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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시에르의 정치와 치안 그리고 예술

조회 수 1774 추천 수 1 2014.10.18 23:5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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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시에르의 정치와 치안, 그리고 예술



1. 정치, 치안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는 우리는 흔히 듣기도 하고 하기도 하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으로부터 기원하는 이 문장은 ‘공동-내-존재(être-en-commun)’로 위치 지워지는  인간의 정치적 실존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대중의 정치적 이탈 지점에서 ‘정치’란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벗어나서는 안 되는 존재로서 인간의 신체에 대한 것을 이야기 하는 것처럼 읽혀지기도 한다. 랑시에르는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언급으로부터 의미를 분할해 내며 자신의 정치적 기획을 출발시킨다. ‘인간은 폴리스적인 동물’이라는 것이 좀 더 적합한 이 표현에서 ‘정치’라는 의미로 사용된 그리스어의 politeia는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이 국가(폴리스), 정체(政體)로 번역되는 플라톤의 저서 제목이기도 하다. 랑시에르는 politeia라는 언어의 용법이 정치와 치안의 상대적 의미로 사용될 수 있음을 통해 흔히 ‘정치’라 불리는 것으로 부터 치안을 분리해 낸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란 말의 의미를 통치의 의미와 동일하게 사용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시민은 지배하는 일과 지배받는 일에 참여하는 몫을 가진 자이고, 따라서 정치적 지배는 자유민과 평등한 자의 지배”라고 이야기 한 것과 플라톤이 다수의 개인들이 가진 여러 정념들을 자기조절 함으로써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들에게 정치란 개인들의 정념을 규제하여 공동체를 안정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런 ‘정치’의 의미들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으며 현실의 정치에서 지배적이기도 하다.


랑시에르는 고대 그리스의 정치철학과 현실에서 여전히 적용되는 ‘정치’의 논리를 뒤집고자 한다. 이러한 ‘정치’는 지금의 의회주의에서는 합의에 의한 통치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정치가 아니라 치안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치안은 지배적인 것들을 계속 지배적이게 하며 들리지 않은 것들을 계속해서 들리지 않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지 않도록 하는 정치술이 된다. 이러한 ‘정치’의 개념들과 정치술은 근대적 정치제제 속에서도  유효함을 지속하고 있으며 언어의 용법에서도 분리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분리되지 않는 의미의 사용을 넘어서서 1990년대 전후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으로부터 기인한 자유주의 경제체제의 비경쟁적 상태를 통해 정치의 종언이 선언되는 사태를 세계는 맞이하고 있으며 이런 탈정치적 흐름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정치권력의 부정적인 문제에서 벗어나는 탈정치적 흐름으로 순수예술이나 학문의 경향들과 대중이 정서적 영역에서 정치적 혐오와 무관심이 형성되기도 하고, 정치적인 문제가 도덕적인 문제로 전환되기도 한다. 어쩌면 이런 상황이 랑시에르로 하여금 정치와 치안의 문제를 분리적으로 사고하도록 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랑시에르는 정치가 종언을 향해 가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히려 이런 때 이른 정치의 종언이야 말로 오히려 ‘정치적’일 뿐이며 정치의 ‘걷어냄’으로 실재하는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불평등을 은폐하는 정치술이자 정치적인 것을 삭제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뺄셈/제거의 작업이라고 말한다. 정치가 복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랑시에르는 ‘약속의 정치’가 실종된 프랑스의 사태1)로부터 다시금 정치의 복귀를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의 이런 주장은 정치에 대한 혐오를 통해 그로부터 이탈되는 한국의 정치 상황과 선거의 시간에서 자주 강조되는 정치적 무관심에 대한 경고와 닮아 보인다. 그러나 이처럼 한국사회의 정치집단이나 스스로 조직된 대중적 결사체로부터 요구되는 정치적 참여의 독려는 랑시에르의 정치적 복귀와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른 것이다. 한국사회의 정치적 관심에 대한 요구는 오히려 '정치의 종언'이라는 프랑스를 비롯한 세계적인 사태에서 탄생한 시대적 담론들과 닮아 있는데 이것은 종언과 참여가 치안과 통치의 동일성을 통해 전지구적 차원에서 현상하는 것을 말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80년대 말 동유럽의 몰락과 소련의 동일한 징후 속에서  『역사의 종언과 최후의 인간』을 통해 이데올로기적 경쟁이 종료되었음을 선언한다. 그는 사회주의의 붕괴로 자유민주주의로의 안정적 발전의 길이 열린 것이라고는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더 이상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을 초월할 어떤 정치체제도 존재하지 않음 또한 주장한다. 그에게는 이제 사회는 정치적인 경쟁보다는 경제적인 경영을 통해 어떻게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복지국가로 갈 수 있는가가 중요한 목표가 된 것이다. 바로 이런 지점이 ‘약속의 종언’으로 표현되었던 프랑스의 정치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부분이다.

한편으로 종언의 사태가 만들어내는 정치적 혐오와 무관심, 그리고 그것을 경고하는 상황 속에서 이런 탈정치적 흐름을 차단하는 방법으로 ‘참여’가 강변되던 시간이 있어왔다. 그러나 이런 시간에 대한 부정적 기억은 탈정치적 사태에 대한 해결로서 ‘참여’가 유일하거나 아니면 유효한 방법인지와 통치나 치안과 분화되지 않는 ‘정치’의 의미 속에서 그것은 어떻게 현상하는지 또한 살펴보게 만드는 것들이다.


 종언의 사태는 우선적으로 체제논쟁에 대한 중단과도 관계되지만 보다 밑으로 부터는 삶을 힘들게 하는 ‘정치’에 대한 거부라는 내용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정치의 행위 속에서 ‘치안’의 내용을 분리해 내지 못한다면 정치적 무관심에 대한 경고는 ‘치안’영역으로 회귀하려는 의도와 또한 분리되지 않는다. 랑시에르의 탁월함은 이처럼 참여나 정치적 관심을 통해 오히려 포획되는 ‘정치’의 영역으로부터 정치와 치안을 분리해서 정의한 것이다. 또한 멀리는 ‘최선정체’의 추구에 대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로부터, 정치를 윤리적인 것과 분리하고자 했던 마키아벨리, 오이코스와 폴리스의 구별을 통해 정치를 정의하고자 하는 한나 아렌트, 삶의 영역에서 작동되는 미시적인 것으로의 관계로 정치를 보았던 푸코 등과 같이 많은 정치적 이론들의 흐름 속에서 정치와 치안을 분리해서 사유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치안의 논리에서는 전체가 부분들의 총합과 동일해지며, 각 부분이 그에 부합하는 몫을 갖는다. 또한 치안논리에서는 바깥이 없고, 실재가 외양과 명확히 구분되며, 가시적인 것이 비가시적인 것과 명확히 구분되고, 말이 소음과 명확히 구분된다. 반대로 정치의 논리가 있다. 정치의 논리는 부분들, 자리들, 그리고 직무들의 [치안적]셈에 포함되지 않았던 보충적 요소들의 도입으로 정의된다. 정치의 논리는 자리들이 나눔을 흐트러뜨리는 동시에 전체의 셈, 그리고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나눔을 흐트러뜨린다. 정치의 논리는 욕구들[이 지배하는] 어두운 삶에만 속해 있는 것으로 셈해지던 자들을 말하고 생각하는 존재들로 보이게 만든다. 정치의 논리는 어두운 삶[에서 새어나오는] 소음으로밖에 지각되지 않았던 것을 담론으로 들리게 만든다. 이것이 내가 ‘몫 없는 자들이 몫’, ‘셈해지지 않는 것들을 셈하기’라고 불렀던 것들이다.2)


일상적으로 우리들이 ‘정치’라는 것을 사유하는 방식과 그것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대체로 비슷하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통치행위와 그 지배형태들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의회의 합의를 위한 정치활동이나 정부의 통치행위 등을 ‘정치’라고 생각하고 사유한다. 이것은 자신이 소속된 사회집단의 확정된 자리나 기능의 분배, 몫이나 자격의 분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이런 분배와 분할은 궁극적으로는 사회성원들의 합의로 현상되는 의회정치의 합의를 통해 유지되고 정당화된다. 이것을 랑시에르는 정치가 아닌 합의를 통한 통치, 즉 치안으로 정의한다.


