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혁 선교사가 들려주는 인도 이야기

8장 지속적인 헌신 - 2

인도가 바라는 선교사 조회 수 1518 추천 수 0 2015.08.04 20:57:55
지속적으로 부담스런 내용입니다.
인도선교사가 될 사람은 희생의 끝, 죽음까지도 삶의 현실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합니다.
초반에 나오는 한국 교회의 예는
20년전 번역할때는 자랑스러웠는데 지금은 내용이 부담스럽습니다. 
그 만큼 제가 때가 묻었다는 증거이기도 하겠지요. 

마 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희생은 고독, 비판, 거부 속에서 검소한 삶을 살면서도 남들에게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고통뿐만 아니라 선교 일선에서 선교사역에 영향을 주는 반대와 박해도 포함합니다. 일선 선교사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질병입니다. 자연사, 질병으로 인한 죽음, 순교이 모든 것 또한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드려야 할 희생의 일부분입니다. 이것은 선교일선에서 주예수를 섬기기 위한 결단과 소명의 본질입니다.  

한국교회의 예
한국교회사 중 감명받는 특징중의 하나는 복음을 위한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이 복음전파를 인하여 감내한 희생입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룬 비결중 하나입니다. 일제치하 한국 교인들은 무수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한국 전쟁동안에 교회는 그들의 믿음에 대한 또 다른 시험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5백 명이 넘는 교역자들과 기독교 사역자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의해 납치 또는 처형되었습니다. 교회들이 불타고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가진 믿음 때문에 무자비하게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참고 견디었으며 결과는 오늘날의 하나님의 놀라우신 축복으로 나타났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교회중 하나입니다. 전 아시아 신학협회의 이사인 노봉린목사는 아래와 같이 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고통하는 교회이다. 하나님은 한국에 있는 그의 교회를 살리시기 위해 그의 백성들의 고난과 역경가운데 일하셨다. 내가 종종 느끼는 바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리고 그들을 평화의 근원으로 인도하고 영적인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는 고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중국 교회의 예
최근 놀랄만한 성장을 보인 고난받는 교회의 또 다른 예는 중국입니다. 줄잡아 1949년 중국에는 약 1백만 가량의 기독교인이 있었고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크나큰 박해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선교사들은 추방되고 교회는 파괴되었습니다. 60년대 말 문화혁명으로  모든 선교사와 교회, 기독교 계통이라 여겨지는 조직은 전부 제거되었습니다. 외적으로 중국은 종교가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70년대 초반 교회들과 기도 모임들이 나타나고 전파되어 복음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4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중국의 신자는 백만에서 5천만으로 늘어났습니다. 그중 90%가 풀뿌리 가정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고난과 희생은 놀라운 중국 교회 성장의 비결입니다.

선교사가 고난을 견딜 때 후에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것과 같이 긍정적인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스데반에게 가해진 박해 때문에 흩어진 사람들이 베니게와 키프로스와 안디옥까지 가서, 유대 사람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행11:19)”는 말씀은 한국과 중국 교회의 예에서 입증된 진리입니다.

우리 주님은 “죽음의 세력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 16:18b)”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흘러갈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승리에서 승리로 성장해왔고 이것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감내하기를 기뻐하는 사람들의 좋은 선례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산의 삶 
선교사로서의 대한 결단은 때때로 사랑하는 이들과의 결별을 초래합니다. 부모, 연인, 자녀와의 결별, 심지어 아내와 남편과의 이별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찰스 스터드는 아프리카를 향하여 떠날 때 사랑하는 아내와 이별해야 했습니다. 스터드는 52세때 아프리카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병약한 아내는 그와 동행할 수 없었습니다. 둘 다 그 부르심은 기약 없는 이별을 의미함을 깨달았습니다. 그 같은 희생은 콩고의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헨리 마틴에게 있어서 주님의 부르심은 사랑하는 리디아와의 헤어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뜨겁게 사랑했으나 리디아는 인도로 따라나서지 않았습니다. 그 이별에 대해 마틴은 이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리디아와 나의 소명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나를 강하게 하셨다. 나는 때때로 가장 아끼는 보배인 리디아로 인한 고뇌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고 마음이 갈래 갈래 찢어지는 듯하였다. 다른 한편 내면에서 터져 나오는 지고한 감격이 찾아올 때도 있었다. 이것이 갈등이었다.”

