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혁 선교사가 들려주는 인도 이야기

바가바드 기따의 아들 간디

인도의 길 조회 수 2171 추천 수 0 2016.06.23 19:5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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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따 선택의 배경

'해도 잠든 밤하늘에 작은 별들이로 시작해서 나는 못난이 나는 못난이로 끝나는 딕훼밀리의 7080노래가 있다. 청년 시절까지, 심지어 결혼해서까지도 간디가 바로 그 못난이, 찌질이었다고 하면 너무 외람된 표현일까? 학교 다닐때는 자기보다 키가 훨씬 작은 애한테도 기죽어서 지냈다. 대학가서도 성적이 바닥을 헤맸다. 그의 인생에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유복한 집이라 영국 유학을 가서 대충 공부하고서 땅 짚고 헤엄치기보다 쉽다는 변호사 자격증을 따왔다. 고향에서 개업을 했는데 책으로 공부한 법과 인도 현실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봄베이에서 변호사 개업하고 10불짜리 첫 변호를 맡았는데 너무 떨려서 아무 말도 못했다. 딱하게 여긴 동료 변호사가 그 일을 대신했다. 동갑내기 아내에게는 옹고집 남편이었고 불합리한 일에도 무조건 복종을 요구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가 되었다. 대영제국에서 인도를 해방시키는데 앞장섰다. 신기하지 않는가? 간디는 대영제국을 대항하여 싸울 정신적인 힘을 바가바드 기따(이하 기따)로부터 얻었다. 간디는 기따에 대해 말만 들었지 어렸을 때는 이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간디가 기따를 최초로 읽은 것이 영국에 유학하던 시절이다. 그것도 산스끄리뜨 원본이나 힌디 번역이 아닌 Edwin Arnold의 영어 번역본 '천상의 노래(The Song Celestial)'이었다.

간디는 기따에 나오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실제 역사상의 전쟁으로 보지 않고 마음의 전쟁으로 해석함으로써 자신이 주장하는 비폭력주의를 뒷받침했다. 간디에게 중요한 것은 그 전쟁의 성격이 아니라 기따 전편에 나오는 정신, 즉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위한 고행과 봉사였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선배 독립운동가 틸락도 기따를 폭력적인 측면에서 해석했다. 그나 간디는 이를 비폭력을 가르치는 경전으로 해석하여 인도 독립을 위한 무기로 삼았다. 간디는 영국 유학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백인들을 접하면서 이들 생각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기독교 우월주의를 보았다. 그런 생각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인도 독립운동을 추진해야할 근거가 빈약해진다. 그래서 간디는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신약의 산상수훈에 감탄을 하면서도 이 사상이 기따의 아힘사, 비폭력사상과 다를 바 없다고 정의를 내리고 힌두교의 비폭력주의를 강조했다.

버리고 즐기라

그렇다면 간디는 단순히 힌두교의 우월성만 강조하기 위해 기따를 내세웠을까? 간디의 삶을 보면 그게 아니다는 것이 명확히 드러난다. 수년간 간디를 숭배하며 따르던 한 미국 언론가가 어느 날 기자다운 촌철살인의 질문을 간디에게 날렸다. “선생님의 인생의 비밀을 단 세 단어로 저에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어떤 도전도 피한 바 없는 간디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거요?” “버리세요. 그리고 즐기세요. (Renounce and enjoy)”

간디의 이 말은 가장 오랜 힌두 문헌중의 하나인 이샤 우파니샤드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 기따의 전부가 이 단순한 세 단어의 주석이었다. 이 말은 우리가 삶을 즐기려면 돈, 소유, 권력, 명성, 심지어 가족이나 친구도 이기적 목적으로 애착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기적인 애착이 생기는 순간 이것들의 포로가 된다. 기따의 언어로 분리는 행동의 숙련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결과를 염려하는 자는 목표를 보지 못한다. 그때 그가 보는 거라곤 자기 앞에 닥친 반대와 장애물뿐이다. 결국 상황의 어려움을 감지하면서 일을 그만 두거나 좌절과 절망으로 인해 폭력으로 돌아선다. 그러나 결과로부터 자신을 분리한 사람은 곤경에 처해져도 전혀 흔들림이 없다. 이익, 권력, 명성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최선을 다한다. 항상 목표를 지향한 그의 시선은 어떤 난관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선명하게 본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분리하는 훈련을 통해 당신이 행한 것에 대한 결과를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동기가 순수하다면 당신의 수단은 올바른 겁니다. 참으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겁니다. 당신이 수단을 돌보고 나머지는 그 분에게 맡기면 그 일의 결과는 바르게 나타납니다.

분리는 냉담하거나 무관심한 게 아니다. 이건 효율적인 개입의 전제조건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타인에 대한 최선은 종종 우리 자신의 의견에 대한 애착으로 인해 왜곡된다. 행복도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원한다. 우리가 자신들을 위해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 때만이 타인의 필요를 선명히 볼 수 있고 어떻게 그들을 섬길 것인가를 제대로 알게 된다.