근대로 들어서면서 ‘정치’의 대명사는 대의제가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항상 민주주의란 이름이 함께 붙어 다닌다. 그러나 대의제가 민주주의의 실현의 방식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거꾸로 민주주의란 것이 대의제를 위하여 생겨난 것이 시간적으로 먼저였다면, 대의제를 민주주의의 한 방식으로 사유하는 것은 대의제에 대한 인식의 틀이 어떤 시간을 거쳐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770년 미국의 연방주의자들에 의해 ‘대의제 민주주의’란 말이 최초로 사용되었는데 당시에는 민주주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대의제를 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야기되고 받아들여졌다. 사실 대의제가 시행되면서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과 관계되어 있으면서 보여주는 것은 삶과의 긍정적인 연결이라기보다는 많은 경우의 상황에서 오히려 그것과의 부정적 뒤섞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사태에 대한 변명으로 직접적인 민주주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상황은 피할 수 없다는 주장은 면죄부와 함께 ‘합리성’을 통해 정당함을 얻도록 만든다. 당연히 어떤 조건하에서도 대의제를 대체하는 직접민주주의란 가능하지 않다. 지금처럼 아무리 SNS가 발달한 상태라 하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 이다. 그러기에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주장은 실현될 수 없는 불합리한 것이 되어버린다.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것으로 인민이나 국민에게 주권이 있다는 사유가 있다. 그리고 그들이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민주주의를 사유한다. 하지만 ‘인민주권’은 오히려 대의제 정치를 강화한다는 것을 사유할 수 있어야만 한다. 직접민주주의를 사유하면서 ‘인민주권’을 떠올리는 한 우리들은 이런 불가피한 정치적 현실에 대한 면죄부를 지속적으로 발행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대의제는 인민주권이 실현될 수 없는 영역에서가 아니라 거꾸로 그것이 실현되는 지점에서 탄생한다. 개개 인민의 주권이 대의 불가능함은 대표를 표상함으로써만 대의 가능한 것이 되어버린다.


근대를 통해 형성된 국민으로 인해 더 이상 주권이 개인으로 표상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 말의 의미는 주권자였던 군주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근대의 주권자라 불리는 개별 인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다. 전체 인민으로서는 한없는 지배자의 권능을 가지지만 전체 인민의 표상으로 작동되는 대의제의 장치들이 전체인민의 뜻으로 작동되지 않는 이상 인민 개개인은 한 없이 무능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문제는 전체 인민의 뜻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개개 인민의 의지를 대의제는 관철시킬 방법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렇게 한 없이 무능한 개별 인민이 정치에 대해 무관심해지거나 자신을 무능하게 만드는 ‘정치’에 대해 혐오를 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할 것이다. 혐오와 무관심은 새로운 정치에 대한 포기로도 나타나지만 이것의 심화는 때로 치안의 통제로 부터도 벗어나는 흐름으로도 나타난다. 또한 정치적 무관심이 독재정부의 탄생이나 보수정치의 회귀의 형태로도 현상하기에 정치적 방기는 우리들이 동의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경고를 ‘정치권’으로부터 역으로 받기도 한다. 무관심과 혐오가 결과할 일들의 우려를 통해 어떤 정치적 의무를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이런 의무의 실천으로서 참여와 합의의 범주에서 움직인다 하더라도 우려스러운 결과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대의제 정치의 범주는 우리들이 열심히 정치에 관심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그 관심을 통하여 랑시에르가 말하는 치안의 영역으로 부터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장치이다. 이런 정치적 경험을 우리들은 국민이나 참여란 이름으로 진행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시간으로부터도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란 오히려 주권이 없는 자로부터 출발한다. 아감벤이 대의제의 인민을 대문자 인민(People)라고 칭하고 동시에 가난하고 배제된 자들로서의 인민을 소문자 인민(people)라고 부르며 대의 불가능한 자들로부터 민주주의의 잠재성 보았다면 랑시에르는 보이지 않는 자들을 보이게 함으로써 민주주의가 현실화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정치와 치안이 부딪히는 불화의 정치가 지속되는 곳에는 어떠한 주권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영역이 있다. 보이지 않는 자들, 들리지 않는 자, 언어를 가지지 못한 자들로서 주권적 인민 혹은 시민권의 외부인 이주자나 난민, 비정규직, 프레카리아트로 불리는 식별이 불가능한 존재들이 있다.  민주주의의 문제는 어떤 정치체제 내부에서 주권을 회복하거나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외부에서, 그것들을 끊임없이 드러내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문제이다. 근대의 인민-주권의 문제는 국민으로 표상되는 막강한 권력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면서 한없이 무력한 개별 인민을 만드는 과정이다. 개별인민의 무력함은 권력을 위임받은 정부의 강함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과정은 인민을 개별적 요소들로 분할하면서 약화시키고 국민으로 통합하는 권력의 통치술이다. 토크빌은 표현을 빌자면 국가가 ‘모든 불행의 유일한 구원자’를 자처하게 되는 것이다. 


국가는 ‘복지’와 ‘안전’의 담당자로 등장하는 것이다. 푸코는 『국가, 안전, 영토』를 통해  인구문제로 확장된 안전의 문제가 어떻게 통치술로 자리 잡는지를 보여준다. 푸코의 경우 페스트와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 풍토병의 관리를 통해 국가가 국축하는 안전장치를 보여주는데 이것은 국가의 범주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고 또한 방지되고 차단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관리된다는 측면에서 마찬가지임이 드러난다. 사회의 안전은 인민 개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통계적으로 관리될 수 있는 영역에서 의인화된 전체인민으로 국민이라는 신체에 대한 것이다. 이처럼 국민에 대한 안전이 개별인민에 대한 안전으로 오해되면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세월호 사태를 통해 우리들은 경험하고 있다. 통계적으로 관리된다는 말은 세월호 사건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 또한 그것이 정부의 유지에 위협이 될 것인가를 수치적으로 예측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고가 가져온 그 외의 문제들이 가지는 영향은 그것이 파국적이지 않을 경우 관리될 수 있는 오차의 범위가 되어버린다.  안전장치를 통해 규율화된 신체들은 오히려 사고를 계기로 어떻게 안전한 국가를 만들어낼 것인지를 제안하게 되고 이러한 제안행위들이 과도해지거나 과격해져 국가의 안전에 위협이 될 경우 오히려 그 행위자체가 비난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지금의 세월호사고 이후 진행되는 일련의 사태들은 국가의 안전장치와 그것의 규율화가 어떻게 치안의 영역으로 자리 잡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의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는 다수라는 이름하에 소수가 배제되고 짓밟히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음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수’란 국가의 안전이 만들어내는 동일화 현상으로부터 수치화된 것에 다름이 아니다. 대의제의 의회정치에서 항상 일어나는 ‘합의’와 ‘합의되지 않음’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배제의 ‘정치’를 작동시킨다. ‘합의의 정치’란 합의를 통한 배제를 작동시킴으로 합의의 틀 안에 들어오지 않은 것들을 보이지 않게, 들리지 않게, 말하지 않게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합의되지 않음’이라는 정쟁의 모습에 대해 합의에 이르지 못했음을 책망하는 것은 스스로를 치안의 통제 안에 가두고자 하는 주장에 다름이 아닐 수도 있다. ‘세월호특별법’을 둘러싼 흐름들 또한 이런 합의를 이루고자 하는 과정이다.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들에 대해, ‘인민’이라는 전체신체의 보호와 양육을 위해 그것에 방해되는 요소들을 언제든지 잔인하게 솎아낸다. 이것은 억압이나 규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합의를 통해서 행해지는 것이다. 


