 눈에 뜨이는데요
그래도 전체적으로 도움이 되는 분들이 있다 하니
이 강의와 책만들기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신 분들에게 감사한 생각이 다시 듭니다.
저달 님의 간증(?)이 나를 자꾸 놀라게 합니다.
몇 달 사이에 어떻게 저렇게 생각의 틀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인지
아직도 긴가민가 합니다.
사실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거든요.
성령의 도움이라고 할 밖에는 다른 설명의 길이 없군요.
위의 대글들에 다 녹아 있지만
우리는 '어떤 힘' 앞에서 놀라고 있는 중이랍니다.
지난 오랜 역사에서 신앙의 선배들이 흘깃 보았던,
모세의 경우에는 그 등만 보았던,
불꽃이기도 하고 바람이기도 하고,
어둠이기도 하고 빛이신,
더 근본적으로 부활 생명인,
역사를 초월하면서도 역사에 내재한,
궁극적으로 종말에 그 실체를 온전히 드러내실 그 분의 현실성을
조금씩 느끼는 중인 거지요.
모두들 좋은 한 주 살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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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2009.06.23 00:18:46
*.208.130.31

정 목사님, 그동안 제가  목사님의 가르침을 따라 갈려고 하긴 보다는
저 자신이 알고 있던 조금 체험한 우물안 신앙적 경험의 울타리에 갇혀  자꾸 목사님께  반론만 제기하다가
시간을 많이 소진한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말씀대로 힘을 좀 빼고 살았어야 하는데요..
잠시 다비아 출입을 좀 자제하고 멀리서 바라 봤더니 어느날 부터 목사님의
가르침이 귀에 들어오고  목사님이 왜 기존 목사님들과 다른 방향의 목회를 하시는지
이제야 조금씩 이해가 되어 가고 있어요..
저는 제가 경험하고, 제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전부이고  저에게 가르쳐준 목사님들이
바른 목사님들인줄 알았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날에 목사님과 다비아 필진들께 힘들고 귀찮게 물어보고 따지고 한점 참으로 송구스럽습니다.
당시로서는 제가 알고. 경험한 신앙이 참 진리인줄  한 행동들이니 부디  양해해 주시고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또한 무엇보다 감사 한건  정 목사님과 다비아 필진 목사님들과,  회원 분들이 저를 이해해 주시고 
형제와 같이 대해 주시니 참으로 감사 합니다.
 다비아에서 앞으로도  더욱 많은  가르침과, 좋은 교제를 기대하며 구도에 정진해볼까 합니다 ^^ 
    

[레벨:1]MonAmour

2009.06.24 17:26:56
*.160.132.218


쁘리야입니다.
도그마적으로 Naive하게 신앙생활을 해왔던...

지난주 모임이 뜨거웠다면... 그것은 저의 Hot Temper가 철철 뭍어나는 논쟁 방식탓입니다.
주로... 펄펄 뛰면서(?) 목힘줄 솟구쳐가며... 따지고 드는게 저 쁘리야 인것 같습니다. 아니 입니다.
(이런 제 태도에 누구는 흉한꼴 볼까 무서워서 많이 망설이셨다고 그랬습니다.)

지난주 제가 천착했던 Point는...
"진리를 두고 서로가(타 종교들) 경쟁하며 나아간다" 는 것에서...
구원이 우주적이다는 것에는 의문이 없습니다.
종말까지 열려진 구원안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에 관한 것이엇습니다.

제가 타 종교인과 하나님을 믿는 나.
관계성안의 우리 였습니다.

사띠야님의 글 제목처럼... 당연히 구원이 우리만의 것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제가 타종교에 대해서 바라보는 관점은 사띠야 님께서 표현하신것 처럼 "우월성"이 아니라...
"다름"이라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닫혀진 우월성이 아닌....다름으로 보고 있는데...

사띠야 님이 제기하셨던 진리를 두고 종말까지...경쟁해 간다 할때에...
그 경쟁에서 각각 서있는 지평이 다르겠죠?
기독교 이스람교 힌두교 유대교 불교... etc
그 안에서 나는 기독교위에 서 있는 것이고요...
열림을 가지고 진리논쟁을 해가거나 경쟁해 가거나... 할때....
나는 어떻게 시작을 할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점에서 선교는 무엇하러 하느냐 고 질문하셨던 루비님과 약간 비슷하게...
선교를 해야한다 말아야한다... 는 접어두고...
그럼 선교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과도 맥을 같이 할 수 있겠어요.
내가...믿는 것... 내 믿음의 실체와 다른 것들.... 즉 타종교...와 관계성 문제 이겠어요.
내가 믿는 것이 우월하다 이것뿐이다가... 아니라....
내가 믿는 것과 다른것이 맞닥드릴때...
그것이 알라 일때, 부처일때, 비슈누고, 시바고 할때,
그럼 나는 뭐라 할꺼냔거죠? 그래... 알라도 맞다?
점점 더 정리가 안되서... 이해가 되실지...