교육과 인도 복음화 분야를 개척한 알렉산더 더프에 대해 사람들은 “그분의 기념비적인 성취는 그의 가정생활의 희생이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한 사람이 선교일선에 가려고 할 때 부모가 연만하거나 질병에 시달리거나 가난하거나 또 다른 이유로 아들 또는 딸을 의존해야만 하는 부모를 떠나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 선교후보는 이별의 아픔을 감내해야만 합니다. 

제자도의 요구 중 하나는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마 10:37)”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순종은 무수한 아픔과 희생이 따르나 여기에는 또한 주님이 약속하신 축복이 따릅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생을 받을 것이다.”(막 10:29,30)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삼상 2:30)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부모를 떠나 선교일선으로 오는 것은 정말 큰 희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 사람은 하나님이 그들의 부모를 위하여 넘치도록 예비하신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1974년 제가 북인도선교로 부르심을 받아 순종하고자 할 때 그런 결단이 요구되었습니다. 몇 개월 후 저는 아버지가 심히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선교본부는 저에게 열흘동안 남인도로 내려가서 아버지를 뵙고 오도록 시간을 허락하였습니다. 열흘이 지나도록 아버지는 계속 병환중에 임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휴가를 낼 수 없어 아버지를 주님의 돌보심의 손길에 맡기고 선교 일선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곧 돌아가실 것을 알았지만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못했고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못하고 그 준비를 돕지도 못했습니다.

15일후 아버지는 소천 하셨고 주님은 모든 상황을 맡아 주시고 영예롭게 장례식을 치루게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하늘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마침 우리 마을에 FMPB 지도자 모임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임종을 전해 들은 그들은 모임을 일찍 끝내고 장례식에 참석하였습니다. 온 마을 사람들은 어버지가 병환중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선교일선에 보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버지를 이렇게 영화롭게 하셨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빚쟁이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하신 그 약속을 이루십니다.

어떤 선교사부부는 그들의 사랑하는 자녀를 멀리 떨어진 기숙사학교로 보내는 것에 대해 크나큰 어려움을 느낍니다. 이것은 선교 현장에는 적합한 학교가 없기에 필요한 것이었으나 부모에게 있어서 이것은 가슴이 에이는 고통이었습니다. 자녀가 기숙사에서 아프다거나 공부를 잘못한다는 소식을 들을때면 더욱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실라와 내가 세 아이들을 다섯 살이 되었을 때 도나부르의 샨도샤 학교에 보내면서 이 아픔들을 실제로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사명을 위해 애들을 기숙사로 보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잘 하나님이 이들을 돌보아 주셨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현재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공부도 잘하고 행복해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한 부모와 자녀 양쪽의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도 또한 희생에 포합됩니다. 오스왈드 샌더스는 말합니다. “최종의 선은 능력의 분출과 신경성 에너지의 지출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다.” 그같은 희생은 육신과 정신 둘 다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의 사역에 대해 기술하면서 바울은 말합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행 20:19, 31) 바울의 ‘육신의 가시’는 그의 인간적인 약점을 항상 기억하도록 하였습니다.(고후 12:9-10)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영혼을 위한 열정에 가득찼을 때 그의 경험을 아래와 같이 표현했습니다. “한 달에 백만 명씩 이 땅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영혼을 불태웠습니다. 2,3개월 동안 그 갈등은 격렬했습니다. 나는 그 당시 밤낮을 통틀어 한 시간 이상 자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이성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만 그렇게 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그가 중국 내륙선교의 기초를 놓기 위해 지불했던 희생입니다.

