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혁 선교사가 들려주는 인도 이야기

크리스천과 민족운동

인도기독교사 조회 수 1133 추천 수 0 2019.06.03 01:01:25

7장 크리스천과 민족운동

 

민족주의는 인도인에게 있어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유럽 식민 기간동안 민족주의자들 감상은 여러 가지로 표출되었다. 우리는 그 감상들을 유럽인들의 점유의 시작부터 공개적으로 보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지 몇 곳 밖에 없고 그들의 동기와 목적은 다양하다. 예를 들어보자.

 

19세기 초엽 케랄라 트라반코르 주의 수상이었던 벨루 탐비(Velu Thamby)는 영국에 대항했다. 그러나 그의 반대는 이기적인 동기에 기인했다. 전 마드라스 행정관구 남부 비라 판디야 코따봄만은 영국에 대항하였으나 그의 목적은 달랐다. 인도의 다른 지역들로부터 많은 다른 예들을 인용할 수 있다.동시에 유럽의 도래, 특히 영국은 인도에 르네상스를 가져왔다. 그 결과 인도인들은 그들의 문화, 언어, 문학, 종교와 국가에 대해 자부심과 애착의 관념을 갖기 시작했고 이것 또한 문화적 르네상스라고 말할 수 있다. 라자 람 모한 로이 같은 사람이 일어나 사회적, 윤리적, 종교적 개혁을 시작했다. 그같은 개혁자들은 인도인들, 특별히 젊은이들을 그 개혁에 동참하도록 격려했다. 그 같은 사회개혁자들은 영국 식민당국에게 인도 공무원(Indian Civil Service:ICS) 자리를 더 많이 주도록 요구했다. 그것이 그렇게 썩 명쾌히 표현될 수 없었을 지라도 권력의 이전을 향한 첫 진척으로서 보여질 수 있었다. 인도 공무원으로 인도인들은 행정부 내에서 훈련받는 것뿐만 아니라 인도인들도 영국인들과 평등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을 의미했다. .

 

1857년 폭동은 행정부의 입장을 바꾸었다. 그 사건은 영국으로부터 인도를 해방하고자 함이 아니라 영국을 향한 사회의 많은 부분에 소속된 뭐라고 뚜렷이 정의 내릴 수 없는 인도인들의 증오의 표출이었다. 그것은 또한 그들의 노력으로 하나 되기 위한 필요성을 갖도록 인도인들을 유도했다. 그 결과로서 민족주의와 정치적 자각이 자라기 시작했다. 인도인들은 특별히 지식인들은 새로운 비전과 사명을 가지고 미래를 보기 시작했다. 그 폭동은 그들에게 자기 인식을 하게 했고 그래서 거기에서 문화와 힌두 종교의 르네상스가 싹텄다.

 

그런 정황속에서 1885년 인도 국민의회(Indian National Congress)가 발족했다. 발기인중 하나였던 알란 옥타비안 흄(Allan Octavian Hume)은 인도인들이 좀 더 많은 자유를 가지고 행정 참여에 더 많은 기회를 가지며 그들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는 더 많은 더 많은 여지를 가지는데 있어 영국이 더 많은 협조와 이해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만약 영국이 인도 국민의회가 잘되기를 바란다면 이것은 성심어린 관계로 이끌 것이고 그것의 활동은 평화와 친선의 길이 될 것이라는 상태하에 있었다. 초기 상태의 국민의회는 독립을 요구하지 않았고 지적인 온건주의자들로 구성된 이들은 폭력적이지 않았다. 국민의회는 인도 국민의 삶의 향상을 위한 사회, 경제 개혁을 요구하였다. 인도인들의 행정 참여에 보다 많은 할당을 요구하였다.

