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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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필자가 기독교 장로회 서울지역 목사님들의 겨울 수련회에서
강의할 내용 중의 한 단락을 끌어온 것입니다.
앞뒤 맥락 없으니까 약간 어색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주제는 그런대로 드러나지 않았을까 합니다.
오강남의 <예수는 없다>
그런데 성서의 지평을 바르게 포착하지 못하고 단지 오늘의 목회 현장에 확대 재생산해낼 규범만 찾고 있는 근본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성서와 기독교의 역사를 단지 ‘종교사’의 차원에서만 접근하는 일종의 ‘해체주의자들’도 또 하나의 혼란을 야기한다. 이미 종교 다원주의는 오래 전부터 논란이 되어왔는데, 이 자리에서는 그런 논란의 긴 줄기는 그만 두고 <예수는 없다>의 저자 오강남 교수의 주장만 간단하게 검토하겠다. 오강남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필자도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철저하게 신화적인 신학과 세계관, 문자주의와 근본주의, 종교적 배타주의, 세속적 물량주의에 대해서는 아무리 큰 소리로 비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에 현상적으로 나타난 기독교 신앙의 왜곡을 교정하고 본질로 접근한다는 명분으로 기독교의 ‘근본’까지 훼손한다면 그것은 흡사 “이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태우는”, 또는 “목욕물을 버리려다가 아기까지 버린” 꼴이 아닐까 염려스럽다. 예컨대 그는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배타적인 태도를 고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까지 유보하고 있다. 그에게 예수는 단지 하나님의 신성을 훨씬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체현한 인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할 자라기보다는 우리가 본받을 자에 불과하다. 결국 예수 부활의 역사성도 실종되고, 단지 초기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예수의 가르침이 되살아난 것쯤으로 처리된다. 하나님의 역사가 철저하게 인간의 실존으로 떨어진 모습이다.
종교학자 오강남의 종교사적인 접근은 교양인 기독교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만하고 나름으로 한국교회의 개혁에 일조를 할지 모르지만, 그가 기독교를 지나치게 표면적으로만 다루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심각한 한계라고 본다. 그가 대단한 것처럼 밝히고 있는 성서관, 기독론은 신학의 초보에 불과하다. 예컨대 동정녀 마리아를 문자적인 의미에서 믿는 기독교인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미 신학에서는 극복된 문제를 대단히 새로운 발견이나 되듯이 이렇게 침소봉대할 필요는 없었다. 본인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 책 <예수는 없다>는 자신의 형이나 누이에게 알아듣기 쉬운 말로 풀어 쓴 기독교 해설서라는 사실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성서와 기독교 역사의 깊이를 충분히 해석하지 못함으로써 기독교의 복음을 해체할 뿐이지 복음과 신학의 깊이는 놓치고 있다. 그의 장황한 논리에 의하면 예수는 우리보다 빨리, 또는 좀더 깊이 하나님을 인식하고(頓悟) 살았던 사람에 불과하다. 과연 그럴까?