대의제 안에서의 혐오와 희망과 같은 일들이 반복되거나 지속되는 것은 일상 속에서 대의제 정치의 외부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능력과 이런 정치라는 동일한 언표가 가지는 다의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기표가 발생하는 동일화의 전제주의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데서 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싫어하고 미워해야 할 정치와 그것으로부터 떠나거나 회피해서는 안 되는 정치가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점 또한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다. 혐오해야할 정치는 무엇이고 관심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정치가 무엇인지를 구별하여 사유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정치’를 치안과 구별해서 정의하는 랑시에르의 기획이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우리들이 일상에서 마주하는 정치의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철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이 정의하고 제안하는 정치의 개념에서조차 다양하고 이질적인 것들이 하나의 언표로 현시된다. 민주주의에 대한 의미는 동일하게 사용되지 않는다. 플라톤이 민주주의를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던 것을 앞에서 이야기 했는데 그런 면에서 본다면 아마도 그는 대표적인 반 민주주의자일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하면  그는 민주주의를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로 정의한다. 여기에는 남용, 위반, 잉여, 차이, 분란의 요소가 들어있다. 플라톤의 『정체』에 나오는 데모스는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노인, 시민과 외국인, 인간과 동물이 무분별하게 뒤섞인 무리들이다. 플라톤은 이처럼 데모스가 형상 없는, 표상 불가능한 존재임을 이야기 한다.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린다면 보이지 않는 것들, 들리지 않는 것들, 몫이 없는 자들을 의미한다. 플라톤은 민주주의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야기 하지만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는 진실하다. 그가 부정적으로 이야기 하는 의미들을 긍정의 형태로 전복해서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민주주의의 의미들은 플라톤의 부정으로부터 추출된다. 플라톤은 형상이 분리되고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들이 무분별하게 뒤섞여 있는 무리로, 형상 없이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노인, 시민과 외국인 등의 사이에서 생성되는 존재로부터 민주주의의 의미가 생성된다는 것이다.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의 송환거부는 자신을 한국이나 자신이 속한 나라에 포함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의 존재로 남고자 하는 것이다. 즉 파키스탄-한국 사이의 시민권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한국-파키스탄인 되기’, ‘한국-네팔인 되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이것을 ‘자리 옮김’, ‘사이존재’로 표현한다. ‘사이존재’는 두 형상 사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상이 ‘함께-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파르마콘’이자 ‘코라’이다.  볼 수는 없지만 상상가능하고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사티로스나 켄타우로스가 그러하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의 반대편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사이에 존재하므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한국에서 자주 회자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 중,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를 살펴보면 지젝이 데리다의 ‘도래할 민주주의’에 대해 ‘메시아라는 타자의 도래’라고 했던 비판은 데리다가 아니라 최장집에 대해 적용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3) 『민주주의란 무엇인가』(2011)의 저자 고병권은 자신의 책에서의 문민정부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그 또한 최장집과는 전혀 다른 민주주의를 이야기 한다.4)


랑시에르가 이야기하는 치안이란 의미를 조금 더 살펴보자.

‘치안’은 인간들을 공동체로 결집하고 그들 간의 합의를 끌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리와 기능들을 위계적으로 분배한다. 사회 안에서의 자리의 분배, 혹은 몫이나 자격의 분할과 관련된 것이다. 그것은 사회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한 통치행위이다. 몫이 있는 자와 몫이 없는 자, 말하는 자와 말할 수 없는 자, 들리는 자와 들을 수 없는 자, 보이는 자와 보이지 않는 자를 분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사회적 합의(consensus)를 통해 유지하고 정당화 하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의회정치의 정쟁(政爭)에 대해 행하는 합의의 부재에 대한 비판, 그런 비판을 통해 합의에 이르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합의는 단순히 정당 간에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는 정부와 사용자, 노동자 간의 합의에서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며, 말할 수 없는 이들의 배제됨이 목격된다. 이런 보이지 않음은 ‘난입’이란 것을 통해 보이게 된다. 2007년 11월 ‘비정규직보호법’ 재논의를 위해 모인 노사정위원회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난입’을 통해 그 회의-합의의 시도가 무산되어 버렸다. ‘비정규직보호법’의 논의의 장에 오히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참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격 없는 자들이고 몫이 없는 자들이었던 것이었다. ‘비정규직보호법’이란 비정규직의 고통과 아픔을 드러내어지고 그들의 말이 들리게 하는 법률이기 보다는 오히려 비정규직에 대한 분할과 배제의 통치를 유지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을 뿐 이었다. 이 지점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난입’은 보이지 않던 자들이 보이게 되고 그들의 말이 들리게 되는 정치가 되는 것이다. 정치란 바로 이처럼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만들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만들고, 말하지 못하는 자들이 말하게 되는 것, 몫 없는 자들이 자신들의 몫을 주장하고 나오는 것이다. 민주주의란 합의를 통해 고정시킬 수 있거나 확정할 수 있는 하나의 정체(政體)가 아니며 그것은 모든 정체 내부에 존체하며 항상 도래하는 체제이며 동시에 그것은 존재하는 체제에 투쟁하고 저항하며 다른 체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의 의지이기에 모든 정체들이 외부를 의미하기도 한다. 


합의는 일상적이기도 하지만 한 시대를 시작하게 하는 합의 또한 존재한다. 푸코는 『광기의 역사』를 통해 근대로 들어서면서 하나의 합의가 있었음을 이야기 한다.  정신분석학을 통한 학자와 병원과 정치권력 간의 합의였는데 그것은 바로 ‘광기’에 대한 합의였다. 근대의 이성을 통해 광기가 ‘정신병적 현상’으로 간주되게 된 것이다. 광기는 처음부터 질병의 영역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금 특별한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켜온 그곳에 광기가 존재했음은 또한 특별한 것이 아니다. 중세의 브뤼겔과 보슈의 그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휠더린과 네르발의 낭만주의에서, 고야와 고흐의 그림, 사드와 니체, 아르토의 잔혹극에서 비춰지던 광기를 부정할 수는 없다. 변기를 미술관으로 들여보낸 뒤샹의 행위, 얼굴을 지우고 동물과 인간의 신체의 구별을 뭉개버리는 베이컨의 그림에서 우리는 광기를 목격한다. 근대의 초입에 있었던 합의야 말로 이런 광기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자 능력임을 보이지 않게 한 하나의 통치 수단이었다. 상당기간 동안 우리는 이들의 작품을 전혀 다른 의미에서 해석하거나 아니면 폄하해 옴으로 이들의 작품 속에 비춰지는 광기를 외면하고자 했다. 푸코의 병원의 질서 속에 숨겨져 있는 규율로 미시권력과 랑시에르의 ‘치안’개념의 거시적 영역은 서로 다른 궤적을 그리는 통치 장치의 모습을 보여준다. 푸코가 ‘미시정치’의 궤적을 그리며 정치의 개념에 다가갔다면 랑시에르는 ‘거시정치’에 유념하며 정치의 개념을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음과 들리지 않음은 합의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근거로 삼는 정신의학과 같은 근대의 앎과 지식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정치가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고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들리고, 보이고, 말하게 하는 것이라면 밀양과 청도의 송전탑반대 투쟁은 그곳에서 터전을 이루고 살아가는 주민의 삶의 시공간과 그들이 그렇게 살아갈 권리에 대한 소리의 현신을 보여준다. 오래 전 진율스님의 단식투쟁은 우리들에게 청성산의 도롱뇽 소리를 들려주기도 하였다.