자유인 간디

간디가 자신의 경력을 추구하는 동안에는 자신 안에 내재된 거대한 창의성의 창고에 접근할 수 없었다. 그가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능력이 분출되는 자신을 발견한 것은 바로 다른 사람을 위해 살기 시작했을 때 부터였다. 남아공에서 변호사로 성공을 거두고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할 때였다. 칠십대 되었을 때 그의 능력은 이십대였을 때보다 몇 배나 커졌다. 커다란 위기의 시기에 그의 헌신의 깊이는 점점 더 커졌고 더 큰 양의 에너지와 인내가 생겨났다. 원탁회의동안에는 밤 열한시 이전에 침대에 든 적이 없었고 새벽 2시가 되면 잠에서 깨어났다. 77세의 나이에 힌두-무슬림 폭동이 일어난 노아칼리와 비하르 지역을 통과하는 순례 길의 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성공이나 실패에 관하여 걱정하지 말라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간디는 불안이나 피로의 부담 없이 자신이 당면한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서구 기자가 질문했다. “간디 선생님, 선생님은 지난 50년 동안 매일 15시간 이상 일해 오셨습니다. 좀 쉬셔야 할 때라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왜요?” 간디가 대답했다. “난 항상 쉬고 있답니다.”

이것이 기따가 가르치는 자유를 누리는 삶의 예술이다. 어떤 정치, 경제 또는 비폭력 저항에 대한 간디의 사역에 대한 공부도 그의 능력의 진정한 원천을 드러낼 수 없다. 그러나 간디 자신이 어린이가 갖는 측량할 수 없는 단순함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기따는 내가 처음 접한 1889년 이래로 나의 어머니가 되어왔습니다. 나는 기따를 모든 곤경의 안내자로 삼았고 항상 적절한 안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기따의 도움을 얻으려면 경건한 마음으로 어머니 기따에게 접근해야만 합니다. 평화를 주는 기따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면 결코 절망을 경험할 수 없으며 완벽한 축복을 즐거워하게 됩니다. 이 영적인 어머니는 자신의 헌신자들에게 삶의 매순간 신선한 지식, 희망과 능력을 줍니다.

기따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일과 매일의 삶속에서 이를 실천하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다. 전자는 얼마만큼의 재능이나 장학금을 받아 자신의 개성을 사용하여 진행하면 된다. 후자는 의식의 가장 깊은 곳까지 이르게 하고 성격과 행동이 완벽하게 변하게 되도록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기따를 일상의 교범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린 간디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간디가 했던 것처럼 이를 실행에 옮기는 시도가 없다면 기따를 이해하기란 요원한 일이다.

우리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한다면 이것은 비폭력이 아닙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할 때만이 비폭력입니다. 난 이 거대한 사랑의 법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압니다. 그러나 위대하고 좋은 일 가운데 어렵지 않는 것이 어디 있을까요?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신의 은혜로 만약 우리가 이를 하고자 한다면 가장 어려운 일이 쉽게 이룰 수 있는 일이 됩니다.

난 산상수훈과 바가바드 기따 사이의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산상수훈이 그래픽 방식으로 설명했다면 바가바드 기따는 과학적인 수식으로 축소된 것입니다. 용어로 이해되는 과학책이 아니라 과학적인 방식으로 사랑의 법으로, 내식으로 표현하자면 버림의 법으로 주장되는 것입니다.

기따는 주어진 일을 해라. 그러나 열매는 포기해라. 분리하여 일을 해라. 상급에 대한 욕망없이 일해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기따의 명백한 가르침입니다. 행동을 포기하는 자는 추락합니다. 상급을 포기하는 자는 상승합니다. 그러나 어떤 형식으로든 열매에 대한 포기는 결과에 대한 무관심을 의미합니다. 모든 행위에 있어 사람은 거기에 따르는 결과, 수단과 역량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갖추고 결과에 대한 욕망없이 자신의 앞에 놓인 과업에 전력을 투구하는 자를 일컬어 그의 행위의 열매를 포기한 것이라고 합니다.

기따의 진정한 신자는 실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는 뛰어난 이해력으로 영원한 기쁨과 평화를 누립니다. 그러나 그 평화와 기쁨은 회의론자나 자신의 지성이나 학문를 자랑하는 자에게는 오지 않습니다. 충만한 믿음과 하나된 마음으로 경배하는 마음이 겸손한 자에게 예비된 것입니다.

 

나눠지지 않는 하나의 마음

바로 요가를 통해 이루어지는 나눠지지 않는 하나 된 마음이 바로 기따가 말하는 바다. 이것은 지성, 감각, 감정과 본능사이의 부단한 내적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우리의 보통 마음상태와는 완전히 반대다. 요가는 산산이 조각난 개성들의 완벽한 재결합하여 온전한 하나로 이루어져가는 과정이다.