이런 예수상은 유대교의 주장과 비슷하다. 유대교 신학자인 마틴 부버(?)가 기독교 신학자들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예수 이후의 이 세상이 무언가 달라지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상하게 이 세상은 예수 이전이나 이후나 아무런 변화도 없다. 여전히 무죄한 사람들이 고난을 받고 폭력과 증오가 지배하고, 삶의 무의미가 우리를 감싸고 있다. 메시아가 왔다는 증거가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예수를 메시아로 믿으라는 말인가? 부버의 논리는 정당하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린다. 그들은 이 세상을 확실하게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메시아를, 그런 ‘유대인의 왕’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강남 교수도 역시 이 세상의 정치, 경제적 변화와 메시아 상을 일치시키고 있는 것일까? ‘지금, 여기’에서의 미션(misson)은 이 세상이 살기 좋은 세상으로 변하도록 힘쓰는 것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그의 생각에 따른다면 기독교 신앙이라는 게 결국 ‘복지사회’ 건설과 다를 게 하나도 없게 된다. 이 세계를 조금씩 인간적으로, 생태학적으로 바꾸어나가는 꿈을 현실화하자는 말이다. 이런 꿈을 꾼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익이나 좌익 이데올로기 모두 방식은 달랐지만 결국 이 사회의 변화를 추구했다. 교회 이기주의, 기독교 패권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필요하긴 하지만 기독교 신앙을 ‘새마을 운동’ 차원에서 일종의 개량적 도덕주의와 일치시키는 일은 기독교 영성을 기껏 도덕성 회복과 교회 민주화에서 확인하려다가 결국 그것을 놓치거나 훼손시키는 대중 설교자들의 행위와 다를 게 없다. 그래서 그런지 오강남 교수는 그 책에서 요즘 ‘뉴 라이트’ 운동의 선봉에 나서고 있는 김진홍 목사를 한껏 치켜세우고 있다. 물론 ‘뉴 라이트’ 운동은 <예수는 없다>와 시기적으로 다르기는 하지만 김진홍 목사가 옛날부터 부르짖었던 사회개혁론에는 기독교 영성을 천박하게 만들 요소가 놓여 있었다는 점에서 오강남 교수의 인식론적 한계를 확인할 수 있다. 오강남 교수는 “현각 스님의 책을 읽고 눈물 흘린 까닭은”이라는 제목의 글(부록1)에서 현각의 책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와 현각의 행위를 매우 감동적으로 평하고 있었지만, 필자는 책광고와 그 제목에 끌려 그 책을 읽었다가 실망한 기억밖에 없다. 현각은 그 책에서 자기 깨달음의 내용을 깊이 있게 다루는 게 아니라 단지 자기의 삶이 바뀌었다는 그 사실만 되풀이 하고 있었다. 흡사 짝사랑에 빠진 소녀가 자기 사랑의 내용과 깊이를 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그 남자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가출했다고 고백하는 정도였다.
필자는 여기서 오강남의 모든 주장을 냉소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그는 기독교라는 현상, 특히 한국 교회의 왜곡된 현상에 분노하느라 기독교와 역사적 교회의 심층을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 현상적인 것을 통해서 근본까지 상대화하는, 또는 은폐시키는 우를 범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결국 기독교 절대주의 못지않게 기독교 상대주의도 역시 ‘성서와 기독교 역사의 근본적인 지평’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인 것 같다.
강의할 내용 중의 한 단락을 끌어온 것입니다.
앞뒤 맥락 없으니까 약간 어색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주제는 그런대로 드러나지 않았을까 합니다.
오강남의 <예수는 없다>
그런데 성서의 지평을 바르게 포착하지 못하고 단지 오늘의 목회 현장에 확대 재생산해낼 규범만 찾고 있는 근본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성서와 기독교의 역사를 단지 ‘종교사’의 차원에서만 접근하는 일종의 ‘해체주의자들’도 또 하나의 혼란을 야기한다. 이미 종교 다원주의는 오래 전부터 논란이 되어왔는데, 이 자리에서는 그런 논란의 긴 줄기는 그만 두고 <예수는 없다>의 저자 오강남 교수의 주장만 간단하게 검토하겠다. 오강남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필자도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철저하게 신화적인 신학과 세계관, 문자주의와 근본주의, 종교적 배타주의, 세속적 물량주의에 대해서는 아무리 큰 소리로 비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에 현상적으로 나타난 기독교 신앙의 왜곡을 교정하고 본질로 접근한다는 명분으로 기독교의 ‘근본’까지 훼손한다면 그것은 흡사 “이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태우는”, 또는 “목욕물을 버리려다가 아기까지 버린” 꼴이 아닐까 염려스럽다. 예컨대 그는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배타적인 태도를 고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까지 유보하고 있다. 그에게 예수는 단지 하나님의 신성을 훨씬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체현한 인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할 자라기보다는 우리가 본받을 자에 불과하다. 결국 예수 부활의 역사성도 실종되고, 단지 초기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예수의 가르침이 되살아난 것쯤으로 처리된다. 하나님의 역사가 철저하게 인간의 실존으로 떨어진 모습이다.