심지어 기도사역 또한 한 사람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희생을 수반합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하심을 보시고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의 경외하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간구를 들어주심을 얻었습니다.” (히 5:7) “모든 필사적인 기도는 한 사람의 생명력을 소모시킵니다.”라고 조웻트(J.H. Jowett)는 말합니다. 선교사가 만약 선교일선에서 효과적인 사역을 하기를 원한다면 그는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그 같은 희생을 감내해야만 합니다.

선교사의 사역은 사탄과 모든 악한 세력을 대적하는 영적 전투를 포함하는데 이것은 육체적, 정신적 건강에 영향을 끼칩니다. 귀신을 숭배하고 악령에 사로잡힌 많은 부족들 사이에서 사역하면서 나는 아내와 그 같은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모임이 있던 어느날 우리는 기도로 각종 악령들을 쫓아냈습니다. 그날밤 우리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악령의 공격을 받았고 그 결과로 아내는 1주일 내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고통스러워 하다가 결국 우리의 첫아이를 낙태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선교사들이 악한 영들의 공격에 영향을 받는가를 보여줍니다. 그 같은 건강과 생명의 상실은 선교사로의 부르심과 헌신의 일부입니다. 트레버 라케(Travor Locke)는 그의 책 “그리스도를 향한 부족”에서 그같은 체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교일선의 선교사는 몇 마일을 걷거나 자전거로 가야하고 때로는 산을 넘어 가는 등의 고된 육체노동이 요구됩니다. 이런 과도한 노동은 건강에 영향을 미칩니다. 허기를 느끼며 늦게 자고 또다시 먼길을 가기 위해 새벽 일찍이 일어나야 합니다. 종종 금식하며 기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희생의 삶을 요구합니다. 

개인 사물을 분실하는 것도 희생의 일부입니다. 
희생은 또한 선교일선에서 소중히 여기는 물건을 잃어 버리는 경우도 포함합니다. 나는 1985년 전인도 수양회에서 전 동원 작전의 국제 협력자로 있던 레이 이처(Ray Eicher)이 이 점에 대해 이야기해주기까지는 이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 경험으로부터 그는 사단이 불타는 화살의 하나로서 하나님의 종을 공격하여 물건을 잃어버리게 하고 낙심케 하는 것을 실제적으로 체험했다고 말했습니다. 

선교일선에서 때때로 악인들로 인하여 또는 자신의 실수로 인하여 물건을 분실하는 것은 항상 피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다 하더라도 물건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상황을 대처해나가야 합니까? 선교사는 반드시 그 사실을 선교사역에로 부르신 부르심의 대가로 기꺼이 영접해야 합니다. 그런 태도는 선교사가 기꺼이 희생하려고 할 때 나올 수 있습니다. 

선교일선에서 순교 또는 죽음
마지막으로 선교일선에서의 희생이란 죽음까지 포함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이 선교일선에 뛰어 들려고 계획하고 있는 사람들을 낙심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의 현실입니다. 어떤 사람이 옛선교구의 기독교인들의 묘지(양화진같은 곳-역자주)를 방문을 했을 때 그는 선교일선에서 사망한 남녀노소로 구성된 선교사의 무덤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희생적인 삶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 의미입니다.

기독교 교회의 역사는 그들의 믿음을 위하여 그들의 삶을 드린 다양한 하나님의 종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미르나 감독이었던 폴리갑도 그 순교자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투옥되고 당장 불태워지는 위협의 순간에 다음과 같은 영광스런 고백을 드렸습니다. “86년 동안 나는 그분의 종으로 있었고 한 번도 그분은 나를 잘못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욕되게 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나를 불로 태워죽인다고 위협하지만 이불은 곧 꺼질 불입니다. 그러나 불경건한 자들을 위해 예비된 심판의 불은 영원한 꺼지지 않습니다.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교회는 교부 터툴리안이 바로 지적한 것처럼 그같은 순교자들의 피위에 세워졌습니다.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모판이다.” 선교사의 부르심은 그 같은 희생을 포함합니다.

