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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 울려 퍼지는 생명의 맥박

조회 수 789 추천 수 1 2016.12.02 21:4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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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묵상의 시원에 관한 글을 보고 생각이 나서 올립니다.
시원적인 것을 경험할 수 있는 일상은 어딘가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층다기하며, 그 편린의 경험을 통해서 하느님을 경험하고 하느님의 질서에 참여할 수 있을 텐데, 최근 제게 그 장은 광화문 광장이었습니다. 이런 시원적인 것의 경험은, 물론, 그리스도의 부활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광화문에서 만났던 것들은 긍정적인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여기에는 밝은 면만을 남기려 합니다. 내일도 총궐기가 크게 열릴 텐데 거기에 참여하는 다비안들께 하느님의 평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광화문에 울려 퍼지는 생명의 맥박]

시원적인 것
 시원적인 것, 원형적인 것에 잇대어 살도록 하는 물결이 인류에게는 종교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종교를 단순히 인간이 고안해 낸 사상 혹은 체계라는 의견에 나는 반대한다. 창발적인 우주는 무생물과 생물의 진화에 자양분이며 진화의 과정 속에서 인간이 출현하는 유기적 환경이다. 인간이라는 개체가 따로 존재하고 자연과 우주가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상호 관계적이며 유기적인 몸을 함께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인간의 특성과 능력을 인류에만 한정시키는 것은 거시적인 시각을 놓치게 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은 정신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인간 사회에서 정의를 갈구하고 우주적 지평에서 만물이 맺어야 할 관계의 방향을 상상한다. 경험하고 있는 세상에 때로는 절망하고 때로는 애통해 하고 때로는 약비나게 여기지만, 그리고 인류의 상황은 억압과 횡포가 난무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새로운 질서의 희망을 가지며 그 소망 가운데에서 우리 스스로를 고양시킨다. 이를 인간만의 ‘상상 및 망상’으로 쉬이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세상을 바라보며 시원적인 것을 직관하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순례하는 인간은 만물과의 관계 속에서 배태되었기 때문이다. 우주와 함께, 우주 안에서 창발된 존재자인 인간은 드넓은 우주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으며, 만물은 인간과 함께 변화한다. 말하자면 우주적 차원에서 모든 존재자는, 불완전하게나마, 상호 침투하고 상호 내재한다(perichoresis). 인간이 ― 아니 온 우주가 ― 위대한 상상력을 품고 소망 가운데에서 스스로를 초월해 나가려 하는 것은 시원적이고 원형적인 강렬한 힘이 우리를 흔들어 깨우며 우리와 함께하며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근래에 내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으로 말하자면, ‘생명의 맥박’이 은밀하게 세상에 울리고 있는 것이다. 