대구지역에 ‘건설노동조합’이 있다. 소위 말하는 '노가다‘들의 조합이다. ‘노가다’라고 칭해질 때 그들은 ‘가다’없음, 즉 어떤 형태나 틀이 없음 이었다. 또한 그들은 존재해 있지만 오랫동안 노동운동의 영역에서 조차 노동자로서의 조직화가 방기되어 왔었다. 노동자로서도 보이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노조결성과 파업은 그들이 결코 ‘가다’없는 존재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건설노동자가 되었으며 이제 그들의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소리가 아니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단일한 사업장’, ‘정규’라는 것이 만들어내는 신체의 규율이 없으며 오히려 그들의 요구는 규정된 노동의 형태를 지니는 다른 사업장 보다 제약을 가지지 않는다. 해고와 같은 징계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업무방해’와 같은 사법적 처벌의 장치만이 그들의 투쟁을 제약한다. ‘노가다’는 그들의 능력이자 힘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들이 노동자가 되고자 했던 것에는 하나의 ‘퇴행’이 존재할 수 있다. ‘노동’이란 것을 형이상학적인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노동이란 자본주의의 생산관계에 들어가는 잉여노동을 생산하는 하나의 행위가 된다. 우리들은 ‘노동’이란 단어 속에서 원시시대 행했던 생산 활동과 자본주의에서 행해지는 생산 활동을 구별할 수 있어야만 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은 ‘세상을 창조하며 모든 재화를 생산하는 위대한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그것은 세상을 파괴해온 자본에 동조하는 흐름이고, 세상의 모든 착취의 잉여를 생산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주체화’가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그들의 현재의 생산관계에 속해있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다이쇼 퇴직자동맹’5)처럼 오히려 이런 현실적 조건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사건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테르시테스의 에피소드에 대한 호메로스 말을 인용하면서 말하지 못하는 자들이 말하는 것, 몫이 없는 자들이 몫을 갖는 자가 데모스 출신이라고 이야기 한다.6) 그리스의 예속적 인민으로의 오클로스로 부터 스스로를 분할해 내는 주체는 데모스다. 불화는 동일화의 예속으로부터 해방되어 데모스가 되게 한다. 불화는 주체화의 과정이다. 이처럼 민주주의는 ‘통치 할 자격이 없는 자들의 통치’로 정의되는 것이다. 다수자를 구성하는 이런저런 종류의 공리와의 거리로부터 ‘통치할 자격이 없는 자’들로서 소수성은 규정된다.7) 이런 척도와 공리로 부터의 거리는 그들이 고통 받는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척도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조건을 구성하거나 능력이 되기도 한다. 어떤 체제든지 그 안에는 이처럼 배제된 자들, 아감벤의 표현으로는 ‘벌거벗은 생명’8)이 존재한다. 민주주의는 이들에 의해서, 이들을 통해서 작동되는 체제이다. 그러기에 민주주의는 하나의 정체가 아니라 모든 정체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체의 지배자들에 대해 반하며, 저항하고 투쟁하며, 혹은 그들과 전혀 다른 삶의 장소와 방식을 물색하기에 민주주의는 모든 정체와 동일시 될 수 없는 그 정체들의 외부이기도 한 것이다. 랑시에르는 정치를 가능하게 하고 정치를 요구하는 가능성의 조건을 ‘감각적인 것’에서 찾는다. 공동체가 공유하는 공통적인 것과 그 내부에서 각각의 몫과 자리를 규정하는 경계를 설정하는 감각적 확실성(évidences sensibles)의 체계를 ‘감각적인 것의 분할/감성의 분할’이라고 한다. 이 ‘감각적인 것의 분할/감성의 분할’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말하는 자와 말을 하지 못하는 자를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배제와 포함의 논리로 치안의 본질이다. 몫을 가지지 못한 이들이 이러한 분할 방식에 문제제기를 제기하고 새로운 셈의 방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 정치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이게 하는 능력, 들리지 않던 소리를 들리게 하는 능력, 말하지 못하던 이들이 말하게 되는 능력이야 말로 앎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지식과 같은 보이는 것들의 권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이것은 평등한 무지에 근거한 순전히 감각적인 것이다. 앎, 지식, 이성 같은 것들이야 말로 이미 보이던 것들을 보이게 하는 장치들 - 학교, 병원, 철학자, 과학자 등 - 이 만들어 놓은 것들일 뿐이다. 능력이란 감각적인 것을 통하여 들리지 않는 이들이 있음을 나누어 공유하는 것, 들리지 않던 소리를 함께 듣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예기치 않은 단락을 통해 제기되는 저항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를 특정 정치제제 안에서 권력을 소유하는 행위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렇게 분배의 형식을 찾아가는 활동을 단순히 정치제제의 이행의 문제로만 축소해서도 안 된다.


랑시에르는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의 테제 1에서 “정치는 권력의 행사가 아니다.”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만일 정치를 권력 행사 그리고 권력을 소유하기 위한 투쟁과 동일시한다면, 우리는 단숨에 정치를 없애버리게 된다.”라고 풀어낸다. 진정한 정치, 혁명은 권력주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배제된 주체가 정치의 새로운 장, 새로운 틀을 짜는 것이다. 이런 정치적 작업들은 불화(mésentente)9)를 통해 가능하게 된다. 불화는 몫이 없던 자들이 자신의 몫을 주장하며 나서는 것이며, 말하지 못하던 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에서 발생한다. 랑시에르는 이런 행위를 ‘계쟁(litige, 係爭)'이라 부른다. 가시적인 공동체에서 배제되고 셈해지지 않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행위를 정치적 공론의 장에 끌어들여 평등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랑시에르의 평등은 이런 계쟁을 통하여 도달하는 목표지점이 아니라 이런 불화의 출발점이다. 그의 평등은 현실에서 실재하지 않는 다는 이유에서 형이상학 적이지만 목표가 아니고 전제라는 점에서 플라톤의 이데아와는 분명히 다르다.





2. 정치, 미학


치안의 논리를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활동을 랑시에르는 미학의 정치라고 부른다. 랑시에르는 정치는 일치(consensus)를 넘어서는 불일치(disensus)의 분할활동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정치가 합의의 체제 안에서 권력을 점유하는 일아 아니라 합의를 넘어 새로운 분할의 방식을 모색 한다는 점에서 불일치의 활동이라는 것이다.

랑시에르가 이야기 하는 '감성의 분할 혹은 감각적인 것의 분할(partage du sensible)'은 감각적인 것이 수용되는 시간과 표상을 다루는 감성론을 의미한다. 그것은 공동체가 공유하는 어떤 공통적인 것과 그 안에서 각각의 몫과 자리를 규정하는 경계를 설정하는 감각적 확실성(évidences sensibles)의 체계이다. 감성의 분할이 몫을 가지지 못한 자들의 감각적 영역 전체에 작동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는 예술 활동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예술활동이야 말로 감각적인 것에 대한 합의된 분배 방식에 불일치의 견해를 제시하며 새로운 감성의  분할을 만들어 내는 활동이시 때문이다. 기존 감성의 분할체계를 변화시키는 문제야 말로 예술의 주요과제이다. 한 세계를 다른 세계 안에 들여 놓는 작업을 랑시에르는 감성화(esthétisation)라고 부른다. 감성화는 일상적인 감각의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런 감각방식의 틀 또는 분할 자체를 새롭게 짜는 일이다.  기존의 감각경험으로부터 이질적인 감각 형태를 가시화하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활동으로서의 예술은 새로운 존재양식을 발명한다는 의미에서 미학적이다. 더하여 예술은 삶에 개입하며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려고 하는데 랑시에르는  이것을 각각 '작품을 통한 저항의 기획'과 '미적 혁명의 기획'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전자를 예술로, 후자를 정치라 부를 수 있으며 이처럼 저항의 기획에만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생성한다는 의미에서 예술은 정치적이게 된다. 더하여 대의제의 정치적 틀과 지식의 체계에 머물지 않으며 그런 틀들이 가리고 있는 것들을 가시화 하는 것을 정치라 부를 수 있기에 정치는 예술적이 된다. 이것이 예술과 정치가 상호적 작용을 통해 새로운 '감성의 분할'을 만들어 내는 체제이다.


아담과 하와의 사과, 뉴턴의 사과, 세잔의 사과를 세계의 3대 사과라고 한다고 한다. 요즘 같으면 애플의 벌레 먹은 사과도 포함시키려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은 앎이나 지식을 통해 도달하는 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런 앎과 지식 같은 습속들을 지우면서 가능해 지는 것들이다. 이것은 감각의 통로이다. 이런 것들이 베이컨의 그림에서처럼 세면대의 구멍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신체를 만든다.

세잔은 우리들이 가지던 습속을 지우면서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만든다. 세잔의 사과는 하나의 시점이 아니라 여러 시점에서 그려진다. 일자로 동일화되는 주체의 시점이 아니라 다양한 타자의 시점으로 세상을 마주한다. 세잔의 정물화가 색체와 구도, 형태에서 그 이전의 재현적 정물화와 다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과거의 기억을 지우고, 망각의 능력으로 대상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기억과 습속, 즉 기존의 고정되어 있던 주체적 시점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앎과 지식은 종종 망각을 통한 감각적 신체를 여는데 방해가 된다.

