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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비평집을 다시 한번 읽어가다가,
예전에 누군가 원 베네딕트 선교사님에 대해 설교비평을 의뢰하신 분이 있으신 것 같아서
독서시간을 조금 쪼개서 목사님을 흉내내어 봤습니다.
원 선교사님은 제가 정 목사님 다음으로 존경하는 설교자시기도 합니다.
예고편으로 미리 올려봅니다. 너무 어리숙하지만 한번 읽어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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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사역
국내에서 청소년들을 전문 대상으로 한 목회자는 아직 드물다. 물론 연세중앙교회 윤석전 목사와 같이 다세대를 겨냥하여 활동하는 목회자들이나, 시무하는 교회가 없이 수련회 등에서 활약하는 전문 부흥사들이 있긴 하지만 아직 '청소년 사역'이라는 분야는 국내에서 생소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기독교 선교단체에서 거의 독보적으로 이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유스미션(Youth Mission)의 원 베네딕트 선교사다. 그는 국내 청소년 사역계의 거장이라 해도 좋을만한 것 같다. 매년 여름과 겨울 두 차례 열리는 그의 '사명캠프'엔 적지 않은 회비를 무릅쓰고 수많은 청소년들이 참석하며, 유스미션 홈페이지엔 만명이 넘는 회원이 가입되어 있다.
여기에서 청소년 사역이라는 개념에 대해 잠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 유스미션 외에도 국내 청소년 사역으로 잘 알려진 선교단체로는 예수전도단(YWAM), 라이즈업 코리아, 오병이어 등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첫째, 정기적으로 집회나 수련회를 개최하는 형태로 청소년들을 불러모으며 둘째, '꿈과 비전'을 주재료로 삼는 도전적 메시지로 목회를 시도한다는 것이다.
필자도 청소년으로서 이런 선교단체들의 집회에 몇몇 참석해본 경험이 있다. 한국교회의 주일학교와 학생회 인구는 계속 감소추세라지만, 웬일인지 이 선교단체들은 그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했다. 아니면 한국교회의 현실과 동떨어진 자기만의 무언가에 서로 도취된 상태는 아닐까? 열변을 토하는 소위 청소년 부흥사들과, 그 장단에 맞춰 뜨겁게 기도하는 또래 청중들을 보며 한편으로 떠오른 의문이었다.
또한 이들의 청소년 사역이라는 것이 지나치게 획일적이라는 점도 의문스러웠다. 너무나 감정적인 CCM곡들, 그리고 뜨거운 설교와 통곡의 기도가 어찌 매회마다 동일한 레퍼토리로 진행되는 것일까? 이들이 이러한 반복적 목회 행위로 과연 추구하는 바가 무엇이며, 얻는 것은 무엇인가? 청소년 사역자들 스스로가 자백하는 것처럼 '여름수련회에서 은혜 받으면 빨리 식어버리니까 겨울수련회에도 오게 하는' 것이 단지 그들의 목표인 것인가?
영향력 있는 지도자?
그래서 국내 최고의 청소년 설교자라는 원 베네딕트 선교사(이하 원 선교사)의 설교를 보며 이 점에 대해 답을 내려보고자 한다. 실로 그가 끼치는 영향력은 어떤 대형교회의 중고등부 담임전도사들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다.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능숙한 영어설교로 청소년과 청년층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게다가 저서들의 제목을 보아도 '10대에 꿈을 꾸고 20대에 준비하여 30대에 영향력 있는 인생이 되라'처럼 매우 도전적이다.
원 선교사의 설교에서 핵심 키워드는 단연 '영향력'이다. 그는 매주 월요일 유스미션의 공개집회를 통해 정기적으로 설교하고 있는데, 이 집회의 소개문구를 보아도 '시대에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키우기 소원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청소년들을 향해 꽤 긴 시간이라고 생각되는 약 50분 동안의 설교에서 원 선교사는 '꿈과 비전', '사명', '믿음', '쓰임 받음' 등의 단어를 유난히 힘주어 발음한다.
사실 이러한 소명론적 관점의 설교는 기독교의 본질과 크게 떨어져 있지 않으며, 칼빈의 직업소명설과 같이 신학에서도 중요한 주제임엔 틀림이 없다. 그런데 한국교회 설교자들의 대부분을 보면 소명론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 그저 신앙적 아포리즘을 가볍게 나열하는 것에만 그친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런 경우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드러나게 된다.