 

이 초기 몇 년동안 인도 크리스천은 열렬히 국민의회를 지지하며 연례 모임에 참석하였다.”고 오디(G.A. Oddie)는 말한다. 1887년 인도 국민의회 회동 또는 마드라스 모임의 공식적인 국민의회 보고서에 따르면 등록된 대의원 607명중 2.5%35명의 크리스천이 있었다. 1887년 크리스천 공동체가 전체 인구의 0.79%이하 였던 것을 고려해볼 때 이것은 매우 인상적인 것이다. 35명중 7명은 유라시안(구아 혼혈인)이었고 15명은 인도 크리스쳔이었다.1887의 회동에 참석한 저명한 인도 크리스천의 몇몇은 법률 변호사이자 마드라스 시의원 이었던 수브라마니아(R.S.N. Subramania)와 국민의회내에서도 크게 존경받고 영향력있는 인도 크리스천이자 명석한 웅변가요, 빼어난 학자인 벵갈리 크리스천 지도자 바르너지(Kali Charan Banerji), 변호사이자 후에 오릿사의 부행정관이 된 마두수단 다스(Madhusudan Das)등이었다. 계속된 인도 국민의회에도 크리스천의 참여는 두드러졌다. 1888년 알라하바드 회동에는 1248명중 38, 1889년 봄베이 회동에는 1889명중 54, 1890년 캘커타 회동에는 677명중 22, 그리고 1891년 낙푸르 회동에는 812명중 16명이 참석했다. 국민의회 회동에서 지속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바르너지외에 라호르에서 온 법정 변호사인 나드(G.G. Nath), 기독교 선교단체 학교(C.M.S) 교사이며 지주이고 나중에 마드라스 출신의 법정변호사가 된 필라이(Peter Paul Pillai)등 두 사람이 주목할 만한 인도 크리스천이었다.

 

여성 크리스천 또한 국민의회 회동에 참석했는데 1888년 봄베이 회동에서부터 이들이 참석했고 ‘10명미만의 여성이 참여했는데 그중 3명이 크리스천 사회 개혁가로 잘 알려진 판디타 라마바이, 저명한 크리스천 교육가인 트림북(Ms. Trimbuck)과 니깜베(Ms. Nikambe)였다.

 

그렇지만 1889년의 추수 벌판(The Harvest Field)의 보고서에 따르면 몇 선교사들이 인도인과 다른 크리스천이 국민의회와 제휴하는 것이 과연 지혜롭고 가치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1890, 선교사 하퍼(W. Haper)는 힌두와 결합하는 것의 위험에 대해 인도 크리스천들에게 경각심을 가지도록 했다. 국민의회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하퍼와 같은 선교사들이 있는 반면 인도 크리스천들에게 적극적으로 국민의회에 참여하도록 독려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개인적인 자격으로 국민의회 회동에 참여하는 선교사들도 있었다. 슬래터(T.E. Slater), 앤드류스(C.F. Andrews), 그레이브스(E. Greaves) 선교사들은 정치에 참여하고 국민의회에 가입하도록 기탄없이 추진하였다. 그레이브스는 1910, “국민운동의 선봉에 서있는 인도 크리스천을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노라고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92년 이후로 인도 국민의회에 크리스천의 참석이 서서히 둔화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다양했다. 복음주의자들은 정치와 같은 세속적인 일로부터 초연하게 떨어지도록 크리스천들을 격려하는 다른 세상을 강조했다. 그러나 복음주의와 이것의 지속적인 다른 세상 강조는 이전에도 있었고 새로운 현상은 아니기에 이것은 둔화의 주요 이유가 아니다. 그 주된 이유는 힌두 다수의 미움을 받으면 그들이 자리 잡고 있는 정부의 지지를 잃어버리게 되고 이것은 곧 정부 공무원 자리의 안정적인 고용을 위협받을 거라는 두려움이었다. 보고에 따르면 인도 크리스천의 공무원 고용 숫자는 늘어나고 있었다. 1900년경 이 힌두 지배에 대한 두려움이 일반적으로 크리스천 공동체를 누르고 있었다. 1908년 조셉 고세(Joseph J. Ghose)는 인도 크리스천과 국민운동에 대해서 쓰면서 국민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크리스천에게 해롭다고 그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고세는 만약 크리스천이 정치적 선동에서 불신자와 함께 참가한다면 인도 크리스천에게 어떤 측면에서 유익함이 있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만약 더 많은 정치적 권리와 특권이 이 나라의 사람에게 주어진다면 이 사람들은 우리 빈약하고 작은 공동체에게 가장 작은 유익을 안겨줄 것이다. 한편 불신자들의 손에 거대한 권력이 넘어간다면 우리 공동체의 생존 자체가 위험에 처해질 것이다. 우리는 불신자가 권력을 가진 곳 어디서나 불쌍한 인도 크리스천의 노력이 불이익을 당했고 멸시와, 모욕과 심지어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안다.”

