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혁 선교사가 들려주는 인도 이야기

어느 프랑스 철학자가 한때 “어느 누구도 자신의 내부에서 강하게 대립되는 성향을 견뎌내지 못하면 강한 사람이 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마하트마 간디가 강했던 비밀 중의 하나는 바로 이 강하게 대립된 성격이 자신내에서 조화되어 균형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는 해류가 만나는 지점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단순히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잡동사니의 집합체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 결합은 독특했고 마침내 총체적으로 마하트마 간디라는 새로운 한 인격체로 맺어진다.

 

그는 동서가 결합된 사람이었다. 마하트마 간디의 영혼은 분명 동양인이었다. 아버지가 지방 토후국 재무담당 장관으로 있던 고향 포르반다르에서 일찍이 그는 독립 사상을 고취했다. 속사람은 철저한 인도인이었으나 외적으로 서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마하트마 간디가 서구에서 많은 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결코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간디는 인도를 벗어나 서구에 자신을 드러내고 영국에서 법을 공부했다. 심지어 그는 만찬용 정장, 짧은 각반, 육식과 서구 문명이 가르치는 모든 것을 흡수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모든 것들이 그에게 적합하지 않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다윗에게 주어진 사울의 갑옷과 같았다. 맞지 않았다. 하나님의 서정시인중의 한 사람인 친구가 말했다.

“사람들이 나에게 자기들의 옷을 줍니다. 그러나 곧 그 옷들은 내것같아 보입니다.”

 

그 옷과 사람은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간디는 결코 마음으로 서구 문명에 굴복하지 않았다. 내부에 고스란히 보존된 그의 마음과 서구 문명은 정말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곧 서구 문명의 옷들을 벗어버렸다.

 

사울의 신하들이 사울의 갑옷을 그에게 주었을 때 이를 곁으로 제쳐 두고 시냇가에서 주은 물맷돌을 챙긴 다윗처럼 마하트마는 서구의 사회적 갑옷을 곁에 제쳐두고 자신의 조국의 시내에서 주운 단순한 자갈을 지녔다. 그 모습의 변형을 위하여 자신의 삶의 뿌리를 자신의 문화의 토양 속에 깊이 드리운 다음 세상을 향해 그의 안테나를 들어 올려 나머지를 섭취했다. 현명한 결단이었다. 간디 속에서 당신은 진정한 인도의 영혼이 꽃피는 것을 볼 수 있다. 서구로부터 많은 것을 섭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에서는 여전히 자신의 말과 글을 사용했다. 그의 영어는 놀랍게도 깔끔했고 정확했다. 내 기억으로는 그가 틀리는 영어를 사용하는 것을 본적이 전혀 없었다. 그의 문체는 간디의 영혼에 적합하게 전혀 수사적이지 않았다. 그의 언어는 그의 영혼이 단순하고 직선적인 것처럼 단순하고 직설적이었다.

 

그가 서구에서 그토록 많은 교육을 받은 것과 인도의 바깥세상(남아프리카-역자주)에서 사탸그라하 (진리파지)를 체험하게 된 것은 신의 안배하심이었다. 그가 사탸그라하를 인도에서 먼저 시작했더라면 인도가 실제적으로 갖고 있는 그 복잡한 문제들 속에 갇혀 전혀 시도조차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정신 지배력 가능성의 실습은 보다 단순한 환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간디에게 있어 남아프리카는 본 연극 무대인 인도의 실험무대였다. 거기서 자신의 사상을 명확화 시키고 작은 규모로 그의 기술의 성취를 완벽하게 체험해 보았다. 만약 그가 바로 인도에서 그의 사상을 실행해보려고 했었다면 틀림없이 허둥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남아프리카에서의 다양한 경험과 비폭력 시민 저항의 방법을 통한 승리 쟁취에서 나온 확신이 향후 인도란 거대한 무대에 섰을 때 자신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는 것과 또 그 방향을 따라 나아가는데 있어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26년의 간디의 해외 생활은 그의 백성을 억압의 땅에서 구원해 내라는 야훼의 음성을 가시덤불 사이에서 들을 때까지 미디안 광야에서 보낸 모세의 삶과 비교해 볼 수 있다. 마하트마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살아가는 인도노동자의 권리를 보장 받기 위한 투쟁하는 그 불길 속에서 인도로 돌아가 억압과 속박 속에서 신음하는 인도인을 구해 내라는 그 음성을 들었다. 모세가 그러했듯이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복종했다. 구원자와 그 시기는 일치했다. 인도인들은 그들의 산발적인 울부짖음에 응답하고 그들의 모든 갈망을 구체화시키며 그들을 억압의 사슬에서 풀어줄 한 사람을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동양을 짓누르는 서구의 압제의 고리를 끊어버릴 한 사람이 서구에서 훈련 받고 있었다. 더 나아가 그 사람은 인종 차별의 중심이었던 남아프리카에서 그 기술을 훈련받고 그 연단을 통하여 백인의 통치로부터 유색 인종을 구원하려 하였다. 남아프리카를 다스리던 억압자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종국에는 자신들을 포함한 인도와 세계 전역에 흩어져 있던 지배자들을 파멸로 이끌게 될 구체화된 영향력을 생산하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백인 우월주의를 주창한 남아프리카가 그 우월주의를 부수는 현대 역사에 가장 큰 힘을 시작한 바로 그 한 사람을 만들어 내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신은 인도인의 자유를 위하여 남아프리카에서 간디를 준비하는 한편 영국에서도 환경과 사람을 예비하고 있었다. 간디가 쟁취하려고 했던 바로 그 자유가 세상 어느 곳에도 필요하다는 견해를 가진 일단의 사람들이 영국 정계의 권력을 장악해 가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이 결코 제국이나 민주주의 둘 다 소유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 둘은 본질적으로 함께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식민제국을 민주국가로 전환시키려고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영제국이 인도에 자유를 주도록 강요받지 않았을까? 그렇다. 어떤 면으로 운명의 시간이 다가온 것이었다. 간디하의 자유 운동은 더 이상 그 무엇으로 정지시키거나 지연시킬 수 없을 정도로 불가항력적인 것이 되었다. 대영제국이 더이상 인도를 지배할 역량을 상실한 것이다. 영국 노동당은 이것을 보았다. 나아가 그들 자신의 원칙들에 적합한 역사적 정황을 포착하고 이를 위해 자신들이 이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로 결정했다.