교회의 역사뿐만 아니라 선교의 역사에서도 많은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이 선교일선에서 생명을 잃어버린 기록들이 있습니다. 동부 아프리카의 개척자 요한 루드위그 크라프(Johann Ludwig Krapf)는 선교현장에서 그의 가족을 잃어 버리고 이렇게 썼습니다. “교회의 승리는 그 구성원들의 무덤을 딛고 세워진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드린 아메리카 인디언의 선교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저는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만 제가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제가 목숨을 아끼지 않아왔다는 것입니다.” 오카 부족에게 순교당한 다섯 명의 선교사중 한 사람인 짐 엘리오트(Jim Eliot)는 일생동안 아래와 같은 인생의 좌우명이 있었습니다.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지킬 수 없는 것을 드리는 사람은 바보가 아닙니다.” 순교 직전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선교는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었지만 그의 생애에 하나님의 선교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 선교는 종종 복음을 위한 순교와 죽음을 수반합니다. “기독교 선교의 효과는 숫적인 증가 또는 향상된 경제적 통계의 개념으로 측량되어질 수 없습니다. 영향력있는 기독교 선교는 자신을 잃어버리고 고통, 실패, 곤경, 의심, 대적, 상처, 박해와 죽음이 따릅니다. 부활은 이 모든 것들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경로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그 같은 선교에 대한 이해는 선교일선에 뛰어 들려는 누구에게나 중요한 것입니다.

다른 예술가들이 감히 흉내를 낼 수 없는 놀라운 빨강의 비밀을 발견한 예술가의 전설이 있습니다. 그 색깔의 비밀은 그의 죽음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 후에 해묵은 오래된 상처가 그의 심장을 덮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그림의 비교할 수 없는 색상의 원천임이 드러났습니다. 이 전설은 위대한 성취나 고매한 목적 달성이나 세상의 가치로 이야기 할 수 없는 것들은 바로 심장의 피의 대가로 얻어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바돌로매 지에젠발그(Bartholomaes Ziegenbalg)의 선교 사역에 대하여 보고된 바는 이러합니다. “쓰라린 반대와 우매함에 대면하여 바돌로메 지에젠발그는 외국인 선교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는 사역을 위하여 그의 생명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고통하는 증인들을 통하여 그의 위대한 사역을 진행시키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신비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언급하실때(행 1:8)와 그 스스로를 말씀하실 때(요 16:3) 사용한 ‘증인’의 의미가 순교자라는 것을 주목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본래 그 용어가 사용된 의미가 진리에 대한 한 증언으로 언급되지만 그것은 “죽음으로 그들의 증거나 고백의 중대함을 인증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사용되어져 왔습니다.

최근에 인도 사역현장에서 순교자가 보고 되지는 않았지만 병으로 선교현장에서 죽거나 적합한 의료시설의 결핍으로 죽음에 이른 몇 선교사들의 예가 있습니다. 구즈라트의 선교현장에서 저는 한 선교사의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39세였는데 어린이집을 돌보는 선교를 활동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말라리아 열병의 심각함에 대한 지식의 결핍, 담당의사의 부주의, 도시로부터의 동역자의 부재, 의료 담당자와의 의사전달의 문제와 개인의 육체적 문제가 결합되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의 원인을 인식하는 것을 넘어서 선교사가 반드시 받아 들여야 할 바는 그같은 죽음은 항상 피할 수만은 없다는 것입니다.

같은 해 비하르에서도 프랜즈 선교 기도 연합의 선교사가 그의 아들과 함께 바이러스 열병으로 죽었습니다. 인도 복음 선교에서도 유사한 죽음이 있었습니다. 마댜 프라데쉬의 부족들가운데 성경번역가로 사역하던 한 선교사는 병들었을 때 적절한 약을 투여하지 못해서 죽었습니다. 정말 많은 고통을 치룬 이들은 아래 기록된 성경말씀에 적합한 이들입니다.