대가들이 모든 법칙으로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아마도 이런 습속들과 사회적 에피스테메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습속들과 지식, 앎, 이성 같은 것들은 오히려 존재하는 것들을 보이지 않게 만들고 있다.

인상주의자들의 시각에 고전주의 회화의 재현적 그림은 화가의 눈으로 본 세상이 아니라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 인간의 눈은 완전치 않아서 빛에 의해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미지들만을 포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빛이 사라지기 전의 세상을 빠른 속도로 자신의 화폭에 담는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는 것은 어쩌면 습속 등에 의해 못보고 있던 것들의 장애를 지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장애란 다른 신체 속에서 형성되는 다양함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이런 신체적 차이를 비정상으로 보는 앎이나 지식, 그리고 습속을 의미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뒤샹이 자전거 바퀴나 소변기를 미술관으로 끌어들였을 때,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 같은 것들로 자신의 작품을 구성했을 때 자격 없는 것들이 예술작품으로의 자격을 부여 받았다. 하지만 이것은 자격을 부여 받았다는 표현 보다는 자격 없는 것들이 그대로 예술이 되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여전히 논란이 잠재해 있다. 존 케이지의 경우도 침묵 속에서 들리는, ‘잡음’이라는 들렸지만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음악적 소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의도하지 않고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잡음’과 선율에 의해 발생하는 소리의 평등성을 존 케이지의 ‘4분 30초’는 우리들에게 들려준다.


우리들은 평등을 흔히 어떤 과정의 결과나 혹은 목표로 현실에서 나타나는 평등, 혹은 법적으로 규정되는 개념으로 사유한다. 여기서 알렉시스 토크빌10)의 이야기를 통해 이런 평등의 의미를 조금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긍정과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나는 민주주의에 대해 지지했지만 민주화와 더불어 대중의 노예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간파했다. 그는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미국의 민주주의 혁명을 찬양하지만 점차 자율성을 잃고 중앙권력에 예속되어 가는 미국 시민들에 대한 우려를 이야기 한다. 그는 민주주의와 평등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한 자유주의자 귀족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그를 통해 평등에 내재해 있는 예속의 문제를 들여다 볼 수 있음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토크빌의 의견을 받아들인다면 ‘평등’속에 자유와 예속의 의미들이 공존함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랑시에르의 평등전제란 현실화되어 나타나는 것에 대한 평등성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의 평등성을 의미 한다. 잠재적 평등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권력이 내게 부여한 자리에 대해 무지할 때 해방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랑시에르는 말한다. 무지함이란, 무지한 신체란 모든 것이 지워지는 신체가 아니라 이전이 습속들에 대한 무지함을 의미한다. 무지함이란 어쩌면 수많은 새로운 것들로 넘쳐나는 신체일 수 있다. 이전의 것에 대한 부족이 아니라 새로운 것의 과잉에 의해 정의되는 신체다. 하나의 일자로 동일화 되는 습속을 만들어낸 근대적 이성으로 부터의 무지함이 그것일 것이다.


죠세프 자코토라는 선생을 통해 무지한 스승이 최고의 스승임을 보여주는 랑시에르는 유식한자와 무식한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자의 평등을 넘어있는 지적 능력 자체에 대한 평등을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자격 있는 자와 없는 자, 몫이 있는 자와 없는 자와 같이 인위적인 분할에 의해 형성된 것들의 평등에 대한 주장이야 이해할 만도 하지만 ‘지적 능력’의 평등이라는 것은 태생적 평등을 의미하기에 거기에 까지 생각이 도달한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현실에서 드러나는 지능의 차이를 넘어서 잠재성 차원의 평등을 이해해야만 이러한 평등은 받아들여질 수 있다. 사실 ‘지적능력’이란 것은 이미 전개되어 온 한 사회의 필요에 의해 특정한 기준을 가지고 측정되어지는 능력일 수 있다. 민족지 학자들이 연구해온 부족들이나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들에서는 이런 지적능력의 측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IQ테스트 같은 것들이 바로 이러한 지적능력의 측정에 대표적인 것들이다. 평등의 이념이 사회적 관계의 평등, 인간의 평등으로 사용되어온 역사를 보면 이 ‘평등’이라는 표현으로는 ‘이전의 평등’을 나타내기에는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러한 평등을 좀 더 전향적으로 잠재성의 차원에서 지능이나 능력의 평등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것 또한 어떤 능력이 있을 것이라는, 있어야 한다는 하나의 전제일 수 있다. 생산능력이나 아니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으로 그것이 측정되어지거나 그런 능력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등한 것과 열등한 것이 발생한다. 능력의 평등이란 이런 ‘능력’과는 전혀 다른 능력을 의미한다. 랑시에르는 인민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지도부족이나 설명의 부족, 소통의 부족이 아니라 인민의 지능이 열등하다는 믿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랑시에르의 ‘이전의 평등’ 혹은 ‘평등전제’는 그것의 심연이 어디쯤일지 분명하지 않아 보인다. 그것의 분명함은 서구적 언어에서는 찾을 수 없을 지도 모르다. 동양적 사유인 ‘무위’라는 지점 까지 밀고나간다면 아마도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랑시에르가 존재의 평등이라 할 수 있는 무위의 영역으로 넘어갔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평등은 모든 능력의 평등으로 나아가는데 이 때 능력이란 사물의 자체의 내부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능력이 아니라 존재자가 외부와 만나면서 다른 것으로 생성되는 능력이어야 한다. 이럴 때만 온전한 평등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존재자는 하나의 기계로서 그 특이점을 통하여 외부와 만나면서 그 능력이 현행화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능력의 평등이란 무위의 영역으로 넘어선 잠재적 평등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앞서 뒤샹이 레디메이드를 갤러리에 전시하게 했을 때 하나의 평등이 실현된다고 하면서 하나의 논란이 잠재해있다고 한 것이 있는데 이것의 의미는 여기에 하나의 포획이 전제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술이 아닌 것도 미술관에 가야만 예술이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의 틈입일 수 있지만 어찌 보면 삽입이거나 포획일 수 있다. 기존의 체제로 비집고 들어간 것이기도 하지만 그 내부에 있어야만 예술의 지위가 인정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왕실의 수장고에 있던 것들이 예술품이 되듯이 이미 미술관이라는 것을 통해서만 예술품이 되는 과정이 전제된다.

또한 모든 것은 예술적이어야 한다거나 예술이어야 한다는 하나의 강박이 자리 잡고 있다. 레디메이드가 예술이 되었지만 여기에는 미술관 권력에 대한 인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 부분에서 헤겔이 이야기 하던 ‘인정투쟁’의 의미들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지배적인 것으로 부터의 ‘인정’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인정’의 과정은 곧 포획의 과정이 되어버렸음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포획으로부터 벗어나는 예술활동을  2012년 선데이 페이퍼의 ‘화요일-노란 날들’의 프로젝트로부터 볼 수 있다. 이것이 진정으로 예술을 삶의 장과 그 주변으로 끌고 간 작업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방천에서의 전시 또한 그러할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보이지 않던 예술을 보이게 하는 사건이다. 미술관의 작품들이 그것의 경제적 가치로 인정될 경우  그것은 우리들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보이지 않게 만든다. 평론가들에 의해 작품이 이야기 되고 해석되지만 미술관의 작품들은 여전히 삶과는 멀게 존재한다. 삶의 차원에서 본다면 어쩌면 그 작품들도 보이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상품화 과정은 유명해진 작품이나 그렇지 못한 작품 모두를 예술로서 보이지 않게 만든다. 상품화된 예술의 자기소외와 상품화되지 못한 예술의 배제를 통해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것이 예술이 가지는 위기일 것이다. 뒤샹의 작업에서 예술이 되는 것은 변기 그 자체가 아니다. 그의 행위가 바로 예술이며 그것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받아들이는 관람객의 사유가 예술이다. 평등과 짝을 이룬 예속처럼 이 행위는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권력화  된 것의 내부로 동일화되는 과정일 수도 있다.  오히려 그의 변기가 거대한 미술관을 화장실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다면 우리들은 그의 행위를 통해 또 하나의 통쾌함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삶과 함께한다고 해서 모든 예술작품과 활동의 고유함이 삶의 영역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술은 그 자체의 고유한 영역으로 존재하고 그것을 통해서 오히려 삶과 만난다. 