런던에서 원탁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 간디는 매순간 인도의 독립을 위해 깨어있었다. 자신의 메시지와 완벽히 일체가 되어 있는 이런 간디의 모습은 영국인들에게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는 자연스러운 호소가 되었다. 간디는 연설이나 무대 이벤트들을 계획하지 않아도 되었다. 뭐를 하든 믿은 대로 구현해 내었다. 회의 기간 중 인도를 대표하여 간디는 두 시간동안 회중 앞에서 설득력 있는 연설을 했다. 간디가 연설을 마쳤을 때 런던 리포터들이 간디의 비서 바하데브 데사이 둘레에 흥미를 갖고 몰려들었다. “어떻게 아무런 준비, 사전작업이나 메모도 없이 그렇게 긴 시간동안 이야기할 수 있는 비결이 뭡니까?” 데사이는 대답했다. “간디가 생각하는 거나 느끼거나 말하는 거나 행동하는 거나 모든 것이 동일합니다. 메모가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웃으면서 추가로 말했다. “당신과 나, 우리는 하나를 생각하고 제2의 것을 느끼고 제3의 것을 이야기하고 제4의 것을 행동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흐름을 기록할 파일이나 메모가 필요합니다.”

글을 쓸 때 난 내가 전에 무슨 말을 했던가를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의 목표는 주어진 질문에 대한 답이 나의 이전 진술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순간에 드러내는 나 자신이 진리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나는 진리에서 진리로 성장해왔습니다. 저장된 기록속에서 50년 전의 나의 글과 최신의 것을 비교해야 할 때마다 난 둘 사이의 불일치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개인이 무력해지고 그의 행동이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칠 때가 옵니다. 그가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만들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우리 중 소수만이 삶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본다. 대부분은 우리가 가진 편견, 선입관, 욕망, 흥미와 두려움으로 우리 자신의 호불호를 통하여 다른 이를 본다. 이것은 인간대 인간, 공동체대 공동체, 국가대 국가로 우리 앞에 조각난 분리주의자들의 모습이다. 우리가 삶을 있는 그대로, 나눠지지 않는 전체를 보기위해서는 개인의 이익, 능력, 즐거움, 명성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개별 상황에 따라 삶을 볼 수밖에 없고 세상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우리의 욕망에 따라 조절된 것을 볼 것이다.

수년간 반복해서 자기욕구를 충족시키는 그 같은 조절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인격이라고 믿게 된다. 사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벗겨야 할지 잊어버린 가면이다 그 가면 뒤엔 완벽한 두려움 없음, 무조건적인 사랑, 넘치는 기쁨과 같은 우리의 진정한 영광이 놓여있다. 간디가 수년간 자신보다 남을 위해 살면서 가면을 벗겨버리고 자신을 무화시키는데 성공했을 때 간디는 고독, 이기심, 두려움이 자기의 인격으로부터 제거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남은 건 항상 숨겨져 있던 사랑과 용감함이었다.

진정한 아힘사

고대 인도의 명상 선생은 말했다. 적대감이 전혀 없는 사람은 아무에게도 도전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적대적일 수 없다. 두려움이 전혀 없는 사람은 그가 아무도 위협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운 사람이 전혀 없다. 이것이 진정한 아힘사에서 나온 힘의 정확하고 과학적인 정의다.

왜냐하면 비폭력적인 사람에게는 온 세상이 하나의 가족이다. 그래서 두려움도 없고 아무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저녁 세바그람 아쉬람에 수백명의 사람들이 저녁기도 모임에 모였다. 태양이 지려하고 인도의 뜨거운 낮이 지난 후 뱀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모인 사람들 사이로 코브라가 한 마리가 기어 나왔다. 의료시설이 빈약한 인도의 시골에서는 코브라에 물린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라 그 뱀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경악한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공포로 사람들이 밟힐 위험도 있었다. 그러나 간디는 움직이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간디는 단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다리, 가슴과 팔이 다 드러난 도띠를 입고 있었다. 숨을 죽인 대중들이 쳐다보고 있을 때 코브라는 바로 간디를 향해 갔고 천천히 그의 넙적다리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무슨 소리도 내지 않는 긴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간디는 라마 라마 라마 라는 그의 주문을 외우고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코브라도 두려움의 흔적을 잃어버렸다. 뱀은 결코 고통을 일으키지 않는 누군가의 면전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감지했음에 틀림없다.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그 뱀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미끄러져 사라졌다.

가장 간단한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 될때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마음이 열려있다면 아무런 어려움도 없을 것입니다. 비폭력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어떤 지적인 위업으로 오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알지는 못하지만 모든 사람은 신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자신안에 믿음을 갖고 있고 그것이 증폭된 최고봉이 신입니다.

간디의 삶의 지팡이 만뜨라

용감함은 간디가 태어날때부터 가진 것이 아니다. 고등학교때 그의 키보다 작은 아이들을 두려워했다. 싹트는 인내의 역량과 자신을 강하게 만들 수 있는 깊고 충동적인 욕구만 갖고 있었다.

가정의 오래된 종 람바가 그의 첫 도우미가 되었다. “도련님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나쁜게 아니랍니다.”라고 람바는 간디에게 확신을 주었다. “그러나 어떤 것이 도련님을 위협한다면 도망가는 대신에 땅을 딛고 서서 마음에 라마 라마라는 주문을 반복하세요. 그것이 도련님의 두려움을 쫓아내고 마음에 두려움이 없게 만들거예요.”

