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혁 선교사가 들려주는 인도 이야기

북인도 벌판에서 부른 생명의 노래

인도의 길 조회 수 4655 추천 수 0 2010.02.02 02:52:20

[글이 깁니다. 갈무리해서 읽으시거나 첨부화일을 다운받으셔서 읽으세요.]


델리 공항에 내리니 살짝 벗겨진 머리의 중년 사내가 다가와서 인사를 했다. 대사관 영사민원실장이라고 했다. 대사관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혈압이 팍 올랐다. 이국땅에서 비명에 간 누나가 바로 이런 인간들 때문인 듯 한 생각이 일순 들었다. 국민의 사망 사건이 났으면 바로 현장에 달려가 사건의 진상규명을 확실히 하여 유가족이 도착하였으면 자초지종을 보고하여야 할 텐데 그러기는커녕 팔짱끼고 있다가 우리가 나타나니까 체면치례로 나타난 듯한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없었다. 이번 사고가 난 단체의 여행을 주선하고 안내하던 여행사 대표는 카주라호행 비행기 이륙시간이 불과 30분밖에 남지 않았다며 출국장으로 이동을 서둘렀다. 예의 민원실장도 같이 가려고 따라나섰는데 비행기표도 없었다. 안개로 인해 모든 항공기편이 취소되어서 비행기표를 미리 마련하지 못했다는 것도 핑계로 들렸다. 이렇게 우리가 갈 수 있는데 비행기표가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짐을 부치고 출발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안내방송이 나왔다. 바라나시까지는 갈 수 있는데 거기서 카주라행 비행기가 안개로 인해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실장이라는 자의 말이 사실이었다. 그래도 그런 악천후마저도 인도에 거주하는 저 작자들 때문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비행기가 취소되니 아득한 생각이 들었다. 열차도 만만치 않고 결국 12시간이면 사건현장에 도착한다는 말에 찦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이노바라는 도요타산 6인승에 7명이 타고 나니 맨 뒤에 탄 세 사람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체구가 작은 우리 두 형제와 민원실장 세 사람이 번갈아가면서 뒷자석을 지켰다. 물경 4시간 걸린다는 델리에서 아그라 구간 거리가 6시간으로 늦어진 것은 중간 지점을 넘어서 만나게 된 예의 그 심한 안개때문이었다. 고속도로라면서도 수시로 등장하는 역주행차량들, 속도 느린 트랙터들, 소, 돼지같은 가축들로 인해 아찔하던 판에 안개로 인해 시야마저 확보되지 않자 한국에서 갓 도착한 우리 일행은 손에 진땀이 나고 다리는 긴장으로 쥐가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옆자리를 보니 김실장은 속편하게 눈 붙이고 있었다. 우리는 이런 안개속으로 밀어넣어 식구들을 사망하게 한 여행사 대표에게 한바탕 분노를 쏟아 부으며, 또 속도를 내어 앞의 트럭을 추월하려는 운전수를 인하며 놀라며 목적지까지 1/3지점인 아그라에 도착하였다. 아그라는 타지마할로 유명한 곳이라고 설명하는 여행사 대표의 습관적 안내 멘트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속으로 ‘이 사람아 지금 우리가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있는가’는 생각만 들었다.

운전수도 아그라를 지나 잔시로 접어드는 지역에는 정글이 있고 거기에는 지나가는 차마다 무작정 사제총을 들이밀어 대는 강도집단이 있다고 말을 하면서 할 수 있으면 날이 밝으면 그 지역을 지나가자고 하였다. 운전수 말도 말이려니와 이런 안개로 갔다가는 도저히 속도가 날 것 같지 않아 아그라에서 1박을 하기로 하였다. 이래저래 놀란 가슴에 잠이 오지 않아 한국에서 준비해온 양주를 꺼내들고 여행사 대표와 함께 권커니자커니 자정을 넘겼다. 실장은 내일을 기약하고 자기 숙소로 들어갔다. 중도 지점에 식사를 할 때 기도를 하는 것을 보아 기독교인인 듯하여 우리도 합석을 권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공항과 차안에서 그렇게 퍼부어대었어도 아직 우리로서는 고인의 시신도 보지 않는 상태에서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공관을 향한 마음이 풀리지도 않는 상태여서 우리로서도 달갑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인도에서의 하루가 저물었다.