삶과 함께 하는 예술이란 어떤 것일까?

예술의 사조로서 예술에서의 ‘정치’로서 ‘정치적인 예술’을 의미하는 하나의 흐름과 경향이 있다. 중심 권력을 비판하거나 혁명을 찬양하는 예술로서 통속적인 맑스주의 예술의 이론들에 기대어있다. 정치적인 내용을 가지지 않거나 그것을 표방하지 않는 예술, 비-정치적 예술이나 소위 ‘순수예술’은 지배계급에 저항하지 않으며 그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예술로 취급된다. 이러한 예술론들은 예술을 통해 ‘정치’의 의미들을 생성했던 많은 예술가들을 적으로 돌려버렸다. 예술에서의 정치를 ‘정치적 예술’로 단순화해 버렸으며 예술의 정치적 활동을 ‘정치적’인 것으로 환원시켜버린다. 물론 재현적 예술들의 동조와 침묵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행위를 보는 능력은 단순히 정치적인 것의 취급에 근거하지 않는다. 예술의 정치란 정치적인 것을 그림의 소재나 주제로 설정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정치를 표명하는 태도나 행위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화의 과정을 통해 보이지 않던 것들 보이게 만들고 들리지 않던 것들을 들리게 만들며, 몫이 없던 자들이 몫을 주장하게 되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창조를 의미한다.


예술의 정치란 자신의 감성을 바꾸는 것, 사람들의 감성을 바꾸는 것, 도래할 세상을 위해 감성적 바탕을 창조하는 것으로 감각적인 것의 혁명을 의미한다. 예술의 정치를 보여주지 못하는 통속적인 맑주주의 예술은 사실 맑스에 대한 충실함 보다는 그것의 오해로부터 발생한다. 그것은 오래된 정치경제학의 시선을 통해서 맑스를 보았기 때문이다.11) 이것이야 말로 보이던 것을 지속해서 보이게 만드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수립 후 그것이 치안으로 전화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처럼 맑스 진영의 내부에도 불화가 존재한다. 아방가르드 예술은 이런 의미에서 정치적 아방가르드와 잇닿아 있는 지점과 함께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지점에 존재한다.

‘정치적 예술’에는 아이러니하게 ‘숭고’함이 숨겨져 있다. 이때의 숭고함이란 리오타르가 칸트의 『판단력비판』,「숭고의 분석」으로부터 차용해와 펼쳐놓은 ‘숭고의 미학’을 의미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는 맑스주의자들에 의해 부정적으로 이야기되는 리오타르가 오히려 ‘정치적 예술’가들과 동일한 예술의 체제에 속해있다는 의미에서 아이러니하다는 것이다. 리오타르는 드러나는 인간의 사교성으로부터 정치의 가능성을 이끌어내며 정치는 개인들의 이기적 이해를 떠나 무관심을 띤 지평에서 공적 합의를 이루는 활동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미의 미학’을 비판하며 그것이 합의의 절차적 정치로 이어지기 쉽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그것들에는 역사의 사건이 드러내 보이는 심연을 은폐하는 허위기능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거짓을 폭로하고 고발하는 윤리적 의무를 숭고의 미학에 부과한다.  랑시에르는 이런 리오타르의 숭고의 미학이 공동의 영역을 물질적이고 상징적으로 재형성하는 활동을 배재하고 저항의 계기만을 강조함으로써 미학의 긴장관계를 해소하고 있다고 본다. 이는 예술의 윤리화와 동시에 정치의 윤리화를 가져오며, 결과적으로 예술과 정치의 제거를 야기한다고 본다. 

랑시에르는 리오타르의 숭고의 윤리, 미학이 첫째로 사회적 관계에 복무하는 예술의 강화, 둘째로 재앙에 대한 끝나지 않는 증언에 전념하는 예술의 강화를 가져온다고 진단하는데 이런 예술은 근대적 예술체제인 ‘예술의 윤리적 체제’에 복무한다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억압과 모순의 상황에 저항하던 예술들이 윤리적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강조하는 예술로 전화되는 과정을 베트남 전쟁 당시 희생자들을 위해 바쳐진 크리스 버든의 ‘기념비’와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후 전시된 크리스티앙 볼탄스키의 ‘전화가입자들’이란 작품을 통해 설명한다.12)


우리는 흔히 윤리적 도덕이 비윤리적 정치에 대항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한국사회에서도 정치권이나 정부의 비도덕성에 대항하는 윤리적인 투쟁의 모습들을 목도한다. 80년대 반정부투쟁의 투사들은 또한 자의적이건 타의적이건 간에 이런 윤리적 인격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런 경향은 그들이 집권자나 정치가로 변화된 이후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랑시에르는 브레히트의 서사극 ‘도살장의 성 요한나’13)를 통해 정치와 윤리사이의 중재가 가능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정치적 문제들은 윤리적 호소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윤리화의 경향들은 인류 공동체의 보호라는 도덕적 당위를 정치에 기입함으로써 공동체의 사회적 관계를 위협하는 모든 것에 대한 예방적 공격을 정당화한다. 이것은 911이후 세계적 현상으로 드러난다. 역으로 윤리화는 ‘윤리적 투사’들에 대한 제거의 방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랑시에르는 근대이후 합리적 의사결정모델이 다양한 인민들을 하나의 인민으로 환원시킨다고 말한다. 이 속에서 다양한 사회의 구성원들의 합의는 하나의 일반적 권리를 형성하고 그것을 통해 그들은 동일한 권리를 누리게 되므로 하나의 인민으로 가정된다. 이렇게 가정된 하나의 인민은 단일한 공동체를 구성한다고 간주되며 이런 공동체가 보호되어야 할 당위가 형성된다. 하나의 인민만이 존재하므로 공동체의 유지와 관련된 어떤 정치적 이견이나 불일치도 존재하지 않는 공동체를 랑시에르는 ‘윤리적 공동체’라고 칭한다. 여기에서 소외된 자는 공동체가 손을 내밀어 구조해야할 난파자이거나  정체성을 공유하지 않기에 공동체를 위협하는 자, 이방인, 추방자로서 극단적 타자가 된다. 우연에 의해 발생하는 타자를 위해 공동체는 자원봉사나 기부와 같은 간접적인 참여활동을 호소한다. 그것은 ‘지구공동체’나 ‘국가공동체’ 모두에 해당되는 것이다. 범죄, 사회적 병리 현상을 유발하는 정치․경제적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수행하는 대신 도덕주의적 호소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갈등의 요소들을 해소하려고 한다. 한국사회에서도 발생하는 재앙적 사건들에 대해 즉각적이고 적극적인 모금활동이 벌어지는 현상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세월호 사건 이후에 있었던 모금활동에 대해 비판적 여론이 있었던 일은 이런 윤리적 호소에 대해 벗어나는 새로운 흐름을 의미 있게 보여주기도 한다.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의 경우 그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공유하지 않는 자가 되어버렸다. 끊질 긴 단식은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는 자로 그를 위치시켰다. 국가 공동체를 이루는 평범한 유기체의 세포였지만 그는 ‘불행한’ 계기로 암세포가 되어버린 것이다. 공동체의 신체를 보호하기 위하여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혼과 아이들의 돌봄에 대한 비난, 보상금을 노린 행위 등으로 몰아세우는 정부의 집요한 노력은 바로 정치적 문제를 윤리적으로 전환시키며 그를 윤리적 공동체의 구성원으로부터 제거하기 위한 활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정부의 노력들이 모두 관철된 것은 아니지만 윤리적 공격에 대한 윤리적 답변은 정치적사건의 문제들을 윤리적 문제로 전환시켜 버린다.


