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혁 선교사가 들려주는 인도 이야기

누가 붓다를 죽였는가?

인도의 길 조회 수 4290 추천 수 0 2010.03.12 01:04:30

인도의 저명 주간잡지중의 하나인 아웃룩 인디아(Outlook India)는 지난주 특집으로 최근 발간된 “불교도 무신론자의 고백(Confession of a Buddhist Atheist)의 저자와의 대담을 실었다. 스코틀랜드 출신 저자인 스테판 바첼러는 한국 불교의 ‘선’을 배우기 위해 1981년에서 1984년까지 송광사에서 귀산스님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현재 불교의 이단아 또는 불교의 개혁자로서 불리며 전 세계에 진정 붓다가 원하던 불교를 전하고자 애쓰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불교의 기본이 되고 있는 팔리어 경전 원본을 통하여 세인들에게 알려지지 않는 역사적 붓다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기존 편집자들이 팔리어 경전을 강화(講話)의 길이 순서로 나누어 편집함으로서 진정한 붓다의 모습이 사장되어 버린 점을 지적하면서 새로운 각도로서 팔리어 경전 읽기를 제시하고 있다. 대담 순서별로 정리해 본다.

붓다의 진실 연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가?

이 연구는 붓다가 거주하며 사고했던 사라바스띠, 쿠시나가르, 가야, 바이샬리, 라즈기르, 보드가야 등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나는 지정학적으로 붓다가 살았던 세계에 대한 선명한 이해를 갖게 되었다. 이런 관점으로 초기 팔리어 텍스트를 읽기 시작했다. 그때 까지는 나도 다른 불교도처럼 드러난 붓다의 생애에 대해 막연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다. 팔리어 경전은 첫 인도 역사의 진본 기록으로 초기 인도 역사의 80년간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과 같다. 이 경전 속에서 우리는 신들보다 인간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조절하기 위한 치열한 삶의 투쟁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붓다가 살고 있었던 시대의 정치, 경제적인 관점에서 붓다의 세계를 보기 시작했다. 거듭해 읽으면서 그 편린으로 흩어진 이야기들을 재구성하는 동안 특별히 그의 깨달음부터 죽음까지 그 역사의 편린 속에 드러나는 군상들의 실체에 대해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서서히 그 편린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모을 수 있었다.

만약 당신이 팔리어 경전에서 붓다의 삶과 그 시대상을 발견했다면 어떻게 지금까지 그것이 알려지지 않았을까?

그 역사가 잘 알려지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텍스트의 원 편집자들이 그 자세한 역사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었던 탓이다. 그들의 관심은 붓다의 가르침, 담마를 보존하는데 있었다. 그들은 경전을 편집할 때 연대기적으로 배열하기보다 강화의 길이에 따라 배치했다. 그래서 당신은 조금 짧은 강화, 긴 강화, 주제별로 연결된 강화, 그들을 쉽게 식별하기 위해 장절을 나눈 강좌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경전을 나누다보니 부지불식간에 그들은 역사적 연대기의 흐름을 파괴시켜버린 결과를 야기했다. 단지 몇 몇 텍스트로만이 대화나 실제 이야기를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작은 파편들을 재조합, 텍스트의 위대한 원천을 추출해 내게 되면 그 작은 파편들이 단순한 자의적 수식어가 아닌 전체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서로가 각기 독특한 의미를 가지면서 또한 긴밀한 연계성을 갖고 있는데 심지어 작은 역사적인 특성들조차 지속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번역하면 줄잡아 5-6천 쪽이 되는 방대한 팔리어 경전속에 많은 역사기록의 편린들이 조각그림 맞추기 퍼즐처럼 숨겨져 있다. 조심스럽게 조합하게 되면 전체 그림을 완성하게 된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충분한 그런 그림말이다.

그 그림이 무엇인가?