종교학자 오강남의 종교사적인 접근은 교양인 기독교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만하고 나름으로 한국교회의 개혁에 일조를 할지 모르지만, 그가 기독교를 지나치게 표면적으로만 다루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심각한 한계라고 본다. 그가 대단한 것처럼 밝히고 있는 성서관, 기독론은 신학의 초보에 불과하다. 예컨대 동정녀 마리아를 문자적인 의미에서 믿는 기독교인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미 신학에서는 극복된 문제를 대단히 새로운 발견이나 되듯이 이렇게 침소봉대할 필요는 없었다. 본인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 책 <예수는 없다>는 자신의 형이나 누이에게 알아듣기 쉬운 말로 풀어 쓴 기독교 해설서라는 사실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성서와 기독교 역사의 깊이를 충분히 해석하지 못함으로써 기독교의 복음을 해체할 뿐이지 복음과 신학의 깊이는 놓치고 있다. 그의 장황한 논리에 의하면 예수는 우리보다 빨리, 또는 좀더 깊이 하나님을 인식하고(頓悟) 살았던 사람에 불과하다. 과연 그럴까?
이런 예수상은 유대교의 주장과 비슷하다. 유대교 신학자인 마틴 부버(?)가 기독교 신학자들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예수 이후의 이 세상이 무언가 달라지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상하게 이 세상은 예수 이전이나 이후나 아무런 변화도 없다. 여전히 무죄한 사람들이 고난을 받고 폭력과 증오가 지배하고, 삶의 무의미가 우리를 감싸고 있다. 메시아가 왔다는 증거가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예수를 메시아로 믿으라는 말인가? 부버의 논리는 정당하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린다. 그들은 이 세상을 확실하게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메시아를, 그런 ‘유대인의 왕’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강남 교수도 역시 이 세상의 정치, 경제적 변화와 메시아 상을 일치시키고 있는 것일까? ‘지금, 여기’에서의 미션(misson)은 이 세상이 살기 좋은 세상으로 변하도록 힘쓰는 것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그의 생각에 따른다면 기독교 신앙이라는 게 결국 ‘복지사회’ 건설과 다를 게 하나도 없게 된다. 이 세계를 조금씩 인간적으로, 생태학적으로 바꾸어나가는 꿈을 현실화하자는 말이다. 이런 꿈을 꾼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익이나 좌익 이데올로기 모두 방식은 달랐지만 결국 이 사회의 변화를 추구했다. 교회 이기주의, 기독교 패권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필요하긴 하지만 기독교 신앙을 ‘새마을 운동’ 차원에서 일종의 개량적 도덕주의와 일치시키는 일은 기독교 영성을 기껏 도덕성 회복과 교회 민주화에서 확인하려다가 결국 그것을 놓치거나 훼손시키는 대중 설교자들의 행위와 다를 게 없다. 그래서 그런지 오강남 교수는 그 책에서 요즘 ‘뉴 라이트’ 운동의 선봉에 나서고 있는 김진홍 목사를 한껏 치켜세우고 있다. 물론 ‘뉴 라이트’ 운동은 <예수는 없다>와 시기적으로 다르기는 하지만 김진홍 목사가 옛날부터 부르짖었던 사회개혁론에는 기독교 영성을 천박하게 만들 요소가 놓여 있었다는 점에서 오강남 교수의 인식론적 한계를 확인할 수 있다. 오강남 교수는 “현각 스님의 책을 읽고 눈물 흘린 까닭은”이라는 제목의 글(부록1)에서 현각의 책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와 현각의 행위를 매우 감동적으로 평하고 있었지만, 필자는 책광고와 그 제목에 끌려 그 책을 읽었다가 실망한 기억밖에 없다. 현각은 그 책에서 자기 깨달음의 내용을 깊이 있게 다루는 게 아니라 단지 자기의 삶이 바뀌었다는 그 사실만 되풀이 하고 있었다. 흡사 짝사랑에 빠진 소녀가 자기 사랑의 내용과 깊이를 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그 남자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가출했다고 고백하는 정도였다.