첫째, 막연한 분별력을 가지고 신자들의 가슴에 상처를 주는 경우이다. 인도하심이니 부르심이니 하는 단어는 풍요롭게 나열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우리의 삶을 충분히 해석해내지 못한다. 그래서 남는 것은 '그때 그때 다른' 분별기준 뿐이다. 성서에서 아브라함과 야곱, 요셉 등의 삶을 해석은 하지만 결국은 종교적 당위론에만 머물고 만다.
성서는 영웅전기가 아니라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포착해낸 기록이다. 그리고 그 관계의 주도권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 성서가 전하고자 하는 궁극적 메시지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성서를 읽으며 성서 인물들의 영성에 감탄하는 설교자일수록 어설픈 소명론을 내세우기 쉽다. 그들에게는 성서 인물들의 삶과 현대인의 삶 사이에 일어나는 괴리를 메워줄 도구가 교양이나 윤리일 뿐이다.
그래서 청중들에게 은연중에 '니들은 왜 얘들처럼 못 하냐?'라고 꾸짖기가 일쑤다. 각 가정마다 처한 특수한 삶의 환경과 걸어온 길을 무시한 채, 남의 집 아이의 일정면만 보고 자기 아이와 비교함으로서 아이가 열등감에 놓이게 만드는 어머니와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청중들이 가진 진정한 재능과 은사는 무시되고, 성서 인물들의 특수한 하나님 경험이 '무조건 획일화'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둘째 문제는 지나치게 낭만적인 소명론에 헤매는 것이다. 이것이 기복주의나 열광주의라는 표면적인 형태로 판단될 수 있지만, 사실 내재된 '신앙 낭만주의'는 그 정도가 훨씬 심각하다. 앞에서 제시한 문제가 '하나님의 뜻'을 지나치게 관념화하고 절대화한다면, 이 문제는 자기 기도나 삶을 하나님 앞에 절대화한다.
특히 입시문제 때문에 막막해하는 국내 청소년들과 학부모들에게 이러한 낭만적 메시지는 잘 먹혀드는 떡밥과 같다. 한때 서울대 수석졸업자의 신앙적 공부법으로 인기를 끌었으나 비리 문제로 떠들썩했던 <다니엘 학습법>이 그 좋은 예이다. '기도와 더불어 노력'을 강조한다고 낭만주의를 탈피한 것은 아니다. 훨씬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주도권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설명이 없다면 그야말로 성공학도 기독교도 아닌 '죽도 밥도 안되는' 사이비가 될 뿐이다.
이러한 신앙 낭만주의자들이 곧잘 남발하는 용어가 '기름부음(anointing)'이다. 특히 열광주의자들에게 기름부음이란 그저 능력의 공급을 의미할 뿐이다. 그들은 기름부음을 얻기 위해 이곳저곳의 집회를 쫓아다니며 은혜를 받고 싶어한다. 그것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대하여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무튼 여기에서는 기름부음이 갖는 소명론적 위치에 대해 자세히 논하진 않겠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원 선교사는 이렇게 소명론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나오는 오류를 충분히 극복했는가? 분명한 점은 그가 이에 대해 뚜렷하진 않지만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정목사님의 소개로는 홈스쿨링의 틴에이저이군요.
형제의 글을 읽으면서 좀 웃음이 나왔습니다.
왜냐하면 글은 무르익은 성인의 글인데 소재가 청소년다운 것이라서 말입니다.
마치 성하의 여름나무인데 이른 봄에 서있어야 하는 느낌이랄까....
원 베네딕트 선교사는 CTS에서 지나치면서 몇 번 본 기억이 있습니다.
형제가 짚어준대로 내가 젊었을 때도 계속 들었던 내용인 것 같아서
길게 들어본 적은 없군요.
청년의 시기에 낭만적인 소명론 앞에서 두부류를 잘 설명해주었는데,
참으로 절실하게 와닿아서 일 것 같습니다.
성서의 인물들을 성공지향적인 모델을 삼고 힘을 얻는 경우와
열광주의와 이른 소명의식에 동원되어 중요한 준비의 시기를 놓치는 경우 말입니다.
그 오류에 빠지지않고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 대단합니다.
형제의 나이에 이 곳 다비아를 누리게 된 것이 늦깍이로서 부럽군요...^^
이전에 정목사님 설교 댓글들에서 신학하시는 분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맛나요?
이 글을 보니 청소년 사역에도 관심이 있으신듯 하군요.. 유명해지실진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문제의식에 기대가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