람바를 사랑한 간디는 한동안 그 제안을 따랐으나 곧 잊어버렸다. 젊은 마음에 서구 교육의 분위기속에서 성장하면서 주문을 되풀이 한다는 것은 기계적이고 미신같이 여겨졌음에 틀림없다. 간디는 자신이 어떤 것을 오랫동안 믿든 않든 그 대상을 직접 실험해 보지 않고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과학도였다. 람바로 인해 그의 의식속에 깊이 뿌려진 씨앗은 그의 유년시절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자라났다. 그러다 마침내 남아공에서 유색인종에 대한 갈등과 증오의 폭풍우가 그를 부수기 시작했을 때 그 만뜨라는 다시 그의 내면 깊은곳에서부터 울려나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에서 검증되었듯이 만뜨라는 그의 최대의 후원자가 되었고 능력의 무오한 원천이 되었다.

만뜨라는 삶의 지팡이가 되었고 모든 곤경을 견뎌내게 하였습니다.

되풀이 할때마다 그것은 새로운 의미를 지녔고 각 반복은 당신을 신에게로 점점 더 가까이 인도합니다.

만뜨리는 화내는 것에서 동정으로, 악의에서 선의로, 증오에서 사랑으로 자신들을 부정적인 인격으로부터 적극적인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모든 전통의 구도자들이 발견한 영적인 공식이다. 마음을 잠잠케 하므로 그것은 점차적으로 의식의 깊고 깊은 수준에 나눠지고 반대의견들을 하나로 통합한다.

간디의 만뜨라 라마는 기쁨에 이르고 머무는 공식이었다. 간디는 매일 자신의 마음의 리듬과 가까이 연결된 만뜨라의 리듬과 자신의 발걸음과 호흡의 리듬이 안정되기 시작할 때까지 수 마일을 걷곤 했다. 두려움이나 분노가 그를 위협할 때 간디의 마음깊이 기쁨의 공식을 구동하기 위하여 라마의 힘을 빌렸다. 라마 라마를 반복하며 잠이 들면 기쁜 가운데 잠들 수 있었다. 수년 동안 만뜨라는 그의 가장 깊은 의심과 두려움 아래로 파고 들어 간디는 기쁨가운데 지낼 수 있었다. 그것은 외부의 폭풍우가 결코 흔들 수 없으며 폭력의 위협이 파괴할 수 없는 마음의 습관이었다.

성장하는 동안 수차례 간디의 유모 람바는 축제일에 좁고 비뚤어진 포르반다르 시장골목을 통과하며 양옆에 늘어서 있는 야채와 과일가게들 사이로 걸어가는 사원 코끼리들의 행렬을 보여주었다. 헌신적인 그녀의 눈에는 이 코끼리들은 라마 만뜨라가 할 수 있는 능력의 생생한 묘사였다. 가게들 사이 거리를 따라가며 그들의 코는 뱀처럼 쉴새없이 좌우로 건들거리며 가게속의 코코넛과 바나나를 탐욕스런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어떤 말이나 위협도 그들을 조용하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코끼리들을 잘 알고 사랑하는 숙련된 코끼리 부리는 사람이 코끼리 코에 대나무를 감겨주었다. 그 순간 코끼리는 코로 대나무를 감자말자 조용해졌다. 불안감이나 물건을 도둑질 맡는 일이 없어졌다. 코끼리는 군중이 가득한 거리를 대나무를 감아쥐고 양쪽 옆에 들어선 코코넛이나 바나나에는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머리를 높이 들고 보무도 당당히 걸어갔다.

람바는 어린 모한다스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도련님의 마음이란 코끼리 코와 같아요. 마음이 만뜨라를 붙들면 모든 불안은 사라지게 된답니다.” 이것은 기따가 주는 메시지와 같다. 모든 상황, 승리, 패배, 찬양, 불평, 사랑과 미움에서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면 당신은 어딜 가든 당신의 목표로부터 당신을 흔들리게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때 당신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만뜨라는 마음을 조용하게 하고 성격과 의식을 변화시키는 열쇄역할을 하는 명상의 준비작업이다. 명상은 종교가 아니다. 이것은 어떤 신앙이나 신조로부터 독립적인 동적인 훈련이며 이안에 모든 집중의 힘은 마음 깊은 속을 움직여 점차적으로 모든 작은 이상과 목표를 소모시키고 최우선의 이상을 담아내도록 한다.

이 훈련을 통하여 사람은 밤 낮 끊임없이 갈등과 분노의 폭풍우가 몰아치는 의식의 가장 깊은 수준으로 들어간다. 간디가 말했듯, 그것은 사랑이 분노와 두려움과 씨름하는 곳이고 궁극적으로 명상을 통하여 모든 감정을 제압하게 된다.