이튿날 아침, 새벽을 깨워 거리를 나갔던 김실장이 안개가 너무 자욱하다고 했다. 7시경 주섬 주섬 짐을 챙겨들고 차를 타니 운전수가 길을 헤멜정도로 안개가 심했다. 그렇게 엉금 엉금 운전을 한 시간 가량 하니 비로소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짐을 가득 실은 트럭이 곧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옆을 지나갈 때면 곧 넘어 올 것 같아 가슴이 조였다. 가도 가도 산이 없는 벌판을 7시간을 넘어가니 운전수가 말하던 정글이 나타났다. 그 정글 사이로 새롭게 길을 내고 있고 그 옆에는 배가 하늘을 향한 트럭이 나자빠져 있었다. 그곁을 가슴을 쓸고 지나갔다. 하염없이 졸다깨다 졸다깨다 하니 어느덧 석양이 깃들기 시작했다. 어둡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하여 시신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염려마저 들었다.

산이 나타나고 숲이 나타나고 꼬불꼬불 산길을 1시간을 달려 드디어 목적지인 판나에 도착하였다. 판나 경찰서장이 보낸 오토바이를 따라 시골 읍내같은 도로를 들어서니 그나마 정리된 경찰서 앞마당이 보이고 마중나온 서장을 따라 서장실로 들어갔다. 먼저 사고의 경위를 물었다. 서장의 말인 즉슨 안개가 그 원인이라고 했다. 같이 갔던 강선생의 오빠는 누가 잘못했는가를 밝혀 달라고 하며 트럭 운전수를 불러달라고 했다. 운전수의 말은 자기는 저속으로 가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승객을 싣고 오던 차가 들이받아서 사고가 났다고 했다. 그것을 통역을 통해 들은 우리들은 저런 뻔뻔한 놈은 콩밥을 먹여도 단단히 먹여야 한다고 길길이 뛰었다. 서장은 사고발생 직후 출동한 기자들이 촬영한 동영상을 보여 주었다. 휴지처럼 구겨진 차량으로 보아 그 사고의 심각성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부검을 해야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왈가왈부하다가 서장은 가족들의 선택에 맡긴다고 하였다. 그냥 시신을 가져가도 되지만 사건의 결말을 확실히 보고 또 법원에서 분명한 증거를 확보하려면 부검은 필수라고 이야기하면서 부검을 해보도록 권고했다. 우리들은 일단 시신을 보고 결정하겠다고 했다.

경찰서에서 3분거리에 위치한 정부 병원으로 이동했다. 창고 비슷한 곳에 세워진 시체 안치실쪽으로 다가갔다. 마음이 떨리고 어떻게 해야하나 일순 두려움이 몰려왔다. 잠긴 창고 문을 열고 들어서니 시멘트로 만든 시신 안치대 위에 놓은 얼음위에 두구의 시신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담요로 가려진 시체를 벗기니 도저히 망가져서 알아볼 수 없는 누나의 얼굴이 드러났다. 우리 형제는 도저히 그 광경을 눈뜨고 볼 수 없었다. 형은 거의 사색이 되어 울부짖었고 나 또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비참한 죽음앞에 통곡밖에 나오지 않았다. 여행사 대표와 김실장, 그리고 인도 경찰들이 말없는 위로를 받으며 시신을 두고 나왔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우리는 시신에 대한 부검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의논을 했다. 누나의 비참한 모습을 본 우리 형제는 도저히 더 이상 누나의 몸에 흠집을 내는 것이 마음이 아파서 부감을 하지 말자고 했으나 고 강선생의 오빠는 분명한 증거확보를 하고 가해자격인 트럭 운전수를 심판대앞에 세우기 위해서 부검을 실시하자고 했다. 결국 부검을 결정하고 경찰서장에게 의사를 동원해 줄 것을 부탁하고 숙소가 마련된 카주라호로 나왔다.