기존 사람들이 알고 있는 붓다상은 왕자로 태어나 호화롭게 살다가 어느 날 모든 것을 버리고 붓다(깨달은 자)가 되어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훌륭한 설법을 베풀고 수많은 승려들이 따랐다는 것이다. 그렇게 가르침을 계속하다가 어느 날 병상에 누워 극락왕생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깨달음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붓다는 깨달음 이후의 성취해야할 일, 즉 그의 깨달은 바를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이를 실천하는 공동체를 세우고자 하는 생각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수차례에 걸쳐 이것을 제자들에게 이야기한다. 이것을 자신의 삶에 부여된 사명이라고 믿었다. 이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의 추종자들과 단순히 히말라야 산자락을 방랑하고 다닐 수만은 없었다. 사명을 실현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들 즉 부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라즈기르, 사라바스띠와 이보다는 조금 작은 바이샬리 등 몇몇 새롭게 생겨나는 도시들만이 그런 것을 제공해 줄 수 있었다. 그 뿐 아니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성가시고 폭력이 난무하는 세속의 왕들과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군주국들과 군대 세력들과도 직면해야 했다.

경전은 그가 상당히 오랜 수명, 즉 80세까지 살았다고 말한다. 경전에 따르면 35, 36세에 득도하였고 이것은 곧 그가 45년 동안 가르침을 베풀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은 수도원에 거주하고 있는 몇 명의 승려들에게 제한되지 않고 신분고하를 따지지 않고 사회의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설파되었다. 그것은 과히 혁명적이었다. 그때까지 북인도는 갠지스강 유역을 둘러싼 작은 소왕국에서 군주국으로 전환되는 시점이었으며 이것은 100년 찬드라굽따 마우리아에 의해 통일을 이루게 된다.

또 하나 일생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붓다가 개입했던 일은 사키아(석가(釋迦))에 있는 자신의 공동체를 돌보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대부분 사람들은 그가 가족과 가문에 대한 책임을 저버리고 승려가 되어 방랑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전부 맞는 말은 아니다. 득도후 카필라바스투로 돌아온 그는 가족과 화해하고 그의 제자들 중 핵심멤버의 일부는 그의 사촌들이었다. 그 중에는 끊임없이 붓다를 무너뜨리려고 한 데바닷따, 첫 동자승으로 된 아들 라훌라, 첫 여승이 된 계모 마하파자파띠, 모든 경전을 암기한 사촌 아난다, 그의 측근이면서 임종을 지켜본 사촌 아니룻따, 붓다의 부친 수도다나의 사후 사키아족의 수장자리를 계승한 아니룻따와 아난다의 형제인 마하나마 등등이다. 그래서 붓다의 29세 때의 출가는 장래 사키안족의 지도자로서 그의 역할을 포기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사키아는 진정한 왕국이 아니었잖나?

사키야는 인도의 지방 소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 크지 않고 커봐야 기백 평방 마일 정도였다. 붓다의 출생당시에는 장로들의 평의회에서 다스리던 이 소공화국이 사라스와띠에 수도를 둔 코살라의 지방 정부가 되었다. 가족의 대표가 명목상의 지도자가 되어 유지되던 공동체형태였다. 붓다의 출생때 그의 부친 수보다야가 사키아 내부를 다스리던 의회의 대표였으나 코삼바왕의 봉신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정치적으로 볼 때 붓다가 아버지보다 훨씬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단 말인가?

어떤 측면에서는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굉장한 권력권으로 진입했다. 당시 정치적으로 가장 큰 위력을 떨치고 있던 라즈기르의 빔비사라왕과 사라스와스띠의 프라세나짓뜨왕의 후원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 지, 또 그 비전을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대중들의 매우 능력있는 지도자요 뛰어난 조직자였다. 흔히들 생각하는 그냥 앉아서 묵상하며 가끔씩 설법을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마하비라와는 전혀 다른, 절연이 아닌 그가 살고 있는 세상과 깊이 연루된 사람이었다.

어떻게 그 당시 유력한 왕들의 지원을 받게 되었나?