저는 그냥 내가 서있는 이자리... 이 신앙... 이 믿음으로....
어떻게 관계를 지어갈지가... 모르겠을 뿐인겁니다. 망설여지고 고민되는 것이예요.
자칫 잘못하면... 사띠야 님이 말씀하신대로.... 진리의 세계를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문자적으로만 알고 다른 종교를 재단하는 그런 도그마적인 것이 되거나.... 아니면..... 모두의 신은 결국하나다...라는 식의.... 범신론이라고 그러나요 이걸...
알라라고 부르지만 그게 하나님이고 부처라고 하지만 그게 하나님이고...
(내가 아는 것은 하나님이므로.... )
그러니... 열심히 그 식으로 살아도 된다... 식이랄까?

즉 나의 인식...? 출발점?  뭐라그래야 하나요 이걸....

여튼 저는 8차 기꼬 모임의 '열려진 진리'논쟁에서 이 부분이 모호했던 겁니다.
여전히 그렇고요...
그리고... 제가 " 그렇다면 우리 모임도 도그마적인것이 아니냐"고 제기하였던 것은....
도그마적 태도라는 측면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예요.
교회에서 교리적으로 성서를 배우듯....
모임에서 충분한 것들이 풀어지지 못한 상태로....
맞는 것 같은 말들로 어물적 넘어가버릴때... 이것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그런갑다....
그런거야... 그런것 같은데.... 왜 아무도 다른것을 얘기 하지 않았고... 그럼 안되거나... 안해도 되거나....
라는 식으로.... 인식이 되어진다면... 기꼬도 또다른  형식의 도그마가 되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에서...
했던 이야기 입니다.
물론 이부분은 서로의 신앙의 수위차... 진리의 세계에 얼마나 들어가 있느냐... 하는 것에서 차이도 있겠습니다.
일천한 저의 상태로는 그랬다는 것이죠....

아... 시간이 많지 않아서...
이만 접어야 하겠습니다.

요며칠 저를 많이 붙들던 시가 있어서 붙이며 마무리 합니다.

       뼈아픈 후회

                                      황지우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이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페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서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나의 희생, 나의 자기 부정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알을 넣어주는 바람 뿐


profile

[레벨:26]사띠아

2009.06.25 10:01:45
*.163.202.99

6.25 아침입니다.
결자해지라. 인도에서 일어난 일이니 인도에서 먼저 이야기를 해야할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확실하게 이 종교문화다원적인 인도에서 기독교인으로서 확실한 스탠스를 유지해야하겠지요.

다름의 관계라고 말씀하시니 훨씬 듣기 편하네요.
다름으로 접근을 하면 그들의 삶의 자리가 눈에 들어오겠지요.
그러면 진리논쟁에서 다름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된다는 그런 의미는 아니겠지요.
서로 잘못을 일러바치는 토토와 끼끼에게
니 말도 옳고 너말도 옳다는  엄마의 말이 되어서는 안되겠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 스탠스는 위의 꼭지글에 설명을 드렸다시피
나는 나의 생명이, 구원이 나로부터 나오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
그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 예수로 인간의 역사속으로 들어오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인간 예수'란 창으로 그 하나님, 생명, 하나님의 나라를 인식하고
그렇게 열려지는 세계를 누리며 삽니다.
이것이 나의 스탠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살아가는 이들과 나는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가?