사건현장에서 가져온 고인의 유품을 챙기다 보니 평소 우리 가족들을 마음으로 섬겨주던 누나의 손길이 느껴서 더욱 마음이 아팠다. 숙소로 돌아와 식당을 향하였다. 하루 종일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하여 시장한데도 제대로 식사를 하는 이가 없었다. 한국에다 시신 확인전화를 하며 울먹이는 형과 강선생 식구들도 모두가 목이 메었다. 중고등학교 선후배로서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남들을 위해 살아가며 가족들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고인들이라 남은 유가족들의 목을 더욱 메이게 하였다. 일단 시신을 수도인 뉴델리로 운반하여 시설이 좋은 화장터에서 화장을 하기로 중지를 모으고 김실장을 통하여 차를 카주라호로 불렀다. 내일 부검이 10시경에 시작되어도 넉넉잡아 12시경에는 시신을 운구해서 출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내일 있을 일정을 생각하며 잠자리로 들었다.

이튿날인 23일 토요일 아침, 날씨가 그렇게 쾌청할 수 없었다. 구름한 점없는 파란 하늘에 양광이 비치는 시골읍내 풍경은 이런 일만 아니었다면 너무나 여행하기 좋은 날씨였다. 그러나 부검을 해야하고 또 먼 길을 떠나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인해 이렇게 좋은 날씨를 즐길만한 심적여유가 전혀 없었다. 9시경에 호텔을 나와 이동할 차를 기다리는 동안에 김실장에 다시 한 번 델리에서 올라오는 차량의 현재 위치를 알아보라고 부탁했다. 전화를 하는 김실장의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어제저녁 11시에 출발한다고 하던 차량이 이제 아그라에서 10분 지점이라고 하니 이곳에 도착할 시간이 아무리 빨라야 오후 5시가 될 판이고 이로 말미암아 모든 일정이 또 다시 늦어 질까봐 조바심이 생겨서 나온 것이었다. 전화를 마치고 돌아선 김실장은 일행을 쳐다보며 입을 떼었다.

“현재 차량이 어제 우리가 숙박했던 곳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곳에 있다고 합니다. 제가 정말 아무런 사심없이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부검이 끝난 후 차량으로 다시 델리로 24시간이 걸려 이동하다보면 시신이 상할 대로 상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고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도 전통적으로 화장할 장소가 많으니 여기서 화장하여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듣고 보니 그 말도 맞는 듯하였다. 유가족들 4명만 따로 한 켠에 가서 의견을 조율했다. 어제와 그제에 걸쳐서 24시간도 넘는 거리를 지프차로 이동한 악몽이 그대로 남아있는 가족들에게는 김실장의 말이 설득력있게 다가왔다. 유해를 손상한다는 것이 더더욱 못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화장을 카주라호에서 하기로 하고 올라오고 있는 차량을 취소시켰다.

다시 한 시간을 달려 시신이 안치된 판나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경찰서장을 만나 일정을 논의하고 가져가야할 사망확인서를 비롯한 서류를 챙겨주기를 부탁하였다. 통역하는 김실장의 말에 모든 것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줄 것을 거듭 다짐하는 경찰서장이 고마웠다. 경찰서를 나서면서 일부 일행은 사건 현장을 답사하고 김실장은 남아서 부검을 지켜보고 시신을 염을 하기로 했다. 나는 한국에서 준비해온 수의를 김실장에게 넘겨주며 누나의 유해의 마지막 화장을 잘 부탁한다고 하였다. 특별히 흉하게 턱이 갈라진 그곳을 어떻게든 이쁘게 잘 봉합해 달라고 의사에게 부탁해 달라고 했다.