왕들이 이미 그의 철학을 선명하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설명할 필요는 느끼지 않지만 왕들이 그를 지원한 이유는 그에게서 어떤 종류의 천재성, 감화적인 용모와 카리스마, 요즘 용어로 말하면 비저너리를 보았고 그래서 그와 어울리기를 원했다. 또한 이때는 거대한 변동의 시기였다. 인도의 첫 도시가 막 태동하려고 하던 때였고 브라만과 베다를 따르는 농업중심의 옛 삶의 형태는 경제적 발전으로 인해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었다. 갠지스강 유역의 막대한 생산으로 인해 충분한 잉여생산물이 있었다. 그 잉여 생산물은 은행업자를 비롯한 매우 부유한 상인 계급의 출현을 몰고 왔을 뿐만 아니라 통치자들에게 군대를 거느릴만한 충분한 부를 제공하고 젊은 청춘 남녀들로 종교, 철학 또는 다른 사상을 추구하기 위해 집을 떠나도 걸식으로 생존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불확실한 미래로의 이동이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사회질서의 태동인 도시들의 출현을 목격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 왕들이 개화된 포부를 가진 이 무리들과 승려들을 지원하였다고 본다. 물론 붓다의 사후 1백년후 이 무리들은 마우리야 왕조의 출현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마우리야 왕조의 시조 찬드라굽타 마우리야는 자인교도였고 2대 아쇼카는 불교도였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인교와 불교운동을 브라만식의 종교를 대신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이를 따랐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 내에서도 다른 가닥의 흐름을 가진 자들 사이의 부단한 경쟁이 있었다.

붓다의 시대에 브라만과의 갈등이 존재했나?

아니다. 그것은 아쇼카 시대 이후에 시작되었다. 붓다의 생존시에는 명확히 정해진 단체 형성이 되지 않았다. 명백히 붓다는 브라만 사상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는 합법화된 사회구조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은유적이고 종교적인 사상을 직설적으로 거부했다. 신에 관한 어떤 비슷한 개념에도 전혀 시간을 투자하지 않을 정도로 이에 대해 철저히 무관심했다. 그는 어떤 종류의 영원한 혼이 있다는 것에 매우 의혹적이었다. 당신이 붓다의 중심 사상을 배우기 시작한다면 당신 곧 그것들이 우파니사드나 베단타의 정통적 신념에 정확히 반대되는 것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그가 시대의 주된 사상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새로운 종류의 세상, 말하자면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기 위한 그의 시도의 절대 필요한 부분으로 보았다고 생각한다.

초기 경전에 붓다의 외모에 대한 기술이 있었는가?

전혀 없었다. 단 하나 내가 그의 외모에 대한 기록이라고 발견한 것은 그가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외모를 지녔다는 것이다. 그는 다른 승려들과 같이 익명의 사람처럼 보였다. 요즘 보는 좀 우스워 보이는 헤어스타일, 긴 귓불 등의 모든 것은 훨씬 후대의 상상물이다. 비록 팔리어 경전에 브라만이 자신의 브라만 경전에 나오는 마하푸루샤(위대한 사람)의 32개의 특징을 읽고 그 마하푸루샤의 현신이 바로 붓다라고 생각하여 하나하나 유사한 점을 발견하려고 시도했다는 것이 두 번 언급되어 있더라도 말이다. 지금 그것은 분명히 전설의 일부일 뿐이다. 그래서 붓다의 상은 그의 실제 외모와 일치되는 점이 없다. 그러나 일부 신도들은 그가 마하푸루샤라고 믿고 그러므로 그런 독특한 얼굴 생김새를 가져야 한다고 믿고 있다.

붓다가 그의 말년을 망명생활로 보냈다고 했는데?

