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혁 선교사가 들려주는 인도 이야기

제7장 간디의 삶의 핵심 사땨그라하 (01)

스탠리 존스 조회 수 5908 추천 수 0 2010.07.04 18:16:03

‘사땨그라하‘란 용어는 외국인에게는 생소하게 와 닿는다. 이것의 문자적 의미는 ’진리의 힘‘ 또는 ’진리가 가진 에너지‘이다. 이 사상과 실천은 간디 자신의 삶의 핵심이자 이 세상에 미친 지대한 업적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것에 비한다면 다른 모든 것은 그 의미가 미미해 보인다. 이것은 간디주의의 핵심이기도 하다.

 

나는 다음과 같이 간디의 업적을 다섯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새로운 기술과 정신-사땨그라하

둘째, 도덕 세계는 하나이며 개인, 단체와 국가의 도덕성도 하나이라는 것을 강조

셋째, 목표와 수단은 일치해야 한다는 주장

넷째, 자기가 직접 체험하지 않고 경험하고 있지 않는 사상은 결코 주장하지 않는 사실

다섯째, 원칙을 위해서는 죽음과 고통도 불사하는 자세

 

이 다섯 가지 업적중 가장 중요한 것을 고르라면 역시 첫째인 사땨그라하를 손꼽을 수 있다.

 

사땨그라하의 사상은 서서히 전개되어 종국에는 그의 전부가 되었다. 그는 이 사상의 근간을 구자라트 지방에서 전해지던 교훈시에서 빌려왔다. 선으로써 악을 갚으라는, 그 교훈이 그의 지도 원리가 됐다. 그것이 점점 그의 열정으로 되어 갔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여러 가지로 실험해 보게 되었다. 이것이 그 놀라운 구절이다.

 

 물 한 잔을 밥 한 상으로 갚고

 한마디 정다운 인사에 넙죽이 절을 하며,

 피천 한 푼을 금으로 갚고

 네 목숨을 건져 주었거든 목숨도 아끼지 마라.

 모든 어진 말과 행동을 그렇게 존중하고

 조그만 섬김도 그 갚음은 열 곱으로 하라.

 그러나 참 성자는 만인을 하나로 알고

 기쁘게 선으로써 악을 갚느니라.

 

사땨그라하의 핵심 사상은 이 교훈시에서 나왔다. “그러나 신약성경으로 인해 이것이 내 마음에 확고하게 되었다.”고 간디는 말했다.

 

특히  산상설교는 사뭇 내 가슴을 찔렀다. 이런 구절들, 즉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악한 것을 대적하지 말라. 누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그에게 또 다른 편을 돌려대라. 또 누가 네 겉옷을 취하거든 그에게 속옷까지 가져가게 하라 하는 말이 나를 한없이 기쁘게 하였다.... 이 포기는 종교의 가장 높은 형태로 나에게 다가왔다.

 

몇 년 전 선교사 S.W. 클레메스 박사가 마하트마에게 가장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나 책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성경, 러스킨과 톨스토이였지요.”라고 대답했다. 후에 그는 의심할 나위 없이 ‘기따’를 첨가했다. 산상수훈을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고 주장하는 톨스토이는 구자라트 찬가의 사상을 확신하는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그것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러스킨의 책 ‘이 작은 자에게도’는 그로 하여금 단순, 검박한 삶을 살도록 결정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전쟁의 공포에 휩싸인 서구의 책인 ‘신약성경’이 그로 하여금 전쟁을 반대하도록 하고 물질주의적, 유럽의 복잡한 문명 속에서 탄생한 러스킨의 책이 그로 단순한 사람을 살도록 결정하게 한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그는 최소 필요로 그의 삶을 축소시켰다. ‘이 작은 자에게도’에서 종교와 섬김은 함께 만났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 25:40-역자주) 그의 종교는 인간을 섬기는 것을 통하여 신을 섬기는 것이었으리라. 그는 비폭력이 되기를 바랐다. 그는 단순해지기를 바라며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기를 바랐다. 이같이 그의 일하는 신앙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요소들을 한 곳으로 모아 확정된 삶의 태도로 결집시키는 것을 촉진시킨 사건이 있었다.


내 인생의 경로를 바꾼 한 사건을 기억한다. 그 경험은 내가 남아프리카에 도착한 지 7일 후에 운명적으로 발생했다. 그 기차에서 나는 침대칸이 아닌 1등 칸 티켓 소지자였다. 마리츠버그에서 침대를 준비하려고 할 때 관리가 다가와 나를 쳐다보고 짐칸으로 가라고 했다. 내가 거부하자 그는 나를 차디찬 역에 떨어뜨려 놓고 떠나버렸다. 여기에 창조적 체험이 있었다. 나는 나의 생존자체를 걱정해야만 했다. 나는 어두운 대합실로 들어갔다. 백인이 방에 있었고 나는 그를 두려워했다.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자문했다. 인도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나의 도움이신 신과 함께 내 앞에 놓인 무엇이든 대면할 각오로 나아갈 것인가? 나는 머물러 고통당할 것을 결정했다. 나의 적극적인 비폭력은 이 날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신은 그 여행기간동안 나를 시험하셨다. 나는 역원이 준 좌석으로 이동하는 동안 혹독하게 구타를 당했다. 그것은 나의 생애에 있어 가장 의미 있는 경험 중 하나였다. (1938. 12.10 하리잔)

