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조회 수 441 추천 수 0 2016.10.12 11:3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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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말은 독특한 영적인 매체다. 여기서 말은 글을 포함하는 표현이다. 즉 인격자들 간에 서로 소통하는 매개를 말한다. 아마도 짐승들은 말이라고 하기 보다는 소리를 통해서 자기들 나름으로 소통을 하는 것 같다. 성경이 율법주의자들을 개나 돼지 곧 짐승으로 표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말이란 그 소리나 문자와 함께 역시 담긴 그 의미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소리나 글은 결국 그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처음 성경은 인간이 소리로 읽을 수 없는 글자로 주어진 것도 같은 의미가 있다.

그런면에서 인간들이 공부를 한다는 것은 그 대부분이 그 말을 배워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서로 다른 차원의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실은 원론적인 면에서는 그 말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예를 들어 국어와 수학이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어쨌거나 그 말이나 글이 없으면 소통도 전달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모든 배움은 실은 그 말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가 그 '말을 영이고 생명이라'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면에서 신앙 또는 신앙생활이란 다르게 표현한다면 곧 그 말을 다시 배우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상징적이지만 출애급 여정에서 광야가 바로 그런 장소로 상징되는 곳이라고도 이해한다. 즉 애굽의 말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 곧 그 말씀을 이해하는 곳이라는 의미다. 애굽에 살 때는 몰랐지만 거기를 벗어나보니 그 애굽의 모든 말들이 종교적으로 거짓(율법)이었음을 비로소 아는 것이다. 물론 당시로는 모세가 유일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여호수아와 갈렙이 이해하게 된다.

그 종교적 말들의 최상은 결국 만나를 먹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즉 종교의 목적은 곧 인간의 필요를 채우는 것 곧 배를 불리는 것 곧 생존을 위한 먹고 마시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위해서 율법도 결국 만나 곧 떡을 만드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이라고 한다. 오늘도 신비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역시 만연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 만나를 먹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만나를 통해서 그 말씀을 먹게 하는데 결코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되면서 받았다는 광야 시험 에피소드의 첫번째가 바로 그것이었다. 일반 사람들 곧 율법적 존재들은 그 시험의 진정한 결론적 물음을 볼 수 없다. 그러기에 '돌을 떡으로 먹는다'만 보이는 것이다. 곧 기적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된 자에게만 그 진정한 문제가 보인다. 즉 그 모든 과정은 결국 그 말씀에 있다는 것을 안다. 즉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가 그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곧 그 새로운 말이 주어진 사람이라는 표현이다.

그러나 그 말은 원래 우리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속에 원래부터 있던 것은 율법적인 말 곧 종교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인간은 누구도 예외없이 자연스럽게 그 종교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율법적이라고 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율법적이라는 표현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아주 인간적이라는 의미다. 요즘 많이 사용하는 그 휴매니즘이다. 그러기에 오늘도 역시 그 휴매니즘과 복음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혼동하는 이유다.

창세기에 인간 창조의 그림에서 그런 인간 곧 아담에게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 넣는다'는 표현은 분명 그 말 곧 진정한 그 말씀을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표현 역시 굳이 신약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말은 성령이기도 하고 그리스도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그리스도인'이란 그저 교회 다니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 결코 아니라 그 생기 곧 '하나님의 말씀'이 넣어져 생령 곧 '성령의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말씀 육신'이란 표현이 그것이다. 그 말씀은 비로소 그 말을 알아 본다.

그런데 이 말이란 참으로 독특하다. 영적이라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즉 내가 말을 말하지만 때로 그 말이 나를 말한다. 내가 그 말을 하는데 그 말이 내가 되기도 한다. 즉 사람은 그 말과 하나다. 즉 아무리 고상한 표현의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속는다고 해도 그 말과 하나인 사람은 절대 속지 않는다. 말은 표현 뿐아니라 그 자체가 가지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말과 하나되었다는 것은 곧 그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 말이 가지는 그런 이중성은 일종의 창조 원리 또는 예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성경은 율법과 진리로 대조해서 표현한다. 곧 같은 말이지만 율법과 진리는 다르다. 형태나 표현 방법은 그 둘이 결코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고 해야 한다. 즉 상징적으로 율법은 만나로 보이고 그래서 육신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진리는 그 말씀의 내용으로 곧 그 의미로 들린다. 그러기에 그것이 그리스도인 예수에게는 시험이 되는 것이다. 다른 일반 사람들에개는 시험 자체가 되지 않는다.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의 시험은 먼저 상징적이지만 '성령 임함' 후에 있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구원은 곧 그 말의 변화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온전히 그 말이 고쳐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면에서 타락은 그 말이 고쳐지지 않고 원래 그대로 있는 상태 자체인 것이다.즉 다른 무슨 죄를 따로 지어서 생긴 결과가 아니라 그 말이 주어지지 않은 옛말 상태 그대로를 지칭하는 성경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현상은 오늘도 여전하다. 해 아래 세것이 없다.

즉 내가 어떤 말(영)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성경이 그 말대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곧 율법을 가진 자는 성경도 전부 그 율법으로 보여 그 인간적으로 자연스럽게  이해되어 그렇게 적용해서 열심히 행하면서 산다. 바리새인들로 표현되는 그 부류가 곧 그 대표적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그 생기 곧 숨 또는 성령, 보혜사, 그 진리 또는 진리의 말씀 등으로 표현되는 것이 주어진 사람, 곧 하나된 사람에게는 똑같은 성경이 율법으로 보이긴 하는데 뭔가 다른 것을 눈치챈다. 즉 그것이 그런 표현 속에 분명 의미가 담긴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자꾸 배워가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실은 세상의 일반적인 삶에서도 사람들이 자녀들을 교욱시키고 자기들도 꾸준히 배우는 것이 곧 같은 원리이기도 할 것이다.

즉 신앙 생활이란 결국 그 말이고 그 말을 배워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 말이 온전하면 완성적 존재다.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 말이 얼마나 고상하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진리냐를 말하는 것이다. 혹 때로 쌍욕을 하고 인간적으로는 손가락질 받을 만한 표현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이 진리인 자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너무나 고상한 말만을 하는데도 실은 율법만을 말 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많은 것이 세상이다. 율법의 말을 가졌기 때문이다. 즉 예수와 바리새인의 극단적 대조다.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예수가 될 것이냐 바리새인으로 살 것이냐 를 묻는다. 하긴 이런 물음도 그 말이 담긴 사람에게만 가능한 시험이다. 이미 말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이런 시험도 없다. 시험은 아는 자에게 치르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 그들에게는 인간적인 시험만 있다. 아니 시험이라기 보다는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어려움이거나 유혹 등이라고 할 수 있다.

[레벨:12]staytrue

2016.10.12 15:37:00
*.241.177.84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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