 

이전에도 언급했다시피 초기 몇 십년동안 국민의회는 온건했고 그래서 영국은 그들을 통치의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러나 띨락(Bal Gangadhar Tilak)과 고스(Aurobind Ghosh)의 등장으로 국민의회는 혁명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거기다 1905년 벵갈의 분리는 국민의회로 하여금 영국 통치에 적대감을 갖고 국민의회 사람들은 영국 관리와 그 건물을 공격해서 관리 몇 명을 죽였다. 이 사건은 영국과 인도에서 영국인이 국민의회를 격렬하게 공격하게 했다. 그래서 20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인도 크리스천과 선교사들의 마음에 불안과 두려움이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국민의회를 떠나기 시작했고 국민의회 회동에 참여가 점차 줄어들었다.

 

불안한 인도 크리스천 사이에 이와는 달리 보다 적극적인 접근을 천명한 폴(K.T. Paul)같은 소수의 인도 크리스천이 있었다. 폴은 만약 우리가 정치 문제에 초연하기를 고집한다면 거기에는 끔직한 위험이 있다는 것을 잘 깨달아야 할 것이다. 물질적, 사회적, 도덕적, 정치적인 등 모든 견지에서 본 우리의 유익은 여타 인도 공동체와 바로 연계되어 있다. 이것이 영원할 것인가? 세상의 모든 것이 끝나거나 변하기에 오래 오래 후인 500년쯤 뒤에 인도에 대한 영국의 정치적 사명이 끝나길 소망해보자. 우리는 그때까지도 인도인일 것이다.” 폴의 관점에서 볼 때 그의 공동체의 유일한 문제 해결점은 철회나 무관심이 아닌 국민의회와 국민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은 광야의 소리와 같았다. 인도 크리스천들은 은둔 쪽으로 가기를 더 선호했다.

 

1914년에 발족되어 1923년 인도 국제 크리스천 협의회(National Christian Council of India: N.C.C.)가 된 인도 국제 선교사협의회(The National Missionary Council of India: N.M.C)는 이 문제에 대해 인도 크리스천들을 돕지 않았다. 카즈 바고(Kaj Baago)에 따르면 크리스천 협의회내에 선교사의 지배와 영향력 때문에 정치적 자유를 위한 국가의 항쟁을 견지할만한 정의를 내릴 수 없었다. 그는 나아가 말하기를 밀어닥치는 정치적 문제에 대하여 크리스천 협의회의 리뷰의 반복된 대답은 평화를 위한 기도였다. 그리고 자유를 위한 국가의 항쟁에게 줄 수 있는 한 하나의 헌신의 가능성으로 보여진 것은 수년내에 크리스천 협의회내로부터 제의된 빈번한 모임이라는 주장을 철회할 수 없다.

 