그런데 금방 올 것 같은 의사들이 갑자기 급한 환자들이 생겼다면서 부검이 늦어지기 시작했다. 또 5명의 증인이 필요하고 또 증인록이 작성되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은 자꾸만 지연되었다. 증인으로 출두한 지역 구청 재무담당관은 자신도 여자로서 이런 일을 당한 고인들에게 대해 애석해 하면서 무엇이든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해달라고 했다. 김실장은 고인이 되신 최선생님의 시신은 수의가 있기 때문에 염이 큰 문제가 없으나 고 강선생님의 경우는 아무런 대책이 없어 수의를 대치할 2미터 상당의 천이 석장 정도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자 그 여자 재무담당관은 자기 남편에게 전화하여 아주 깨끗하고 매끄러운 천을 준비해주었다. 부검이 진행되는 동안에 김실장은 약국에서 시신을 소독할 솜과 알콜, 그리고 시신을 매듭할 붕대를 넉넉히 구입하였다. 그러는 사이 사건 현장을 둘러보러 갔던 일행이 돌아왔다. 현장을 보고서도 누구의 잘못인지 구분이 서지 않아 사건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간 스마일 칸 경정에게 사건 개요 설명을 다시 부탁하였다. 칸 경정은 도로의 중앙선을 그리고 트럭이 중앙선을 침범해서 달리고 있었다고 했다. 일차적인 잘못이 트럭에 있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인 김실장이 일행이 계속 부검을 지켜보는 것보다 미리 화장 장소를 찾아가서 화장 준비를 하는 것이 시간 절약을 위해 좋을 것이라는 건의를 했고 유가족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거듭 거듭 시신의 염을 잘 부탁한다고 말을 하고 유가족 일행은 먼저 출발을 하였다.

뒤에 홀로 남은 김실장은 오랜 만에 해보는 염, 그것도 재료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고 장소마저 허접한 곳에서 두 구의 시신을 염을 할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다. 일단 일을 시작했으니 매듭을 제대로 지어야 하겠는데 아침도 허술하게 먹은 터라 계속 입술만 바싹 바싹 말라왔다. 1시간여를 기다린 후에 첫 시신이 넘어왔다. 부검장 앞마당 그늘에 시신을 들대위에 누이고 흰 천을 시신위에 덮고 먼저 들대를 깨끗이 닦았다. 솜에 알콜을 묻혀서 고인의 얼굴을 깨끗이 화장하듯 닦아냈다. 얼음에 붙어있던 톱밥 찌꺼기가 성가시게 붙어 나왔다. 솜으로 구멍을 모두 막고 흰 천으로 덮어가며 옷을 벗겨내고 몸의 구석 구석을 닦아내었다. 처녀로 살면서 고이 간직한 몸이 이렇게 생면부지의 남자의 손을 통하여 씻겨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하였을 것이다. 김실장은 거듭 거듭 돌아가신 이에게 이런 저런 말걸음을 하였다. ‘얼마나 추우시겠소.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소. 얼마나 아쉽겠소. 그러나 이제 편히 가시오. 아마도 지금 계신 그곳은 이곳보다 훨씬 좋은 곳일거요.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날 것이니 그때는 서로가 낯설지 않을 것이외다.’ 시신을 다 닦고 흰 천으로 전신을 감싼 김실장은 시신의 손, 팔과 다리를 묶어 움직이지 않도록 한다. 인도인들의 도움을 받아 베니어 합판으로 짠 관속에 넣고 1시간 넘게 가는 찻길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스티로폴로 깔고 벽을 세우고 담요를 말아 머리 양옆을 고정시켰다.

첫 시신의 염을 끝날 무렵에 두 번째 시신도 부검이 끝났다. 부검대 위에 그대로 놓여진 시신 근처의 이물질을 알콜로 깨끗이 닦아내고 머리부터 씻어내리기 시작하였다. 수의가 준비된 터라 윗도리부터 입히기 시작하여 덮어가면서 아래옷도 입혔다. 두루마리와 치마도 입혀서 예쁘장하게 하고 손도 가리고 발도 가리고 머리도 가렸다. 의사들에게 갈라진 턱을 좀 손질해달라고 부탁을 하였건만 바늘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찢어져 그냥 모양만 보기좋게 가지런하게 하였다고 한다. 두부가 심하게 손상이 가서 어디를 손을 대도 머리가 달그락 거리면서 고정되지 않아 눈도 입도 감기기가 힘이 들었다. 어떻게 이렇게 무식하게 부검을 한단 말인가. 김실장은 부검한 의사들을 향하여 말없는 원망을 보내고 수의를 깨끗하게 입히고 붕대를 두 가닥씩 풀어 팔, 다리, 몸통을 든든히 묶었다. 들대에 실어 관까지 이동한 후 다시 똑같이 스티로폴을 채웠다. 혼자힘으로 도저히 벅찼는데 지역 텔레비전 방송국 기자인 산자이씨가 있는 힘을 다해서 도와주어서 무사히 트럭위에 실을 수가 있었다. 유가족의 부탁으로 시신이 안전하게 화장장에 도착할 수 있도록 경찰이 호위하였다.