명상의 원칙은 당신이 명상하는 그 무엇이 되는 것이다. 간디는 기따의 사상에 나오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유와 기쁨으로 살아가는 나눠지지 않는 하나의 마음으로 명상했다.

기따의 제2장 마지막 18절은 삶의 예술의 비밀을 제공합니다. 이 구절들은 그 이후 내 마음판에 새겨져 있습니다. 나에게 있어 이 구절들은 모든 지식을 제공합니다. 이 구절들이 나에게 가르치는 진리들은 영원한 진리들입니다. 그 안에 갑론을박이 있지만 실현된 지식을 드러냅니다. 내가 많은 번역본들과 주석서들을 읽은 이래 만족할 때까지 논쟁하고 이유를 따져왔습니다. 그러나 처음 읽을 때 받은 감명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 구절들은 기따 해석의 열쇄입니다.

간디는 기따 2장 마지막 18절중 63절을 평생의 모토로 삼았다.

감각의 대상을 깊이 생각하면 집착이 생긴다. 집착에서 욕망이 생기고 욕망은 강력한 정욕으로 불타오르고 정욕은 무모함을 낳는다. 그러면 기억이 모두 틀려져 고상한 목적은 사라지고 마음은 메말라져 목적과 마음과 사람 모두 망한다.

간디가 위대한 것은 진리를 알고 이를 실천한데 있다. 그는 인도와 인도인, 나아가 식민 지배국인 영국인을 위해서도 자기를 버렸다. 버린 그 자리에 자유와 정의와 기쁨이 들어찼다. 종국에는 인도의 독립이 있었다. 그의 버림의 행진은 자기 것을 고집하는 기따의 의붓아들들인 힌두우익자들의 총탄으로 마감되었지만 진리를 발견하고 이를 실천한 그의 정신은 인도인들이 가장 소중하게 아끼는 돈마다 새겨져 오늘도 인도 전역을 메아리치고 있다.

미국 감리교 선교사였던 스탠리 존스가 남아공에서 귀국한 간디를 델리의 세인트 스테반 대학에서 만났다. 어떻게 하면 선교를 잘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간디는 간단히 대답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라 그러면 된다.” 간디는 능히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진리가 신이었고 그 진리를 실천한 그의 삶은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되었다. 그래서 말했다. “메리 지반히 메라 산데시헤”(내 삶이 나의 메시지입니다.) 기따로부터 비폭력과 불살생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실천함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변화시킨 간디의 삶은 참으로 고귀한 기따의 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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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2016.06.24 11:17:09
*.164.153.48

사티아 님,

큰 울림을 주는 좋은 글 ,

잘 읽었습니다.

앎을 실제로 살아내는 것,

이것처럼 어려운 게 없으니

간디 같은 분 앞에서는 주눅이 들고,

이것처럼 옳은 게 없으니

용기를 내서 가야겠다는 자극도 받는군요.

다 좋은데,

코브라 이야기는

도저히 내가 흉내내기 어려운 겁니다.

전승과정에서 조금 부풀려진 거 같기도 하고,

일리가 있는 이야기 같기도 하고 해서요.

바가바드 기따를 기억해두어야겠습니다.

건강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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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5]사띠아

2016.06.25 08:08:50
*.173.92.107

목사님

다듬어지지 않은 글 읽으시느라 피곤하셧지요.

좀 더 다듬겠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인도분들의 말은 코브라 전승은 사실이랍니다.

어제 아침에도 운동 나갔다가 코브라를 봤습니다. 

인도 친구들이 풀섶에 들어간 코브라를 가리키며 두려워하는데

겁없는 제가 막대기로 근처를 두드렸더니

고개 쳐들고 달라드는 것이 아니라 쏜살같이 도망 갔습니다.  


4개월간 바가바드 기따를 공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3부 18장으로 이루어진 전편을 상중하 3편에 걸쳐 정리하고

이번 간디 편은 바가바드 기따 실천편으로 써보았습니다.

제 생각이 아니고 제 글이 늘 그렇듯이 여기저기서 

베끼고 옮겨서 짜집기 한 것입니다. 


간디의 말처럼

예수의 말씀, 그 정신을 삶으로 살아내는

그런 결기를 저에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profile

[레벨:38]클라라

2016.06.25 18:54:31
*.226.54.217

사티야님, 인사드립니다.

저도 긴 글이지만 세 번이나 읽었습니다.

두 번은 더 읽고 답글을 드릴까 하다가 그래봤자 내용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아 컴터 앞에 앉았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간디야말로 이 말씀이 실제 육화되서 사신 분이군요.  

진리가 아닌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서(비본질적인 것)- 다시 진리(본질적인 것)와 하나가 되었을 때

그 때서야 비로소 '자유'을 누릴 수 있다. 이렇게 이해 되네요.

그 자유의 삶의 증거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말씀이 실행되는 것이고요.

 

사티야님,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저한테는 최고의 글입니다.

성서에서 배웠던 말씀을 실천해야  하는 부담감이

목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늘 걸려 있었는데

그 부담감이 오히려 자유를 옥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군요.

"버려라, 그리고 즐겨라!" 잘 기억하겠습니다.