붓다에게 호의적이었던 그의 아버지 빔비사라를 폐위시키고 자기의 스승인 데바닷따와 함께 붓다를 퇴출시키려고 한 아자타사투가 왕으로 있던 라즈기르 뿐만 아니라 바이샬리에서도 붓다는 자기의 지지 기반을 상실했다. 바이샬리에서의 마지막 우기 안거에 그는 거대한 숲 아래 박공구조의 집에 머물지 않고 성벽 외곽지역 작은 동네에 머물면서 그의 추종자들을 보내 후원자들에게 도시 안에 머물 곳을 알아보도록 하였다. 왜 그가 그렇게 했을까? 이상하지 않는가? 한 가지 가능한 이유는 근래 이전 붓다의 추종자였던 숭가타가 붓다를 배신하고 바이샬리 평의회를 찾아가 “승려 싯달타 고타마는 가짜다”라고 증언하는 바람에 그곳으로부터 탄핵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마도 그가 바이샬리의 지지기반을 상실했을 것이고 사라바스띠에서도 동일한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그의 고향은 적의 공격하에 있었고 마가단들은 그를 차기 전쟁의 공명판으로 대우하고 있었다. 당신은 붓다의 퇴출이 바로 자기의 주된 후원자의 상실과 연계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생애 마지막 9-10개월간 그가 지속적으로 옮겨 다닌 사실은 그가 망명생활을 했다는 것을 말한다.

당신은 또한 붓다가 의도적으로 독살당했다고 결론을 맺었지 않았나?

그가 마지막 식사를 했던 파바는 말라의 사키야와 인접한 코살란 지방의 주요 지방도시중의 하나로 적들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말라로부터 간 코살란 군대장관 카라야나가 붓다의 고향 사키야를 폐허로 만들고 있었다. 파바는 자인교의 창시자 마하비라가 몇 년 전 사망한 곳이기도 했고 붓다가 거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의 적(마하비라를 의미함)을 위해 세운 사원이 있었다. 경전은 단지 붓다가 그의 수행자들과 함께 쿤다라는 대장장이 집에 식사초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쿤다는 햄 또는 베이컨과 유사한 연한 돼지고기 볶음 요리인 수카라마다바를 준비했다. 식사를 받아드는 순간부터 붓다는 그 음식이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고 의심한 듯 보인다. 붓다는 주인에게 “그 돼지고기를 나에게 주고 나머지 음식은 다른 승려들에게 주라”고 말했다. 식사가 끝났을 때 붓다는 쿤다에게 “나머지 돼지고기 요리는 구덩이에 묻어 버리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혈변을 동반한 심한 질병에 걸렸고 그는 묵묵히 그걸 견뎠다.” 그의 유일한 반응은 아난다에게 “쿠시나라로 가자”였는데 그 같은 상황에서 그 의미는 “이 장소를 벗어나자”로 들렸다.

왜 그가 그 음식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 그것을 먹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이 사실이 자신의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서둔 것으로 확신한다. 왜 적들이 이미 죽어가고 있는 노인을 구태여 죽이려고 하겠는가? 정말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우리가 알기로 붓다는 매우 심하게 앓고 있었다. 이렇게 앓고 있는 노인을 독살하려고 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왜 붓다는 “나에게 그 음식을 주고 다른 사람에게는 주지 말라”고 했을까? 내 생각으로는 그 음식이 붓다를 표적삼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사람 즉 붓다의 모든 가르침을 외우고 있던 그의 사촌 아난다가 표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난다를 죽이면 불교를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아난다가 표적이었다. 이것이 어떤 측면으로는 텍스트를 제대로 읽는 것이다. 만약 그 사건을 연대기적인 장면 속에 삽입하면 그런 추론이 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그 돼지고기 요리를 다른 사람이 먹지 못하도록 묻게 했다는데?

아마 그는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일말의 가능성도 제거하려고 했다. 당신은 다른 방법으로 이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는 분량의 이 텍스트의 흐름을 따라 가게될때 그 결론은 명확하다.

당신은 붓다의 사후에 권력 투쟁이 있었다고 했지요?