막상 카주라호 화장장에 도착하니 기다리고 있던 유족들은 관을 열어 고인의 얼굴을 보려고 했다. 김실장이 차라리 얼굴을 보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권면하자 유가족은 김실장의 말을 그대로 받아 들어 관을 붙들고 하염없이 흐느끼기만 했다. 다른 지역과는 달리 자기 고장이 아닌 타 지역에서 사망하여 이동한 시신에 대한 터부로 인해 기존 시설이 잘 갖추어진 화장장을 얻지 못했다. 결국 경찰의 도움을 얻어 정부 땅인 밭과 밭 사이 공터에 화장장을 준비했다. 김실장은 여행사 대표에게 이런 것이 아니지 않느냐 장작은 왜 또 저 모양이냐고 답답해서 소리를 쳤다. 이미 엎질러 진 물, 김실장은 유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듯 보였다. 잠시후 두 수레의 우마차에 잔뜩 실은 장작이 도착하자 그나마 화장터가 제대로 규모를 갖추어 가는 듯하였다. 힌두 사두들이 나름대로 힌두 의식을 행하며 가족들에게 고인이 먹고 가야할 음식도 관위에 뿌리게 하고 노잣돈도 관위 천속에 넣도록 하였다. 간략한 힌두 의식이 끝나자 힌두 사두들은 바로 소똥에서 점화된 불을 붙이려고 했다. 그때 김실장은 고인들이 모두 기독교인이었고 특히 유족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기독교식 장례예식을 치루겠다고 하였다.

장작위에는 관이 놓여지고 관 옆에는 관이 탈 때 시신이 보이지 않도록 나무들을 세워 관을 가렸다. 그 관앞에 도열한 유가족들과 길옆에는 이 지역을 지나던 여행객들이 잔뜩 모여 마지막 가는 장레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성경도 찬송가도 가지지 않는 김실장은 간략하게 적은 순서지를 들고 장례식을 거행했다.

잠시 묵도가 있겠습니다.

이렇게 운을 뗀 김실장은 묵도 중 시편 23편을 낭랑하면서도 간절하게 암송하였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편 낭독이 끝난 김실장은 혼자서 사도신경을 암송하였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지옥에 내려 가셨다가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사도신경 암송을 마친 김실장은 이제 유가족과 고인들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가 여기 이 땅에서 각각 45년, 37년을 살다가신 정혜현, 강성우 성도를 마지막으로 보내는 자리로서 모였습니다. 이들을 기쁘게 영접하여 주시고 또 이 땅에 남아 고인들의 유지를 받들 유가족들에게 깊은 위로를 허락하여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젊은 시절 교회를 다닌 경험이 있던 형과 나는 기도 끝에 아멘을 같이 동참할 수 있었다. 기도를 마친 김실장은 찬송가를 불렀다. 우리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찬송가여서 같이 따라 부를 수 있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후렴]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내 고생하는 것 옛야곱이
돌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
꿈에도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길 되나니 은혜로다
천사 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야곱이 잠깨어 일어난 후
돌단을 쌓은 것 본받아서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4절까지 긴 찬송가를 울먹이면서 부르는 김실장의 애잔한 찬송가소리는 저녁노을이 가득히 뵌 북인도의 하늘아래 지평선 멀리 멀리 퍼져나갔다. 정말 일생동안 주께 더 나가기를 갈망해온 누나가 이 찬송가를 듣고 있는듯한 착각이 들었다. 일용할 양식책에 빽빽이 기록해둔 자기반성과 주님을 향한 마음 고백을 볼 때 일생동안 누나가 추구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찬송을 마친 김실장은 다시 고린도전서 15장 후반부를 암송하였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전 15:50-58)

암송을 마친 김실장은 이 말씀에 기초하여 간단한 설교를 하였다.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시집 장가가는 잔치집의 흥겨운 잔치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눈으로 볼 때 때 아닌 때에, 장소 아닌 장소에서, 원치 않는 모습으로 이 세상을 떠나 우리 주님의 품에 안긴 두 성도를 마지막으로 보내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 두 분이 왜 이 이역만리 낯선 곳에 오셔서 전혀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우리 곁을 떠나가시게 된 것입니까?