어젯 밤 간디 생각하다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다시 읽었는데 읽길 잘 했다 싶네요.

참, 코브라 전설은 저는 믿어지네요. ^^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25]사띠아

2016.06.27 06:18:08
*.177.126.106

라라집사님

아인슈타인은 간디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정도의 존재가 살과 피를 가지고 지상으로 내려왔다는 사실을

몇 세대후의 사람들은 거의 믿지 못할 것이다."

아무 책이나 읽지 않던 아인슈타인조차도

간디 자서전을 읽으며 그의 초상화를 서재에 두었습니다.

진리(사티야)는 신이라고 한 간디의 생각은

신이란 '우주의 규칙적인 조화안에서 

서서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라고한 

스피노자를 존경하며 

'우주적인 종교감정'을 이야기한 

아인슈타인의 생각과 통하는 점이 있었습니다.

저의 눈에는 간디가 만뜨라와 명상을 통해 

절대타자, 누미노제를 경험한 듯 보여집니다. 

아인슈타인도 과학을 하면서 우주를 움직여가는 힘에

그런 경외심을 느꼈지 않나 싶구요.


고타마 싯달타나 간디가 

오직 기독교인으로만 성장해오고 

그 체계안에서 굳어진 저에게

무척 부담되는 존재들이기는 합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저의 만뜨라(주문)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성도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율법의 미몽속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을 향해 닫아 놓았던 마음이 열리자

오직 그분만을 믿고 살며 열정을 불태운 사도 바울

그리고 많은 믿음의 선배들.


세상을 위하여 자신을 버림으로서

예수님께서, 붓다가, 간디가 누릴 수 있었던 자유가

그리운 새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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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웃음

2016.06.26 18:44:17
*.195.198.250

요즘 한국에서는 이상한 역사이야기들이 많이 있네요.

고타마 시타르타 석가모니께서 한민족의 조상이라고 하네요.ㅎㅎㅎ

단군할아버지의 손자가 석가모니랍니다.

암튼 조금 더 있으면 간디나 예수께서도 한민족의 조상이 될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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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5]사띠아

2016.06.27 06:20:45
*.177.126.106

웃음님

인도식 개념으로 이해하자면 '아바타(화신)이군요.

이미 어떤 인도인들은

예수님은 비슈누신의 11번째 화신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석가모니는 좀 일찍 태어나서 8번째 화신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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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주안

2016.06.28 13:53:03
*.69.199.48

간디의 삶이 그리스인이 살아내야할 삶과 비슷하네요

나의 욕망과 세상 것들을 버리고 주님만으로 즐거워하며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인으로 살며

내안에 계신 주님과 하나되어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모습이요.

사띠아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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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5]사띠아

2016.06.29 17:50:09
*.160.132.218

간디나 붓다나 테레사 수녀처럼 

남을 위하여 자기들의 온 몸을 불사른 이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인간이 그어놓은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만민에게 충만하심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

특히 간디의 경우 자기만을 위해 살때는

별볼일 없는 찌질이 인생이었는데

남을 위해 살고자 방향을 잡고

자신의 삶을 던졌을때(36살부터는 부부관계도 안했습니다.)

마하트마(위대한 영혼)가 된 것을 봅니다.

그 분의 인도하심의 손길에 

얼마만큼 자기를 던지느냐가 

삶의 질과 행복의 관건인 듯합니다. 

주안님이 "겉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로운'

신명나는 삶을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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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떡진머리

2016.07.01 22:12:51
*.237.98.48

벌써 5년 전 쯤이 됩니다. 딸 아이를 광주에 있는 철학 대안학교에 보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소위 '명상철학'을 하는 이상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철학의 정체가 바로 바가바드기타였습다.

처음에는 인도철학을 하는 사람들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대체로는 기독교, 운동권과 관계된 인사들  있었습니다.

득도한 듯한, 세상을 달관한 듯이 굴었지만 막상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그분들의 생각이나 사상에 문제를 제기할 때면 제가 그분들로 부터 느낀 것은 벽창호, 답답함, 골때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 또한 바가바드 기타를 이해하기 위하여 간디를 포함한 3권의 바가바드 기타 주석 및 해설서와 우파니샤드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얻은 것으로는 어쩌면 그분들이 그런 자세를 가지는 것은 그들의 공부 상 당연한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수련 중 명상을 통한 내부로의 침잠은 외부에 대한, 철학적으로 이야기 하면 타자에 대한 무감각함을 가져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들게 하였습니다.

또한 버릴 수 없는 욕망- 스피노자는 이것을 코나투스라고 부릅니다.-을 마치 버릴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을 버리는 것이 당연한 것 처럼 여기는, 수련한 사람들은 이것을 버린 사람처럼 사유하는 태도들은 타자의 욕망을 매우 천박한 것 처럼 여기는 그런 태도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버리지 못한 엄청난 욕망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문제는 자신들은 이 욕망이 없는 사람들 처럼 굴며 타인의 욕망을 비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바가바드 기타의 사상이 인도의 카스트제도를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온존시키고 있는 사상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바가바드 기타의 사상에 잘 빠져드는 것은 기독교에 없는 자기 수련의 측면이 바가바드 기타에 매우 강하게 나타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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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5]사띠아

2016.07.08 05:29:56
*.177.205.53

떡진 머리님의 혜안이 놀랍습니다.
아래글은 바가바드 기따에 대한 글을 쓸때 서문입니다.

