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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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국가가 다양한 인민들을 국민으로 통합하는 과정은 상이한 인민들의 기억을 하나의 역사로 통합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런 통합된 기억은 단일한 역사의 범주에 들어오지 않는 것들을 배제하거나 지우고, 그렇게 되지 않는 돌발적 사건들은 역사화하며 역사의 안으로 포획하여 왔다.
5.18광주는 80년대 내내 우리들 속에서 긴장을 만들어내며 한국사회를 흔들어왔다.
국가의 군대가 국민을 향해 살육을 저지른 사건.
국민이 자국의 군대와 싸우며 항쟁한 사건.
'폭동'이라는 언어들 통해서 배제하려고 하였으며 언급되는 것을 터부시하며 우리의 기억으로부터 지우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끊임없고 치열한 투쟁을 통해서 배제되지도 지워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돌발로서의 '폭동'조차 '민주화운동'과 '국립묘지'의 지위를 얻으며 국가의 민주화를 위한 위대한 역사적 사건이 되었고 역사에 포획되어 들어갔다.
5.18은 이제 아무런 사회적 긴장을 형성하지 못하며 대중운동의 동력 또한 만들어내지 못한지 오래되어 버렸다.
오히려 투쟁의 영역에서 배제되어버렸고 지워져 버린 채 행사장의 노래와 그 명예를 훼손하는 일베들의 행위에 대해 소심하게 대응하며 스스로 투쟁한다는 위로를 하는 그런 사건이 되어버렸다.
민주화 운동이라는 이름아래, 국가에 의해 살해된 이들은 이제 국가를 위한 일을 했다며 국가에 의해 기념되는 치욕을 겪는다.
국민에 반하는 기억이 국민의 기억으로 포획하며, 역사의 외부에 있던 폭동이 내부의 운동으로 되면서 단일한 역사의 안으로 편입되어 버리며 다른 방식으로 지워져 버린 것이다.
이렇듯 동력의 소멸과 서서히 잊혀져가는 항쟁의 기억을 안타깝게 비판하지만 이런 지워짐의 역사로 부터 자유로운 이들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국정이나 교학사와 구별되고 있는 교과서들 또한 이런 기억의 통합 작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전히 민주화운동으로 명명되는 것을 지키고자 할 뿐이며 그것의 진정한 동력인 폭동의 힘은 망각해 버리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돌발, 폭동적 사건을 역사 속에 포함될 수 있는 형태로 해석하거나 변형시키고 있는 일들은 이미 흔하게 일어고 있는 것들이며 그것을 통해 ‘민주화운동’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에는 탁월한 철학적 기술이 사용된다.
그것은 변증법이다.
이 기술은 진보적이라고 불리는 이들에게 더 사랑받는 기술이기도 하다.
서로 대립하고 투쟁하던 것들을 잘 통합시켜 하나의 역사로 통일하는 기술, 바로 변증법이다.
단일한 역사를 뚫고 나오는 돌발들이 통일되어 하나로 나가는 역사를 우리는 역사의 발전, 혹은 진보라고 불러왔다.
하지만 역사에는 다수의 역사로 포획되지 않고 폭동으로 남아 긴장과 파열을 일으키며 통합되지 않는 돌발적 사건들이 있어왔다. 이것을 ‘진보’라 부르던 아니면 다른 이름으로 부르던 간에 변증법적 발전과는 동일한 범주에 놓여있지 않음은 자명해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진보가 아니라고 해도 '폭동'이 '민주화 운동'으로 해석되고 명명되는 것 보다는 훨씬 힘을 간직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5월 광주가 역사화 되지 않았을 때, 그것이 항쟁이고 폭동이었을 때 그것은 항상 투쟁의 동력이 되었었다.
강한 생명력이 느껴집니다.
전부이해되진 않지만,
보편적 역사화가 과거의 어떤 사건들을 언어안에서 개념화시키고, 역사로 화석화 시키면서
돌발적으로 분출되는 결코 포획되지 않는 에너지와 생명력을 그림자처럼 만든다 ...
저는 이런 수준으로 이해됩니다.
덧붙여 이런 수준에 이해에서, 제 수준의 신앙과 연결지으면,
절대적 타자인 하나님을 인정할 때에만, 그런 동일성들을 멈출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사실 인정보다는 경험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긴한데,
개인적으로 절대적 타자인 하나님을 경험할 때 비로소 자아에서 벗어나 타자를 인정하고,
동일성을 멈출수 있는 시작점이 마련되었던 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변증법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설명하려는 시도 역시 돌발적이고 살아 생동하는 생명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에 대해서는 부족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어차피 이런 부분은 키르케고르도 우리들의 실존과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한 부분과 일맥하긴 할테지만요 ...
결국, 중요한건 인간의 역사, 인간의 현실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 성령의 현실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어쨌든 제 소박한 신앙에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맡기면서 기도하다보면 되겠지 하면서 살아보려고 합니다 ^^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자신의 사유를 이해해 주는 것 보다 나의 글을 통해 그 글을 읽는 사람이 다른 사유를 생성할 수 있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글이란 쉽게 쓰거나 어렵게 쓰거나 상관없이 그 의미에 다다르지 못하고 항상 미끄러지기 마련이니까요.
라캉이 "기표는 기의에 다다르지 못하고 미끄러진다."고 표현 했던 의미일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제가하고 있는 철학적 사유의 문제와 신앙의 영역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중입니다.
믿음의 문제는 키르케고르가 이야기 한 대로 보편적 이성을 벗어나 있는 어떤 것 같습니다. 아마도 변증법의 영역에 담아낼 수 없는 어떤 것들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이 것으로 부터 인간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것을 넘어서는 기독교적 힘을 발견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선과 악에 대한 우리들의 윤리적 종교관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이 가지는 이런 선악의 종교관은 사실 인간적 윤리학의 범주안에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는 힘을 저는 미안하게도 무신론자로 공인되는 니체로 부터 얻었습니다.
그리고 신학자 야콥 타우베스로 부터 시작된 바울에 새로운 대한 연구들이 주목할 만한 현대철학자들로 이어지며 진행되고 있음은 이런 생각을 조금더 구체화 시키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나중에 조금더 생각이 풍부해지면 글로 써서 함께 고민할 기회를 만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소박함은 좋은 미덕입니다.
무엇인가 의미가 생성되는 것은 이전의 것들에 나의 욕심을 얹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하나씩 버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믿음은 이와같이 세상을 긍정하는 힘과 연결되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역사 해석이 재미있군요.
세상 모든 일들이,
예수나 부처나 마르크스에 의한 일들도 역시
시간과 더불어서 역사화되는 건 당연한 거 아닐까요?
돌발적 사건이나 투쟁의 동력도
이런 변증법적 역사화의 큰 범주 안에 들어 있으니
그걸 너무 첨예하게 구별하지 않는 게 옳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역사화가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지만 않는다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