사회적 유용성에 따라 예술이 식별되는 ‘예술의 윤리적 체제’로서 정치적 예술은 예술을 도덕적 판단에 종속시키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경향은 정치적 비판의 효과에 대한 가정으로부터 가능하게 되는데, 사실 이 효과는 가정된 것일 뿐 여기에는 그럴만한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정치적 예술은 정치와 예술의 ‘특수성’을 용해하는 ‘불명료한 영역(indistinct sphere)’을 창출하며 정치적 공간을 위축시킨다. 그것의 문제는 ‘전례 없는 무한 악, 정의, 복원의 드라마’를 낳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치와 합의(consensus)를 산출하게 한다. 이런 일치와 합의는 정치의 핵심인 불화를 제거하는 공동체를 산출한다. 이것이 ‘윤리적 공동체’로 ‘정치 없는 공동체’인 것이다. 이처럼 ‘예술의 윤리적 체제’는 새로운 감성의 분할을 생성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런 예술은 매우 정치적으로 보이지만 정치적이지 않으며 첨예한 정치적 문제를 모호한 윤리적 문제로 전환시켜버리는 효과를 가져 온다.


정치와 치안은 어느 순간에 분리되어 있지만 항구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언제나 정치의 영역은 동일화의 과정을 거치며 치안으로 전화되어 간다. 하나는 혁명의 기운으로 충만했던 사회주의 혁명이 ‘불화’의 힘을 상실한 채 동일화의 과정으로 흐르는 것을, 한국 사회에서처럼 노무현 정부의 출현이나 안철수 현상과 같이 사회적으로 충만했던 변화의 기운들이 정권의 수립이나 특정한 인물을 통해 대의제 정치로 귀속되는 과정은 대중의 기대가 통치의 장치를 통하여 포획되는 동일화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로 연결-연속되는 FTA협상과 체결의 과정은 이런 포획의 과정이 어떻게 지속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하나의 예가 된다. 이 지점에서 예술이란 동일화를 해체하는 과정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는 끊임없는 과정으로 그 고유함을 인정받는다. 그렇지만 이것은 또한 해체의 과정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해체의 과정은 진실의 가능성이지 진실 그 자체를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동시대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넘어서는 지점의 경계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경계의 의미가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의 옮긴이 주석처럼  가장자리가 이처럼 플라톤이 등을 돌리고자 했던 연안으로의 경계를 를 의미하지는 않는다.14) 사실 플라톤의 연안은 동굴 속의 죄수가 나갔던 동굴의 출구와 동일할 뿐이다. 이러한 연안과 출구는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더욱 이데아의 내부로 돌아서는 행위일 뿐이며 현실을 부정하고 그것으로 벗어나는 피안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다.  오히려 진정한 경계는 죄수들의 그림자들이 비추어진 동굴의 가장 안쪽 벽의 어느 지점일 것이다. 들뢰즈가 유목민이란 ‘움직이지 않는 자’라고 하며 탈주를 역설적으로 정의 했던 것은 이런 의미이다. 정치와 치안이 충돌하는 정치적인 것의 내부의 경계, 들뢰즈라면 ‘첨점’이라는 표현으로 사용했을 그것이다. 이런 첨점은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몫을 가진 것들을 돌파하며 그 배후에 있는 그렇지 못한 것들을 드러나게 하는 지점이다. 동시대를 넘어섬이란 동시대로부터 무관심 하거나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 내부에 형성된 ‘불화’의 지점들 찾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대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근대’라는 동시대에 머무르고 있다. 


‘미학의 정치’란 예술의 가시적 실천을 통해 감성의 분할을 지속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근대의 감각적 경험구조를 형식적으로 재편하는 것이다. 감성화(esthétisation)는 감성의 분할 속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게 된 자신의 감각경험의 방식으로 부터 탈주이자 동시에 작품을 통해 관람객들로 하여금 이런 감성의 분할체제에 불화를 일으키게 하는 기획이다. 예술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나는 동시에, 그것이 관람객과 대면하게 된 순간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타자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작품이 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게 될지에 대해서는 온전히 책임질 수 없다. 여기에 회화의 경우 그려지는 그림과 보는 그림이 존재하게 된다. 작가의 ‘그려짐’ 만으로 끝나지 않고 그와 독립적인 타자의 ‘봄’으로 연결되는 예술은 작품을 통해 서로의 특이점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고 작가가 타자의 감성의 분할의 재편에 관여하게 되는 조건이기도 하며 타자를 통해 그 또한 새로운 감성의 분할을 만들어내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처럼 감성의 분할에 대한 재편은 ‘그려짐’과 ‘봄’ 사이에서 생성된다.



1) 랑시에르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라는 저서의 시작은 1981년 선거 당시 110개의 공약을 내세워 당선된 프랑스 사회당 출신 미테랑 대통령이 1988년 재선에 임하면서  어떤 공약도 내 세우지 않은 상황에 대한 언급으로 출발한다. 이런 상황은 사회주의의 몰락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랑시에르가 표현하는 바로는 “약속의 사용으로 표시되는 어떤 시간의 종언으로 묘사된다.”고 한 약속의 종언이다. 당시의 상황에서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자유주의의 승리를 선언하며 정치로부터 멀어진 것과 레오 스트라우스로부터 출발한 네오콘의 ‘정치의 회귀’가 모두 서로 상대적인 담론의 형식을 가진 치안의 동일한 의미들로 이것들은 정치의 제거로 귀결된다.


2) 자크 랑시에르 홍익대학교 강연문 <La subversion esthétique, 감성적/미학적 전복> 중, 2008.12.3.


3) 이 점에 대해 지젝은 데리다의 ‘도래할 민주주의’를 욕망의 구조로 해석하여 ‘미래에 이루어질 수 있는 민주주의’로 비판하는데 이는 데리다가 메시아라는 타자의 도래라는 유대교 전통에 충실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데리다의 메시아는 그 형식이 가지는 ‘단절’의 형식적 측면의 의미를 지지하기에 ‘단절’을 통해서 어떤 것이건 메시아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도래할 것들은 새로운 장소로서 ‘코라’를 열어젖히며 이는 기존의 장소와 틀들이 무너짐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데리다의 ‘도래할 민주주의’는 항상 새롭게 반복되는, 즉 영원회귀의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이전과 이후 - 운동가와 집권자 - 의 단절을 찾기 어려운 최장집의 ‘이후의 민주주의’야 말로 지젝의 비판을 받을 만하다.


4) 최장집의 경우는 김대중 정부의 등장을 절차적 민주주의의 출발로 보았다. 그 또한 민주주의가 아직 정착하지 못했음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그는 운동으로 맞이한 절차적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에 오히려 2000년 이후에 나타난 다양한 사회운동들조차 ‘퇴행’으로 규정한다. 여전히 ‘운동’적 이라는 것이다. 고병권은 이런 최장집의 입장을 그의 책에서 비판한다. 최장집의 주장처럼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것과 민주정부를 실제로 운영하는 단계적 사고에 대해 이 사이에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이 둘 사이에 큰 단절이 있는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이전과 이후의 구분은 운동가에서 집권자로 변화한 것에 상응하는데 여기에서 주체는 여전히 동일하고 연속적이라는 것이다. 이후는 이전의 전개이고 확장이지 단절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새로운 사회운동이 어떻게 새로운 주체(비정규직, 중고생, 이주노동자, 장애인, 성적 소수자 등)를 낳고 있는지, 어떤 단절과 변화를 겪고 있는지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주화된 사회에서도 민주주의가 문제되는 것은 그 사회가 불완전한 민주주의를 가진 후진사회이기 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 개념 자체가 어떤 완성모델을 갖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가 어떤 사회도 도달하지 못한 미래의 유토피아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제의 체제가 실패한 곳, 그 무능을 드러낸 곳에서 새롭게 정의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5) 1950년대 말 석유가 사용되면서 일본의 규슈지방의 탄광의 광부들이 대량해고 될 때 다니가와 간(谷川雁)은 해고의 중지, 타협과 조정을 요구하는 대신 그는 ‘다이쇼 퇴직자동맹’이란 것을 만들었다. 많은 이들이 복직의 요구나 해고의 반대 투쟁을 하고 있을 때 ‘다이쇼 퇴직자동맹’은 오히려 사직서를 내고 퇴직금을 요구하는 퇴직운동을 전개한다. 그들은 이렇게 마련된 기금을 통해 스스로의 콤뮨을 만들어 내는데 이것이 ‘서클마을’이다. 그들은 동일한 명칭의 시집을 통해 언어 또한 자신들의 것으로 쟁취해간다. 이런 활동을 통해 ‘기업주의로 부터의 해방’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자본주의적 욕망을 벗어나는 활동의 장을 창출해 낸다.