축의 시대 이전까지는 브라만들이 있지도 않는 신들을 팔아 수천 년 동안 장사를 잘했다. 그러나 인도판 춘추전국시대를 겪고 있던 갠지스강 유역의 똑똑한 크샤트리아 출신들이 못살겠다 갈아보자고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베다를 중심으로 한 제식주의 형식주의를 인도 종교 철학 전통에서는 쁘라브릿띠 다르마(Pravritti Dharma)라고 한다. 신의 사자 브라만 체재하 질서를 철저히 유지하면서 현세에 주어진 다르마에 충실하는 삶의 방식이다.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하는 법, 브라만이 온갖 권력의 정점에 서서 부를 독식하자 여기저기서 불만의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더구나 갠지스강의 잉여농산물로 장사를 해서 사람들이 살만하게 되었다. 이때 기존 전통에 반발한 우파니사드가 등장하고 우리는 이 탈속적인 사상을 니브릿띠 다르마(Nivritti Dharma)라고 한다. 세속적 욕망을 구속하는 것이라고 보고 이를 떠나서 도를 추구하는 무리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저마다 먹을 것이 없어 허덕일때는 꿈도 못꾸던 일들이 구걸해서 살만하니 이런 사상도 활개를 치게 되었다.

고타마 싯달타나 마하비라에 와서 이런 탈속적인 경향이 더욱 강해진다. 그로부터 2-3세기 후 등장한 마우리아왕조의 아쇼카왕은 붓다의 원래 뜻과는 상관없이 아예 불교를 국교화 해버렸다. 콘스탄틴이 신심이 깊어서 기독교를 국교화 한 것이 아니듯이 아쇼카도 기존 기득권 세력 길들이기의 한 방편으로 받아들인 것뿐이다. 하여튼 한 나라의 절대 통치자가 일정 종교를 적극적으로 장려하게 되니 세상의 똑똑한 사람들은 다 세상을 떠나버린다. 결혼도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 우리나라 인구가 줄어든다고 야단이다. 사는 게 팍팍하니 출가 아닌 출가를 하는 싱글들의 천국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래서는 정상적인 사회가 유지되기 힘들다.

이렇게 되자 그동안 잠잠히 숨죽이고 있던 브라만들이 자기들의 실력을 발휘한다. 바람 부는 강가의 갈대처럼 숙이고 있던 기득권자들이 오랜 굴욕을 떨치고 다시 일어선 것이다. 지난 수백 년은 너무 길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같다. 절치부심, 와신상담의 긴 세월을 거치면서 나름대로 반성도 많이 했다. 민중의 마음을 자신들에게 돌이키려고 공부도 많이 하고 고민도 엄청 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힌두교다. 사회도 버리지 않고 시집장가도 가면서 살다가 해탈할 수 있는 체계를 정립한 것이다. 헤겔의 정반합은 아니지만 비스무리하게 되었다. 브라만의 사상도 붓다의 사상도 함께 녹여서 태어난 혼혈아, 인도식 용어로는 맛살라, 힌두교가 탄생했다. 그 체계화된 힌두교의 정수가 바로 바가바트 기따다.

 

힌두들은 기따를 통해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고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기따만 이해하면 힌두들의 사고를 다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힌두들은 이 우주가 하나의 실체에서 파생했기 때문에 형태와 기능은 다르나 본질은 하나라고 본다. 본질은 아트만은 영혼, 순수의식, 순수 자아라고 표현한다. 이렇게 생성된 우주 존재역시 태어나고 모든 존재 생과 죽음을 되풀이한다. 이 믿음을 설명하고 있는 법칙이 업(까르마)과 윤회(삼사라). 업은 우주의 인과 법칙이다. 씨앗을 뿌리면 결실을 맺는 것처럼 모든 행위는 반드시 결과가 있다. 그렇기 나의 나된 것은 내 업보의 필연적인 결과다. 이 법칙에 따르면 우주에 우연이란 없다. 업의 결과가 현생에 다 나타나지 않고 결과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업의 결과를 경험하기 위해 다시 태어난다.

또한 힌두들은 우주와 사회가 하나의 유기체라고 본다. 다르마는 이 유기체가 잘 돌아가게 하는 질서체계이자 윤리규범이다. 유기체는 경쟁이 아닌 조화와 기능을 그 속성으로 한다. 힌두의 체질은 경쟁개념과는 맞지 않다. 힌두 체계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바로 다르마다. 카스트는 바로 다르마의 엑기스이며 엣센스다. 힌두도 불교나 자이나교처럼 모든 인간의 실존상황을 고(, 두카)로 본다. 이런 고통스런 상황에서 해탈하는 것이 궁극적인 삶의 목표다. 윤회도 다시 태어나야 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고다. 바가바트 기따는 까르마(행위)요가와 박띠 요가를 그 길로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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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2016.07.08 23:15:55
*.226.54.217

선교사님,

저한테는 쏙쏙 이해되는 내용은 아니지만,

-힌두교나 바그다드 기타에 대한 전이해가 없어서 그럴거예요.