필자는 여기서 오강남의 모든 주장을 냉소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그는 기독교라는 현상, 특히 한국 교회의 왜곡된 현상에 분노하느라 기독교와 역사적 교회의 심층을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 현상적인 것을 통해서 근본까지 상대화하는, 또는 은폐시키는 우를 범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결국 기독교 절대주의 못지않게 기독교 상대주의도 역시 ‘성서와 기독교 역사의 근본적인 지평’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인 것 같다.
비슬산
해가 바뀐지 벌써 일주일이 지나갑니다
새해인사를 댓글로 대신합니다
목사님의 지적에 많은 사람의 고민이 있는것 같습니다
특히 기독운동을 했던 사람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현상 같습니다
뭔가 눈에 보이는 실체를 원하는데 현상적으로 나타나질 않으니 말입니다
오강남님이 지적하신것은 이해하기도 쉽고 실체가 보이니까요
그러나 더 이상의 나아감이 없이
정목사님 말씀대로 하나님의 역사나 예수를 인간의 실존으로만 바라볼수 밖에 없었겠지요
한때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이 유행했던것처럼 말입니다
결국은 제일 중요한것을 놓치고 맙니다
개교회와 목사님들의 형편이 어찌보면 놓치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무조건 믿어야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됩니다
여기에 고민이 있습니다
저는 한동안 성령"이라는 단어에 고민한적이 있습니다
아직도 진행중이겠지요
도대체 성령의 실체가 뭔가?
이해할듯 하면서도 잡힐듯 하면서도 멀리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아카데미에서 목사님 글중에 "영"에 관련된 글들만 모아서 읽어보았습니다
이제 조금 안개가 겉히는 느낌입니다
아직 미세한 먼지 수준이겠지만요.
신자가 교회를 떠나는 여러 경우가 있겠지만
근본적인 고민에 의해 떠나는 경우는 참 안타깝습니다
주위에도 많이 있습니다
새로운 전도도 중요하지만
교회를 떠난 사람들에 대한 신뢰회복과 그들의 고민에
대안을 제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좀 요원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이 해결하겠지요?
새해인사를 댓글로 대신합니다
목사님의 지적에 많은 사람의 고민이 있는것 같습니다
특히 기독운동을 했던 사람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현상 같습니다
뭔가 눈에 보이는 실체를 원하는데 현상적으로 나타나질 않으니 말입니다
오강남님이 지적하신것은 이해하기도 쉽고 실체가 보이니까요
그러나 더 이상의 나아감이 없이
정목사님 말씀대로 하나님의 역사나 예수를 인간의 실존으로만 바라볼수 밖에 없었겠지요
한때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이 유행했던것처럼 말입니다
결국은 제일 중요한것을 놓치고 맙니다
개교회와 목사님들의 형편이 어찌보면 놓치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무조건 믿어야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됩니다
여기에 고민이 있습니다
저는 한동안 성령"이라는 단어에 고민한적이 있습니다
아직도 진행중이겠지요
도대체 성령의 실체가 뭔가?
이해할듯 하면서도 잡힐듯 하면서도 멀리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아카데미에서 목사님 글중에 "영"에 관련된 글들만 모아서 읽어보았습니다
이제 조금 안개가 겉히는 느낌입니다
아직 미세한 먼지 수준이겠지만요.
신자가 교회를 떠나는 여러 경우가 있겠지만
근본적인 고민에 의해 떠나는 경우는 참 안타깝습니다
주위에도 많이 있습니다
새로운 전도도 중요하지만
교회를 떠난 사람들에 대한 신뢰회복과 그들의 고민에
대안을 제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좀 요원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이 해결하겠지요?
비슬산 씨,
비슬산은 내가 12년동안 바라보던 산인데,
이름이 좋군요.
새로운 전도보다는 교회를 떠난 사람이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합니다.
문제는 그 대안이 무엇이냐 하는 거죠.