고인중에 한 분이신 정혜현 선생님의 동생 분은 이곳으로 오는 길에 저에게 물었었습니다. ‘저는 이런 죽음을 당하게 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시기나 한가요?’ 그때 저는 이렇게 이야기하며 위로를 했습니다. 이 두 분이 이 세상에 머물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분들이고 저 하늘나라에 할 일이 많아서 먼저 불러가신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이 조그만 위로가 되셨을지는 모르지만 저는 이 시간 이런 위로이외에도 이 분들의 죽음에 담긴 분명한 메시지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분들의 비참한 죽음에서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비참한 최후를 마치신 예수님의 죽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예수님 본인도 그 비참한 죽음의 영문을 모르고 영접하기 힘들어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으로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두 분의 갑작스런 죽음, 비참한 죽음의 이유를 모르고 받아들이기 힘이 듭니다. 그러나 이 두 분의 죽음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도저히 이런 죽음이 아니고서는 전할 수 없었던 메시지가 이 분들의 죽음을 통하여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일생동안 생명을 일구고 살리는데 드려졌던 이 분들의 마음속에는 삶의 질곡속에 묻혀 사느라 생명세계와는 담을 쌓고 사는 가족들의 모습이 많은 아픔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새벽과 밤들이 가족들의 생명 구원을 위한 눈물의 간구로 채워졌을 것입니다.

마침내 이 분들의 기도는 이 분들의 예기치 못한 죽음까지 연장이 되어 우리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인들이 죽음으로 외치고 있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이 분들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듣는한  이 분들의 죽음은 결코 끝이 될 수가 없습니다. 다시 생명을 얻은 우리와 함께 하며 우리로 힘을 내어 생명을 살리는 일에 몰두하게 하는 생명의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기에 모이신 유가족 여러분들에게 다시금 이 분들이 일생동안 이루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가 되새겨 보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이 분들이 죽음으로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깊이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를 마친 김실장은 다시 찬송가를 불렀다.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라는 제목이었다.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우리 맘이 평안하리니
항상 기쁘고 복이 되겠네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후렴) 주의 팔에 그 크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날이 갈수록 주의 사랑이 두루 광명하게 비치고
천성 가는 길 편히 가리니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기뻐 찬미 소리 외치고
겁과 두려움 없어지리니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찬송가를 마친 김실장은 이제 주기도문으로 장례예배를 마쳤다. 우리 형제는 주기도문을 따라하면서 끝까지 이 주기도문을 같이 암송하고 있는 자신들에 대해서 놀랐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예배를 마친 김실장은 힌두 제사장들에게 이제 장작에 불을 붙이라고 하였다. 훨훨 타들어가는 시신들을 보며 우리 유가족들은 목메어 울었다. 그러나 지극한 슬픔 가운데서도 우리들의 누이가 결코 불쌍해 보이지만 않는 것은 아마 방금 드려진 그 예배의 메시지 때문이었을는지도 모른다.

* 이번 사고로 돌아가신 고인들의 유족들은 김실장에게 고인의 이름을 딴 ‘혜성장학금’을 만들어 인도의 가난한 이웃을 도와달라는 뜻을 전하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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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이방인

2010.02.02 03:14:01
*.118.129.226

죽음 앞에서야 우리는 비로소 삶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헤아리게 되나봅니다.

낮은 자리에서 수고하시는 선교사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며

마치 뜨거운 인도의 태양 아래서 유가족들과 그리고 선교사님과 함께 장례예배를 드린

착각이 드네요. 눈가에 이슬이 맺힙니다. 유가족의 눈으로 글을 쓰신 선교사님의 뛰어난 공감능력이 제 안에서 그것을 불러 일으킨 때문일 거라고 봅니다.

