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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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피에타>
유진스미스<도모꼬를 목욕시키는 어머니>
구미정목사님과의 3회에 걸친 단기강좌, 말그대로 짧은 만남을
어제 마쳤습니다
세상의 가부장적 메카니즘과 그 속의 일그러진 편견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과 함께 아직은 결론 짖지 못하는
혼돈이 함께 있음을 고백합니다
여성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모성'이라는 한가지 틀에 고정시켜 악용당할 소지가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저는
유진스미스의 "도모꼬를 목욕시키는 어머니"를
강의가 주는 이미지의 하나로 선택합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배경의 어둠 속에
미나마따병으로 사지가 비틀어진 도모꼬와
그녀를 목욕시키는 어머니의 모습이
상대적인 밝음으로 드러납니다
미나마따병은 일본 남부 어촌마을 사람들이 걸린,
화학공장에서 배출된 메틸 수은으로 인한 수은 중독증입니다
이 사진은 식물인간인 딸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이 성모와 같은 숭고함으로 인해
20세기의 '피에타'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더,
인간이 소유와 권력이란 가부장적 우상의 패를 따르며
자연과 인간 스스로에게 난도질한 행위의 결과가
고스란히 담은 도모꼬의 모습이,
2000년전 종교적 소유와 권력의 폭력앞에
죽임당한 예수와 비유된다는 점에서 다시 피에타와 연결지어봅니다
하지만 이쯤에서 솔직히 머뭇거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뭐? 여성모두가 성모가 되라고?
아님, 도모꼬의 모친처럼 모성애의 숭고함만이 인류를 구원할 거라고?
여성만의 모성애 요구는 지배자의 또다른 여성 악용이며
인간이 숭고함을 지닌 존재라는 인식은
애초에 가당치않은 환상이 아닐까!
가부장제의 위계구조에 오염되지 않은 신인류의 도래를 갈망한다고?
그 또한 포이어바흐의 논리처럼
인간 종에 대한 개체의 신적인 투사가 아닐까!
마티스<춤>
하지만
모든 다양함과 망설임과 냉소에도 불구하고
'춤'을 추고 싶습니다!
땅을 떠나 홀로 높이만 올라가는 "야곱의 사다리"를 버리고
인간과 다른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과의 손잡은
둥근 춤을 추고 싶습니다!
인종과 계급과 성과 자연이 왜곡과 위계를 버리고
옴살스런 춤을 추고 싶습니다
'사다리를 오르느라 힘에겨워서 웃거나 기뻐할 겨를이 없는
난폭한 영성이 아니라
웃음과 기쁨의 영성'(매튜폭스)을 취하고 싶습니다
도모꼬의 비틀린 육체를 숨기지 않고
승천하는 성모의 옷자락을 붙들어서라도
바로 이땅에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육화해야 할 '사라의 원무'를 추고 싶습니다'(구미정)
약간 다른 마티스의 춤입니다.
구미정 목사님 강의를 이렇게 사진과 그림들로 소개해 주시니 참 좋습니다.
'사라의 원무' 라는 인용이 어디서 온 건지 조금 궁금해서 묻습니다.
제가 읽었던 소설 중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모세의 아내) 십보라
그리고 (에스라의 동생) 라일라 라는 세 권의 책이 있습니다.
작가는 Marek Halter라고 하는 폴란드에서 태어난 유대인입니다.
사라는 번역판이 있는 걸로 아는데 나머지 두 권은 모르겠네요.
이 세 여자들이 주인공입니다. 소설이라서 성경과는 차이가 있지요.
특히 마지막에 나온 "Lilah"(라일라)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늘상 듣던 느헤미야, 에스라 이야기들과는 아주 다른 버전입니다.
성전건축이 끝난 후 유대인들과 결혼해서 살았던 이방인 아내들과 아이들을
모두 쫓아낼 때 그녀는 그들과 함께 떠났습니다.
모두가 함께 어울리는 날.
아마 그날이 주님 오시는 날일까 생각해봅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말한 소설들이 한국어판 제목이 뭔지는 잘 모르겠군요.
몇 년 전 인터넷 책방에서 책 주문하려는데 이 소설이 종교 섹션에 있길래
좀 우습다고 생각 한 적이 있어서 기억나는 일이랍니다.