위에서 이길용 박사께서 지적한대로 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에 거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기독교 자폐증적 태도를 계몽시키는 데 일조한다고 볼 수도 있죠.
그러나 나는 그런 방식으로는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신학과 기독교 역사의 깊이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 기독교를 비판할 생각이 있다면
단지 현상적인 것에 머물러야 하는데,
오강남은 너무 깊숙하게 나갔습니다.
오늘의 신학이 역사와 계시와 종말과 존재와 시간에 대해서 얼마나 깊이 고민하고
사색하고 주변의 학문과 대화하려고 절치부심하는지 그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다만 신학개론의 초보에 의지해서 기독교의 본질을 재단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거죠.
이미 신학은 자연신학, 과학신학, 타종교 등등, 많은 간학문적 성과를 내고 있으며,
지금도 계속 학습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강남은
한국의 보수기독교 현상만 보고 비난의 칼을 휘두르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이길용 박사의 주장처럼 이런 해명이 신학자들로 나왔으면 좋았을 것인데,
이것보다 더한 해명이 이미 나왔지만,
다만 글쓰기 방식이 좀 달랐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종교학자의 손에서 나왔다는 게 좀 아쉽다고 볼 수 있까요?
그런 건 그렇게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니까 접어두고요.
도울의 기독교 비판도 역시 변죽만 울리고 만 셈입니다.
이런 접근이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런 초보적인 신학도 이해하지 못하는 평신도들에게는 혼란만 가중시킵니다.
왜냐하면 오강남의 접근에는 무언가 전이해가 필요한데 그게 빠졌거든요.
다른 한편으로 신학을 신학답게 한 사람에게는 오강남의 주장이
지나치게 낡은 이야기, 진부하고 상투적인 이야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다 아는 이야기, 신학이 극복했거나 문제의식을 갖고 다투고 있는 문제를
과대포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일종의 센세이셔날리즘이죠.
이 책이 크게 읽힌 이유는 아마 도발적인 책 제목에 있지 않을까요?
"예수는 없다"
이게 바로 우리 출판계의 속사정입니다.
요즘 <어머나>라는 신파조의 노래가 히트라면서요?
가장 적나라하고 가장 유치하고
전혀 절제되지 않는 가사와 맬로디와 그 내용이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기 때문에
관심을 끌고 있다는 이 대중문화 현상과 맞물려 있습니다.
요즘 뜨고 있는 장경동 목사의 설교도 이런 유입니다.
그러나 결국 허무한 거죠.
아이큐가 아니라 이큐 시대라고 하면서 감성중심의 문화가 세를 확보하고 있는데,
그럴 우리가 어쩌지는 못하겠지만 영합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안은 무엇일까요?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의 전철을 밝을 필요는 없습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복지가 필요한 투쟁의 대상일지 모르지만
복음을 거기에 의존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우리의 대안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옛것에 담겨 있습니다.
성서와 2천년 기독교 역사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게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기독교 신앙 자체를 포기하는 게 낫습니다.
성서와 기독교 역사에 종말론적 진리가 담지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단지 도그마로서만이 아니라 보편적 진리의 차원에서 확보해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성서해석에 더욱 천착할 것이며,
신비주의자들의 영성을 회복해야 하고,
오늘의 시대를 충분히 인문학적 토대에서 읽어내야 합니다.
이 모든 작업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사건이 있습니다.
왜 예수의 부활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목표가 되는지,
우리는 변증적인 작업을 치열하게 전개해야합니다.
이를 위해서 물론 종교학에 대한 이해도 심층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겠지요.
과연 오강남 교수가 교회와 신학의 이러한 고민과 진지성을 어느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비슬산 씨,
말이 길어졌네요.
우리 홈페이지 '다미아'에서 영에 관한 대목만 발췌해서 읽을 정도로
관심을 보여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도움도 있었다니 다행입니다.
함께 이 시간, 이 역사, 이 시대를
좋은 뜻으로 투쟁적으로 살아갑시다.
그럼 이만....