선교훈련 받을때 가장 먼저 대했던 낯선 말, '문화상황화'가 생각이 납니다.
근본주의적 시각으로
보리수앞에 프라사드(공물)을 바치고
아침마다 떠오르는 해를 보고 깊이 절을 하는 힌두들을 보면 열불이 터지죠.
어이구 저 우상덩어리, 무지몽매한 중생.
어리석다. 우짜면 좋노? 사랑해야지.
나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신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지.
그 사랑으로 다가가는데 핍박하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신약의 성도들이 당했던 고난과 같아 보입니다.
진정한 기독교인들의 세상을 향한 스탠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묘한 다름아닌 틀림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는 도그마에 자기들의 바램, 욕망을 덧붙여
예수님이 진작 전하고자 하신 그 복음을 놓쳐 버리고 있는거죠.
예수님이 첫 메시지, 그리고 가장 힘쓰셨던 것이 무엇일까요?
복음서 기자들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천국 비유를 통해서 하늘나라를 가르치셨죠.
기독교가 그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자 하시던 예수님을
제대로 인식하고 실천하며 살았다면
이 세상에 생명을 나누는 삶을 살았다면 결코 현재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의 스탠스에 대해 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예수와 예수의 복음이 아닌 도그마에 아니라고 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익숙해져 있는 탓에
아니 그 도그마에 편승하여 내 자신을 확장하려는 본능이
자꾸만 옆 사람의 스탠스를 곁눈질하거나 평가하려고 합니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이들을 선교하러 왔기 때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구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요?

그런 관심 그 사람들이 좋아할까요? 관심끄세요. 너나 잘 하세요 일겁니다.
기독교의 선교는, 제가 이해하기로도 빛과 소금입니다.
그러나 도그마적이 아닌 삶 그 자체라고 봅니다.
조금 진부하지만 좀 더 이야기하죠.
빛은 존재 자체만으로 주변을 밝게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것을 비춤으로 알게 하여 진리가 무엇인가를 알게합니다.
소금은 존재 자체만으로 사람들속에 녹아들어 생명을 주고 화목을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자기 구원에 천착하라고 이야기도 했던거구요.

이야기를 하다보니 말투가 이웃에 대해 전혀 모르쇠로 살아가라는 뜻으로 들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건 아니죠. 이웃 사랑의 방식이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는것이죠.
설교조로 흘러가는 것 같아 이건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그러면 본론으로 돌아가 결론을 맺겠습니다.
그 이웃들과의 관계,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나의 스탠스에 견고하게 선 채 그들과 생명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하겠지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하겠지요.
네 생각이 옳다 그르다고 다투는 삶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진리에 촛점을 맞추어야 하겠지요.
경쟁이라면 말 이전에 얼마나
어느 진리가 진정으로 사람을 살리는 진리인지 경쟁해 나가야겠죠.

쁘리야님.
설명이 장황했던 것 같은데 그냥 생각의 흐름을 적어 본 거니까
잘못되었다면 또 지적해주세요.
직설적인 화법이 좀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그것 또한 다름이겠지요.

[레벨:7]늘오늘

2009.06.25 10:56:05
*.239.101.246

 

‘근본주의적 시각으로

‘헌금봉투들에 도장을 받고

‘예배마다 코미디강좌에 실실거리며 영생을 되뇌이는 기독도들을 보면 열불이 터지죠.

‘아이구 저 위선덩어리, 후안무치한 중생.

‘탐욕스럽다. 우짜면 좋노? 사랑해야지.


“사랑 안 받아도 좋으니, 그 삐딱한 시선 좀 거두시구랴.

ㅋㅋ^^

“어쩌면, 우리가 그들에게 배워야하지 않을까요?


‘보리수 앞에 내것이 내것 아니라고 내려놓는 마음을,

‘아침마다 떠오르는 해를 보며, 경건하게 신께 무릎 꿇고 귀의하는 법열을,


^^


[레벨:18]눈꽃

2009.06.25 16:23:25
*.187.19.193

쁘리야님!
인도 <기꼬>공부모임이 바다 건너 이곳까지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오는 것은
구성원들의 진지한 자세 때문인것 같습니다

물음을 사장 시키지만 않는다면......

등에 업은 아이 3년 찿는다는 말도 있지요
진도 나가지 않으면 잠시 쉬다보면 어느날 번뜩 등의 아이가 떠오르거나 아이가
제발로 돌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을겁니다

세상에는 아이 업은 이의 손을 잡고 수십년을 함께 맴돌아 주는 직업인이 수없이 많죠

"...........<기꼬>도 또다른 형식의 도그마가 되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가....하는"
<기꼬>를 공부하며 물음을 사장시키지 말고 확장시키고 있노라면 아~~하는 날이 반드시
올겁니다

올려주신 황지우님의 시,구구절절 동감입니다
그러나 과거는 ㅡ갔고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4:17)
쁘리야님과 사티야님 루비님 러브님 조이님 화이팅!emoticon

[레벨:1]MonAmour

2009.06.26 02:18:59
*.160.132.218

쁘리야 입니다.