6)『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랑시에르, 도서출판 길, 2008, 238, 241쪽.


7)『천개의 고원』,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김재인 역, 새물결, 897쪽


8) 조르조 아가벤(Giorgio Agamben)은 그의 저서 『호모 사케르』(Homo Sacar)에서 법의 외부에 존재하는 자들로서 ‘호모 사케르’를 이야기 한다. 이 말은 고대 로마의 법체제 속에서 가져온 것으로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지만 죽여도 되는 생명’을 의미한다. 이 말의 의미는 인간의 법질서 외부에 있기에 죽여도 되지만 희생제에 사용되는 제물들처럼 인간의 법질서를 떠나 신의 질서로 편입되지도 못한다. 인간의 법질서 외부로 추방되어 있기에 무슨 일을 당해도 상관없는 존재이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경우 그들은 이러한 법질서의 외부에 있기에 이들은 폭행을 당하거나 임금을 체불당해도 무방한 존재이며 이를 경찰에 알리면 오히려 자신들이 처벌당한다. 행위 이전의 존재 자체가 불법적인 이들이다.


9) ‘불화’는 랑시에르의 저서 『불화(mésentente)』의 제목이며 그의 사상의 주요 개념이기도 하다. 이 말의 불어의 의미는 듣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entente(듣기와 이해하기)의 부정형으로 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함을 의미하며 ‘논쟁’과 ‘갈등’의 의미도 있다. 이 말은 흑과 백간의 갈등이기 보다는 백과 백간의 갈등이다. 동일하게 ‘민주주의’라 칭하지만 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예술의 정치에서 정치라 칭해지는 것을 예술의 정치적 의미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불화를 단순히 몰인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알튀세르가 이야기하던 구조적 몰인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 자체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그것을 무너뜨리는 행위를 포함한다.


10) 『미국의 민주주의』,『앙시앙 레짐과 프랑스혁명』이란 책의 저자이자 19세기의 인물


11) 흔히 1980년 대 이후 맑스주의 운동의 진영에서 조차  맑스주의 이론을 ‘정치경제학’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맑스의 『자본』을 정치경제학의 완성이나 그것의 연장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에 대한 비판은 이진경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과 『미래의 맑스주의』를 참조.


12) 자크 랑시에르, 주형일 옮김,『미학안의 불편함』, 인간사랑, 2008, 187쪽


13) 1929년 자본주의의 공황에서 미국 시카고 도살장 노동자들을 위해 싸웠던 구세군 활동가 요한나 잔 다르크는 선량하며 기독교 신앙심을 가진 육류업자 마울러를 감동시켜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실패하고 죽게 된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자본가로서의 천성과 도덕적 선량함이 양립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며 정치적 문제들이 윤리적 호소로 해소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14)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랑시에르, 양창렬, 도서출판 길, 2008, 5쪽. 플라톤이 연안으로부터 등을 돌려 3차례에 걸쳐 방문한 곳은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로 철학에 관심이 있다고 하던 시라쿠사의 왕 디오니시우스를 철학자로 만들어 꿈꾸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니오니시우스의 철학에 대한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는 위대한 철학자로부터 철학하는 왕이라는 칭호를 받는 것, 철학책을 저술하는 것을 희망했을 뿐이다. 플라톤은 자신이 바란 세상이 이처럼 철학하는 왕에 의해 가능할 수 있다는 기획의 실패를 보여준다. 그가 등을 돌린 연안은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을 뿐이고 몫이 있는 자에게 다가갔을 뿐이었다. 동시대의 견유주의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사유가 오히려 이런 정치적 평등에 다가가 있다고 할 것이다.  철학하는 왕이기를 원했던 디오니시우스가 디오게네스에게 어떤 제안을 했었던 이후인 것 같다. 길거리 우물에서 채소를 씻고 있는 디오게네스를 보고 “네가 조금만 디오니시우스 왕에게 공송했더라면 채소를 직접 너의 손으로 씯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라고 플라톤이 비아냥거리는데 디오게네스는 이런 플라톤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네가 채소를 직접 씻는 법을 배운다면 너는 디오니시우스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다.” 플라톤의 항해정치는 채소를 씻는 방법을 배우려는 의지가 없는 노예의 정치일 뿐이다. 그는 왕이나 철인으로부터 정치를 상상했고 그것을 이루려 하고 있다.    

  1. [2008/12/19] 특집 백분토론에 대한 소회 by 이길용 (127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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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굶주린 늑대 

2014.10.19 21:14:15
*.38.50.9

좋은 글 감사합니다.

소수의 엘리트가 다수를 보호 혹은 지배하는 사회와
모든 사람이 승자 혹은 강자가 될 수 있는 사회.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수 있는지 정리하기 어렵지만
전자는 실패한 사례가 많은 것 같고
후자는 성공한 사례가 적은 것 같습니다.


최근 온라인에서 많이 언급되는 것이 [수평폭력]이라 
저도 이에 관한 고민을 자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부해야하는 것이 폭력 그 자체인지 
아니면 잘못된 방향의 폭력인지 ...


오늘 대구샘터교회 리다수 모임에서 잠깐 아나키스트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다비안이시기도한 어느 집사님께서 좋은 사례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한국에서 아나키스트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인디언을 연구하는 일이 많습니다.
인디언 추장은 지도자이지만 아무런 특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PS. 단락들이 모두 붙어있어 글 읽기가 조금 어렵습니다.
단락사이에 줄띄움이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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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떡진머리

2014.10.21 21:48:35
*.11.138.194

줄 띄워쓰기에 대한 충고 감사합니다.
대체로 인터넷 상의 글들은 단락을 잘 나누는 편인데 이 글은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가 올린 글이라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수정하여 올립니다.
아마도 민주주의의 문제는 결과의 문제가 아니라 과정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아나키즘에 대한 그리스시대의 용법으로 anarchos는 아르케 없음인데 이 말은 정체가 없다는 뜻이고 지배자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다른 정체들 - monarchia(군주정), oligarchia(과두정)은 정체 앞에 지배자의 범위를 표시하는데 비해 민주주의는 demokratia는 데모스와 힘을 의미하는 kratos의 접속어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기본 정체들은 아르케 그룹과 크리토스 그룹으로 나뉘는데 아르케 그룹이 폴리스의 권력을 행사하는 직무를 둘러 싼 지배자의 숫자를 표시하는데 비해 크라토스 그룹은 그런 직무와 관련되어 사용되지 않습니다. 데모크라티아에는 지배자의 지위나 통치수단을 장악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정체없음을 의미하는 아나르케의 의미가 민주주의의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 입니다.
민주주의는 완성된 체제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체제에서건 그 내부에서 항상 문제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정체 없음이란 무(無)정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잉을 의미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데모스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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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4.10.20 22:43:08
*.94.91.64

랑시에르,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프랑스 철학자인가 보군요.

정치철학자인가요?

제목이 재미있는데,

숙독하지는 못했습니다.

어딘가 기고한 글처럼 보이는 군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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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떡진머리

2014.10.21 22:11:06
*.11.138.194

목사님 안녕하시지요.

대구 Y에서 행사를 하신다는 이야기 전해 들었습니다.
랑시에르는 프랑스 철학자 입니다.
루이 알튀세르의 제자인데 그와 함께 <자본론 읽기>집필에 참여했었습니다.
이후에 알튀세르 이론을 비판하면서 그와 결별했습니다.  
그는 정치와 예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2008년도에 한국에 방문해 서울대, 홍익대 등에서 강연을 했으며 2014부산 영화제의 뉴커런츠상 심사위원 이기도 합니다.

미술분야에서는 랑시에르의 미학이론에 대해 많은 고민과 그것을 작품에 적용하는 작업들이 진행되어지고 있습니다.

이 글은 대구의 미술가 그룹인 '썬데이페이퍼''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작성된 자료입니다.
이 그룹은 지금 방천시장에서 전시중입니다.
이 전시는 올해 초부터 내부의 열띤 논의를 통하여 만들어진 전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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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랑시에르의 정치와 치안 그리고 예술 [4] [레벨:20]떡진머리 2014-10-18 1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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