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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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시아 젠틀레스키<유디트>
까라바조브<유디트>
구스타프 클림트<유디트>
어제 구미정목사님의 인문학단기 강좌가 있었습니다
예상했듯이 폭포처럼 쏟아져나오는 지성의 신세계가 펼쳐지더군요
성차별적인 혹은 가정사의 문제라고 순진하게 눌러왔던,
그러나 인간사의 폭력과 차별과 생명경시의 뜀틀이 되는 장본인인
가부장제의 핏대선 '모가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위 세가지 그림은 각기 다른 화가가 그린 <유디트>입니다
어제 수업을 들은 후의 제 나름의 정리 방법이지요!!
'유디트'는 종교개혁시 새로운 성서에서,
역사가 아니고 알레고리라고 판단하여 제외된 <유디트서>의 여인입니다
기원전 2세기경
이스라엘을 점령한 앗시리아의 장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어
나라를 구한 과부, 그녀가 바로 '유디트'이지요
위 그림들의 화가의 성을 밝히자면
첫째는 여성,
둘째 세째는 남성입니다
이 세 그림에서도 여성을 바라보는 화가의 편견은 극명해 보입니다
우선, 남성화가의 두 그림 중 두번째 까라바조브의 유디트를 보면
칼을 쥐고 목을 따는 그녀의 모습이 앳됩니다
내키지 않는 듯, 근심하는 듯
이미 거반 죽어가는 홀로페르네스의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보입니다
단지, 옆에선 몸종 '아브라'의 모습은 마녀의 얼굴을 하고 있군요
살인을 교사하는 마녀!!
수동적여 보이기 까지한 유디트와 마녀 몸종!
까라바조브가 보여주는 여성상일까요?
세번째 그림 클림트의 유디트는
이미 살인이 끝난 후, 전리품을 쓰다듬는
대의나 민족적인 차원을 찾아볼 수 없는 지극히 섹슈얼한 팜므파탈의 모습만이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첫번째 그림,
17세기에 흔치 않는 여성화가인 젠탈레스키의 유디트는
가냘프지도, 성적매력이 있지도 않습니다
몸종 아브라도 동반자의 적극성을 보여주는 가운데
유디트는 억센팔과 무표정한 얼굴로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이 해야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화가 젠탈레스키는 스승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
남성우위 사회로부터 편견과 따돌림 당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녀에게 켜켜이 쌓인 분노는
남자의 목을 가볍게 그어낼 수 있을 정도의
냉정한 복수의 칼날을 갈게 한 것이지요
홀로페르네스의 모가지를 혹은 가부장제의 모가지를 따긴 따야하는데
위 세그림 유디트들의 모습은 너무 치우쳐 있군요
남성화가의 그녀는 수동적이거나 마녀적이거나 기껏해야 섹스심볼일 뿐이고
여성화가의 그녀는 그 분노로 인해 남성의 모습을 되밟는,
남성화된 유디트라고나 할까요
그렇다면 가부장제의 모가지를 그을 우리의 유디트는,
어제 구목사님의 표현처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유전자로서의 "여성",
"자아 동일시된 여성" 혹은 "여성동일시된 남성"이어야 할까요?
구목사님과의 수업이 기다려지는 일주일이 되겠네요~
몇장의 그림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팡팡 날려주시니
구목사님 강의를 통해 겨우 눈을 뜬 생각들이 정신없이 날개짓을 하려고 합니다.
역시 시그림님 최고~~!!
다만, 클림트의 유디트에서
대의나 민족적인 차원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문제인 것처럼 말씀하셨는데
이 부분은 좀 생각이 다릅니다.
대의나 민족의식이라는 것 자체가 바로 남성 가부장 이데올로기에서 줄기차게 옹호해 온 가치가 아니겠습니까?
그 가치를 위해 달려온 인간을 상징하는 존재는 바로 모가지만 남은 남자 ‘홀로 패를 냈어’ (하여튼 브리즈 성님의 기발한 언어감각은 여전하시네요^^*)구요.
그렇다면 클림트의 유디트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해 보입니다.
너희들이 그토록 숭배하는 이성과 권위와 관념의 목을 내가 치리라,
무엇으로? 관능과 퇴폐의 칼로!!
만약 우리가 유디트에게 남성들이 독점한 대의를 쟁취해 올 여전사를 요구한다면
젠틀레스키 그림 속의 씩씩한 유디트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시그림님도 말씀하셨듯이, 남성 대체물로서의 유디트가 답은 아니지요.
저는 새로운 해답의 단초를 다시 클림트의 그림 속에서 찾고 싶습니다.
클림트가 재창조한 유디트는 자신이 목을 쳐놓고도 상대의 시신을 혐오하거나 능멸하지 않습니다.
유디트가 길고 우아한 팔로 ‘홀로 패를 냈어’ 의 잘린 목을 쓰다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이 잘난 사내놈의 모가지야, 그동안 비뚤어진 남성성의 가치들을 줄기차게 구현하느라 너도 피곤했지?
이제 그만 미련 버리고 눈 감으렴, 이 섹시한 누나가 위로해줄게~~”
이게 바로 관능과 퇴폐의 깊고도 넓은 아량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
물론 클림트의 그림이 관능을 넘어서는 새로운 지평을 제시해준다고 하기는 힘들겠죠.
하지만 어느 분야든 고착된 권위와 위선을 까발리기 위해서는
일단 선구적 날라리가 필요하듯이
저는 클림트의 그림이 화가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새로운 wo/men (기존의 ‘여성’의 개념에 제한되지 않는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여성-구목사님 강의에서 배운 내용임다^^*) 의 도래를 준비하는 여명과 같은 역할을 훌륭히 감당했다고 보여집니다.
하여튼
구목사님과 시그림님,
두 여성 동지들의 가열찬 선동으로 인해
여러 다비안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골치 아픈,
또는 아주 신나는 사태가 벌어질 듯도 합니다요 ^^*
제가 머리가 좀 나쁘기로서니 이 마당에 대의나 민족의식을 찬양할 리가~
단지 남성사회의 범주에서 유디트가 유디트일 수 있는 이유는
그나마 그런식의 '쓸모'였을 텐데 그마져도 보이지 않은 섹스어필 홀로를 말한거 뿐입니다
개인적으론 클림트의 그림이 요즘 한국인의 돈을 긁어모으는 것을 아까워하고 있습니다
소풍님 말씀대로 선구적 날라리의 역할이 아주 없다고는 못하지만
여성몸의 치우친 이상화와 우리사회의 성상품화가 너무나 꿍짝이 잘 맞는다는 거죠
여성과 남성이 서로에게 섹스어필할 수 있다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여성만의 섹스심볼은 남성우위사회가 갖는 관음증의 산물이죠
유디트는 가부장 1의 목을 잘라
가부장 2에게 자신을 의탁한 셈이겠지요.
그러나 홀로페르네스가 가부장제 자체의 상징이라면
해볼만 합니다...ㅎㅎ
아직 태어나지 않은 유전자로서의 "여성",
"자아 동일시된 여성" 혹은 "여성동일시된 남성"
재미있는 표현이군요.
그건 서로에게 동등한 것을 요구할 수 있고
동등한 것으로 답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그러기에는 관습, 문화를 떠나
구조적으로 너무나 많이 틀리고,
인간의 타락이 이 차이를 악한 쪽으로 사용하기에
틀린 것을 요구하고 틀린 것으로 답할 수 밖에 없는 건 아닌지..
여하튼,
가父장제도, 가母장제도 아닌 가人장제가 되는 그 날까지~~
담주는 무조건 참석입니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