댓글을 달까 말까 좀 망설였습니다.
한걸음 한걸음 소통의 더딤에 답답하기도 하고,
내안에 생각들을 푸는 것있어서 나의 어눌함이 글의 시작도 전에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듯 까마득한 어지러움을 주니까...

여튼... 장황하지 않게 짧고 명료하게 간단히 써내려가고자 노력하며 들어갑니다. 써보죠 뭐.

제가 계속하여서 제가 서있는 지평... 즉 나의 신앙의 지평에(사띠야님은 스탠스 라고 표현하셔죠?) 집착하는 것은요...
왜냐하면....(좀 설명을 해도 될려나? 장황해 질 기미???)
저는 신앙을 인도에와서 가지게 되었는데요.
이전엔 철저한 무신론자였으며, HUMANIST였습니다.
(신앙의 자리에 신념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에 엄청난 희망을 걸고 이룰 수 있다 맹신하며...)
그러다 보니,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그저...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세뇌당한건 아닐까?
또는 인간이 사회화 되듯이... 그냥 종교적으로 사회화 되어버린것인가?
때마침 그것이 기독교였다? (내가 한국에 태어나서 한국인으로 키워지듯이...)
이런 물음들이 있을 때가 많았어요.
지금은 나의 믿음의 실체(즉 하나님)에 대한 의문보다는 그것을 품고 있는 나에게 믿어웁지 않은 시선을 던지게 됩니다.
내 신앙의 실체말입니다.
(사띠야 님이 자주 얘기하듯... 내 신앙의 기저에 있는 것이 나의 확장의 욕구 또는 자기 연민인가? 뭔가? )
여튼 저에 대해서는 그렇고 마찬가지로 타종교를 가진 인도인이나 다른 여러사람들을 볼때....
내게 가졌던 그런 생각들이 동일하게 적용되어지는 것이죠!

생각들 안해 보셨나요?
내가 만약 나를 하나님께 인도해준 누군가를 만나지 않고... 그 반대의 사람을 만났다면...
무슬림, 불교, 원불교, 힌두, 기타등등 을 만났다면요...

그래서 논의의 처음에 있었던... "진리를 두고 서로가(타 종교들) 경쟁하며 나아간다"는 것....(사띠야님이 제기하셨던...)
전 거기서 주저앉게 되던걸요...개인적으로는 굉장히 모호하기도 했고(구원의 열려있음과 우주적임은 충분히 공감하고요 이해해요..),  앞에 말한... 제 신앙의 늘 한구석에서 주춤주춤 하는 그것을 딱 건드리는 그런 말이기도 했어요.
또... 앞글에서 말한 "선교를 어떻게 할지와 맞닿을 수 도 있다"는 부분의 맥락(선교를 해야한다 말아야한다는 접어두자고 했던것도 기억해 주세요...)을 여기에 이어서 봐주세요.

  무엇인가를 바꾸고 가르치고 결국 인도하는 차원의 것은 아니고 사띠야님의 표현을 살짝 바꿔 표현하면(사띠야님이 생각에 많은 부분 공감해요. 물론 제가 걷고 있는 길이 한참 뒤이긴하지만요. 그러니까.. ) 신앙이 다른 이웃들과 함께... 생명을 나누는 삶 또는 그들앞에 or 그들과 맞닥뜨려 생명을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합시다.
이럴 때, 내 신앙의 지평이라는 것을 돌이켜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피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솔직하게... 다름을 대하는 우리의 실질적인 태도의 근간에 무엇이 있느냐?  내 신앙과  함께...그 다름과 어떻게 함께 하느냐?
Practical way... 생각과 사는 것 다 합한것....
뭐냐는....

-----집에 가야해요... 아.... 오늘은 여기까지..... ------

[레벨:18]눈꽃

2009.06.26 07:12:21
*.187.19.193

쁘리야님!

가까이 있어 말과 말로 이야기를 풀어 가는 것이 아니고 지면이라 생각을 풀어 나가기가 좀 한계를 느끼시리라 생각 됩니다. 답글을 다는 저도 마찬가지구요

네~ 저희 신앙 여정을(50여년) 잠깐 말씀드리면 모태신앙,  어려서 엄마 따라 주일 학교부터 시작 했지요 시나브로 기독교에 물들었다고 할까요
정말 제가 진지하게 과연 내가 기독교인 인가? 왜 내가 기독교인 이어야 하나? 의 진지한 물음들이 시작 되었고 ......(생각해 보면 이전의 나는 어쩜 무늬만 기독교인이 였습니다.)
이전의(다비아를 만나기전)교회 행활 중에서 저는 너무나도 답답하여 교회를 떠나고 성경을 덮은 적이 몇번 있었습니다.
성녀라 일컽는 마더 테레사님도 죽음 가까이서 과연 하나님이 계신가 모르겠다고 말했다는데... 그래서 설왕 설래 많은 말들이 있었고,저는 그분이 오히려 솔직하신 분이라 생각되어 좋았습니다.