종교 현상은 이러한 생명의 맥박에 공명하는 사람들의 반응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인 나는 이 생명의 맥박을 하느님이라는 표상으로 경험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거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문제가 연일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이른바 비선 실세로 알려진 박근혜 씨의 최측근 최순실이 국정 인사·대통령 연설·외교·국가 기밀·정경유착형 비리 등에 손을 뻗치는 등 국가 권력의 민주적인 시스템을 기만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사건의 중심에는 국가의 민주적인 체계를 무시하고 최순실 등과 연결하여 국정을 운영하려고 했던 박근혜 씨가 있다. 제계 인사들과 대기업을 이용하여 개인의 영달을 위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고 제계 사람들은 권력과의 연결을 통하여 특혜를 받으려 유착을 했다. 여기에는 정략적인 계산으로 이들에 부역한 정치인들도 연루되어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누군가의 표현에 의하면 상위 1%가 99%를 우롱한 것이다.
 사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드라마 《자이언트》 마지막 회(2010. 12. 7. 방영, SBS)의 다음과 같은 대사가 떠오른다. “나는 당신 따위 이길 생각 같은 거 애초부터 없었어. 처음부터 내 상대는 당신이 아니었으니까. 조필연, 당신 같은 인간이 잘 사는 세상, 내가 이기고 싶었던 건 바로 그 더럽고 악랄한 세상이었어. 나한테 당신은 처음부터 아무 것도 아니었어.” 이 드라마는 군사 독재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군부·정계·제계의 추악한 유착 관계가 어떻게 우리의 현대사를 오물로 더럽혔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군부 출신이자 정계에 진출하여 독재 대통령을 돕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활동하면서 가족 등 주변 인물을 통하여 제계를 장악하고 있는 추악한 악역 ‘조필연’이 자신을 무너뜨린 주인공 이강모에게 “뭐야? 날 이겼다고 생각하는 건가?” 하고 묻자 대답했던 말이 바로 위에 언급한 대사이다. 조필연으로 상징되는 독재 권력이 우리가 쓰러뜨려야 최후의 ‘거인’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악랄한 사람들이 잘 살아가는 세상, 그 질서가 바로 우리가 상대해야 할 진정한 ‘거인’이라는 것을 함축적으로 보이고 있는 《자이언트》는 지금 우리에게도 주는 메시지가 있다.
 이 거대한 힘, 우리가 싸워야 할 거인은 성서에서도 여러 이름으로 등장했다. 크고 강한 힘으로 무장한 느빌림, 풍요주의와 물질만능주의 형태를 띠는 바알과 아세라 그리고 맘몬, 어린 아이와 같이 힘이 없고 죽이더라도 사람들이 크게 연연하지 않았던 이들을 희생시켰던 몰록, 전쟁에서 승리하여 사람들을 짓밟고 착취함으로써 이룩하는 로마의 평화, 이방인·가난한 자·사회적 소외 계층 등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율법주의 등. 우리 시대에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여 사람들을 객체화하며 몇 사람들만 부를 독점하는 힘으로 작용하며 혐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여 여성 혐오(misogyny), 성 소수자에 대한 혐오, 조선족에 대한 혐오, 타 민족에 대한 차별과 혐오 등으로 우리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형형색색 여러 빛을 띠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말살하고 차이로 사람을 구분하여 차별하고 혐오하는 거대한 흐름, 다른 사람을 밟고 일어서려는 거대한 흐름,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시원적인 관계를 파괴하려는 거대한 흐름, 이 거인을 ‘악마’로 불러 왔다. 우리는 박근혜-최순실 뒤에 웅크리고 있는 거인을 보아야 한다. 그래야 고작 ‘조필연’을 쓰러뜨리는 데에 만족하여 제2·제3의 조필연이 등장하는 형국이 반복되는 것을 조금이나마 경계할 수 있을 테다.