상기 언급한 선교사 협의회나 크리스천 협의회의 태도는 영국 정부의 신정책 때문일 것이다. 세계1차 대전의(1914-18)의 결과로 영국 정부는 인도와 같은 그들의 식민지에 선교사를 포함한 영국인이 아닌 외국인의 입국에 대해 재고하기 시작했다. 그 같은 정책의 결과중 하나는 1919년에 소개된 'A', 'B', 'C' 세 부분으로 된 각서(Memorandum)였다. 각서 ‘A'는 북미의 외국인 선교회 컨퍼런스를 통해 인도에 온 선교사를 포함한 영국인 선교사들에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B'는 로마 가톨릭 단체를 위한 것이었고 'C'는 영국과 친밀하지 않는 관계를 가진 나라들로부터 온 선교사들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각서 'A'에 연관된 사람들에 대해 크리스천 협의회는 선교사에게 정부에게 복종하고 존경해야할 의무를 가지고 정치적 입장을 자제하도록권고하는 의무를 갖고 있었다. 그같은 보장은 웨스트민스터의 추기경과 연관된 단체 또는 기관의 총회장에 의해 각서 ‘B' 조건하에 온 사람에게 해당되었다. 각서 ’C' 조건으로 온 사람들은 인도에서 사역하기 위하여 허락을 득해야 했고 개인적으로 보증서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상기와 같은 이유가 크리스천 협의회로 하여금 중립을 지키도록 하는 이유가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1919년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가 국민의회에 입성했고 곧 그는 민족운동의 인정받는 지도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국민의회는 대중중심이 되었다. 1920년 간디는 비협조 프로그램을 천명했다. 이후에 물레 또는 차르카가 민족주의 인도의 상징이 되었고 집에서 짠 카디나 카다르 옷이 또한 민족운동의 일부분이 되었다. 1920년 이후에 민족운동은 격렬해졌다. 국민운동의 선두에 선 국민의회는 식민 정부에 따르면 대중 안전에 대한 위협적인 이데올로기와 프로그램 때문에 또 다른 정부로 간주되었다. 민족운동은 영국정부의 문제가 되었다. 이 기간동안에 앤드류스(C.F. Andrews), 윈슬로우(Jack C. Winslow)등과 같이 민족운동의 명분을 지지하는 선교사들이 인도 여기저기에 있었다. 1920년에 시작된 크리스천 아슈람은 이런 국민 정서에 합치한 상징이었다. 아슈람 사람들은 카디를 입고 삶의 모든 측면에서 검소함을 따랐으며 금주 프로그램을 지지했다. 192025명의 영국 선교사들은 1919년 잘리완왈라 박(Jallianwala Bagh) 비극과 정부의 일련의 행동에 대하여 그들의 이의를 제기하는 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그같은 지지의 표현은 정부에게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정부는 각서에서 민족운동의 선교사 지지를 다루는 의무조항이라는 규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22년 개정된 의무조항의 형태는 아래와 같다. “나는 합법적인 정부에게 복종과 존경할 의무를 가졌으며 정치 문제에 조심스럽게 절제하여 참가 하며 나의 소망과 나의 영향력이 그 문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한 정부에 충성을 다하여 협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특별히 만약에 교육에 종사하는 것이라면 시민가 그 나라의 정부 사이에 선의와 이해를 촉진하기 위고 법률 준수와 훌륭한 시민이 되도록 전심전력을 기울일 것이다. 정부가 영국인이 아닌 선교사들에게 특히 엄격해지기 시작했을때 그들은 교사, 전도사와 목사같은 선교의 서비스를 하고 있는 인도 크리스천들에게도 정부에 대한 동일한 충성을 하도록 요구했다.

 

아래의 예가 그들 아래 고용된 인도 크리스천들을 통제하도록 선교사들을 압박한 정부의 방법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마드라스 관구의 남 아르코트 구, 띠루코일루르를 기반으로 사역하고 있던 덴마크 루터교회 선교회 출신 칼 빈슬레브(Carl Binslev)라는 선교사가 있었다. 한 크리스천으로 개종한 스와미나단과 전도사가 띠루코일루르 덴마스 선교회 학교의 교사로 임명되었다. 1921720일 지역구 징세관인 구삐(F.F.B.L. Guppy)가 칼에게 스와미나단에 대해 모종의 행동을 취하라고 편지를 썼다. 이유는 그가 징세관이 생각에는 반영국적이라고 여겨지는 간디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것과 같은 민족주의자같은 행동을 위해 선교 부지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상기 그은 다음과 같다. “나는 악평이 자자한 사실, 즉 띠로코일루르에 있는 당신의 선교 부지가 약 한 해 동안 지역구 핵심부에 대한 선동과 반영국 활동에 이용되어 왔다는 것에 대해 당신에게 경고합니다. 당신이 이 행위를 그치지 않는 사실은 기묘하게도 부주의하거나 또는 당신이 영국령 인도에 외국인 선교사로 들어온 상태에 대해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상기 언급한 의무조항의 배경에 비추어 칼 빈드슬레브는 그의 대리인 스와미나단의 활동을 통제하도록 지시가 아닌 명령을 받았다. 몇 개월동안 그 둘 사이에 편지 왕래가 있었다. 마침내 정부의 위협을 견디지 못하여 192111월 스와미나단에 대해 행동을 취했다. 스와미나단 사건은 선교회의 고용아래 인도 크리스천에 의한 정치적 자유의 표현을 축소하기 위하여 각서가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한편 1920년부터 시작된 비협조 운동에 참여한 인도인 크리스천이 있었다. 인도 크리스천의 참여의 규모를 보여주는 명백한 데이터를 갖고 있지 않지만 민족운동에 동조하는 상당한 수의 인도 크리스천이 있었다. 라즈꾸마리 암리뜨 카우르(Rajkumari Amrit Kaur), 조지(S.M.George), 조셉(George Joseph), 쿠마랍빠(J.C. Kumarappa)와 국민의회 의원이었던 무커르지(H.C. Mookerjee) 등은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국민의회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민족주의자였던 두따(S.K. Dutta), 아자리아(V.S. Ajariah), 루드라(Sushil K. Rudra), (K.T. Paul), 랄리아 람(B. Rallia Ram), 어거스틴 랄라람(Augustine Ralla Ram), 차카라이(V. Chakkarai) 등이 있다.