 

1946년 인도의 상황은 변혁이 무르익은 시기였다. 인도의 상황은 그 분위기로부터 담즙을 짜낼 수 있을 정도로 쓰디썼다. 그때 애틀리의 연설이 있었다. 그들은 애틀리가 제대로 말을 할까 의문을 품었다. 그러나 그의 연설은 유사 이래 가장 위대한 연설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는 인도가 갈망하는 네 가지를 말했다.

 

(1) 인도는 독립하게 될 것이다. (독립이란 말이 이때 처음 사용됨)

(2) 독립은 민주 공동체가 될 것인지 아닌지는 인도인 자신들이 결정해야 할 것이다.

(3) 만약 인도가 민주 공동체가 아닌 방향으로 독립이 진행될 경우 대영제국은 그 전환이 될 수 있는 한 매끄럽게 진행되도록 도울 것이다.

(4) 다수의 진행에 소외받는 소수가 없도록 할 것이다.

 

조금도 얼버무리는 말없는 명쾌한 그의 연설의 내용은 하룻밤 사이에 인도 대륙의 분위기를 바꾸어 버렸다. 인류의 역사에 한 사람의 연설이 한 대륙의 분위기를 바꾸는 일이 흔하지는 않는데 애틀리의 연설이 바로 그것을 해냈다. 다음날 인도 법관의 반응이 흥미로웠다.

“애틀리의 연설이 나를 슬프게 하였습니다.” 법관이 말했다.

“당신을 슬프게 만들다니요” 내가 반문하였다. “왜죠? 그것은 훌륭한 연설이었잖소?”

“맞아요!” 그가 대답했다. “그것 맞아요. 훌륭한 연설이었죠. 그러나 난 그런 멋진 말하는 사람과 헤어지기는 싫습니다.”

 

며칠 후 나는 도시의 지도자를 만나기 위해 브라만에 의해 마련된 저녁 만찬에 초대받았다. 저녁을 마칠 즈음 나는 말했다.

“40년 만에 처음으로 이렇게 동서양의 다양한 사람이 모였으나 긴장이 없는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무슨 일인가 일어났음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나에게 기독교인들의 성찬을 떠오르게 하는 군요. 단순한 저녁이 아닌 성찬 음식 말이죠.”

 

동양과 서양이 함께 그리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한 힘이 우리를 묶고 있었다.

 

대영제국 각료 사절단이 인도에 있을 동안 나는 델리에 있는 프리처치에서 설교를 하였다. 각료중 한 장관이 성서 본문을 낭독했다. 그들은 내가 인도에서 이전에 결코 듣지 못했던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사실 이 찬송은 인도 시민들과 영국 군인들이 함께 섞여서 불린 적이 이전에는 결코 없었다.

 

그들의 영혼은 자유의 불길로

그들의 눈은 지식의 빛으로 가득한

세상이 전에 알지 못하던 고귀한 족속이 일어나는

그 일이 벌어질 것이라네.

 

양측 다 마음으로 그 찬송을 부르고 “그들의 영혼에 자유의 불길”을 갖게 되었다. 영국이 인도에게 자유를 인정하는 것은 영국 스스로 자유를 얻는 것이기에 마음 깊숙이 감명을 받았다. 내적 갈등과 토론과 사과와 방어가 끝이 났고 대영제국은 자신의 영혼 속에 자유의 불길을 품게 되었다. 영국은 인도의 자유에서 자유를 얻게 되었다. 영국은 제국을 잃고 있었지만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영국 민주주의의 진정한 목소리는 노동당 지도자들을 통하여 나오고 있었다. 간디는 인도를 위한 자유를 얻으면서 영국에게 새로운 자유를 주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방법과 영혼의 독특함이었다.

