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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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세상을 '살 동안만' 인식하며, 사유하며 살아간다.
'살 동안만'이라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을 의미할 수도 있고
어떤 이들에게는 '순간이라는 시간'을 의미할 수도 있다.
모두에게 동일하지만 모두가 다른 시간을 사람들은 살아간다.
성경에 나오는 유대인들은 그들의 시간 안에서 그들을 구원해 줄 메시야를 기다렸다.
그들이 처해 있는 삶의 자리가 언제나 불안하기에 그들의 메시야 고대는 아주 절박했다.
하지만 그들의 메시야 상(像)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야 상(像)은 시간안으로 들어온 하나님이신 예수와는 달랐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다시 오실 메시야,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재림을 고대한다.
삶의 자리가 언제나 불안하기에 유대인들처럼 그러한 현재의 삶으로부터
해방을 희망하며 그리스도를 고대한다.
유대인들이 가진 메시야 상(像)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못했듯이(요10:24)
현대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들 속에 포함되어 있는 나도 그런것은 아닌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고백하는 나는 어떤 메시야 상(像)을 가지고 있는가?
그 메시야 상(像)이 유대인이 기다리던 메시야 상(像)과 동일하지는 않은가?
그 메시야 상(像)이 현재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와는 달라서 여전히
불안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은 예수를 통하여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으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예수를 통하여 피조물의 형태를 취하셨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예수를 통하여 전혀 전능하지 않게 보였으며,
영원하시고 편재하시는 하나님은 예수를 통하여 지금 그리고 여기에 한정되셨다.
영원과 동시에 시간을, 하나님과 동시에 인간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예수그리스도!!
성령하나님의 부르심과 인도하심으로 그 분을 바라볼 때, 믿을 때 하나님과의 만남은 가능하다.
그 만남을 통해 믿음의 선배들은 언제나 예수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고백했다.
나의 믿음 또한 거기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주님 예수그리스도를 믿습니다.'(마16:16, 요20:28)라고 고백한 믿음의 선배들을 따라
나 또한 그렇게 고백한다.
'주님 예수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이 고백을 통해 믿음의 시작을 하며, 믿음의 본질이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것은 곧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하나님 안에 있는 믿음,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믿음이다.
나의 믿음은 어디에서 시작하고 있는가?
나인가? 아니면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인가?
나로부터 시작된 믿음은 언제나 바람에 나는 겨와 같으며(시1:6) 꺼져가는 등불 같으며(사42:3)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며(약1:6) 언제나 비천하며, 율법에 매인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믿음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임마누엘- 안에 있으며
비천함을 돌보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며(눅1:47-48), 만물보다 크신 하나님만 찬양하며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와 믿음 안에서 언제나 자유에 매인다. (눅1:38)
세상을 '살 동안만'인 나의 시간안에서 이렇게 인식하고, 사유함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믿음이 없다.
이러한 나의 불신앙과 직면하면서, 날마다 성령하나님의 부르심과 인도하심에 놀라면서
다만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주여 믿음 없는 나를 도와 주소서' 간구한다.
신앙적 진정성이 살아있는 북소리 님의 신학 묵상 단편을 잘 읽었습니다.
이런 글쓰기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교 영성의 중심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갈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