현장의 전례(leitourgia)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 거인이 주관하는 질서에 저항한다. 시원적인 생명의 질서, 우리가 꿈꿔야 할 관계는 사랑의 신비라 할 수 있는 온전한 상호 내재(perichoresis)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내가 이 사람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이 사람들을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3) 다른 사람, 다른 민족을 짓밟고자 하는 종적(縱的)인 관계를 벗어나 새로운 열망으로 살아가려는 삶이 바로 신앙이다.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이 짙게 깔리어 있지만, 울분이 차오르며 절망스럽지만, 새로운 상상력과 희망으로 오늘을 바꾸어 보려는 일련의 몸부림이 신앙이다. 이 고백과 신앙이 가리키는 시원적인 힘을 ‘민중총궐기 현장’에서도 맛볼 수 있다.
 누군가는 거리의 촛불과 분노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고 말한다. 동의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대상은 말 그대로 ‘거인’이다. 악마적인 질서를 당해낼 재간이 없다. 심지어 어느 정도는 누구나 이 질서에 연루되어 있으며 여기에 참여하고 있다. 그 누구도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자세히 살피어 보고 검토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그렇다. 그러나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동시에 전적으로 반대한다. 거리의 분노, 의사의 표출은 ‘거인’에 맞서겠다는 몸부림이며, 우리는 그 몸부림 안에서 시원적인 것을 ‘겪기’ 때문이다. 거리의 촛불과 분노는 결코 헛되지 않다. 민중의 몸부림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각성한 민중의 연대가 역사를 바꾸어 왔음은 물론이다. 성서에서 나오는 ‘할렐루야’는 희망적인 상황, 기쁜 상황 속에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표현이 아니었다. 시편과 요한묵시록에서만 등장하는 이 표현은 가장 어둠이 짙을 적에, 가장 절망적일 적에, 슬픔과 분노가 치밀어 오를 적에, 횡포와 억압과 술수가 가득할 적에 정의의 불길이 모든 것을 사르고 승리하기를 바라는 열망 속에서 외치는 말이다. 어디에도 빛을 찾을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빛을 직감하는 사람들, 아니 깊은 어두움 속에서 역설적이게 빛의 힘을 발견하는 이들이 외치는 말이다. 그렇게 ‘없이 계신 하느님(다석 유영모 표현)’, 없이 있는 시원적인 것을 경험하고 노래하는 표현이다.
 민중총궐기의 현장, 광화문과 시청 거리 곳곳에서 민중의 함성이 가득하다. 여러 단체에서 깃발을 들고 모였고 여러 사람들이 곳곳에서 왔다. 중고등학생 연합 단체에서 대거 합류했으며 여성 단체에서도 왔다. 보수적인 색채가 짙은 지역에서도 왔다. 100만이 넘는 민중들은 조금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새로운 희망을 향해, 정의로운 세상을 향해 연대했다. 성찬의 전례 중 성체 나눔(분병례)을 할 적에 “우리는 서로 다르나 한 빵을 나누며 한 몸을 이룹니다.”라는 고백이 “우리는 서로 다르나 한 희망을 나누며 한 몸을 이룹니다.”라는 길 위의 고백이 되는 순간이다. 도심 거리를 행렬할 적에는 한 마음으로 구호를 외친다. 이 때 누군가가 선창을 하게 되는데 평소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아니 목소리를 내고 싶어도 사회 시스템이 ‘가만히 있을 것(세월호 참사 때와 같이)’을 강요했던 이들이 각자의 목소리를 높이어 이끌어갔다. 어린 아이들과 여성 그리고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이끄는 선창에 마음을 모은다. 서로가 서로를 끌어가고 높고 낮음이 없이 서로의 마음을 모아 하나로 드높인다. 여기에서 생명의 힘, 시원적인 것이 움튼다. 사회 기득권을 향하여 거인을 향하여 ‘종말’을 선언하는 순간만큼은 종적 질서는 해체된다. 집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는 여러 사람들이 쓰레기를 줍는다. 누군가가 줍자고 외치지 않지만 자발적인 행동이 일어나는 곳에서 내 눈에 보이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 여성이었다. 이들의 모습은 현장을 아름다움 축제의 장으로 이끌었다. 궐기의 현장에는 서로가 다치지 않도록 배려하고 격려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에 모인 민중들은 서로의 삶이 서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으며 서로 연대하고 마음을 모을 때에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 뿌린 대로 거두고 일한 대로 먹을 수 있는 세상,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과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집단적으로’ 그리고 감격적으로 경험한다. 이 현장은 거리의 전례·삶의 전례의 장이 된다. 하느님의 질서인 생명의 힘을, 그 맥박을 체감할 수 있다. 원형적인 힘은 이처럼 '현장들'에서 경험할 수 있다.

에필로그
 생명의 맥박에 공명하여 나온 민중의 발걸음이 보이는가. 성난 백성들의 광야에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거인에 맞서고자 손을 맞잡은 사람들의 뜨거운 용기가 느껴지는가. 사회적 지위의 벽과 경제적 차이의 벽 그리고 차별과 혐오의 벽을 무너뜨리어 하나 된 이들의 뜨거운 심장이 느껴지는가. 어둠만이 짙게 깔리었다고 한탄한다면 이들을 보라. 죽임의 질서만이 우리를 지배한다고 좌절한다면 이들을 보라. 금수강산의 빛이 어디에 있느냐 묻거든 이들을 보라. 살림의 질서, 부활의 생명이 어디에 있느냐 묻거든 이들을 보라. 생명의 맥박에 공명하는 이들의 혈액이 황폐한 곳, 말라가는 곳을 소생시키리.

[레벨:21]주안

2016.12.02 23:00:05
*.69.199.48

오! 멋집니다.

생명의 맥박이 이루어낼 열매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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