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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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용 박사님,
이렇게 화사하고 짜임새 있고, 품위나는 홈피를 만들시느라 고생이 많았소이다.
추천 사이트로 새롭게 눈에 뜨이는구료.
바로 설교모음을 몽땅 퍼 나르느라 땀 꽤나 흘렸소.
똑같은 동작을 반복한다는 건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오.
설교모음은 원래 홈피에서 좁게 편집된 것이라서 그런지
여기서도 좁게 나오는구료.
회원끼리의 쪽지 나눔도 편리한 것 같군.
어제도 말했는데,
상단의 그림 중에 오른쪽 검은색의 나무가 제 색깔을 보일수는 없을까?
고놈이 눈에 거슬리네.
이 홈피를 보고 이신건 박사가 부러운 눈치더군.
그 양반도 인터넷에는 일가견이 있는데,
이렇게 까지 만들 수는 없다고 손사레를 치는구먼.
추천 사이트의 먼저 홈피 칸은 삭제가 맞소.
그곳의 초기 화편을 새 홈피로 연결하도록 했으니까.
나중에 여기 한번 와서
사진, 또는 동영상, 음악 삽입 같은 것들에 대해서 한 수 가르쳐 주시오.
어제 자동 로그인 작업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 들어올 때 다시 로그인을 했오.
어찌된 영문인지.
요즘 나는 9월 기독교 사상에서 준비하고 있는 설교비평 심포지움
발제 준비를 하고 있오.
지구촌 교회 이동원 목사와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의 설교 비평이오.
하용조 목사 건은 <예배참관기> 말고 따로 초고를 썼고,
이동원 목사 건은 지난번 기독교 사상 4월호에 쓴 것을 기본으로
조금 보충할까 생각 중이오.
판넨베르크 설교집 출판(컨콜디아사)을 위해서 번역 마무리를 하고 있오.
판넨베르크가 2권의 설교집을 냈는데,
이걸 하나로 묶어서 내기로 했오.
그 양반이 남부독일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지 아니면 신학 자체가 그런 탓인지
좀 보수적인 기질이 보이지만
그 신학과 설교의 깊이에 대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소.
만족스럽다기보다는 감동적이라고 해야겠지.
말이 나온 김에,
몰트만 박사가 얼마전에 순복음 교회 조용기목사의 초청으로
또 다시 한국에 왔다 가지 않았오?
이신건 박사에게도 한 마디 했지만,
그게 나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거요.
어떻게 역사 변혁의 에너지를 담보하고 있는 몰트만의 종말론과 성령론이
수구반동적이고 탈역사적이며, 더 나아가 민중의 아편처럼 작용하는
조용기 목사의 성령론과 궤를 같이 할 수 있는 것인지.
수년전에도 하비 콕스가 한국의 기복적인 종교현상을 긍정적으로 해명한 적이 있는데,
내가 아직 이런 관점에서 생각이 모자란 탓인지 헷갈릴 뿐이오.
종교학자로서 이길용 박사는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시오?
이번 주 <한겨레 21>에 박노자 교수의 글이 재미있더군.
서양 사람들이 대개의 동양을 소위 <오리엔탈리즘>의 토대에서 낮추어보고 있는 반면에
티베트에 대해서만은 특별 취급을 하고 있는 그 이유가 사실에 대한 객관적이고 실체적
인식에 근거한 게 아니라 모종의 정치적, 심리적 음모가 담겨 있다는 것이오.
티베트는 한번도 서양과 대랍한 적이 없기 때문에 티베트를 아무리 격상시켜도
서양에게 해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중국과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도 매우 효과가 크다는 것이오.
이런 말 이외에도 박노자 특유의 직관과 해석에 의한 언급들이 제법 있었오.
한 마디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가 길어졌군.
들어갑시다.
하여튼 방학 중에 한번 보도록 시간을 만들어 봅시다.
정용섭.
이렇게 화사하고 짜임새 있고, 품위나는 홈피를 만들시느라 고생이 많았소이다.
추천 사이트로 새롭게 눈에 뜨이는구료.
바로 설교모음을 몽땅 퍼 나르느라 땀 꽤나 흘렸소.
똑같은 동작을 반복한다는 건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오.
설교모음은 원래 홈피에서 좁게 편집된 것이라서 그런지
여기서도 좁게 나오는구료.
회원끼리의 쪽지 나눔도 편리한 것 같군.
어제도 말했는데,
상단의 그림 중에 오른쪽 검은색의 나무가 제 색깔을 보일수는 없을까?
고놈이 눈에 거슬리네.
이 홈피를 보고 이신건 박사가 부러운 눈치더군.
그 양반도 인터넷에는 일가견이 있는데,
이렇게 까지 만들 수는 없다고 손사레를 치는구먼.
추천 사이트의 먼저 홈피 칸은 삭제가 맞소.
그곳의 초기 화편을 새 홈피로 연결하도록 했으니까.
나중에 여기 한번 와서
사진, 또는 동영상, 음악 삽입 같은 것들에 대해서 한 수 가르쳐 주시오.
어제 자동 로그인 작업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 들어올 때 다시 로그인을 했오.
어찌된 영문인지.
요즘 나는 9월 기독교 사상에서 준비하고 있는 설교비평 심포지움
발제 준비를 하고 있오.
지구촌 교회 이동원 목사와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의 설교 비평이오.
하용조 목사 건은 <예배참관기> 말고 따로 초고를 썼고,
이동원 목사 건은 지난번 기독교 사상 4월호에 쓴 것을 기본으로
조금 보충할까 생각 중이오.
판넨베르크 설교집 출판(컨콜디아사)을 위해서 번역 마무리를 하고 있오.
판넨베르크가 2권의 설교집을 냈는데,
이걸 하나로 묶어서 내기로 했오.
그 양반이 남부독일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지 아니면 신학 자체가 그런 탓인지
좀 보수적인 기질이 보이지만
그 신학과 설교의 깊이에 대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소.
만족스럽다기보다는 감동적이라고 해야겠지.
말이 나온 김에,
몰트만 박사가 얼마전에 순복음 교회 조용기목사의 초청으로
또 다시 한국에 왔다 가지 않았오?
이신건 박사에게도 한 마디 했지만,
그게 나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거요.
어떻게 역사 변혁의 에너지를 담보하고 있는 몰트만의 종말론과 성령론이
수구반동적이고 탈역사적이며, 더 나아가 민중의 아편처럼 작용하는
조용기 목사의 성령론과 궤를 같이 할 수 있는 것인지.
수년전에도 하비 콕스가 한국의 기복적인 종교현상을 긍정적으로 해명한 적이 있는데,
내가 아직 이런 관점에서 생각이 모자란 탓인지 헷갈릴 뿐이오.
종교학자로서 이길용 박사는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시오?
이번 주 <한겨레 21>에 박노자 교수의 글이 재미있더군.
서양 사람들이 대개의 동양을 소위 <오리엔탈리즘>의 토대에서 낮추어보고 있는 반면에
티베트에 대해서만은 특별 취급을 하고 있는 그 이유가 사실에 대한 객관적이고 실체적
인식에 근거한 게 아니라 모종의 정치적, 심리적 음모가 담겨 있다는 것이오.
티베트는 한번도 서양과 대랍한 적이 없기 때문에 티베트를 아무리 격상시켜도
서양에게 해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중국과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도 매우 효과가 크다는 것이오.
이런 말 이외에도 박노자 특유의 직관과 해석에 의한 언급들이 제법 있었오.
한 마디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가 길어졌군.
들어갑시다.
하여튼 방학 중에 한번 보도록 시간을 만들어 봅시다.
정용섭.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