선교사님의 수고와 좋은 글 올려 주심에 감사드리며

유가족들에게도 하나님의 크신 위로가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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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사띠아

2010.02.02 10:29:45
*.163.215.136

사고 수습을 수월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현지 경찰과 현지인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더하여 유가족들이 생명지향적으로 집중된

저의 마음을 헤아려 주고

같이 협조해 준 것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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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2010.02.02 05:37:38
*.68.129.80

사땨 님!

정말 정말 귀한 일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글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네요.

유가족들께서 고인들을 기리는 장학금으로 가난한 인도의 이웃들을 돕기 원하신다니

더욱 큰 일을 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제 한 번 꼭 가보고 싶은 인도지만

사땨님이 뉴욕에 오실 날이 더 먼저 일 듯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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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사띠아

2010.02.02 10:32:58
*.163.215.136

고인들이 남기신 핸드폰에 매달 정기적으로 입금하던 내역이 찍힌 기록이 있었던가 봅니다.

여행 나오느라 입금을 하지 못한탓에 남겨진 메시지였겠지요.

아뭏든 이런 일이 계기가 되어 생명을 나누는 일이 더욱 풍성하게 일어나길 바랄 뿐입니다.


올해 실시될 감사가 5월말을 피해가기만을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모래알님도 뵙게 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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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2010.02.03 21:57:55
*.229.151.223

선교사님 글을 어제 밤에 읽었는데, 쉽게 답글을 달 수가 없었습니다.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 종이 한장 차이라는 생각이 어제 오늘 내내 제 머리를

떠나가지 않고 머물러 있군요. 그래서 였을까요? 오늘 저는 이런 주제로 제 아는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게 되더군요.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이런 얘기를 나누면서, 꼭 주님의 "부활 생명"이야기가 안 빠지니요.

 

선교사님의 장례예식에 대한 말씀은 제게 너무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숭고함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눈물나게 아름다운 정경이 눈에 그려졌습니다.

아마 제가 그 현장에 있었으면, 어떻했을까? 자꾸 상상하게 됩니다.

 

한 2년전에 저 보다 두 살 어린 집사의 임종을 지켜 봤어요.

가족들의 울음, 소란스런 병실..

주변은 정신없이 시끄러운데, 저는 그때 정말 기막힌 고요함을 체험했습니다.  순간적으로요.

아, 그때의 적막감을 잊을 수가 없군요. 참 신비롭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임종의 자리가 이렇게 아름답다니!!

 

선교사님, 지금 제가 그 때의 일을 떠 올리는 것은, 그 장례예식의 현장에

그런 숭고한 아름다움이 머물러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과 고인의 형제들이 함께 드렸던 기도와 찬송으로 인해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리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더 가슴이 벅찹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자리는 우리를 늘 하나님의 평화속으로 밀어 넣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저는 다시 하나님의 고요를 묵상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떠나겠지요. 고요한 적막속으로..

주의 형제들의 기도와 찬송을 들으면서..

 

아름다운 장례예식을 그려 봤습니다.

그 분들이 타지에서 외로운 주검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리스도의 한 형제의 아름다운 헌신의 손길로,

참으로 가장 기쁜 이별이 되었다고요.

그리고 그렇게 인도하신 우리의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선교사님,

인도에서의 하나님의 크신 사역, 언제나 빛나시기를 늘 기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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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사띠아

2010.02.04 09:43:32
*.163.215.136

라라 집사님께서 북인도 평원에 충만하였던 하나님의 고요를 읽으셨군요.

예배를 인도하는 내내 순서지를 보는 것외에는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기도는 물론이고 사도신경, 주기도문, 성경본문, 설교까지도

그냥 두 눈을 감고 마음에 들려 주시는 그 분의 음성에 집중하고자 했지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역 미디어들이 현장 인터뷰를 요청하여 왔습니다.

힌두식 장례를 치르면서 기독교식으로 예배를 인도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다소 적대감과 호기심을 섞어서 물어왔습니다.

돌이켜 보면 힌두권의 중심지역에서 기독교식 예배를 드렸으니

엄청 그들의 자존심을 긁었을 것입니다.

질문에 담긴 이들의 마음을 읽고 간단히 대답해 주었습니다.


힌두도 생명이 있고 기독교인도 생명이 있는데

이 생명을 지으신 이가 하나님이 아니냐?