 

선교사들 중 앤드류스(C.F. Andrews)만큼 민족운동을 위해 헌신한 사람은 없다. 그는 국민의회 지도자들, 특히 간디와 가깝게 지냈다. 그는 인도인의 국민적인 자각에 두신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적극적으로 민족운동을 후원했다. 그의 글과 연설을 통하여 민족운동에 인도 크리스천의 책임감을 일깨우려고 노력했다. 1908년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만약 인도 크리스천들이 단순히 자기 공동체만의 관심에 몰두하고 민족운동에 합심하여 반대한다는 인상을 얻는다면 인도 기독교를 단숨에 날려버릴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국가를 위해 일할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며 도전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과 더불어 나라를 사랑하라.

 

(K.T. Paul) 또한 정치적 참여에 대해 많은 강조를 했다. 1905년 그는 몇몇 동료와 함께 국민 선교사 협의회(National Missionary Society)를 조직하고 비서로 봉사했다. 동년 그는 YMCA의 국제 간사중 1인이 되었으며 1916년 총회장이 되었다. 그는 국민운동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몇 크리스천 사이의 경향을 비난했다. 그는 어떤 단체를 위한 공동체 대표의 시스템을 반대했는데 그 까닭은 나라의 가장 큰 유익을 방해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바로 공동체 그룹이 되는 것으로부터 크리스천 교단화를 방지한 사람이었다. 이르윈 총독은 19301112일부터 1931119일 사이에 런던에서 열렸던 제1차 원탁회의에 그를 유일한 프로테스탄트 인도 크리스천 대표로 선출했다. 그는 1931411일에 소천했다. 간디는 193197일부터 1211일 사이에 열린 제2차 원탁회의의 연설에서 폴에 대해 언급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워하는 것이 의심할 나위가 없는 것처럼 저 또한 우리 가운데 있는 폴을 그리워합니다. 나는 잘은 모르지만 내가 아는 한 그는 결코 국민의회에 공식적으로 소속된 적이 없었으나 그는 전적으로 민족주의자 였습니다. 인도 크리스천들이 자신들의 좁은 공동체 관심사로부터 벗어나기에는 시일이 걸렸다.

 

인도 크리스천의 전인도 위원회(All-India Conference of Indian Christians:AICIC)라는 조직을 언급해야만 한다. 첫 위원회는 1914년에 열렸다. 독립이전의 높은 자질과 영향력을 가진 인도 프로테스탄트 크리스천을 포함한 이 조직의 지도자는 헌신된 민족주의자 였다. 그러나 이 조직의 결정은 자주 유보되어싿. 1920년의 모임은 인도 크리스천이 국민의회에 가입여부를 결정하기를 유보했다. 1921년 모임은 비폭력 운동 반대를 되풀이했다. 이것은 인도 크리스천에 있어서 민족운동은 교회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연루되어 있고 그래서 인도인 국가와 같은 인도 교회는 외국 통치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느꼈다는 사실을 묘사한다. 그러나 우리는 1920년 후반부부터 이 조직이 논조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1930년대에는 분명히 국민운동편에 섰다.