다행히도 경전은 그의 죽음으로 끝을 맺지 않고 있다. 이것은 그의 사후 9개월 후에 벌어진 첫 번째 종단회의까지 다루고 있다. 그리고 선명하게 붓다의 사촌 아난다와 브라만으로 살다 인생 후반부에 승려가 된 마하카삿파와의 권력투쟁을 묘사하고 있다. 마하카삿파는 붓다로부터 직접 전수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붓다의 임종당시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가 그의 사후 1주일 후 막 화장 장작에 불을 붙이려 할 때 승려 몇몇과 함께 나타났다. 마하카삿파가 마지막 사자에 대한 예를 붓다의 시신에 표하고 장작불이 붙여졌고 그이후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다. 마하카삿파는 아난다가 완전히 득도한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그래서 공동체내에 어떤 지도자의 역할을 맞기에 적합하다고 보지 않았다. 마하카삿파는 자신이 완전 득도한 사람으로서 비록 붓다가 명백히 자신의 후계자를 두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붓다의 후계자라고 선언했다. 우스꽝스럽게도 불교도 공동체는 그를 상가(종단)의 시조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붓다가 그렇게 원하지 않았던 라틴의 아버지인 파파 또는 교황이 그의 사후 몇 개월 만에 그의 공동체에 발생했다. 마하카삿파는 라즈기르에 첫 종단회의를 구성했다. 물론 자신이 지도자 자리를 꿰찼다. 팔리어 경전에 마하카삿파가 아난다를 아주 무시 또는 홀대하는 두 경문이 등장한다. 그는 아난다를 단지 어린아이에 불과하다고 격하시킨다. “넌 자신의 주제를 너무 몰라. 애야.” 그러자 아난다는 대답했다. “그러나 이것은 회색 머리칼이 아닌가?” 왜 이 구절들이 여기에 등장해야 하는가? 왜 그들은 이것을 편집할 때 삭제하지 않았을까? 경전 내에서는 첫 종단회의에서 발생한 그들의 갈등을 짐작케 하는 짧은 구절들이 많이 있다.

마하카삿파의 권력 이양이 불교에 해악이었나?

마하카삿파는 거대한 불확실성의 시대에 권력을 이양 받았다. 전쟁이 곧 발발한 조짐이 보였다. 어떤 측면으로서는 만약 그런 일이 없었다면, 그런 강력한 독재자나 가부장적인 권력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면 불교는 아마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권력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런 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아난다는 아마도 그런 일을 하기에는 너무 온순했고 그래서 공동 합의를 이끌어내려고 했을 것이고 모든 이들이 해명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일을 진행하려고 했을 것이다.

이 드러나지 않는 붓다의 이야기가 붓다를 향한 당신의 경배심을 약화시켰나?

나는 그를 한 사람으로서 알게 된 지금 내가 그를 신화적 존재로 인식하고 있을 때보다 더더욱 그를 경배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연구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나는 이상적인 붓다를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연구를 마친 지금 이 지구상의 한 나라에서 야심만만한 친척들과 왕들 사이에서, 모든 투쟁에 가운데서 그의 다르마(의무)를 충분히 수행하고자 몸부림쳤던 한 사람을 보며 그 자체가 비범하다고 생각한다. <상기 글은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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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바라바

2010.03.14 17:31:29
*.2.45.158

성서 이전의 예수의 목소릴 듣기 원했었는데 지금도 그걸 목말라 하고 있고 붓다 역시도 승단 이전의 붓다를 찾고 알고 싶었는데 오늘에야 그 진실을 알게 되었네요. 불교나 기독교나 기복신앙화 하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 신앙이 그러한 것을 나무랄 수도 없지만 종교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작업이 바로 교회의 예배일진데 넘 우향하진 않았는지 되물어 봅니다. 제도 종교의 모습은 언제나 같습니다. 인도의 깊은 철학적 사유나 그 문화와 전통을 제대로 알아야 하겠지요. 종교인 이전에. 만약 제가 인도에서 태어났다면 당연히 힌두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문화와 그 민족의 역사를 고려한다면 기독교 온리 선교는 글쎄요.어쩔 수 없는 기독교 내의 선교라 할지라도 전 선교 지향적인 기독굔 반대합니다. 교리적 변증은 서로 다툼밖엔 없지요. 그리고 굽힐 수 없는 당위성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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