선교사님 글이 유려해서인지 흥미롭게 읽혀집니다.

윗글이 서문이라 하시니..

앞으로 더 기대해도 될른지요.

사실, 예전부터 선교사님 글 기다리고 있었는데,

너무 뜨문뜨문 올려 주시더라구요.

애석하게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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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떡진머리

2016.07.10 23:07:50
*.237.98.48

간디는 자신의 바가바드 기타 주석에서 "비폭력의 정신만이 경전의 참뜻을 밝혀줄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기타'의 주제는 단순히 브라만의 체현과 그 방법들이며 싸움은 다만 그 가르침을 수단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비아사(마하바라타의 저자)가 아름다운 서사시를 쓴 것이 전쟁의 무용함을 서술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간디가   자신의 윤리적 정당성위해 바가바드 기타를 해석하고 있다는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간디의 폭력과 비폭력의 구분에서 그의 행태적 기준이 폭력적일 수 있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문제는 그가 산스크리트원본이 아닌 영국시인인 에드윈 아놀드의 번역판으로 바가바드 기타를 읽었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습니다. 물론 제가 이 번역판을 읽지 못해서 뭐라고 정확히 이야기 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마도 간디는 그의 기준에서 비폭력이라는 강한 윤리적 지향성을 가지고 이 번역본을 읽어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잘 아시겠지만 불교에 의해 더욱 확장된 포기자(抛棄者)나 사문(沙門,승려)의 성행은 카스트의 위기를 초래했고 이로 인해 바로 바가바드 기타의 행(行)의 요가에서 사회윤리를 준수하는 것이 해탈의 이상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나오게 됩니다.

욕망에 집착하지 않는 행위가 강조되게 된 것입니다.

간디가 여성이나  슈드라 계급도 바가바드 기타를 읽어야 한다고 이야기 하는데 이것이 인도의 사회구조적 질서의 혁파를 위한 것이라고는 이야기 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인도에 이미 산재해 있는 엄청난 사회의 구조적 폭력을 이야기 하지는 않습니다.

간디의 주석서에는 비아사가 전쟁을 가지고 비유하지 않는 것이 훨씬 좋았을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만 이것이야 말로 생뚱맞은 이야기 입니다.

전쟁의 이야기에 나오는 수많은 수식적 어구들이 단지 전쟁의 무의미함을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야 말로 거꾸로 간디가 이런 주장을 하지 않았어야 한다는 것을 반증해줄 뿐입니다.

아르주나와 크리슈나의 대화는 명확합니다.

특히 가장 오래된 주석의 고전인 슈리 샹카라차리야의 주석서를 보면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해탈과 행위의 갈등을 해소하는 규범적 문제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무사계급의 의무로서 아르주나는 어떤 슬픔이나 분노, 즉 인간적 욕망없이 행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의무경(義務經)에 의해 의무(dharma)라는 것이 우주의 법칙 뿐만 아니라 사회적 의무까지 확장되게 됩니다.

'바르나아슈라마'제도는 계급과 더불어 인생의 4시기에대한 제도인데, 제2기 재가자(在家者)의 삶으로서, 3기와 4기 이전의 행위적 삶에 대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크리슈나는 수행자적 삶을 고민하는 아르주나에 대해 무사적 삶과 재가자의 삶을 살아갈 것에 대해 가르침을 주는 것입니다.

니가 수행자냐는 것입니다.

수행자적 삶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3기나 4기의 삶에서, 그리고 브라만 계급의 삶에서나 고민할 것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질서와 규범을 따라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간디의 비폭력은 '바가바드 기타'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가 오랜 영국의 생활에서 가져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도의 오랜 종교적, 철학적 사상들은 간디가 구분하듯이 폭력과 비폭력의 문제를 그렇게 단순하게 구분하지 않습니다.

물론 간디를 포함한 인도민족의 투쟁이 의미를 가지지만 현실적으로 인도의 독립은  간디의 비폭력이 아니라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폭력(전쟁)들의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간디가 강조하는 '티파스차라야(자기 몸 괴록힘)'은 자기의 신체에 대한 폭력을 내포합니다.

사실 간디의 위대한 사상 운운하지만 우리가 아는 그의 위대한 사상은 별로 없습니다.

앙상하게 알고있는  '무저항 비폭력'이라는 것 뿐입니다.

사실 그에게 더 많은 사상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비폭력을 통해 영국과 항상 타협하였습니다.

물론 그 결과는 항상 영국으로 부터 당하는 배신이었습니다.

좀 더 분명하게 간디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바가바드 기타와 간디를 연결하는 것은 간디 그 자신만으로도 충분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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