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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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대구오프에서 판넨베르크의 설교집 '믿음의 기쁨' 중
'권위의 근원 (마13:10-17)'을 공부하였습니다.
요즘 다비아 큐티에서도 권위에 대한 부분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만..
판교수는 이 설교에서 여러 의미를 다루고 있는데요,
잡을 듯 말 듯 , 놓칠 듯 말 듯해서 정리를 좀 해봅니다.
권위의 케이스 1>
1. 왜 예수님이 가르치는 방식으로 간접적인 '비유' 를 택하셨는가?
첫째, 군중들이 직접 보고 들은 것 외에는 아무리 중요해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앞선 예언자들이 선포했던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님과 그의 선포안에 현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신성 모독적인 불손으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세째, 예수님이 자신의 말과 인격 가운데 하나님의 미래가 현재한다는 사실을 피력하는 것은
자기의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2. 그 분은 권위를 내세우셨는가?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인격에 따라오는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런 것을 피하려는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격에 대한 논쟁의 도화선이 된 자신의 복음 선포를 비유 형식으로 말씀함으로써
권위 문제를 '사실성의 차원'으로 바꾸었습니다.
*'사실성' - 이 낱말에 대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독일어라고는 한번도 접한 적이 없고, 질답시간에 독일학파이신 문사모님께서
단어의 뜻을 명확히 해달라는 요구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사실'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단어이고,
개인적으로는 '존재의 identity에 대한 정확한 reality' 정도로 이해를 하고 지나갑니다만도..
사모님의 요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모든 언중들의 정확한 단어 이해가 필수라는
생각에서입니다.
권위의 케이스 2>
1. 기독교 교회와 교직자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자신들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예수님과 사도들의 권위를 이용했습니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검증되지않은 관리 체제를 더 많이 생산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교권을 앞세우는 일은 자신의 인격적 권위가 드러나는 것을 막아보려했던
예수님의 정신에도 위배가 됩니다.
2. 종교와 정치의 권위의 공통점은?
일반적으로 권위를 자랑하는 집단은 '종교와 정치' 두 곳입니다.
권위를 내세운다는 것은 그 권위가 더 이상 자연스럽게 인정되지 않으며,
그리고 실재적인 일로 증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권위는 사실적인 근거를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습니다.
권위의 케이스 3>
1.교회로서의 권위는?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와 ,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어떻게 증거하며 활성화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어떤 교권, 조직, 전통적 삶에서가 아니라 앞서 말한 것들에 대한
주님을 향한 교회의 성실성으로 결정됩니다.
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는 비유로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가 자신에게 현재적으로 임했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숨길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지금도 기독교 공동체 안의 선포는 우회적일 필요가 없으며,
궁극적으로 우리 시대의 인간 문제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인
'현재를 규정하는 힘'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해야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자신의 삶에 속한 문제로 여기고 사실적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정목사님의 강의 후에 목회자와 성도 간의 권위, 여성목회자, 목회자사모 등에 대한
의견들이 있었습니다.
추운 날씨에도 고정 멤버들은 여전하셨구요,
멀리 구미에서 오신 까마귀 목사님 내외분 반가왔습니다~~
(까만 목사님에 백설공주처럼 예쁜 사모님이었습니다..^^;)
일단 정리를 해보니 정리 전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진정한 권위는 환자에 대한 애정, 증상에 대한 높은 이해도와 치료의 충실성에서 저절로 드러나지, 뭔가 윽박지르는 태도나 신비주의(?) 같은 것으로는 택도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권위가 드러내야할 그 "사실성" 이 없을 때 권위는 권위 자체로 드러나려 한다는 것... 교회에서도 여러 분야에서도 드러나는 일반적인 현상인 것 같아요...
권위와 사실성이었지요?
사실성이라는 단어 때문에 갑론을박이 있었는데요.
판넨베르크 설교집을 번역한 나의 한계가 그대로 나타난 거에요.
사실성은 독일어 단어 Sachlichkeit의 번역이에요.
저 단어 '자크리히카이트'는
Sache를 어근으로 합니다.
'자헤'는 일, 용무, 용건, 사실 등등의 뜻이 있어요.
거기에다가 추상명화하는 어미인 lichkeit가 붙은 거지요.
어제 읽은 설교의 제목은 die Sachlichkeit Jesu였어요.
직역하자면 예수의 사실성이지요.
그걸 의역해서 권위의 근원이라는 제목을 달았어요.
에수는 자신의 권위를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인격이 아니라
그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현재한다는 사실성에 두었다는 것이
그 설교의 핵심이었어요.
그게 무얼까요?
하나님의 통치가 현재한다는 사실성 말입니다.
오늘 종말론적 메시아 공동체인 교회에
그런 사실성이 드러나고 있을까요?
그런 걸 추구하고 있을까요?
좀 좁혀 말해,
목사는 목사라는 직책 때문에 아니라
목사의 일 때문에 목사라는 권위, 혹은 카리스마가 보장되는 거겠지요.
교회는 교회라는 사실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 통치를 증언하고 거기에 참여한다는 사실때문에
권위가 보장되는 거겠지요.
선생도, 기술자도, 판사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어제 유니스 님이 예로 든 이솝 우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요.