마하트마 간디의 사상과 행동을 명료화 시키는데 도움을 준 두 가지 또 다른 영향력이 있었다. 그 중하나인 소로의 수필 “시민 불복종”은 사람이 비록 동료 시민의 의지를 거역할 지라도 자기 양심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 그 결과로 인한 투옥도 각오해야 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영혼이 아닌 육신을 감금한다는 그것은 남아프리카에서 중대한 측면에 봉착한 간디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것에 관하여 간디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생각이 소로의 글로부터 나왔다는 선언은 잘못된 것입니다. 남아프리카에서 체제에 대한 저항은 소로의 시민 불복종의 글을 접하기 훨씬 이전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 운동은 수동적 저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이 불완전해서 나는 구자라트 독자들을 위하여 사땨그라하란 단어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내가 소로의 위대한 글의 제목을 보았을 때 나는 영어 독자들에게 우리의 투쟁을 설명하는데 그 문구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심지어 시민 불복종조차도 그 투쟁의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시민 저항”이라는 문구를 채택했습니다. 비폭력은 항상 우리 투쟁의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1909년 영국 여성 참정권과 그들의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해 구속도 불사하는 그들의 방법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 시대에 둔 그분의 목적들을 이루기 위해 준비하신 강력한 도구를 빚기 위한 영향력의 집결점이 있다. 인도로부터 구자라크 찬가, 팔레스타인으로부터의 신약, 러시아로부터 책, 미국으로부터 팸플릿, 영국으로부터 책과 여성참정권 영향, 그리고 남아프리카의 두 남자, 역원과 대합실의 백인 선점자. 이 모든 것들은 운명처럼 결합되어 간디를 사람의 자유를 위해 사람이 싸워온 가장 고상한 싸움중의 하나를 싸우도록 20세기의 원형 투기장으로 밀어놓았다. 그것들은 간디를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하면서도 가장 온유하며 인간적인 혁명가로 만들기 위해 결합했다. 호랑이라 불리는 클레멘쇼는 이렇게 말했다. “크리스천이 크리스천다운 크리스천이 되고자 결단하면 진정한 혁명이 시작된다.” 간디는 비록 크리스천이 아니었지만 선으로 악을 이기는 크리스천의 태도를 견지하기로 결단했고 거기에서 진정한 혁명이 시작되었다. 간디가 신약원칙을 공공 행사에 적용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나는 독립 쟁취 투쟁 기간 동안 비기독교인들에게 일련의 강좌를 하고 있었다. 두 사복경찰이 앞에 앉아 내가 무슨 선동적인 연설을 하고 있지 않나 감시하며 속기하고 있었다. 거기서 내가 산상수훈을 설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상수훈이 간디의 손에서 공공행사를 수행하는 태도와 기법으로 적용되었을 때 그것은 혁명적인 것이 되었다. 그것을 구두로 적용한 나에게 있어 그것은 선동적이 아니었지만 간디가 생명에 관계된 것으로 적용했을 때 그것은 선동적인 것이 되었다. 간디의 손에 들린 신약은 T.N.T.가되고 우리 손에 오면 종종 수면제가 된다. 한 소녀가 “바바라, 내가 말해줄게. 신약은 디모데서에서 끝나지 않고 요한계시록에서 끝나.”라고 말할 때 그 소녀는 그 의미에 근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어떤 사람이 수양회를 마치며 “그것은 매우 결단이 요구되는 수양회였습니다.”라고 기록한 것처럼 그것을 끝맺음 한다. 간디는 그것을 적용하는 단순한 방법으로 우리의 결단을 혁명으로 바꾼다.

 

그러나 거기에는 간디와 그의 혁명을 형성하도록 했던 또 다른 긴장이 있었다. 그의 진리에 대한 개념이었다. 아마 종국에 가서 이것은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겨질 것이다. 오랫동안 그것의 의미는 나에게 모호하게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명백하다. 그는 진리와 신을 동일화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신을 인격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 진리가 신이다. 그리고 지상의 왕과 법이 다르듯이 신의 법과 신은 다른 사물이나 요소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은 하나의 사상, 법 그 분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와 그의 법칙은 어느 곳에나 있으며 모든 것을 다스린다.