비슬산은 내가 12년동안 바라보던 산인데,
이름이 좋군요.
새로운 전도보다는 교회를 떠난 사람이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합니다.
문제는 그 대안이 무엇이냐 하는 거죠.
위에서 이길용 박사께서 지적한대로 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에 거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기독교 자폐증적 태도를 계몽시키는 데 일조한다고 볼 수도 있죠.
그러나 나는 그런 방식으로는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신학과 기독교 역사의 깊이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 기독교를 비판할 생각이 있다면
단지 현상적인 것에 머물러야 하는데,
오강남은 너무 깊숙하게 나갔습니다.
오늘의 신학이 역사와 계시와 종말과 존재와 시간에 대해서 얼마나 깊이 고민하고
사색하고 주변의 학문과 대화하려고 절치부심하는지 그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다만 신학개론의 초보에 의지해서 기독교의 본질을 재단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거죠.
이미 신학은 자연신학, 과학신학, 타종교 등등, 많은 간학문적 성과를 내고 있으며,
지금도 계속 학습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강남은
한국의 보수기독교 현상만 보고 비난의 칼을 휘두르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이길용 박사의 주장처럼 이런 해명이 신학자들로 나왔으면 좋았을 것인데,
이것보다 더한 해명이 이미 나왔지만,
다만 글쓰기 방식이 좀 달랐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종교학자의 손에서 나왔다는 게 좀 아쉽다고 볼 수 있까요?
그런 건 그렇게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니까 접어두고요.
도울의 기독교 비판도 역시 변죽만 울리고 만 셈입니다.
이런 접근이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런 초보적인 신학도 이해하지 못하는 평신도들에게는 혼란만 가중시킵니다.
왜냐하면 오강남의 접근에는 무언가 전이해가 필요한데 그게 빠졌거든요.
다른 한편으로 신학을 신학답게 한 사람에게는 오강남의 주장이
지나치게 낡은 이야기, 진부하고 상투적인 이야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다 아는 이야기, 신학이 극복했거나 문제의식을 갖고 다투고 있는 문제를
과대포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일종의 센세이셔날리즘이죠.
이 책이 크게 읽힌 이유는 아마 도발적인 책 제목에 있지 않을까요?
"예수는 없다"
이게 바로 우리 출판계의 속사정입니다.
요즘 <어머나>라는 신파조의 노래가 히트라면서요?
가장 적나라하고 가장 유치하고
전혀 절제되지 않는 가사와 맬로디와 그 내용이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기 때문에
관심을 끌고 있다는 이 대중문화 현상과 맞물려 있습니다.
요즘 뜨고 있는 장경동 목사의 설교도 이런 유입니다.
그러나 결국 허무한 거죠.
아이큐가 아니라 이큐 시대라고 하면서 감성중심의 문화가 세를 확보하고 있는데,
그럴 우리가 어쩌지는 못하겠지만 영합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안은 무엇일까요?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의 전철을 밝을 필요는 없습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복지가 필요한 투쟁의 대상일지 모르지만
복음을 거기에 의존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우리의 대안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옛것에 담겨 있습니다.
성서와 2천년 기독교 역사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게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기독교 신앙 자체를 포기하는 게 낫습니다.
성서와 기독교 역사에 종말론적 진리가 담지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단지 도그마로서만이 아니라 보편적 진리의 차원에서 확보해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성서해석에 더욱 천착할 것이며,
신비주의자들의 영성을 회복해야 하고,
오늘의 시대를 충분히 인문학적 토대에서 읽어내야 합니다.
이 모든 작업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사건이 있습니다.
왜 예수의 부활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목표가 되는지,
우리는 변증적인 작업을 치열하게 전개해야합니다.
이를 위해서 물론 종교학에 대한 이해도 심층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겠지요.
과연 오강남 교수가 교회와 신학의 이러한 고민과 진지성을 어느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비슬산 씨,
말이 길어졌네요.
우리 홈페이지 '다미아'에서 영에 관한 대목만 발췌해서 읽을 정도로
관심을 보여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도움도 있었다니 다행입니다.