쁘리야님의 글을 읽으며 참 나와 비슷한 점이 많구나 생각했습니다.
진지한 자기 성찰, 물음 이런 것 없이 그냥 가르쳐주는 대로( 주입식) 따라가다 보면 분명 어느지점에선 마딱뜨릴 수 밖에 없는 아니 마딱 드려야만 하는 그래서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내적인)에 직면 해야하고, 그과정의 시간이 단번에 끝날 수만은 없을 것 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한 순간 번쩍 빛이 비추듯 그렇게 명료하게  저항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리어 신앙인이(그것이 불교 힌두교 기독교이든)된 사람들도 있다고 하지만 ......
그들도 신앙에 입문한 이후로 분명 그과정들이 있었으리라 봄니다.  이과정들이 없으면 맹신이 되는거죠.
 이땅에 사는 사람 그누구도 비 종교인은 없다고 하죠 무신론자 그들도 종교인이라고, 자기자신을 믿는, 자신이 신이 되는 거지요.
저도 이기간(자신을 믿고)이 있었죠  허나 자신을 믿는다는게 얼마나 허약한 토대인가를 절감하는 계기(사건)가 있었고 ,아마 이런일이 없었으면 지금도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을지도........

돌다리도 두드려보는 성격의 일면이 있어 누가 가르쳐 주는 것을 그냥 맹신 할 수 없는 성격이라
그렇잖아요 이게 정말 신앙인이 되다는 것은 거기에 자신의 인생을 거는 것인데, 인생을 걸지 않는다면 그사람은 진정한 신앙인이라고 할 수없죠 내인생을 걸어야 하는데 내가 인생을 걸어야 하는 그 대상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게 가능하겠어요.
다행히 다비아 는 열려있어 물음들을 사장시키지 않게하고 아니 물음을 가지게 만들어 주어 저는 좋습니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정말 한송이 국화꽃이 피기까지 소쩍새가 운다는 시처럼 우리는 노력을 해야합니다. 이노력의 과정에 신이 함께 하셔서 아니 신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결단코 우리는 신앙인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회개(메타노니아) 이건 죽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다시 태어나는 거지요
신은 이렇게 결단 할 수있도록 용기, 예~ 용기를 줍니다.
그런데 왜 하필 아니 꼭 기독교 이어야만 하는가? 네 물어야 합니다
저도 깊게는 아니지만 노자 사상에 대해서 불교에 대해서 인도의 베단타에 대해서 조금 공부 했습니다.
 하다보니 유사점이 있지만 분명 어느 지점에서 갈라 진다는 것 을 알게되었구요 (제가 알고 있는 것이 다 라고는 장담 할 수 없음)
지금은 기독교에 대해서 더 매진 하고있습니다  ㅎ ㅎㅎ
종교학에 대해서 시간이 허락되면  공부해 보고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솔직하게...다름을 대하는 .........근간에 무엇이 있느냐?"  " ..... 그다름과 어떻게 함께하냐?"
저도 지금 공부 하고 있기에 이부분에 대해서 무어라 꼬집어 이게 정답이야 말 할수있는게 없습니다.
 신앙의 여정은 단거리 경주가 아닙니다( ㅎ ㅎ 그렇다고 지레 겁먹지 마세요)

ㅡ"즐겁게 노래하고 춤추며,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삶의 순례 길을 가보십시오.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함께 한다는 그 신비를 발견한다면
그 혼자의 길이 멋지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그러나 힘들고 외로울 때도 있을 텐데,
그럴 때는 그 자리에 앉아서 길동무를 만날 때까지 기다려보세요."ㅡ

정목사님이 제게 주신 답글이였는데 저도 이글을 쁘띠야님에게 드리고싶군요

오늘은 저도 여기서 이만 줄여야겠습니다
무더운 날씨, 건강조심하시고
오늘도 주님의 평강이 함께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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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8차 기꼬 공부 후기 [21] [레벨:26]사띠아 2009-06-21 4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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