 

지금은 파키스탄의 경찰국장인 프라카시는 자유를 위한 투쟁기간 동안 바나라시에서 우리 그룹과 차를 마셨다. 그는 웃음을 터트리면서 말했다. “난 할 수 있는 한 많은 샌드위치를 먹어야 하겠소. 난 곧 대영제국의 감옥에 있을 것이거든..”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말을 더했다.

“우리는 우리가 호소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가진 영국인 같은 사람들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의 행운의 별에게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대적속에서 호소할 수 있는 그 좋은 무엇을 보는 이상한 종류의 전쟁과 성공! 그리고 그는 더하여 말했다.

“우리는 영국을 주인 나으리들로서 보내드릴 것이다. 그러나 배가 항구로부터 떠나기 전에 우리는 그들을 친구들로 불러들일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 지금 영국인은 인도에 편만하다. 몇 주 전 한 그룹의 인도인이 구석에서 수군대고 있었는데 그들이 나간 다음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우리는 줄곧 하늘에 당신들로 인하여 감사를 드리고 있었소.”

그들은 내가 영국인인 줄 알고 있었다. 만약 인도인이 허락 하에 정치적인 복잡함이 없이 자신들의 총독을 뽑는다면 그들은 마운틴경을 선출할 것이다. 그는 죽어 장작더미에서 타서 갠지스강과 야무나 강과 상상의 강이 만나는 알라하바드의 물(상감-역자주)에 뿌려졌다. 그는 놀라운 방법으로 인도인들의 마음을 얻었다. 독립 기념일에 국가적 지도자로서 가장 많은 “끼 자이!(환영인사-역자주)”를 대중으로부터 받았다. 두 나라가 나뉘어졌으나 친구로서 나뉘어졌다. 이것은 종종 인류 역사에 일어나는 일이다. 영국과 인도는 견고하게 하나로 결속되었다. 그리고 간디의 손이 그 견고함 위에 놓였다. 그는 새 인도의 건축자이고 또한 영국과의 새로운 관계에 있어서도 건축가였다. 한 국가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한 과정에서 그 나라를 이기는 것은 놀라운 성취였다. 간디의 방법과 영혼이 없이는 이것은 일어날 수 없었다. 얼마의 관리들과 상인들이 언짢고 불만스런 마음으로 인도를 떠나고 그들이 인도와 서방을 향해 별로 좋지 않는 생각을 퍼뜨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이 두 나라는 친구로서 나누어졌다. 되풀이 하지만 이것은 기적이다.

 

독립을 위한 절차를 완료하고 각료들이 인도를 떠나려고 할 때 나는 그들이 한 일에 대해 감사의 편지를 썼다. 나는 미국인으로서 그들의 정신과 인내-내가 생각하기에는 기독교적인 인내를 존경하고 또 그들이 한 일은 역사 이래로 위대한 성취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내각 사절단의 비서가 답장을 보냈다. “우리가 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일이며 또한 거듭하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해준 당신과 다른 모든 이들에 의해 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정치적 행위에 새로운 정신이 드러난 몇몇 새로운 구절들이 있다.

 

그중에 하나는 바로 나다. 나는 전쟁 중에 인도는 반드시 독립될 것을 믿었기 때문에 영국에 의해 인도 출입이 금지 되었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바로 그 영국 관리에 의해 내가 한 일에 대해 감사를 표명하는 편지를 받았다. 나는 미미할 지라도 인도의 독립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뛴 외국인 중 단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영국인으로부터 감사의 구절이 담긴 편지를 받았다. 이것은 신선한 것이었다.

 

둘째로 그 비서는 그들이 한 일이 바로 ‘하느님의 은혜로’ 되어진 일이라고 못을 박았다. 그것은 맞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간디를 통하여 독립을 준비해오셨고, 동서양이 동일한 용어로, 친구로서 그들의 운명을 함께 개척해 나가기 위해 그것을 가능토록 노동당을 통하여 준비해오고 계셨다.

 

마하트마 간디 안에서 동양과 서양이 만났고 그의 방법들과 정신을 통하여 그들은 대국적 측면에서 화목하였다.


profile

[레벨:11]이방인

2009.09.18 07:38:06
*.118.129.226

그러고 보니, 간디와 모세가 닮은 점이 많이 있었군요.

그런데 그동안 한 번도 두 사람의 삶의 행적을 동일 선상에서 바라보지 않았네요...

 

사땨 선교사님 감사드려요..^^

profile

[레벨:26]사띠아

2009.09.18 10:58:38
*.173.232.127

간디와 남아프리카, 모세와 미디안 광야...

생명을 일구어 가시는 주재자의 손길을

읽어내는 저자의 안목이 돋보입니다.


이 시대 우리의 남아와 미디안은 어디며

무엇을 위하여 연단받고 있을까요?


이방인님.. 건필을 기대하고 있는 것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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