함께 이 시간, 이 역사, 이 시대를
좋은 뜻으로 투쟁적으로 살아갑시다.
그럼 이만....
빠뜨린 이야기!
오강남의 <예수는 없다>에 반박 저서
<예수는 있다>를 보셨나요?
이것 또한 장관입니다.
오강남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이런 변증은
기독교의 천박성을 노출시키는 꼴이 됩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전형적인 '창조과학회'에 속한 분이더군요.
과학도 아니고 신학도 아닌 창조과학은
오강남 교수 같은 종교학자를 굴복시킬 수 없을 겁니다.
나도 물론 그럴 자신을 없지요.
다만 기독교의 근본에 대해서 보편적 인식론과 진리론에서
어느 정도 해명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건 그렇고 위의 댓글에서 결정적인 오자가 나왔네요.
우리 홈페이지 이름은 '다미아'가 아니라 '다비아'로!
오강남의 <예수는 없다>에 반박 저서
<예수는 있다>를 보셨나요?
이것 또한 장관입니다.
오강남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이런 변증은
기독교의 천박성을 노출시키는 꼴이 됩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전형적인 '창조과학회'에 속한 분이더군요.
과학도 아니고 신학도 아닌 창조과학은
오강남 교수 같은 종교학자를 굴복시킬 수 없을 겁니다.
나도 물론 그럴 자신을 없지요.
다만 기독교의 근본에 대해서 보편적 인식론과 진리론에서
어느 정도 해명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건 그렇고 위의 댓글에서 결정적인 오자가 나왔네요.
우리 홈페이지 이름은 '다미아'가 아니라 '다비아'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이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킨데 반해, 신학쪽에서는 그런 류의 책들이 자주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곱씹어 볼만한 대목이라고도 생각듭니다. 서구에서는 사실 신학자들이 쓴 책들 중 경우에 따라 일반인들에게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많이 읽혀지는 것을 보게 되는데.. 한국의 경우는 철저히 신학자들의 글은 특정 그룹의 제한된 계층에게로만 국한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기천명 정도에 이르는 독자층을 가지고 발언하는, 혹은 그 이상을 꿈꾸지도 않는 한국 신학자들의 마인드도 적잖이 지적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그리스도교 도서라고 한다면, 솔직히 고만고만한 설교집같은 수필이나, 늘상 하던 이야기의 반복에 멈추는 신앙 에세이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간간이 신학자들이 책들을 펴내기는 하지만, 솔직히 일반인들에게 관심을 일으키거나 혹은 그들을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초대할만한 책들은 찾아보기가 쉽지도 않습니다.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 문호적인 면에서 그리스도교는 마이너리티라 그런건가요? 아님 신학계의 시각이 너무 한곳으로 집중되어 있기 때문인가요?
그런 점에서 오강남 교수의 글쓰기는 내용을 떠나서라도 그 형식에서만은 한국의 신학계에서 보다 새겨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점에서는 김용옥씨의 경우도 마찬가지구요.
자위적인 글쓰기가 아니라, 읽혀지는 글쓰기도 작금 한국의 신학계에서는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세계가 내 교구'라고 소리 높였던 웨슬리의 호기가 지금 한국신학계에서는 결여되어 있지나 않은가 싶습니다. 솔직히 일반인의 시각에서는 맨 그 소리에 그 소리, 그 나물에 그 밥타령으로 일관하는 한국 그리스도교계의 출판 경향에 매번 관심을 기울일 수는 없겠지요. 오히려 점차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관성에 빠지게 되겠죠.
그런 점에서 오강남씨의 저런 류의 책은 종교학자가 아니라, 오히려 신학자들 편에서 제기되는 것이 더 바람직스럽지는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작금 한국의 대표적인 그리스도교 계통의 출판사들이라고 하는 곳에서 펴내는 책들을 보면.. 한국의 그리스도교에 관심을 갖고있는, 갖으려고 하는, 갖을 수 있는 독자들이 안쓰러워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