죽은 사자의 가죽을 뒤짚어 쓰고
사자 흉내를 내던 여우에게서 권위주의의 병든 모습을 본다는 거지요.
하여튼 오늘 한국교회의 권위를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어제 책읽기를 통해서 다시 짠하게 전되었습니다.
어제 빵, 잘 먹었습니다.
유니스님 유머의 달인 같아요
대구 오프는 좀더 깊은 신학적주제의 세미나가 많은 것 같네요
저도 다비아글을 통해 익숙하지 않은 언어적 도구들이 낫설지만(판넨베르크도 낫설구요)
예수님의 비유와 외국어로 번역된 신학적 용어와는 차이가 있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표적에 길들어진 유대인에게
하나님의 섭리와 세계(물질세계로 표현하거나 규정할수 없는)를
조금 관조적으로 바라볼수 있게 하시려 했던건 아닌가란 생각을 합니다
제3자가 가장 주관적이거나 편협하지 않을수 있는것 처럼요
그렇게 관조를 통해서.. 그말씀을 다시 자기에 대입했을때 즉,그 관조의 눈으로 다시 나를 바라봤을 때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이 마음을 건드릴수 있겠죠
반면에 신학적용어는 새로운 학설을 규정하거나 설명하기 위해서 글에 글을 덧입히게되는 경우도 많아서
그럴 경우 직접 글쓴이와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면 더 미궁에 빠질 우려도 있습니다
화자와 청자사이의 둘의 대화에 한사람과 시간적인 차이,그리고 언어적 관습의 차이를 고려하면서
원래 글쓴이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되지 않는다면...돌아가는 경우도 생기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하기 힘들지만...
그래서 성령의 언어로 다가가는 것이 우리에게 더 자연적인 도구가 될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직설적이지 않으면서도
그 궁극적인 정수(精髓)를 선포하여야하는
예수님의 딜레마였던 것 같습니다.
비유하신 내용의 해석들과 예수님의 비유사용의 이유 조차도
다양한 견해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우리가 아직 거울을 보는 존재들일 수 밖에 없어서일 겁니다.
지식고하를 무론하고 주님의 비유들 앞에서
한계적인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라크리매님께서 언급하신대로
성령의 언어로 터치를 받기를 바랄 뿐입니다.
글을 쓰다보니
이런 연유를 던져주는 주님의 비유와 그 방식 자체가
성령의 언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래요, 맞아요..주님의 영의 언어...
위에 언급한 '예수님의 딜레마' 운운은 취소합니다~~
저는 판교수의 설교를 요약했을 뿐이어요..ㅡㅡ;
제가 이해하기로는
2000년 전의 군중들과 지금의 군중들은 많은 차이가 있을 겁니다.
문자 이해, 식견, 문화적 경험..등등 많이 부족한 상태였겠지요.
예수님 비유의 소재는 주로 농경사회, 계급사회에서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소박한 군중들의 이해를 위해 그 형편에 쉬운 꺼리로 진행하신 듯 해요.
비유란 듣는 자에 따라서 본질을 파악하기 힘들 수도 있고,
더 궁극적인 본질로 들어가게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여하튼 쉽게 다가갈 수는 있는 화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만,
다비아의 글들을 보면 어려운 단어나 문장들이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도 많구요..ㅠㅠ
이런 글들에서 느끼는 건
확실히 철학적이나 신학적 용어들은 '도구'라는 것입니다.
제가 확보하지 못한 도구들 말이어요.
가령 정목사님께서 설명을 하시는데 그것이 어려우면
저는 나름의 비유나 시각적인 장면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경우들이 있어요.
언어라는 도구에 미숙한 聽者에겐 하나의 이해 방식인데
예수님께서도 군중들의 그런 사정을 아신 듯 합니다..^^
요즘 좀 고치려는 중입니다.
이것이 습관화되버리면 썩 좋을 것같지는 않아서요.
다른 분들 중에서도 더 나은 댓글을 바라며...
이방인님, 그럼..총총^^
잘 지내지요?
이방인 님다운 좋은 질문이에요.
논리적이신 분이잖아요. ㅎㅎ
군중들이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보다는
그것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라는 게 이상하다는 거지요?
여기에는 판넨베르크의 신학이 작용하고 있어요.
일단 계시의 간접성이 그것이에요.
하나님의 계시는 직접적으로는 가능하지 않고
간접적으로만 가능하다는 건데요.
그 이유는 계시는 하나님 자체이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는다는 성서의 가르침을 기억하지요?
그 하나님은 역사 전체로 자기를 계시한답니다.
그걸 인간은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없어요.
시공간의 철저한 제한을 받기 때문이지요.
예수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식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자신에게 하나님이 현재한다는 사실을 선포해야만 했어요.
이 딜레마를 헤쳐나가는 방식이 비유입니다.
비유는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방식인 거지요.
하나는 하나님의 계시를 간접적으로 말해야 한다는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에게 임한 하나님 구원 통치의 현재를 선포해야 한다는 문제입니다.
좋은 밤.
그런데 유니스 님 초록을 보니 그냥 후루룩 짭짭 거저 먹는 느낌이 드네요...
감솨합니다... 다시 한 번 더 읽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