 

1930년과 1940년대에 크리스천들은 주로 민족운동편에 섰다. 1930년은 민족운동 편에서 보면 많은 정치적 활동이 있었던 해였다. 19303월 소금 진리수호 운동(Salt Satyagraha)가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간디가 5월 체포될 때까지 수그러들지 않았다. 국민의회는 불매 운동의 강도를 증대하였고 그 결과 정부는 시민 불복종 운동의 영향을 절감했다. 1930년의 불매운동에는 많은 수의 시골과 중소도시에서 온 대중들이 많이 체포되었다. 인도 크리스천들도 여기에 개입했고 체포되었다. 시민 불복종 운동의 결과로서 정치 상황의 중대성을 고려하며 영국 선교사들은 행동하기를 결의했다. 그 결과는 비록 노골적으로 민족 운동편에 서지 않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발간하는 간헐적인 성명서와 선언문을 통해서 이 운동을 지지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얼마, 특별히 타밀나두에서 활동하던 미국출신들은 한편으로는 민족운동을 지지를 표명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의 징계를 받았다. 그들 중 한명 이었던 랄프 리차드 케이탄(Ralph Richard Keithahn)는 선교회와 관계를 끊을 것을 통보받고 추방되었다. 스코틀랜드 출신 어네스트 로페스터-파톤(Dr. Ernest Forester-Paton)박사는 친민족주의자였다. 비록 그가 스코틀랜드 국민이었지만 마드라스 경찰관에게 심하게 구타를 당했고 후에 그에 대한 소송이 제기되었다. 그가 받은 구타와 체포는 영국 의회에서 제기되었고 정치적인 개입과 지원으로 그에 대한 소송은 취하되었다. 당국으로부터 경고를 받은 후 띠루파두르의 크리스투 쿨라 아쉬람으로 가도록 허용되었다. 할스테이드(G.B. Halstead)와 마우리스 발랑거(Maurice Ballanger)1930년에 추방된 두 미국 감리교도였다.

 

인도에서 나가라’(Quit-India) 운동 기간에 학생들의 참여가 고조되었다. 상당수 크리스천 학생들이 투옥되거나 과업을 맡았다. 폴 라마스와미(Paul Ramaswamy)는 그같은 사람이었고 후에 6개월 감옥생활을 치루고 난 후 교사 및 전도자가 되었다. 그는 독립후 목사로 추인 받았다. 1930년 마두라이의 징세관은 민족주의자로 판명된 자기들 관할하에 있던 인도 목사들의 얼마를 기소했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이나 어떤 사명을 가졌는지 자료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인도 크리스천, 심지어 민족 운동을 지지하는 임명받은 성직자, 사이의 변화된 태도의 또 다른 예다.

 

힌두와 무슬림사이에 종교전쟁을 일으키고 있을 때 인도 크리스천은 중재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그들은 민족의 복지와 공동체 조화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표명했다.

 

소수의 정치적 유익의 안정장치의 관점에서 1945년 소수의 연맹(League of Minorities)의 형성이 제기되었을 때 크리스천 지도자들은 이를 거부했다. 그들은 크리스천을 위한 분리 선거의 제안을 거부했다. 일반적인 관점은 자신들의 유익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공공복지를 위해 자신들이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독립 인도에서 인도 크리스천의 정지 개입은 택한 주제의 범위를 벗어나므로 1947년으로 마감짓는다.

 

결론적으로 인도의 크리스천들은 초기 그들의 참여를 통해 국민의회를 지지했으나 힌두와 혜택에 관한 것 등 영국정부에 대한 두려움으로 점점 줄어들었다. 그 거리는 ‘1919년의 각서를 통한 정부 통제 때문에 더 커졌다. 그러나 공동체 유익보다 민족운동에 참여하도록 인도 크리스천들을 독려하던 폴, 두따, 수실 루드라, 어거스틴 랄라 람등과 같은 인도 크리스천 민족주의자들이 있었다. 1930, 시민불복종 운동 이후로 인도 크리스천의 참여가 증가되었고 그들과 전인도 인도 크리스천 협의회는 인도를 떠나라운동 시기동안 민족운동 편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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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9.06.03 21:56:43
*.182.156.135

사티아 님, 오랜만에 글을 올리셨네요.

시간을 내서 꼼꼼이 읽어보겠습니다. 

한국을 방문할 경우에 연락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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