이 하나님께로 생명이 왔다가 돌아가는 이 마당에

힌두예식은 무엇이고 기독교예식은 또 무엇이냐?

기독교인들은 이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을 알게하신이가

예수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종교란 너울에 현혹되어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의 눈길이 질문하는 앵커맨을 향하여 쏟아졌지요.

아마 편집하여 짜르지 않았으면

그 눈길은 '아즈따끄' 뉴스를 시청하는 모든인도들을 향하는

눈길이었겠지요.


그 외에도 외국인으로서

이 지역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너무 좋은 사람들이고 협조를 잘해줘서 고맙다고 했지요.

(사실은 타지인이 교통사고로 죽어왔기 때문에

미신에 사로잡힌이 지방유지들이 화장지를 내어주지 않아 고생하였지만요.)


다시 현실로 돌아와 오욕칠정에 맞물려 살아갑니다.

일상이 여상하더라도

죽음 가운데 불현듯 다가와

중층적으로 구성된 우리 삶의 한 순간을 드러내었던

하나님의 평화, 고요가 

이를 되새길때마다 저의 마음을 울렁이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비추인 생명의 빛이

매순간 저와 집사님을 비추시길 기도합니다.

[레벨:1]holly

2010.02.09 23:10:04
*.123.176.108

선생님

생과 사의 현장 속에서 지극히 겸손해 질 수 밖에 없는 일주일을 보내셨군요.

마치 제 눈에 그 현장이 생생하게 보이는 듯 합니다. 생과 사..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의 나라 안의 일이니..

그 분들을 소유하길 원했던 가족들에게는 큰 슬픔이나 하나님께서는 그 분들의 삶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생명이 이 땅에 왔다...간다는 것 또한 우리 언어의 표현일 뿐이니...그 분들과 함께 계신 하나님께서는 당시..그 죽음의 현장 가운데서도 이 땅에 허락하셨던 생명의 노래를 들으시고 계셨을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가족들에게 위로로 하셨던 마지막 말씀이 제 마음에 와 닿습니다. "다시 생명을 얻은 우리와 함께 하며 우리로 힘을 내어 생명을 살리는 일에 몰두하게 하는 생명의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그 아픈 죽음이 북인도 땅 한켠에서 이루어 졌다는 것이.......많은 의미를 전달해 주는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인도 그 땅에서 사라진 것 처럼 보일지라도 그 분들 안에 예수님의 존재는 그 땅 하늘, 공간

가운데 가득하게 임해....그 빛이 얼마나 찬란하게 그 땅과 영안들을 비추고 계실지....

저의 이 생에서 주어진 마지막 순간 또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이 비춰져야 하는 곳에서 맞이하게 되길...소원해 봅니다.

 

선생님.....그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영광의 길 가운데 수고, 땀...그리고 그 나라와 이 생을 잇는 중보자로 서 계셔 주셔서...하나님을 대신해 감사의 고백을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선생님을 향하여.."함께 해 주어서 고맙다"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제 귀에 들리는 듯 합니다. 그렇게....어디서나 생명을 잇는 아름다운 인도의 주춧돌이 되어 주시길...

 

저와 제 안에 계신 그 분의 나라 가운데...선생님의 영혼의 빛이 더욱 환히 빛나시네요^^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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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사띠아

2010.02.11 07:10:46
*.173.244.4

다시 들르셔서 하나를 지워 주셨군요.

잘 지내시죠?

인도오실 준비는 차곡 차곡 잘 되어 가시구요.

인도도 부슬 부슬 봄 비로 

오는 봄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이웃에 있는 장미 공원에서는 장미꽃도 피어나구요.

(아참, 장미꽃도 찍어서 올려야겠습니다.)


한 주내내 중층적인 시간방식에 대해 생각이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느낌 아시죠?

있다는 것은 생각으로나 이성으로나 분명히 확신하는데

느낌으로는 아른 아른 거리는 것

마치 아득한 저 멀리서 들리는 북소리 같은 그런 느낌.

아마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지 못하듯

너무 광대해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일 겁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시고 경영하시는

이 보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이 많이 많이 넓어지고 깊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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