“나는 ‘장로님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서 희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밤낮 그분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에 앉으신 분께서 그들을 덮는 장막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계 7:14,15)

 무엇이 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게 합니까? 무엇이 선교사로 하여금 희생의 삶을 살게 하는 동기입니까? 첫째, 우리 주님의 고난과 희생이 한 사람으로 하여금 고난받게 하고 주님을 위하여 죽게 합니다. 아무도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만큼 고통을 받았거나 받을 수 없습니다. 그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특권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서 고난도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여러분이 받는 특권입니다.” (빌 1:29) 둘째, 장래 영광과 상급이 한 사람으로 하여금 고난받게 하고 스스로를 희생하게 합니다.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롬 8:18)

아래 기록된 11살난 나의 아들 다니엘의 작은 시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고난받고 희생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그같은 영광스러운 삶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굶주림도 부족함도 없다네
하나님이 주시는 땅에는.
고통도 우는 것도 없다네
내가 가는 그 땅에는.
슬픔도 죽음도 없다네
내가 살 그 땅에는.

 그같은 상급과 영광스러운 장래가 하나님의 종들에게 약속되었습니다. “그들은 다시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도 않고, 태양이나 그 밖의 어떤 열도 그들을 괴롭히지 못할 것입니다.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물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 (계 7:16-17)

선교사는 하나님에 의해 보내진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실 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20:21) 이 명령에 따르면 예수님은 뒤 따르는 선교사들의 모델입니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정확히 말합니다. “그분과 같이 우리의 선교는 섬김에서 하나가 된다. 그는 섬김의 완전한 모델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의 교회를 세상을 섬기도록 파송하신다.”

로잔 선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버지가 그를 이 땅에 보내신 것처럼 세상속으로 그의 구원받은 사람들을 보내신 것과, 이것은 동일하게 세상속에서 대가를 지불하는 깊은 침투의 부르심인 것을 확신합니다." 다음의 선교사 찬송은 우리 주님의 예를 따라 선교사의 일을 하고 삶에 수반되는 모든 것의 훌륭한 묘사입니다. 
 
그런 까닭에 나는 너를 보냈다. 
보상되지 않는 노동을 위하여, 
무보수의, 불쾌한, 원치 않은, 미지의 섬김을 위하여 
책망을 견디도록, 질책과 조롱을 참도록 
그래서 나는 너를 보내노라 
오직 나를 위해 수고하도록 
그래서 나는 너를 보내노라 
멍들고 부서진 것을 싸매기 위하여 
방황하는 영혼을 위하여 일하고, 울고 깨우기 위하여 
세상의 짐으로 인하여 지친 것을 견디어 내도록 
그래서 나는 너를 보내노라 
나만을 위하여 고통 하도록 
그래서 나는 너를 보내노라 
고독과 갈망, 
사랑받고 인정받는 것에 굶주린 마음과 함께 하기 위해 
집과 친척과 친구와 사랑하는 이를 버리도록 
그래서 나는 너를 보낸다. 
오직 나의 사랑을 알도록 
그래서 나는 너를 보내노라
너의 삶의 야심을 떠나도록 
소중한 욕구를 죽이고 자기의지를 내려놓도록 
오랫동안 일하고 사람들이 너를 헐뜯을 때 사랑하도록 
그래서 나는 너를 보내노라 
내안에서 너의 생명을 잃어버리도록 
그래서 나는 너를 보내노라 
미움에 의해 딱딱해진 마음을 위해 
보지 못함으로 인해 눈먼 이들을 위해 
피흘림으로 너의 인생을 소비하도록- 저축이 아닌 소비를 위한 것 
그래서 나는 너를 보내노라 
갈보리를 체험하도록 

“나의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를 보내노라.”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5.08.04 21:42:47
*.94.91.64

정말 비장감이 넘치는 글입니다.

선교와 순교가 거의 같은 의미군요.

큰 도전을 받습니다.

profile

[레벨:26]사띠아

2015.08.30 10:05:00
*.177.78.217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이런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저자가 참 존경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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