 

반복하여 그는 주장한다. “나는 신이 진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진리가 신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다.” 여기서 그는 인격적인 신을 배제하고 신을 비인격적인 법과 동일화 시킨다. 그리고 이것조차도 그가 신을  “법 그 분 자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것도 정확하진 않다. 만약 그가 신이 비인격적이라고 의미한 것이었다면 왜 그는 ‘그 자체’(Itself)라고 부르지 않고 ‘그 분 자체’(Himself)라고 했을까? 게다가 21일간의 금식에 들어가기에 앞서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약 밤 12시경 무엇인가가 나를 불현듯 깨게 만들었습니다. 내부에서 일 수도 있고 외부에서 일수도 있는 어떤 목소리, 속삭임이라고 말할 수 없는 목소리가 말했습니다. “너는 반드시 금식을 해야 한다.” “며칠 동안입니까?” “21일 동안.” “언제 시작할까요?” “내일 시작해.” …. 그 같은 경험은 이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습니다. 만약 영적인 금식이 있다면 이것이 바로 그것일 것입니다. ….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는 한 당신은 결코 신을 대면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비인격적인 법이 이렇게 인격적인 방식으로 당신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은 법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듯 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법은 비인격적인 법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인격의 특성에 동참한다. 그에게 있어 진리는 이 법과 동일시되고 또한 신과 동일화 되고 법의 확증을 받게 된다. 마하트마는 사람이 항상 진리를 행하면 도덕적 우주의 지지를 받게 된다고 믿었다. 그는 정해진 경로를 따라 가는 별들이 사람을 위해 일할 것이라고 믿었다. 동일하게 그 별들은 모든 악에 대해서는 거슬러 일한다. 나아가 그는 우리와 우주는 진리를 위해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견지했다. “진리는 우리 존재의 법이다.” 만약 진리가 우리 존재의 법이라면 그것을 따라 행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성취하는 것이며 진리가 아닌 것을 따라 행동하거나 생각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파멸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해야 할일은 우리 자신을 진리와 동일화시켜 항상 진실된 일을 하는 것이고 그러면 진실된 결과가 도출될 것이다. 결과에 대해 신경 쓰지 말라. 결과는 자연적으로 따라오기 마련이다. 도덕적 세계가 그것을 보증한다. 우리가 해야 할일이란 우리가 사물의 정당한 측면에 서 있는 가를 보는 것이며 도덕적 세계가 나머지를 돌본다. 이것은 남북전쟁 중 링컨에게 보내졌던 한마디를 상기시킨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는 것을 바란다.” 그 말의 의미는 “나의 관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이다”였다.

간디는 삶에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내가 진리의 편에 서 있는가? 먼저 질문했다. 그리고 진리와 비폭력 두 가지, 사실과 그 사실을 적용하는 방법-를 받아들이고자 결단했을 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우주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고 믿고 과감히 나아갔다. 그러한 문제에 대한 인식과 해결방법은 그로 하여금 목적에 대한 내적 안정성을 갖게 했고 조용하나 무시무시한 돌진을 하게 했다. 간디는 자신을 통하여 역사하는 우주적 능력의 대리인으로 그 자신을 인식했다. 그는 “나는 나의 종교와 조국을 구하는데 있어서도 진리와 아힘사(비폭력)을 희생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목표를 성취하고자 하는 수단이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그는 선재하는 수단이 들어가는 것에 따라 그 결과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정당한 결과를 얻기 위해 잘못된 수단을 이용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운동이 명백히 성공적일 때라도 그것을 철회 시킬 준비를 했다. 그는 수단이 진리와 비폭력과 부합되지 않는 한 성공이 재로 변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Y.G. 크리슈나무르띠가 말했다.

 

간디는 비폭력의 법을 마치 뉴턴의 중력의 법칙처럼 확고하게 받아들였다. 마하트마의 독특성은 비폭력과 진리를 창조하고 사람들이 이것을 지속적으로 믿도록 하는 것이었다. 만약 후버 대통령이 각 자의 차고에 두 대의 자동차를 약속했다면 간디는 각 자의 마음에 두 미덕을 약속한다.


간디의 전략은 진리였고 그의 수단은 비폭력이었다.

궁극적 현실성들의 상태로 진리와 사랑을 회복시키는 것으로 간디는 당대 사상계에 혁명을 가져왔다. … 진리와 사랑은 무적이라는 성인 간디의 정열적인 믿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profile

[레벨:29]유니스

2010.07.05 10:44:25
*.104.196.54

진리는 진리이고, 강력한 상황에서는 그것을 불신하고야마는 현실에

간디는 정말이지 존경스럽습니다.

진리가 진리이지만 진리에 따른 반복된 결과의 횟수가 커져서

증명에 이르러야하는데 그 횟수가 적어서 진리가 유의미하다는 것을

우리가 용납하지않으려는 것 같습니다.

중력의 진리에는 사과만 낙하하면 되지만

진리로 몸을 던지는 실험에는 인생 전체를 던져야 하기에...

간디가 전략과 수단을 일치시키는 그것, 그에 대한 이 글을 대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의 아슬아슬함이 느껴집니다.

profile

[레벨:26]사띠아

2010.07.07 11:57:27
*.160.132.218

간디는 한번 사는 인생

값있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인 듯합니다.

 

크리스천에게는 예수가 구원이라는 이 명제에 삶을 걸고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심정으로

나날을 사는 바로 그것이겠지요.

 

살아있는 동안 그것을 삶가운데서 매순간을 실험하면서 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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