사실 성경에 "라일라"라는 이름이 어디 등장하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게다가 에스라의 동생이라니.. ㅎㅎ
이 책은 2006 년도 출판된 것인데
앞의 두 권은 아마도 2 년 터울로 더 앞서 나왔을 거에요.
소설이라서 성경과 다른 것 많지만
포로로 잡혀가서 살던 사람들의 삶들이 아주 흥미롭게 써 있었답니다.
70 년이라는 시간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잖아요.
이민자들이 몇 세대 전 조상들의 말과 관습을 지켜나간다는 것이
많이 힘들다는 것을 저도 이해하니까요.
어떤 덕망있는 개인이 A라는 영적 체험을 합니다.
이 체험이 글 또는 말을 통해 언어의 옷을 입고 타인에게 전달됩니다.
이렇게 전달된 언어와 그 언어에 포함된 내용은 누구나가 지향하고
경험되어야 할 B라는 영적 체험으로 바뀝니다.
A와 B.
같은 언어와 같은 내용 같은 형식. 모든 것이 같습니다.
단지 A는 언어로 풀기 이전에 경험되어진 내용이요,
B는 경험되어지지 않은 내용을 언어로 보게 되는 경우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B를 경험하고자 달려듭니다. B를 경험하는 그때,
"그래. 내가 경험했던 A를 당신도 경험했군"이란 말을 듣기 원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되어버린 걸까요.
곧 다가올 것 같은 B는 요원해 보이고, 좀체 경험한 것이 A와 같은 것인지
아닌지 판단이 서질 않는걸요.
아, 그렇군요.
B는 우상이였군요. 언어는, 내용은, 형식은 모두 A와 같은 것이지만,
B는 우상이였군요. 그런 하나님은, 그렇게 경험되어질 하나님은
원래 없는 하나님이군요.
체험이 목표되어진 하나님은 도시 없는 하나님이군요.
체험속에 가두어진 하나님은 원래 없는 하나님이군요.
관념을 실체로 메우려고 하는 작업은 언제나 실패로 드러나는군요.
평신도라고 주눅들지 말고, 신학했다고 자만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진리를 특정신학에, 특정인에 전적으로 위임하지 말라.
그 신학이, 그 누군가가 틀렸을 가능성이 있다라기 보다,
(물론 실증적(?)으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엔 틀렸을 가능성이 있겠지만)
나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포기하고 그 누구의 하나님
밑으로 숨어들어가는 ‘방식’으로는 결코 한 발자욱도 나갈 수 없다.
배우라. 하지만 머물지 말라. 배움이란 것이 원래 머물지 않기로
전제한 것이 아닌가.
구목사님 강의 내용도 좋았지만 목사님의 신학함에 대해 배웠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댓글로 달아봅니다.
세상의 모든 학문의 학습 형태는 찬선씨가 말하는 A.> B
그 구조를 따라가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 모방, 답습의 방법에서 나의 방법을 찾는 이만이 창조의 길로 들어갈수 있는 것 같아요
B > A 로 이끄는 힘,갈수 있게 하는 힘이
곧 은총(생명으로 이끄는 에너지)이라 믿구요
이 모든 과정은 필수적인 것이라 생각해요
간혹, 곧장 A 로 가는 자를 천재라 부르던데
그 천재들도 보면 아버지나 조상 대대로의 유산의 결과인 경우가 많더군요
찬선씨가 핵심을 끄집어서 말로 표현하는데 굉장한 달란트가 있어 보여요
심히 부럽당...학습비법 좀 내게 공개를~~ 쿄쿄~
제가 넘 비약한건가요?
생물시간에 배웠던 모습중 비슷한걸로 올려봤습니다
그때는 가슴아픈 전쟁의 상흔정도로만 인식했었는데...
지금은 저 사진속에서 역사속, 성서속의 여인들의 감정과 삶을 포착할수 있네요
이번 인문학 강좌에서 많은 뭍혀있던 이야기들을 꺼내신것 같아 보입니다
여자인 저도 인정하고 따라 갈수 밖에 없는 시대의 패턴앞에서
굴복은 하지않으리라 다짐하고 사는편인데..가끔은 이런 에고가 자신도 싫어질때가 있어요
기혼녀와 자녀를 키우는 여인들이 한층 성숙하다는것을 실감할때는 더더욱 그렇구요
정명훈씨가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세상에서 가장 강한존재는 바로 "한국의 어머니들" 이다
고개만 끄덕일 얘기가 아니란 걸..시그림님의 글을 통해서 배워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